2005년 1월호

들쭉, 인삼, 버섯, 인진쑥… 청정 산천에서 빚어낸 꼿꼿한 야생의 맛

  • 글: 허시명 여행작가, 전통술품평가 soolstory@empal.com

    입력2004-12-28 1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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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주의 대명사 ‘진로’의 본적이 평안남도 용강군 진지동이라는 사실을 아는 주당이 얼마나 될까.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술 가운데 유일한 소주인 문배주도 평양술이다. 술병과 라벨 디자인은 더없이 조악하지만, 북한술은 맑고 푸른 산천 가득 펼쳐진 야생 열매와 곡식, 갖은 약초의 독특한 맛과 향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들쭉, 인삼, 버섯, 인진쑥… 청정 산천에서 빚어낸 꼿꼿한 야생의 맛

    백두산 고산지대에서 들쭉 열매를 따는 북한 처녀들.

    영화‘역도산’이 개봉되면서 역도산술이 선보였다. 역도산술을 만든 곳은 일본 다케하라시의 한 양조장이다. 다케하라시 관광협회는 다케하라에서 역도산 영화가 촬영됐고 이곳이 술로 유명한 곳이라서 영화개봉을 기념해 특별한 술을 만들었다고 했다. 역도산의 굳세고 강한 이미지가 독한 술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역도산의 일생이 술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기에 만들어진 술이다.

    생전에 역도산은 말술을 마셨다. 술맛을 즐겼다기보다는 마음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한량없이 마신다. 맛을 모르니 자기 주량도 가늠하지 못한 채 마셔댄다. 역도산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는 술을 마시면 난폭해지고 누구 말도 듣지 않는 고집불통에 청개구리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매니저는 부러 “다른 곳에서 한잔 더 하시죠”라고 청했고, 그러면 역도산은 “아냐, 난 갈 거야” 하며 집으로 향했다.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것도 술 때문이다.

    역도산은 도쿄의 뉴라틴쿼터 나이트클럽에서 만취한 상태로 화장실에 가다가 한 야쿠자와 마주쳐 사소한 말다툼을 벌였다. 몸싸움으로 번진 끝에 그는 등산용 칼에 복부를 찔렸고, 그 후유증으로 1주일 만에 숨지고 만다. 무절제한 음주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세월이 지나니 그의 일생은 술과 함께 추억된다.

    그런데 역도산을 기리는 술로 치자면 북한이 훨씬 먼저다. ‘력도산술’은 평양소주공장에서 만들고, 남한에도 수입된다. 황금빛이 도는 투명한 알코올 도수 40%의 소주다. 원료로 멥쌀, 찹쌀, 수수, 강냉이, 사과, 배, 결명자, 벌꿀이 들어간다. 한 모금 마셔보니 코끝에 스치는 향은 순한데 혀가 소금에 절인 듯 짜릿하고, 목에 넘긴 술맛은 쓰면서도 단맛이 돈다. 한 잔을 제대로 들이켜니 역도산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독하다. 북한에서 멥쌀과 찹쌀을 썼으니 고급술에 속할 터이고, 우리네 전통 소주에서 감미료와 향신료로 곧잘 들어가는 배와 벌꿀을 넣었으니 잘 다듬어진 술이라 할 만하다.

    력도산술을 수입하는 대동주류의 김영미 전무는 이 술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을 소개했다. 이 술을 만들자고 제안한 사람이 다름아닌 일본의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였다는 것. 역도산의 제자인 이노키는 스승을 기리기 위해 평양소주공장에 ‘력도산술’을 제안했고 술 빚기에 필요한 시설장비를 댔다. 투자조건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땅에서 한 사람을 기려서 새로운 술이 탄생하기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남쪽에는 ‘김삿갓’과 ‘황진이’ 상표의 술이 있지만 그들을 기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이미지를 차용한 수준이라 ‘력도산술’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북한술 안 팔리는 두 가지 이유

    현재 수입되는 북한 상품은 건강보조식품, 술, 농수산물, 자수나 그림을 포함한 문화예술품 등이 대종을 이룬다. 그 중에서 북한술이 가장 다양하면서도 널리 유통된다. 수입업체도 한때 30개에 육박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숫자가 10개 안팎으로 줄었고, 등록된 수입업체라 해도 들여온 물량을 소화해내느라 교역이 뜸한 상태다.

