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마산 고성터널 부근에 있는 권양숙 여사 부친 권오석씨의 묘.
알아보니, 이 컨테이너 박스는 인근 진동지구대에서 마산중부경찰서 경비교통과의 지휘를 받아 관리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그것이 권양숙 여사의 부친 묘소를 지키는 경비 초소라고 했다. 묘지 입구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허춘식씨는 이렇게 말했다.
“가끔씩 1개 중대가 달려와서 지켜요. 그땐 저희 음식점을 사령부로 사용합니다. (음식점에서) 청와대로 바로 걸리는 전화선을 설치해놓았어요. (전화선을) 꽂아서 바로 썼어요. (의경들이) 한동안 출동했는데, 요즘은 안 오데요.”
‘비전향 좌익세력’으로 옥사
아무리 대통령 장인의 묘소라지만 경찰 중대병력이 출동해서 지킬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이 묘소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노 대통령이 당선 직후 권 여사와 함께 참배한 이후다. 2003년 1월25일의 일이다. 사위가 장인의 묘소를 찾는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왜 세상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을까.
그것은 권오석씨의 전력 때문이다. 그는 6·25전쟁 때 창원군 진전면에서 치안대가 민간인 9명을 학살한 사건과 관련해 종전 후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당시 치안대는 인민군 점령 후 토착 좌익세력이 결성한 조직으로, 공산군 점령지구 내 후방 보급대이자 반동분자 숙청대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치안대 사건 연루자는 60여 명에 달한다. 진전면의 노인들은 권씨는 단순히 치안대 연루자가 아니라 핵심 간부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권씨는 치안대 간부로 활동할 당시 29세였다. 대검찰청 공안부가 발간한 ‘좌익사건 실록’(1973)에는 권씨가 공산군 점령지구 내에서 반동분자로 지명된 자를 숙청하기 위해 만든 반동조사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사원으로 활약했다고 적혀 있다. 종전 후에는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제3조 제1항, 4조 5항, 국가보안법 제1조, 제3조 위반 및 살인죄, 살인예비죄 등으로 체포됐다.
그는 ‘비전향 좌익세력’으로 분류되어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권 여사가 열 살이 되던 1956년 폐결핵 등 질병으로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5년 동안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가 1961년 3월에 재수감돼 1971년 마산교도소에서 사망했다.
노 대통령은 장인 묘를 참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모른다.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의미를 붙인다면 그것은 백성의 몫이 아니다. 지난날의 일이다.”
“혹시 묘소로 몰려갈까봐…”
노 대통령의 참배 후 ‘창원군 진전면 치안대 사건’이 잡지와 방송을 통해 크게 보도됐다. 진전면 주민들에 따르면 방송이 나간 후 마을을 찾아와 “대통령의 장인 묘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오는 낯선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묘소 앞에 초소가 생긴 것에 대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불미스러운 일에 대비하기 위해 경비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렇지만 마산경찰서 김석봉 경비교통과장은 “지금까지 노 대통령 장인 묘소를 훼손하겠다고 협박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집회에 대비한 거죠. 지난해만 해도 경남지역 농민들이 쌀 협상 국회비준 저지를 요구하는 집회가 있었어요. 농민들이 진전면 호산들녘에 모여서 수확을 앞둔 논에 마른 볏단을 뿌리고는 불을 지르거나 트랙터로 갈아엎는 등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는데, 그러다 권 여사 부친 묘소로 몰려갈까봐 경찰이 출동했어요.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노 대통령의 선산이 있는) 진영으로 몰려갑디다.”
권 여사 집안의 선산 묘지를 관리하는 권도엽(82)씨는 컨테이너 초소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했다.
“(컨테이너 초소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곧바로 생겼어. 그때 경남청장이던 이택순(현 경찰청장)이 경찰을 보내줬어. 처음엔 의경이 5명씩이나 와서 밤새도록 지켜줬어. 경찰서장이 시간 나는 대로 와서 둘러보곤 했지. 하루는 이택순 청장이 직접 찾아와 ‘묘지에 별일 없냐’고 물으면서 ‘막걸리 사드시라’며 3만원을 주는 거라. 참 고마운 사람이야. 남의 조상 묘 잘 지켜주더니 경찰청장이 됐어. 한 6개월쯤 지켰나…. 우리 집안에서 이 청장한테 ‘묘지 앞에 경찰이 보초를 서니 남 보기에 좀 그렇다’면서 ‘일이 있으면 와달라’고 했어.”
