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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의 역사

돈이 곧 주권인 시대

누가 여성의 재산권을 빼앗나

  •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돈이 곧 주권인 시대

  • 여성의 재산권은 역사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서양은 중세기까지 심각하게 위축됐던 여성의 재산권이 수백 년 뒤 다시 힘을 얻은 반면, 이슬람 문화권은 7세기 후반까지 강하다 이후 급격히 힘을 잃었다. 우리나라도 16세기까지는 다른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여권이 보장됐으나 성리학이 확대되면서 재산권 행사는 어느 순간 저지당했다. 여성의 재산권을 둘러싼 시대 변화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장 자크 프랑수아, 아들에게 방패를 주는 스파르타 여인(왼쪽), 스파르타 여인상. [위키피디아]

장 자크 프랑수아, 아들에게 방패를 주는 스파르타 여인(왼쪽), 스파르타 여인상. [위키피디아]

민주주의가 발달한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조차 여성의 지위는 초라했다. 그들에게는 시민권도 부여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들에게는 교육받을 권리가 있었다. 소질과 능력에 따라 배우나 가수, 의사, 시인, 운동선수 등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었다. 

스파르타 여성들은 처지가 좀 나았다. 금전을 소유할 권리가 있었고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도 누렸다. 그에 비하면 로마의 여권은 형편없이 낮았다. 여성들은 집안일을 도맡아 함으로써 가족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건 25세 이상의 여성은 자신의 혼인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지녔다는 점이다. 로마 말기에는 결혼뿐 아니라 이혼까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지극히 당연한 권리이지만, 역사적으로는 희귀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여성의 권리는 상당히 컸다. 성경 ‘사도행전’에는 영향력이 컸으리라 추측되는 여성이 여럿 등장한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가 성장함에 따라 여성의 역할은 오히려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중세 초기 귀족의 딸, 영지 경영에 적극적

존 스튜어트 밀과 그가 펴낸

존 스튜어트 밀과 그가 펴낸 '여성의 종속'. [위키피디아]

서양 중세 사회는 ‘로마법’의 지배를 받았다. 그 바람에 장자 상속제도가 대세였다. 하지만 인구사적 측면에서 볼 때 영주의 2할은 아들을 상속자로 두지 못했다. 자연히 딸에게도 상속권이 주어졌다. 또 로마법의 영향이 미미한 지역도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영주의 봉토가 자녀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기도 했다. 또한 장자가 재산을 물려받았더라도 조기에 사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여성이 영지를 물려받아 직접 경영에 나선 경우가 종종 있었다. 

과부가 남편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도 가능했다.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중세 사회에서는 결혼한 여성이 과부가 될 경우를 고려해 과부의 몫(재산)을 미리 결정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남편이 사망하면 40일 이내에 재산의 상속자와 후견인들이 과부 몫의 재산을 챙겨주었다. 과부는 생전에 그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망 후에는 다시 재산이 남편 집안으로 반환되기 때문에 마음대로 처분할 수는 없었다. 이렇듯 중세 서양 여성들은 재산권에 있어 여러모로 제한을 받았다. 

여성이 결혼 당시 가져간 지참금과 친정에서 물려받은 상속 재산 및 남편의 재산은 일단 부부의 공동 재산이었다. 그런데도 그에 대한 관리 권한은 남편에게 있었다. 이 경우 아내는 남편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재물도 매각하거나 다른 재물과 교환하지 못했다. 저당을 잡힐 수도 없었다. 

반면 남편은 재산 처분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아내의 동의도 필요 없었다. 과부가 될 경우 떼어주기로 약속한 재산을 남편이 제멋대로 팔아버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재산권의 저울은 남편 쪽으로 한참 기울어져 있었다. 

여성이 법률에 따라 재산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남편의 병환이 심각할 때, 또는 남편이 장기간 부재중이어서 법정에 나타날 수 없을 때 여성은 남편의 대리자로 활약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법적 권리는 법정에 대리 출석한 남성을 통해 행사됐다. 