    북한술이 남한 시장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주)백두산들쭉술의 김기창 대표는 그 첫 번째 이유로 유통구조상의 문제점을 꼽는다. 북한술은 수입주류로 분류되기 때문에 수입주류대리점을 거쳐서 유통돼야 효율적이다. 그런데 대형 수입주류상들은 북한술을 아예 받으려 하질 않는다. 수입주류로 대표되는 위스키나 와인은 수요가 있고 광고 지원도 잘 되지만, 북한술은 시장부터 개척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속주나 특산주를 취급하는 중소 규모의 주류대리점에서 팔면 알맞을 텐데, 그곳에서는 수입주류를 취급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북한술은 가자주류백화점의 한 귀퉁이나 임진각 또는 통일전망대의 기념품점에 간신히 얹혀 있는 정도다. 결국 수입업체에서 직접 대리점을 만들어 파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또 다른 사업이라 엄두를 내기 어렵다.

    김 대표는 “북한 농수산물에 관세를 매기지 않는 것처럼, 북한술을 ‘우리술’의 범주에 넣어 민속주를 유통시키는 주류대리점에서 취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술이 남한에서 잘 팔리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술병 디자인에 있다. 북한술도 명색 수입품이지만 위스키나 와인처럼 화려한 외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경제수준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북한에서는 술이 경쟁상품이 아니다. 국가가 직접 관장해 각 지역의 식료공장에서 제조, 각 지역별로 일정량씩 할당해 팔도록 한다. 술 빚는 사업장이나 술 품종별로 경쟁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광고도 없다. 그러다 보니 5000원짜리 술이든 5만원짜리 술이든 같은 병에 비슷한 디자인으로 출시된다. 오로지 내용물이 문제일 뿐 형식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주가라면 북한의 이런 방식이 반가울 수도 있다. 괜히 비싼 나무 상자에 넣고 화려한 디자인의 유리병이나 도자기병에 담으면 술값만 비싸지기 때문이다. 애주가는 병 새지 않고 술맛만 좋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상품이 그렇게 나태해서야 어찌 경쟁력을 갖겠는가. 더욱이 마셔보기 전에는 속내를 알 수 없고, 마셨다 하더라도 품질을 가늠하기 어려운 게 술이다. 결국 술도 의류처럼 브랜드의 이미지와 디자인이 판매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북한술은 그런 경쟁세계와 딴 세상에 있을 따름이다.

    진로의 고향은 ‘평남 용강 진지동’

    그렇다면 북한술 맛은 어떤가. 술꾼에게 중요한 것은 맛이다. 맛이 좋다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가 있다. 그런데 맛을 논하기 전에 먼저 확인해둘 게 있다. 북한은 소주가 세다. 북한에선 통상 알코올 도수 25% 이상의 술을 마신다. 탁주나 청주(약주)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20% 이하의 술은 ‘닝닝하고 심심해서’ 별로 마시지 않는다. 남쪽보다 추운 지방에 살기 때문이다. 이런 술문화는 남북으로 분단되기 전에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분단 전에는 북쪽 소주가 남쪽의 술에 영향을 미쳤다. 남쪽 소주의 내력을 살펴보면 그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남한 소주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참이슬 ‘진로’라는 상표는 1924년 평안남도 용강군 진지동에서 태어났다. 진로 창업주인 장학엽씨가 진천양조회사를 시작하면서 진지동(眞池洞)의 참 ‘진(眞)’자와 소주를 뜻하는 노주(露酒)의 이슬 ‘로(露)’를 합쳐서 만들었다. 그리고 현재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술로 문배주, 면천두견주, 경주교동법주 세 종류가 있는데, 이 중에서 유일한 소주인 문배주가 평양술이다. 평양 평천양조장에서 빚던 술인데, 제조자가 6·25전쟁 때 피난 내려온 뒤로 서울에 터를 잡고 있다가 1986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최고로 잘 팔리는 희석식 소주의 본적이 북한이고,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유일한 증류식 소주의 고향이 북한이니, 남한 소주의 기가 한풀 꺾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지면서 술 또한 달라졌을 테니 어디 한번 살펴보자.

    현재 남쪽에서 잘 팔리는 북한술로 들쭉술, 인풍술, 백로술, 개성인삼소주를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 들쭉술의 행보가 단연 돋보인다.

    들쭉은 주로 백두산 일대에서 수확되는 열매다. 들쭉나무는 진달래과 식물로 추위에 강하고, 물 빠짐이 좋은 화산지형에서 잘 자란다. 다 자라면 50~60㎝가 되는데 바람이 센 고산지대로 갈수록 땅바닥에 붙어 자란다. 8월에는 버찌만한 자주색 열매가 열린다. 백두산에서는 재배단지를 조성해 들쭉을 수확하기도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재배하기가 어려워 백두산 특산물로 알려져 있다.

