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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전설

“사진은 사진이면서 사진 그 이상이어야”

한국 사진예술 개척자 이명동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사진은 사진이면서 사진 그 이상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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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값 훔쳐 카메라 사다

“사진은 사진이면서 사진 그 이상이어야”

김구 선생이 서거하기 사흘 전인 1949년 6월 23일 이명동이 촬영한 사진. 사진으로 남은 백범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버지가 황소를 사려고 마련한 12원을 할머니가 창호지에 싸 실로 묶어 숨겨두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돈을 슬쩍했죠. 어머니가 밭 매는 일을 해 하루 30전 받을 때예요. 1원, 2원 하는 카메라도 팔았는데 12원 주고 산 카메라는 성능이 제법 괜찮았습니다.”

눈 온 날 강아지처럼 신이 났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깡충깡충 마을을 뛰어다녔다. 신줏단지 모시듯 렌즈(lens)와 보디(body)를 닦았다.

“이 녀석아, 당장 가서 물러와!”

카메라 산 돈의 출처를 알아낸 아버지는 분노했다. 그는 물러오라는 말을 듣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 숨어 지냈다. “손자 죽겠다”는 할머니의 읍소 덕분에 아버지가 화를 풀었다.



“파란색 현상약과 빨간색 정착약으로 인화하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찍은 인물사진을 보시면서 신기해하고, 칭찬도 해주셨어요.”

독학으로 익힌 사진은 일생의 업(業)이 됐다. “찰카닥이 무슨 예술이냐”고 깎아내리는 이들을 평론과 작품으로 꾸짖으면서 왜 사진이 예술인지 증명해냈다.

최봉림(한국사진문화연구소 소장)이 ‘먼 역사 또렷한 기억’에 붙인 헌사(獻詞)를 읽어보자.

“그의 보도사진은 1960년대 전후 한국사회의 복판에 서 있었고, 한국 언론의 중심이던 ‘동아일보’와 ‘신동아’의 지면을 장식한 사진비평은 한국 사진계 흐름을 주도했다. 그는 끊임없이 사진인의 예술관의 빈약을 질책하면서 사진행위의 지성화를 요구했다. 그가 책무로 여긴 사안은 빠른 속도로 실현됐다. 모더니즘이 한국 사진 주류로 자리 잡았고 사진의 지성화는 사진학과의 확장과 유학 세대 등장으로 충족됐다. 그의 방향타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한국 사진계를 주도했으며, 그의 여정은 한국 현대사진의 흐름과 궤를 같이했다.”

그는 사진평론가면서 사진기자였고, 사진예술 운동가요, 포토저널리즘을 가르친 교육자였다. 리얼리즘 사진 운동에 앞장서면서 1962년 한국사진작가협회 창설을 주도했다. 1963년부터 동아사진콘테스트가 열린 것에도, 이듬해 국전(國展)에 사진 부문이 신설된 것에도, 1966년 동아국제사진살롱을 창설한 중심에도 그가 서 있었다.

1968년 그가 주선해 동아일보사가 발행한 최민식의 ‘인간’은 한국 최초의 개인 사진집이다. 1969년 ‘젊은 사진작가 주명덕’ 제하 칼럼을 시작으로 1983년까지 ‘신동아’에 연재한 사진비평은 한국 사진의 ‘먼 역사’면서 ‘또렷한 기억’이다. 이젠 내로라하는 사진가가 된 이들은 그의 비평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백범 김구의 최후를 찍다

그는 평론을 통해 한국 사진의 낙후성을 꼬집으면서 “사진은 사진이어야 한다” “회화주의를 극복하고 모더니즘에 합류하자”고 외쳤다. 비평가로 활동한 것은 사진이 예술의 한 장르라는 것을 널리 인식시키려는 노력이었다. 1989년 5월 칠순의 나이에 창간한 잡지 이름을 ‘사진예술’이라고 지은 것도 같은 이유다.

저널리스트로서 남긴 족적도 눈부시다. 수필가 윤세영은 ‘먼 역사 또렷한 기억’을 보고 이렇게 썼다.

“1920년생이니 거의 한 세기를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사진을 시작해 광복의 기쁨을 찍었고, 1949년에는 경교장 뜰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마지막 사진이 된 하얀 두루마기 차림의 인물사진을 찍었다. 6·25전쟁을 종군 기록했으며 자유당 정권의 부패를 고발했고, 4·19혁명 때에는 경무대 앞 총알이 날아오는 현장을 기록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는 자체가 전설처럼 느껴졌다.”

그는 1949년 6월 서거하기 사흘 전 백범의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1956년에는 신익희가 기차에서 사망하기 3시간 전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1959년에는 조병옥의 최후 사진을 남겼다. 4·19혁명 때 찍은, 민중의 피가 독재를 몰아내는 경무대 앞 현장을 담은 사진은 이듬해 우표로 제작됐다.

“광복 후 미군 군정청 농림부에서 사진가로 일하면서 성균관대 전문부 정치과를 다녔습니다. 백범 선생이 성균관대 후원회장을 맡았어요. 경교장(백범 사저) 일을 봐주면서 선생을 따랐습니다. 백범 비서이던 선우진 씨 등과 백범동지회를 만들었어요. 백범을 지키자고 의기투합한 것이었죠. 그즈음 경교장에서 백범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백범이 안두희의 총탄을 맞고 서거한 후 입관 직전의 모습을 찍은 것도 기억납니다. 살아서 마지막 모습, 죽어서 마지막 모습을 기록한 셈이네요. 백범과의 인연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1969년 백범 동상을 세울 때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이사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951년 어느 날 강원 인제군 7사단 주둔지에서 한 병사가 편지를 읽는다. 철모에는 칠성부대 상징인 별(★) 7개가 새겨져 있다. 총열에 묶어 매단 인형이 앙증맞다. 편지를 읽으며 웃는 병사의 얼굴이 앳되다. ‘보병7사단의 중동부’라는 제목으로 남은 사진 속 병사는 이튿날 전사했다.

“사진은 사진이면서 사진 그 이상이어야”

1951년 작 ‘보병7사단의 중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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