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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호 특별부록 | 한국의 核주권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1부

원폭 투하 결심한 트루먼, 원자력 이용 천명한 아이젠하워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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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원자력史 속에서 본 한국 원자력史 - 제1부

사상 최초로 원폭 사용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왼쪽)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선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연합참모본부는 1억 옥쇄와 황토보위(皇土保衛)를 외치는 일본인의 항전의지를 꺾기 위해서는 심리적인 충격을 주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고농축 우라늄으로 만든 핵폭탄은 길이 3m, 지름 71㎝, 무게 4t 정도였는데 이 폭탄은 플루토늄으로 만든 것보다 작고 날씬해 ‘꼬마(Little Boy)’란 별명을 얻었다.

리틀보이는 TNT 1만3000t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13킬로톤의 위력이다. 2006년 10월9일 북한이 실험한 핵무기가 애초 4킬로톤의 위력(실제 폭발 위력은 0.55킬로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니, 북한 핵무기보다는 3배 이상 위력이 강한 셈이다.

플루토늄 폭탄은 길이 5m에, 직경 1.2m, 무게가 4.5t이었다. 무게는 고농축 우라늄탄과 큰 차이가 없으나 길이와 직경이 더 길고 모양이 똥똥해 이 폭탄은 ‘뚱보(Fat man)’라는 별명을 얻었다.

통상 플루토늄탄은 고농축 우라늄탄보다 위력이 강하다. 뚱보는 22킬로톤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규슈 상륙작전을 준비하던 시기 미 연합참모본부는 꼬마와 뚱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고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재가했다.

1945년 8월6일 ‘티니안’이라고 하는, 미군이 장악한 북태평양의 한 섬에서 이륙한 509 폭격대 소속 B-29 폭격기(조종사 : 폴 티베츠 대령)가 히로시마(廣島) 상공으로 날아가 꼬마(고농축 우라늄탄)를 히로시마 상공 570m 쯤에서 이 폭탄을 폭발시켰다.



원폭에서 중요한 것은 효율이다. 원폭은 본래 갖고 있는 위력을 100% 발휘하지 못한다. 이유는 한꺼번에 터지지 않고 아주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시차를 두고 터지기 때문이다. 성냥이 가득 찬 성냥통에 불을 붙이면 큰 불과 함께 폭발이 일어난다. 하지만 성냥을 일렬로 늘어세운 후 불을 붙이면, 불이 성냥 하나 하나에 옮겨 붙는 식으로 전파되므로 큰 불과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농축 우라늄과 플루토늄도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핵분열을 하게 해줘야 효율이 높아진다. 반면 그 시간이 길어지면 효율이 현저히 떨어진다. 핵무기에서 핵분열은 100만분의 1초 이내에 이뤄진다. 그러나 100만 분의 1초는 폭발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데는 너무 긴 시간이다. 1억분의 1초로 핵분열 시간을 단축해야 효율이 극대화한다.

그러나 1945년만 해도 1억분의 1초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핵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기술이 없었으므로 핵무기의 효율이 낮았다. 꼬마의 효율은 3% 이하였고, 뚱보는 그보다 높아 20% 이하였다.

핵폭탄 투하 공개한 트루먼

그날 히로시마는 꼬마로 인해 중심부 12㎢가 초토화했다. 부서진 가옥은 6만여 호였고 사망자는 7만8000여 명, 부상자는 8만4000여 명에 달했다. 또 수천명의 행방불명자가 발생했다. 폭격 직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이 사실을 공개하고 7월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일본이 즉각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측의 반응은 없었다. 그리하여 사흘 후인 8월9일 나가사키(長崎)에 뚱보를 투하했다. 나가사키에서는 사망자 2만여 명, 부상자 5만여 명, 가옥 2만여 호 완파, 2만5000여 호 반파의 피해가 발생했다. 위력이 훨씬 더 크고 효율도 훨씬 높은 핵폭탄을 투하했는데 나가사키가 당한 피해는 히로시마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이유는 지형 조건이었다. 히로시마는 廣島라는 한자 이름 그대로 넓은 평지에 들어선 도시다. 반면 나가사키에는 산이 많다. 플루토늄탄의 폭발이 높은 산에 의해 차폐되어 더 센 폭탄을 맞았음에도 피해를 덜 본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일본 가옥은 대부분 목조(木造)였다. 목조 가옥은 폭발이나 화재에 매우 취약하다. 석조 건물이나 벽돌 건물, 시멘트 건물이 적었던 것도 히로시마의 피해를 더욱 크게 한 요소로 꼽힌다. 미국은 일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 8월15일 일본의 쇼와(昭和) 왕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미국은 1억 옥쇄를 외치는 일본인의 저항심을 잠재우고 일본을 장악해 1952년까지 7년간 군정(軍政)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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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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