대통령 장인 묘에 왜 비석이 없냐고 묻자 그는 “노 대통령 재임기간엔 비석을 세우지 않을 것”이라면서 “영부인의 뜻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진전면 사람들은 “대통령의 장인이 6·25 때 치안대 양민학살 사건의 주범임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눈치를 보는 것 같다”면서 “꺼진 봉분을 올리고 금잔디까지 심었는데, 비석을 세우고 축을 쌓기 위해 돌을 갖다놓다가 언론에서 떠들자 관두는 것 같더라”고 귀띔했다.
한마을에 ‘38선’
권 여사의 부친이 ‘치안대 학살 사건’을 주도했다는 얘기가 언론을 통해 시끄럽게 보도된 것과 대조적으로 진전면의 노인들은 그 사건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진전면의 한 경로당에서 만난 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누구를 탓해. (진전면에는) 사변 때 미군한테 뒤진 사람도 천지고, 빨갱이한테 뒤진 사람도 천지야. 빨갱이로 내몰려 우리 경찰한테 뒤진 사람은 또 얼마나 많노. 안 뒈지고 살아남은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살면 돼. 다 지난 일이야.”
진전면은 마산시에 속해 있다. 동쪽으로는 진동면 진북면, 북쪽은 함안군, 서쪽은 진주시, 남서쪽은 고성군에 접해 있는데, 17개 리(里)를 포함하는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이다. 각 리에 노인정이 하나씩 있다. 진전면은 6·25전쟁 당시 한국군과 유엔군의 마지막 거점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아군과 인민군의 최대 접전지 중 하나였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 치안대 양민학살 사건, 미군 양민학살 사건 등이 진전면 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진전면 노인들은 좌익 치안대 학살사건 못지않게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에이 치를 떨었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운동을 하다 전향한 반공단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과 경찰은 초기 후퇴과정에서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속하고 즉결처분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북한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좌익세력이 저지른 보복학살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노인도 적지 않다.
권오석씨 묘 주변에 설치된 경찰의 ‘컨테이너 경비 초소’.
양촌리에서 만난 한 노인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전쟁이 터지자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한꺼번에 죽여버린기라요. 진전면 젊은이들이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억울하게 죽었지요. 그 반발로 좌익이 된 사람도 있고요. 그 시절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개념이 없었어요. 주위에 먹물 좀 든 친구가 좌익이면 우르르 따라 가입했는데, 철학이 없이 따라 했던 시절이라….”
2002년 태풍 루사의 여파로 진전면에서 6·25전쟁 때 학살돼 매장된 민간인 유해가 발굴됐다. 발굴 현장은 진전면 여양리의 산태골. 3개 지점 7곳에서 유골 150여 구(具)가 나왔다. 이곳 노인들은 “6·25전쟁 때 군인,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줄로 묶은 사람들을 트럭 4대에 나눠 싣고 마을 뒤편 산태골에서 총살한 뒤 묻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38선’이 존재하는 마을도 있다. 산비탈에 있는 양촌리의 경우 산허리에 난 길을 경계로 위쪽에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당한 쪽 사람들이, 아래쪽에는 진전면 치안대 사건으로 학살당한 쪽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를 두고 양촌리 노인들은 “울(위)로는 빨갱이, 아래는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산허리 길을 ‘38선’이라고 불렀으며, 어쩌다 6·25 얘기가 나오기만 하면 으르렁대며 싸웠다고 한다.
“읽은 책 대보라”
권오석씨가 주도한 진전면 치안대 사건은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 이후 좌익이 주도한 양민 학살사건이다. 1950년 9월의 일이다. 전쟁 전에 이미 남로당에 가입한 진전면 토착 좌익세력이 전쟁이 터지자 지역 유지들을 반동분자로 내몰아 숙청했다고 한다. 치안대 간부이던 권씨는 반동분자조사위원회 조사원으로 활약했다.
