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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와 함께한 신동아 700호

‘조선민족 대경륜’ 제시한 86년

‘전람회, 토의장, 온양소’ 된 최장기 종합잡지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언론사

‘조선민족 대경륜’ 제시한 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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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라주의 편집

1932년 3월호(통권 5호)에 3편의 기사가 게재 금지당했다, 신동아는 1932년 11월 창간 1주년 기념사업 ‘독자작품모집’으로 문인 배출의 등용문 역할을 시작했다. [1932](왼쪽부터)

1932년 3월호(통권 5호)에 3편의 기사가 게재 금지당했다, 신동아는 1932년 11월 창간 1주년 기념사업 ‘독자작품모집’으로 문인 배출의 등용문 역할을 시작했다. [1932](왼쪽부터)

편집 방침은 ‘망라주의’였다. 당시 신동아 편집을 주관한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 설의식(필명 小梧)은 편집후기에서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문예 등 각 방면을 망라하여 우리의 지식과 문견을 넓히고 실익과 취미를 도울 만한 것이면 모두 다 취하기로” 하는 것이 망라주의라고 밝혔다. 창간호는 사진 화보와 만화를 앞에 넣고 과학란, 연예란, 스포츠란, 문예란을 두었다. 권두논문 ‘농가부채 오억원, 조선농촌은 어디로 가나?(徐椿)’를 비롯해 ‘동서고금 사상가열전’ ‘해외문단 총관(總觀)’ 등을 시리즈로 연재하는 등 국내 문제와 함께 긴장감이 고조되는 국제 문제에 대한 글을 고루 다루었다. 

‘망라주의’ 편집은 동아일보의 조직과 편집진이 뒷받침했기에 가능했다. 그 이전의 잡지가 개인의 성격이나 취미에 따라 내용이 좌우되고 주관성이 강조된 데 비해 신동아 출현으로 잡지가 민족의 공기라는 성격을 나타내게 되고 민족의 대변지적인 구실을 담당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백순재, ‘잡지를 통해 본 일제시대의 근대화 운동’, 신동아, 1966.6) 

재정에 어려움이 없었던 덕에 다른 잡지가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의 호화판으로 제작했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전국에 판매할 수 있었다. 창간호는 발매 부수가 2만 부를 돌파해 당시로선 파격적인 판매 실적을 올려 절판됐고, 제2호는 3판까지 발행해 1만5000부 내외, 제3호부터는 1만 부에서 9000부 선으로 고정됐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잡지의 발행 부수는 많아야 2000~3000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동아일보를 포함한 일간지의 발행 부수가 6만 부를 넘은 적이 없던 사정과 비교한다면 잡지 판매 부수만 보더라도 크게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난관인 검열에선 신동아도 다른 잡지와 같은 처지였다. 총독부 검열로 인한 게재금지를 피할 수 없었다. 1932년 3월호(통권 5호)에 3편의 기사가 게재금지를 당한 것을 비롯해 ‘사고(社告)’로 게재금지를 밝힌 경우가 여러 건 있었다. (1932년 3월·6월·11월·12월호, 1933년 1월·2월호 ‘사고’) 편집국장 이광수의 글을 비롯해 김동인·박계주·황순원의 시와 소설도 금지됐고, 국제 정세를 논한 글이 많이 삭제됐다. 

신동아는 외형적으로는 독립된 형식을 취했는데 사장은 송진우, 판권란의 ‘저작 겸 발행인’은 양원모(梁源模)였다. 양원모는 동아일보 영업국장이었고 실지 제작 총괄은 편집국장 대리 설의식(薛義植)이었다. ‘신동아’라는 제호를 붙인 사람도 설의식이었다.(주요섭, ‘제호와 명명자’, ‘삼천리’, 1932년 2월호, p.49)


학자, 언론인, 문인 편집진

제2차 편집진이 구성된 신동아 창간 2주년 1933년 11월호. [1933]

제2차 편집진이 구성된 신동아 창간 2주년 1933년 11월호. [1933]

일제강점기 신동아 편집진은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차 진용은 설의식을 책임자로 하고 전담기자 몇 사람이 제작을 맡았던 1931년 9월부터 1932년 11월까지 약 1년이다. 9월 창간 예정이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2개월이 지연돼 11월에 창간했는데 설의식 주도 아래 창간호 준비가 거의 끝났을 무렵인 10월 1일 자로 주요섭이 잡지 전담기자로 입사했다. 이어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 김자혜(金慈惠)가 입사(1932.4.1)하고 이해 10월에는 시인 이은상이 입사했다. 

1933년 1월 여성지 ‘신가정’(현재의 여성동아)을 새로 창간하자 신동아와 신가정 제작에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신동아 창간 2주년인 1933년 11월 두 잡지를 제작할 ‘잡지부’를 신설했다. 잡지부 독립과 함께 주요섭은 ‘잡지부장’에 임명되었다. 신문사 소속 최초의 잡지부장이다. 주요섭이 잡지부장으로 승진한 1933년 11월부터 제2차 편집진이 구성된다. 이때의 진용은 부장 주요섭, 기자로는 김자혜·이은상·고형곤(1933년 5월 입사)·최영수(6월 입사), 여기자 김원경(金元經, 1934년 1월 입사) 등이 있었다. 이은상과 두 여기자 김자혜, 김원경은 ‘신가정’ 편집 담당이었다. 

제3차 진용은 1934년 8월, 주요섭이 물러나고 최승만이 부장으로 입사한 뒤부터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될 때까지다. 이 기간에는 부장 최승만을 비롯하여 기자로는 이은상·고형곤·최영수·김원경이 근무했고, 변영로(1933.9.12~1935.4.11일까지 잡지부에 근무하다 정치부로 옮김), 황신덕(1935.6.7 입사)이 있었다. 화가 청전 이상범, 작가 이무영, 박승호도 잡지 제작에 참여한다. 일제강점기 신동아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후에 학자 또는 문인으로 대성했음을 보면 신동아 편집진이 당시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요 인물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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