    들쭉술이 남한에서 명성을 얻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만 자라는 나무의 열매라는 점이 남쪽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다. 게다가 열매를 채취하기 어렵고 수확량도 많지 않다는 점이 희소가치를 높였다. 그 덕분에 한때 10여곳의 공장에서 10여종류의 들쭉술이 제조, 수입됐는데, 지금은 대부분 정리되어 3종류(‘백두산’ ‘두하나’ ‘일오일’)의 들쭉술이 수입되고 있다.

    김일성, ‘들쭉술 전문화’ 현지 교시

    1963년 김일성 주석이 백두산 인근 양강도의 혜산들쭉가공공장을 방문한 것도 들쭉술이 널리 알려지게 된 배경이다. 현재 혜산들쭉가공공장에는 당시에 연설한 ‘김일성 동지의 현지 교시’가 돌판에 새겨져 있다. 그중 술에 관한 부분만 인용하면 이렇다.

    “우리가 이 공장에 대해서 관심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발효통은 참나무나 피나무로 만들어야 좋습니다…들쭉을 가지고 술 만드는 것을 전문화하여야 하겠습니다. 술을 더 잘 만들어 탄부(광부)들에게도 공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백두산 들쭉으로 흰술과 색깔 나는 술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술통도 좋은 나무로 만들고 랭실(冷室)도 만들어야 합니다. 술을 만들어 굴에 넣으면 좋습니다…술은 알코올을 넣지 말고…병도 좋은 것으로 하고 상표와 설명서도 붙여 잘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들쭉은 영양가가 높으므로 홍역이나 산후에 좋다고 합니다.”

    소주(흰술)와 발효주(색깔 나는 술)를 주정(酒精)을 넣지 않은 순수한 상태로 참나무나 피나무 통에 넣어 발효시키라는 등 제조기법부터 상표와 술병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김 주석은 술 제조에 관련한 모든 과정을 언급했다.

    이런 관심의 표명으로 들쭉술은 양강도의 특산물이 되었고,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장수불로주라며 자주 즐겼다는 전언이다. 또 북한에서 외국 손님을 접대할 때 곧잘 내놓는 술이어서 대외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들쭉, 인삼, 버섯, 인진쑥… 청정 산천에서 빚어낸 꼿꼿한 야생의 맛

    들쭉술 합작회사 출범을 알리는 포스터(左). <br>안토니오 이노키가 스승 역도산을 기리기 위해 자금을 출자, 평양소주공장에서 제조한 력도산술.

    들쭉술의 원조공장이랄 수 있는 양강도 혜산들쭉가공공장에 1997년 설비 투자를 한 이는 (주)백두산들쭉술의 김기창씨다. 그는 서울에서 보석가공업과 액세서리 수출을 하다가 일본인 동업자와 함께 ‘백두산들쭉술합작회사’를 만들었다. 회사는 혜산공장의 노후한 설비를 교체하고 발효통과 여과기, 운반차량, 발전기까지 일본 제품을 들여놓아 대량생산체제를 갖췄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들쭉술은 16도짜리 발효주와 40도 소주 두 종류다. 발효주는 붉은 빛에 짙은 갈색이 돌고 신맛이 살짝 나는데, 그 맛이 은근해서 잘 익었다는 느낌이 든다. 40도 소주는 투명하고 맑은 호박색이 돈다. 술이 독하고 짱짱한데, 들쭉향이 강하게 스며 있다.

    대(對)북한 무역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대동무역의 계열사 대동주류는 평양의 대평공장에서 만드는 두하나 들쭉술을 수입하고 있다. 이 술은 남쪽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빚은 16도 발효주다. 대동주류 김영미 전무는 “남쪽 사람 50명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술맛 평가를 거쳐서 2004년에 출시한 상품”이라고 했다. ‘두하나’라는 이름은 남북이 하나 되자는 의미다. 체리핑크빛이 돌고 술맛은 시면서도 단맛이 많이 난다. 시골처녀가 아버지를 위해 빚은 소박한 술 같다. 병당 용량은 일반음식점에서 판매하기 용이하도록 375ml(소주 360ml)로 맞춰져 있다. 가격도 다른 들쭉술에 비해 저렴하다. 음식점에 따라 다르지만 가격은 최하 6000원부터 시작한다.

