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호

이관진 샤프전자 회장 & 류덕희 경동제약 회장

두 재계 원로의 아름다운 ‘선행 경쟁’

  • 권주리애 전기작가, 크리에이티브 이브 대표 evejurie@hanmail.net

    입력2007-02-12 15: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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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덕희 경동제약 회장은 25년 전 신앙생활을 하다 만난 이관진 샤프전자 회장에게 행복해지는 비결을 배웠다. 늘 환한 표정의 이 회장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선행을 베풀고 있었다. 그런 이 회장을 닮기 위해 사회의 음지를 살피고, 절망하는 이에게 희망을 주고자 노력하는 그는 작은 선행이 얼마나 큰 기쁨으로 돌아오는지 잘 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것도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5-17절


    이관진 샤프전자 회장 & 류덕희 경동제약 회장

    명동성당에서 만난 류덕희 회장(왼쪽)과 이관진 회장.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이스라엘 요르단강 근처에 두 개의 큰 호수가 있다. 하나는 살아 있는 호수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호수이다. 죽은 호수는 다른 곳에서 물이 들어오기만 하고 빠져나가지는 못하는데, 반대로 살아 있는 호수는 물이 다른 곳에서 들어오기도 하고 빠져나가기도 한다. 사람도 이와 같이 받기만 하여 포화상태에 이르면 죽은 호수와 같다. 하지만 받기도 하고 자선을 베풀기도 하는 사람은 항상 생명력과 힘이 넘친다.”

    류덕희(柳悳熙·69) 경동제약 회장은 탈무드의 ‘죽은 호수와 살아 있는 호수’를 읽을 때마다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이관진(李寬鎭·79) 샤프전자 회장이다. 류 회장은 25년 전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이 회장을 처음 만났다. 류 회장은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남을 긴 시간을 이 회장과 함께하면서 언제나 묵묵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선을 베푸는 이 회장이 ‘살아 있는 천사’가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기적을 경험하고 나눔을 알다

    류 회장이 가톨릭 신자가 된 계기는 좀 남다르다. 동생인 서울대 류관희 교수가 적극적으로 권유했지만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절에도 다녀보고, 크고 유명하다는 교회들도 다녀봤다. 그러다 나이 마흔이 넘어 부인과 함께 집에서 가까운 용산성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뒤늦게 시작한 신앙생활이기에 성당 일을 매우 적극적으로 하긴 했으나 이성적으로 하는 것일 뿐, ‘하느님 사랑’의 의미는 잘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던 1983년에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추운 겨울, 지방의 상가(喪家)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승용차로 급하게 밤길을 달리던 중 얼어붙은 노면에서 차가 미끄러져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류 회장만 약간의 상처를 입고, 다른 일행은 모두 아무 탈이 없었다.

    “매우 큰 사고였는데, 저만 조금 다치고 동승한 사람들은 멀쩡했으니 기적이었죠.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고 이후 그는 삶에 자신감을 갖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했다. 그 무렵 그에게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고아와 장애아를 수용한 복지시설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사정이 어려우니 몇 가지 약품과 영양제를 보내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좋은 일은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가진 약품으로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뻤어요. 그래서 그 복지시설은 물론 다른 곳에도 직원들과 함께 약품을 들고 찾아갔지요. 영양제, 해열제, 소화제 등을 받아든 할아버지, 할머니, 어린이, 장애아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사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약품을 전달받은 복지원이나 양로원 측에선 “그간 여러 곳에 도움을 청해봤지만 큰 회사들도 별 소식이 없었는데, 이렇게 작은 회사에서 도와주고,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니 고맙다”고 했다.