진전면은 초계 변씨 집성촌으로도 유명하다. 치안대에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변재원(76)씨의 회고다.
“신탁통치에 반대하면 우익이고, 찬성하면 좌익이었는데, 마을 좌익 청년들이 치안대를 만들어서 우익 청년들을 반동분자라고 마구 잡아 가뒀어요. 그때 권오석뿐 아니라 허도녕(허성관 전 행자부 장관 부친)씨도 치안대원이었어요. (치안대에) 잡혀가서 고성군 구만면 면사무소에 갇혔다가 다음날 허씨들이 모여 사는 대방부락으로 끌려갔습니다. 대방부락에서 꽤 컸던 ‘허경구’씨의 집을 본부로 썼어요. 그 집 뒤편 2층 고방(창고)에 갇혀서 지냈어요.
치안대가 반동분자를 A급(처형), B급(강제 노무), C급(석방)으로 분류했던 것 같아요. 재판을 받아야 결론이 나왔어요. 저는 맨 마지막에 재판을 받았는데 그때 처음 권오석을 봤습니다. 나더러 ‘반탁운동을 하면서 반동 역할을 많이 하지 않았느냐’고 묻기에 제가 ‘아닙니다, 저는 문학소년입니다. 사상과 이념에 별 관심이 없어요’라고 했어요. 권씨가 ‘읽은 책 대보라’고 하데요. 생각나는 대로 마구 말했어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마르크스의 ‘자본론’…
나중엔 종이를 주면서 받아쓰라고 해요. ‘깊이 반성하고 있다. 김일성 원수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쓰라고. 그러고는 추신에다 ‘대동청년단에서 활약하는 여덟째 삼촌과 반탁운동을 한 형님을 반동분자로 고발한다’고 쓰라고 시켰어요. 대동청년단은 우익단체였어요. 삼촌하고 형님이 피난을 가버렸다 싶어서 시키는 대로 썼어요.”
변재원씨는 재판 결과 B급으로 분류됐다. 그날 이후 인민군 포대에서 연대본부 연락병이자 짐꾼 노릇을 했다고 한다. 그러기를 일주일. 칠흑 같은 어둠을 틈타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당시 치안대가 사용했다는 대방부락의 집터(진전면 일암리 소재) 일부는 도로로, 일부는 밭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노인들은 “치안대에 집을 빌려준 허씨 집안은 전쟁 이후 아들을 잃고 씨가 마르더니 결국 가세가 기울어 식구들이 흩어졌다”고 전했다.
권오석씨가 이끄는 치안대가 주민 11명을 학살한 장소는 현재 고성군 회화면 옥산골 골짜기. 하지만 변재원씨를 비롯한 몇몇은 “권오석이 학살 현장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현장에 있을 턱이 없지. 봉사(권씨는 시각장애인이었다)가 거기까지 가지도 못했을 것이고, 봉사가 망봤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모든 것을 권오석이 지시했다고 짐작했겠지만, 그가 독단적으로 했다고는 볼 수 없어요. 치안대가 인민군 지휘를 받았거든요. 총살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다 달라요. ‘사람들을 묶어 데리고 가서 총으로 쐈다’는 사람도 있고, ‘돌로 찍어서 죽이더라’는 사람도 있고….”
공소장에 따르더라도 일부 언론보도와는 달리 권씨는 학살현장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살하는 현장 부근에서 학살을 용이하게 감시했다’는 것이 그의 혐의였다.
변씨 일가는 진전면 양민학살 사건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집안이다. 면장을 지낸 변백섭씨를 비롯해 세 명이 치안대에 끌려가서 학살당했다.
“억울해도 우짭니까”
일가 식구들의 죽음을 생생히 기억하는 변재원씨는 “더는 그때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면서 최근의 일을 들려줬다.