    콩기름, 강냉이기름이 소주안주

    들쭉술 다음으로 거론되는 북한술이 개성인삼술이다. 개성고려인삼주공장에서 만든 30도짜리 개성고려인삼술X.O와 50도짜리 인삼곡주가 인상적이다. 개성고려인삼술X.O는 5년근 인삼을 넣어 10년 동안 숙성시킨 것이라는데, 술맛이 꼿꼿하고 인삼 맛이 야무지게 박혀 있다. 인삼 성분이 고루 스며들어 있어 액체 인삼을 마시는 느낌이 들 정도다. 멥쌀, 찹쌀, 인삼 증류액이 들어가는데, 30도 인삼주가 인삼 맛이 강하다면 50도 인삼곡주는 소주 맛이 강하다. 입안에 술 한 잔을 털어 넣자마자 술이 입 천장에 확 달라붙으면서 목을 타고 넘어간다.

    이밖에 수입되는 북한술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증류주가 대부분이고 그 증류주에는 식물약재가 많이 들어 있다. 인풍술의 재료에는 야생포도가 들어가고, 백로술에는 야생배와 백포도가 들어간다. 그밖에도 참나무버섯이 들어간 룡북곡주, 칠보산 송이버섯이 들어간 송이버섯술, 장뇌삼이 들어간 특록용술 등이 눈에 띈다.

    모두가 알코올 도수 35~40%의 증류주로 몸에 좋다는 갖가지 약재가 들어 있다. 그렇다고 북한사람들이 약술만 마시는 것은 아니다. 수입상들이 남쪽 사람들의 취향에 맞춰 몸에 좋을 성싶은 약술을 주로 수입하는 것이다.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살다가 2003년에 월남한 김만수씨는 북한 사람들이 주로 알코올 도수 25%의 소주를 마신다고 전한다. 김씨에 따르면 북한에서 보통사람 월급이 80~90원 할 때 500ml들이 소주 한 병 값은 25~30원이었다. 소주 세 병 사 마시면 한 달 봉급이 날아간다는 얘기다. 술값이 이렇게 비싸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밀주를 담아먹는 사람이 많다.

    김씨는 시골에 사는 지인 집에서 소주를 가져다 마셨다. 물론 밀주였다. 강냉이를 빻아 죽을 쑨 뒤 효모를 넣어 발효시킨 술이다. 강냉이발효주를 가마솥에 넣고 끓이면 가마솥 위에 얹혀진 찜통에 연결된 동관으로 알코올이 나오는데 이것을 냉각시키면 술이 된다. 형편 좋은 사람은 안주로 통돼지나 건어물을 먹지만 없는 사람들은 콩기름이나 강냉이기름을 젓가락으로 찍어먹으면서 소주를 마신다고 했다.

    밀주단속을 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에서 밀주제조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단속에 걸리면 성분이 나쁜 사람은 멀리 추방당하지만, 성분이 좋은 사람은 술 내리는 장비를 빼앗기고 비판을 받는 선에서 그치기 때문. 남한에서 밀주단속에 걸리면 무거운 벌금을 내야 하지만 북한은 사유재산이 많지 않아서 벌금을 추징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소주를 몰래 뽑아서 파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상류층의 문화는 다르다. 북한 묘향산요양소 약국장을 하다가 1997년에 탈북한 허창걸씨에 따르면 요양소의 고위간부들이 치료와 처방을 목적으로 약술을 많이 빚었다고 한다. 남한에선 법으로 알코올 1% 이상의 액체를 술로 규정한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어서 알코올 6% 미만은 술이 아니라 약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술에는 약효를 적을 수 없고, 약효가 있다고 홍보할 수 없도록 해 약과 술을 엄격하게 분리한다. 하지만 북한은 그런 경계가 없다. 약이면서도 술이고 술이면서도 약이 되는 것들이 있다.

    들쭉, 인삼, 버섯, 인진쑥… 청정 산천에서 빚어낸 꼿꼿한 야생의 맛

    혜산공장에 있는 김일성 주석의 교시문.

    허창걸씨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서 처방약술로 가장 흔한 게 독활주와 인진술이다. 그 술들은 약국에서 팔고 있다. 독활(獨活)은 한방에서 생약으로 널리 쓰이는 약재로, 달이면 성분이 파괴되므로 술에 넣어 침출시켜 먹는다. 독활주는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등장하는데, 관절에 좋은 알코올 도수 50%의 독주다. 식후 1잔씩 하루에 2~3잔 먹도록 처방전이 붙어 있다고 한다. 인진술에는 인진쑥이 들어가는데, 알코올 도수 32% 증류주로 습(濕)을 없애고 간 기능을 강화하는 효능을 지니고 있다. 술을 마시면 간을 망친다는데 간 기능을 보호하는 술이라니 역설적이다. 하지만 많이 마시는 건 금물. 한 끼에 한 잔 정도는 간에 해가 없다는 게 허씨의 설명이다.

