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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 - 송상현 회고록

美·英·佛에서의 악전고투 1963~1972

장인인 남재 김상협의 조언… “대한민국은 바다로 나가야”

  • | 송상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장·제2대 국제형사재판소장

美·英·佛에서의 악전고투 1963~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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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어이할꼬

육군본부에서 1년 반 근무한 후 강원 인제군 원통리 11사단으로 전근 배치됐다. 서울에서 가장 먼 38선 이북인 데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어이할꼬’라는 말을 듣는 오지 중 오지다. 원통리는 당시 서울에서 춘천과 양구를 거쳐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12시간가량 가야만 도달하는 마을이었다. 선임하사가 얻어준 하숙방은 초가지붕 이엉 밑에 감추어진 서까래의 끝이 내 턱쯤에 와 닿는 나지막한 곳이었다. 문화생활이란 일절 없는 데다 밤에 자리에 누우면 심한 욕설이 담긴 북한의 대남방송이 밤새도록 들려와 숙면을 취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 서울에 나왔다가 법무참모부에 오래 근무한 장교들을 일정한 조건하에서 법무관으로 임명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돼 논란이 이는 것을 알았다.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자가 매우 적어 군 미필 합격자가 법무관으로 모두 입대해도 군의 법률 수요를 충당할 수 없으므로 만성적 결원을 충원한다는 명분하에 손쉬운 전형을 통해 일단의 보병장교를 법무장교로 임명한 후 10년을 복무하면 변호사 자격을 준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같은 계획은 법조계 인사들의 심한 저항을 받았다. 몇몇 동기생을 만나 소상한 전말을 들었는데 약국에서 10년간 심부름했다고 일정 조건을 갖추면 약사 자격을 줄 수 있느냐는 식으로 성토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의견서를 작성하고 동기생들의 서명날인을 받아 야당 총무 등에게 수교했다. 이 같은 의사표시가 나중에 큰 문제로 비화할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다. 

군 당국은 허가 없이 집단행동에 나섰다고 문제를 삼으면서 강경하게 대응했다. 주동자급으로 분류된 나를 포함한 3명의 군법무관은 서울에서 헌병대의 조사를 받았다. 박모 육군 법무감은 이 사건이 출세와 진급에 지장을 줄까 우려해서인지 지레 엄단을 주장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일을 키웠다. 나를 포함한 현홍주, 김찬진 등 이른바 주동자 3인은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김유후, 장기욱 등 선배 법무관의 사주를 받아 일을 벌였다는 각본에 따라 파면됐다. 김유후, 장기욱 등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 두 사람이 배후라고 허황되게 지목하는 등 전연 승복할 수 없는 웃기는 각본을 작성해 유치하고도 형식적인 수준의 징계가 이뤄진 것이다. 형사사건의 수사와 사건 처리의 수준, 징계조사와 그 절차 등이 아주 후진적인 시절이었다.


열대 기화요초 가득한 뉴올리언스

파면의 법적 효과를 꼼꼼하게 알아봤다. 당시에는 파면당하면 즉시 불명예 제대해야 하고 3년간 공직 취임이 제한되는 불이익이 있었으나 3년이 경과하면 징계에 따른 불이익이 모두 실효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한 일이 옳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일을 처리하는 당국자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유치하고 실망스러워 파면을 감수한 채 즉각 제대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침 은사 김기두 선생님의 권고로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둔 것이 있었다. 결연한 마음으로 1967년 7월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 있는 명문 튤레인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에 참가하고자 뉴욕에 머물렀다. 소낙비의 빗방울이 굵은 것에 놀라 ‘미국 것은 빗방울조차 크네’라고 중얼거린 생각이 난다. 외국에서 온 풀브라이트 유학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프린스턴대 기숙사에 입주했다. 한국이 그리우면 주머니 사정 탓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학 앞 유일한 중국 음식점에서 두부찌개 비슷한 얼큰한 음식을 사 먹곤 했다. 뉴욕 시내에 나가도 한국 음식점의 수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서울에 전화를 걸려면 신청하고도 여러 시간을 기다려야 통화가 될까 말까 하던 시절이다. 

나는 풀브라이트로부터 등록금과 책값 외 매달 270달러씩 생활비를 받았는데 독신이므로 견딜 만했다. 학생 식당에서 70센트 정도에 한 끼 사 먹을 수 있었다. 처음 보거나 신기한 음식이 매우 많았다. 프린스턴대 구내식당에서 종이팩에 든 신선한 우유를 처음 보았다. 한국에서는 미8군에서 유출된 분유를 끓는 물에 타 먹는 게 고작이었다. 아이스크림이 그처럼 종류가 많은 것도 미국에 도착해 알았는데 원하는 종류를 정확히 말할 줄 몰라 사 먹지 못한 기억도 있다. 

튤레인대가 터 잡은 뉴올리언스에 도착하니 처음 접해보는 열대지방의 기화요초가 나를 반기고 식민지 시대부터 여러 나라의 영향을 받아 뒤섞인 독특한 문화적 특색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획기적 흑백 통합 판결을 완벽하게 집행하지 않고 미적거리는 남부였기에 흑인도 백인도 아닌 나는 곤혹스러운 경우가 간혹 있었다. 버스나 전차에 인종 간 좌석 배치 표시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공용건물 입구의 인종별 출입구 표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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