“억울해도 우짭니까. 50년이 지났는데 대립해서 싸워봤자 그렇잖아요. 모른 척하고 살고 싶어요. 권씨, 변씨가 한마을에 살면서 오며가며 다 만나요. 제 동창 중에도 권씨가 있어요. 지난번에 동창 영감이 권양숙한테 100만원을 받았다고 소포(진전면 바닷가쪽 작은 마을)에 가서 회를 냈어요. 권오석이야 밉지만 권씨 문중하고 적대관계가 될 이유야 없잖아요. 권오석과 한마을에 살던 권씨 중에도 학살당한 사람이 있었어요.
세월이 흘렀으니 권씨하고 사돈을 맺을 인연이 있으면 맺어야지 우째요. (권오석은) 죽고 없는데 사위한테 ‘미안하다’고 사과를 들어본들 다 부질없고, 엄마 치맛자락 붙들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양숙이가 ‘그때 일 잘 모른다’고 해도 웃고 치워야지 우째요. 근데 화가 나는 것은 (권 여사 쪽이) 자꾸 ‘시대적인…’ 이라는 이유를 꺼낼 때요. 누가 그 시대를 모르나… 그냥 사실을 인정하면 되지.”
진전면의 노인들은 “전쟁 때 인민군 짐꾼이 되기 싫어서 치안대원이 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전쟁 당시 북한군은 진전면 청년들을 군용물자 운반꾼으로 부려먹었다고 한다. 짐꾼이 되면 인민군 복장을 하고 식량이나 탄환을 운반해야 하는데, 미군은 인민군 군용물자를 짊어진 짐꾼을 보면 폭격을 했다. 허성관 전 행자부 장관이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짐꾼이 안 되려고 치안대에 가입했다”고 얘기한 데에는 그런 사정이 있다. 낙동강 전투의 격전지로 피아(彼我)간 밀고 당기는 공방이 치열한 최대 접전지였던 만큼 북한군은 이 지역 젊은이들을 군수물자 짐꾼으로 최대한 활용했던 것이다.
진전면 노인정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권 여사의 집안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늘어놓았다. 겪은 얘기가 아니라 들은 얘기다 보니 다소 부풀려진 내용도 있었다. 한 할머니(80)는 이렇게 얘기했다.
“권씨 문중이 본래 양반이요. 문장가도 많고, 기미년 삼일의거 때 만세 부른 위인도 많제. 권씨들이 진전면 오서리에 다 모여 살아요. 동대마을에는 권씨가, 서대마을에는 박씨가 사는데, 면장이 한번은 박씨에서, 한번은 권씨에서 나왔어요.”
“아주 똑똑했대”
자신의 손자가 공무원이라고 자랑하는 할머니(78) 얘기다.
“세상이 뒤바뀌는 맛에 사는 거 아이요? 빨갱이 얘기 그만해. 우리 시숙이 사변 때 빨갱이 하다 전쟁 끝나고 정신을 차렸는데, 아들이 공무원 시험에 자꾸 떨어져서 술로 한세상 한탄하면서 보냈어. 못 배웠으니 생각이 왔다갔다했지. 빨갱이가 뭔지 알고 했나? 모르고 한 사람 수두룩해요. 세월이 수십번 바뀌었는데 ‘니 아비가 빨갱이니 니는 마 놀아라’ 하면 살맛이 나겠소? ‘니 아비는 못된 짓 했지만 니는 잘되거라’ 해야 살맛이 나제. 안 그렇소? 세상이 바뀌어 우리 손자 놈이 서울서 공무원 하니 살맛이 나요.”
권오석씨에 대해 조근조근 얘기해주는 할머니도 있었다.
“권씨는 잘 알아. 올케한테 들었어. 아주 똑똑했대. 면서기까지 됐는데, 술이 아쉬워서 미군이 버리고 간 연료통에 든 공업용 알코올을 막걸리에 타 마시다 당달봉사가 된 거라. 그후 면사무소에서 잘려 집에서 놀았어. 할일이 없이 만날 라디오 듣다가 빨갱이가 된 거라. 인민군이 당달봉사라고 무시하지 않고 떡하니 견장 채워주니까 마 기가 살았다 카대. 전쟁이 끝나자 감옥에 갔어. 권 여사 모친은 고향서 살지 못하고 내뺐어. 남편 감옥에 보내놓고 자식 셋을 삯바느질로 키워냈으니 모진 세월 살았제. 모친이 대단해요. 권 여사가 지 에미를 닮았으니 남편을 대통령 만들어냈을끼라.”