    허씨는 묘향산요양소에서 빚은 약술로 감홍로, 벽향주, 오미자술, 구기자술, 왕유술, 전록주 등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약술이 모두 증류주다.

    남한에서 약술, 즉 약주라 함은 소주가 아니라 청주를 뜻한다. 결국 남한은 쌀이나 찹쌀을 주재료로 쓴 청주(알코올 도수 15% 안팎)를 많이 음용하고, 북한은 조나 수수나 옥수수를 주재료로 쓴 소주(알코올 도수 25~40%)를 많이 음용하면서 약술의 바탕도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허씨가 빚었던 술 가운데 왕유술과 전록주는 우리에게 매우 생소하다. 왕유술은 여왕벌 새끼의 먹이인 왕유(王乳, 로열젤리)를 넣어서 만든 술이다. 새큼한 로열젤리의 맛은 술에 들어가면 좋은 향을 낸다. 전록주는 털과 배설물, 지방질 등을 제거한 뒤 뿔이 달려 있는 사슴을 통째로 고아내린 물로 빚은 술이다. 보름 정도 숙성하면 속칭 ‘깡치’가 가라앉아 양주처럼 맑은 술이 된다고 한다.

    지금이야 들쭉술이 북한을 대표하는 술로 회자되고 있지만 원래 북쪽 지방을 대표하는 술은 감홍로다. 북한에서 들쭉술은 양강도의 특산주이지, 북한 주민들이 두루 마시는 술이 아니다. 감홍로는 육당 최남선이 조선의 3대 명주로 이강고, 죽력고와 함께 거론했던 술이다. 북한에서 가장 잘 알려진 양조장인 평양 대평술 공장에서 감홍로를 빚고 있다는데 국내에 수입되고 있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허씨는 현재 약재를 달인 건강보조식품을 만들고 있는데 앞으로 감홍로와 벽향주를 빚기 위해 이북5도청에 문화재 기능보유자 지정 신청을 할 예정이다. 그가 빚은 감홍로를 맛보니 약재가 많이 들어간 소주다. 전통적으로 계피, 용안육, 진피, 방풍, 정향이 들어간다는데, 허씨는 “현대에 이르러서는 약재가 점점 더 많이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풍토·문화·삶이 녹아 있는 술

    북한에서 양조업은 각 지방에서 운영하는 식료공장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 식료공장은 지방마다 있다. 결국 술 공장도 그만큼 많은 셈이다. 술 공장에서는 전통 누룩(밀기울로 만든 둥글거나 네모난 누룩)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식 누룩(특정 균을 추출해 곡물에 파종하여 키운 누룩)을 사용한다. 대표적인 균이 아스퍼질러스 우사미(Aspergillus usa- mi)와 아스퍼질러스 나이거(Aspergillus niger, 북한에서는 ‘니겔’이라고 부른다)인데, 1920년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흑국균들이다. 색깔이나 향기는 좋지 않지만 전분과 당화력이 좋아서 소주 내릴 때 많이 쓰는 균이다. 남한에서도 소주 만들 때 우사미를 사용하고, 탁주 만들 때는 나이거의 변종인 백국균(아스퍼질러스 가와치)를 사용한다.

    술을 좇아가다보면 한 고장의 풍토가 보이고 문화가 보이고 삶이 보인다. 북한은 남한보다 훨씬 독한 술을 마신다. 춥기 때문에 그렇고 거친 노동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 순한 곡물(쌀, 찹쌀, 좁쌀)보다는 거친 재료(옥수수나 도토리)를 많이 사용한다. 거친 재료를 쓰다 보면 발효주보다는 증류주 쪽으로 기울게 된다. 거친 재료의 가치를 높이는 데는 소주가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논밭에서 나는 곡물보다는 산에서 나는 식물 열매들이 술로 많이 담가지고 있다. 대량생산보다는 자급자족적 생산이다 보니 술의 종류가 다양하다. 소주만 치자면 남한보다 북한술이 훨씬 풍성하다.

    알코올 도수 15% 안팎의 청주가 싱겁다고 하는 이들, 희석식 소주가 단조롭다고 하는 이들, 독주가 좋다고 위스키나 브랜디를 즐겨 마시는 이들이라면 북한술에 취해볼 만하다. 그 술을 마시며 북한에서 나는 야생 포도나 버섯이나 들쭉 맛을 가려낼 수 있다면, 행복한 북한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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