    마음 가득 보람과 기쁨이 밀려왔을 때 류 회장의 머리엔 문득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만난 이 회장의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떠올랐다. 다른 신자들에게서 이 회장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선행을 베풀고 있다는 말을 들은 터였다. 류 회장은 봉사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해서 해야 기쁨을 얻는다는 걸 깨달았고, 이 회장의 늘 환한 표정의 비밀도 알게 된 것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류 회장이 1989년에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할 때, 마침 이 회장이 수석 부회장을 맡아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다. 이 회장이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이 됐을 때는 류 회장이 부회장으로 일했다. 두 사람이 함께 로마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교회와 사회 안에서 평신도의 역할과 중요성을 부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의 희생과 봉사 정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도 젖어들었다. 그런 그를 이 회장은 이렇게 평했다.

    “평신도협의회에서 류 회장을 처음 봤을 때에 키 크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어요.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같이 일을 하다보니 일관되고 책임감 있게, 자신의 일처럼 열성을 다하더군요. 무엇보다 상대방을 편하게 해줘요. 그래서 우리 회사에 스카우트하려고 알아봤더니 제약회사 사장이더군요.”

    평신도협의회는 전국의 성당을 찾아다니며 일하는데 류 회장은 성당의 신부들에게서 이 회장에 대해 매번 같은 말을 들었다. 회의나 행사가 끝나고 작별인사를 할 즈음에 이 회장에게 구체적으로 몇날 몇시를 밝히며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회장과 가깝게 지내는 동안 한 번도 이 회장 스스로 불우한 이웃을 도와줬다는 얘길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선행은 도움을 받은 곳에서 인사를 할 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1999년경 이 회장과 함께 일본으로 성지순례를 갔을 때 제가 여쭤봤어요. 어떻게 그렇게 남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지. 그랬더니 이 회장께선 지금까지 자신의 힘으로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시더군요. 어려서는 마을사람들이 가난하고 총명한 이관진에게 학비를 대줬고, 100% 수출만 하던 한국샤프도 정부와 회사 직원들의 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요. 저는 이 회장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지요.”

    사재 30억원으로 장학재단 설립

    이 회장이 나눔을 실천하면서도 잘 드러내지 않는 까닭에 간혹 이 회장이 어느 대학에 적지 않은 돈을 기부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듣게 될 때면 그는 서운한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도 질세라 2001년 현금 5억원과 경동제약 주식 30만주(당시 24억5000만원 상당) 등 사재(私財) 30억원을 출연해 자신의 호 ‘송천’을 딴 ‘송천재단’을 설립했다. 송천재단은 매년 주식배당금과 이자소득으로 조성되는 3억원 이상의 장학금을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지급하고 있다.

    사실 장학사업은 그의 오랜 염원이었다. 그는 경기도 화성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여장부인 할머니는 그에게 특별한 심부름을 시키곤 하셨다. 집안 살림은 물론 친척과 소작농의 형편까지 살폈던 할머니는 저녁 끼니때가 돌아오면 늘 그에게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오라고 시켰다.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있나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그가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을 발견하고 할머니께 알리면 할머니는 그에게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다며 칭찬해주고, 그 집에 양식을 갖다주라며 다시 내보냈다. “절대 어려운 이웃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게, 살짝 갖다놓으라”는 당부와 함께.

    그런데 아버지가 전재산을 쏟아 부어 시작한 제과업이 신통치 않자 자식들이 한창 공부할 때 가세가 급속히 기울었다. 먹고살려면 기술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그는 실업계인 성동공업 중·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성적이 뛰어났던 그는 성균관대 화학과에 진학했지만 등록금을 감당하기 힘들어 2학년을 마치고 회사에 취직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평소 그를 눈여겨보던 당시 성균관대 변희용 총장이 조용히 불러서 등록금을 대신 내 주고, 또 한 번은 학교 장학금을 받게끔 도왔다. 변 총장의 도움에 힘입어 3학년에 복학해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그는 마음 한구석에 그 일이 빚으로 남아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던 그가 장학재단 설립으로 40여 년 만에 마음의 빚을 갚게 된 것이다.