권양숙 여사 고향 진전면 주민들의 청와대 방문 기념사진.
“노 대통령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람이 됐제. 그전에는 신세한탄이나 하면서 지냈다네. 그래서 남편하고 대판 싸워도 참고 이 악물고 수발한 거라. 아버지 없는 설움을 생각하면 그야 참지, 왜 못 참겠어. 노 대통령이 사법시험에 붙었다는 소리 듣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더래. 궁상떨던 서방이 마누라 잘 만나 대통령이 됐제. 안 글나?”
인터뷰를 했던 몇몇 사람이 나중에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그중엔 진전면 치안대 사건 당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진전면 양촌리 변씨 일가 중 한 사람도 있었다.
“(기사를) 너무 세게 쓰지 마세요. 우리야 가족이 죽고 친지가 죽어서 마음이 아픈데 정치하는 사람들이 진전면 얘기를 정치에 이용하는 건 싫습니다. 권오석한테 학살당하긴 했지만 우리도 밖에 나가서 고향 흉 들으면 기분이 상해요. 노무현 대통령이 욕 듣는 것도 화납니다. 우짜든지 남은 임기 잘 끝내놓고 고향에 와서 막걸리 한잔 하면서 할말이 있을 낍니다. 고향마을 묵고 살도록 해주고 후손들 뒤 잘 봐주면 고맙지요.”
최근 권 여사 집안에서는 ‘안동 권씨’ 족보 재발간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권씨 일가 중 한 사람은 “안동 권씨 복야공파 감정공 생원공계 마산 진전 문중 36세손 사위 중에 대통령이 나왔다는 내용이 들어간다”고 했다.
“저거들끼리 싸우고 자빠지대”
진전면은 아름다운 농촌이다. 북으로는 인왕산(仁往山) 줄기가, 남으로는 적석산(積石山)이 감싼다. 또 기암으로 이뤄진 3개 봉우리가 학이 양 날개를 펼친 듯 완만한 능선을 자랑한다. 동쪽으로 문도산(問道山)이, 서쪽으로 발산재가 이어진다. 또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남해와도 만난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진전의 대정 노인정에서 만난 할머니들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들은 갑자기 찾아온 낯선 이를 보자 “혹시 기자양반이냐”고 물었다. “맞다”고 했더니 대뜸 “여기 공산당 없어요”라고 했다. 한 할머니는 “지난해 청와대에 초청받아 갔다왔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권오석 양민학살 사건’ 얘기를 해달라고 하자 한 할머니가 싹싹한 말투로 말했다.
“기자양반, 우리 사진이나 찍어주이소. 대정댁(허성관 전 행자부 장관 모친) 어디 갔노? 오라 캐라. 저기 벽에 걸린 사진 좀 보소. 우리가 청와대 가서 사진을 찍었다 아이가. 하모, 중간에 영부인이 있고, 영부인 모친도 있고, 나도 있소.
기자양반, 빨갱이 얘기하지 말고 청와대 사진 구경하고 놀다 가소. 왜 영감들은 안 갔냐고? ‘청와대 가자’고 하끼네 안 갈라 카데. 빨갱이가 어쩌고저쩌고… 지랄한다. 만날 그라다 죽으라 캐라. 다 똑같다. 진전 냇가에 가서 옷 깨끗하게 빨아 입혀 내보내놨디 저거들끼리 싸우고 자빠지데. 그 수발 다 해준다고 할마이들은 속이 문드러졌다.
전쟁은 생각도 하기 싫소. 여기는 집안에 빨갱이 한두 명씩 다 있었다. 그놈도 내 자식이고 저 놈도 내 자식이다. 마… 됐다. 전쟁 얘기 꺼내지 말고 주스나 마시라. 빨리 오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