    발로 뛴 영업의 결실

    화학을 전공한 그는 1969년 젊은 나이에 친구와 동업해 ‘선경제약’을 창업했다. 근검절약하고 성실히 일하자, 회사가 날로 번창했다. 사업에 자신을 얻은 그는 1975년에 ‘유일상사’라는 이름으로 독립하고, 이듬해에 ‘경동제약’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차근차근 회사를 발전시킨 원동력에 대해, 그는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원인은 본인이 직접 뛰지 않고, 하나에서 열까지 남을 시킨 결과라고 말씀하셨다”며 “아버지의 실패를 교훈 삼아 직접 발로 뛰며 영업한 결실”이라고 말했다.

    그 시절 하루에 약국과 의원 60여 곳을 다녔다. 그가 들렀으나 “바쁘니 다음에 오라”고 한 곳은 제외한 숫자다.

    “버스를 타고 영등포에서 내리면, 흑석동을 거쳐 동작동까지 걸어 돌아오곤 했지요.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코피가 터졌어요. 게다가 그때 위장병을 앓고 있어서 배를 움켜잡고 걸어 다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지요.”

    그는 장학재단을 설립한 것 외에도 인천에 100여 명의 어린이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300여 평 규모의 보육시설을 지었고, 여러 대학에 발전기금을 냈다.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유복하게 보낸 류 회장과 달리 이 회장은 어린 시절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아버지가 철도청에 다녔지만, 만날 술에 절어 있었기에 어머니 혼자 힘으로 자식들을 키운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어머니가 더는 학비를 댈 수 없어 이 회장이 학교를 그만둘 처지가 되자 마을 어른들이 돌아가며 어린 이관진의 등록금을 내주었다. 그는 동네에서 ‘수재’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총명했다. 그의 재능을 아낀 이웃들이 수업료며 밥과 음식을 갖다줬다.

    “술독에 빠져 사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공부를 많이 해야 빼앗긴 나라를 찾을 수 있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틈나면 어머니께서 애국부인회에 나가셨기 때문에 제가 집안일을 도맡아 했어요. 집에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배고픔을 이기려고 더 열심히 공부했는데, 우리 마을에 성당이 생겼어요.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한 수염이 텁수룩한 프랑스 신부님이 성당에 오면 초콜릿과 먹을 것을 준다고 해서 신부님을 따라갔지요.”

    배가 고파 간 성당에서 이 회장은 마을에서 제일 갑부 집안의 딸인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그런데 신부 집안에서 결혼하려면 영세를 받아야 한다고 해 영세를 받고 결혼하기에 이른다. 1952년 경제통신사(經濟通信社) 기자가 된 이 회장은 편집국장을 지내고, 1972년 샤프전자의 전신인 한국샤프를 세웠다.

    군대에 성당 새로 짓기

    이 회장이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게 된 계기가 있었다.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일하던 1980년 초에 진해에 있는 해군 성당에 갔을 때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광에 비해 성당은 지은 지 하도 오래되어 벽이 갈라지고, 손만 대도 허물어질 것 같았다. 가족과 떨어져 낡은 성당에서 기도할 해군 장병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각 지방 교구에 비해 아직 온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군종선교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다. 이 회장이 신부에게 조용히 물었다.

    “바다가 참 아름다운데 성당이 너무 낡았군요. 행여 무너져내릴까 걱정됩니다. 이 성당을 재건축하려면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이 회장은 성당을 새로 지어주었다.

    “좋아하는 해군 병사들을 보니, 제가 몇 배로 더 기뻤어요. 작은 기쁨이 부메랑이 되어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그 후 이 회장은 해군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에도 성당을 새로 지었고, 지난 1월8일까지 20년간 군종후원회 회장직을 수행했다. 이 회장은 요즘 자신의 자선 활동을 좀더 체계화하기 위해 복지재단 설립을 준비 중이다. 류 회장은 이 일만은 이 회장보다 자신이 조금 앞섰다고 즐거워한다. 2001년에 이미 송천재단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님은 지갑에 10만원짜리 수표를 여러 장 넣어 다니세요. 어려운 이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 때문이죠. 그만큼 이 회장은 나눔을 생활화하신 분입니다. 자신이 행복해지기 때문에 선을 베푼다는 이 회장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내 이웃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겠다’는 마음만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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