그나마 여성이 자유로울 때는 과부가 된 다음이었다. 이 경우에는 자신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임의로 자녀에게 나눠줄 수 있었다. 간혹 중세 귀족 중에는 어머니 집안의 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은 모계 재산을 상속했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 

중세 사회에서는 재산이 있어야 특별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여성이라도 재산이 있으면 마을 회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 도시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재력만 있으면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같은 시기 한국 사회에서는 재력이 큰 여성이라도 공적 자격이라든지 의사결정권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12세기 이후 서양 여성의 권리는 약화됐다. 그 배경에는 ‘로마법’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시일이 경과할수록 여성의 지위는 낮아졌다. 16세기경 여성은 사실상 법적 무능력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1804년 제정된 ‘나폴레옹 민법전’에서도 여성의 재산권과 소송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영국은 유럽에서도 인권 의식이 가장 높은 곳이었으나 여성의 참정권과 재산권을 허락하는 데는 인색했다. 1870년까지도 영국의 관습법은 아내가 실질적으로 소유한 동산(動産)의 소유권은 남편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심지어 여성 명의로 된 부동산 관리 권한도 남편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법적 문제가 발생해도 여성은 법원에 출정해 자신의 권리를 직접 주장할 수 없었다.


16세기경 여성 인권 끝없이 추락

그 당시 과학자들은 젠더의 차별을 생물학적 차이라고 강변했다. 18세기 중반 유럽에 등장한 ‘사이비 과학’인 ‘골상학’에서는 여성의 뇌 무게가 남성의 뇌보다 가볍다는 이유로 남녀 차별을 정당화했다. 많은 의학자는 남성의 성기를 기준으로 삼아 여성의 성기는 그 자체가 비정상적이라고 우겼다. 

그런 와중에도 소수의 용감한 지식인들은 편견과 오류에 맞서 싸웠다. 존 스튜어트 밀이 대표적이었다. 밀은 1869년 펴낸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을 통해 잘못된 편견으로 여성의 사회적 기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남성과 여성이 본질적으로 동등하다는 점을 확신했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교육과 환경 탓이라고 했다. 그는 역사책을 들추어 큰 업적을 남긴 여왕들이 있었음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종속’은 인간의 본성을 깊이 탐구하고, 바람직한 사회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따라서 후세가 이 책을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평가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밀과 동시대의 미국 사회에는 여성의 재산권과 참정권을 위해 연대투쟁을 벌인 여성운동가들이 존재했다. 이미 1850년대부터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을 비롯해 수전 앤서니, 어니스틴 로즈 등이 청원서를 작성해 1만 명의 지지서명을 받아냈다. 그들은 이 청원서를 뉴욕 주의회에 제출했다. 당장에 가시적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무척 중요한 운동이었다. 서구 여러 나라에서 벌어진 여성운동 결과, 마침내 1893년에는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이로써 여성의 재산권과 참정권을 인정하는 새로운 흐름이 뚜렷해졌다.


여성의 재산권을 보장한 코란

코란을 암송하는 여성. [위키피디아]

코란을 암송하는 여성. [위키피디아]

이슬람 경전인 ‘코란’과 그들의 법률인 ‘샤리아’에는 여성의 권리가 다각도로 보장돼 있다. 가령 코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남성에게도 부모 및 가까운 친척이 물려준 재산이 있고, 여성에게도 부모 및 가까운 친척이 물려준 재산이 있는 법이다. 각자는 많든 적든 정해진 몫을 받느니라.’(4:7) 

7세기 중·후반부터 이슬람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그러자 코란과 샤리아에 담긴 세계관이 이슬람 문화를 특징지었다. 그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 또는 사회적 여건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초기의 이슬람은 이러한 차이를 차별로 확대해석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세계관에는 위험의 소지가 내재돼 있었다.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태도가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런데 코란은 다처제의 조건을 명시했다. 

‘너희가 여러 아내를 공평하게 대해줄 수 없을 것 같은 염려가 있을 경우, 한 사람의 여인하고만 결혼하든지 아니면 너희 오른손이 소유한 것, 즉 노예인 여성을 관계해야 한다.’(4:3) 

이슬람이 성립되기 전, 중동 지방 여성들의 권리는 보잘것없었다. 여성에게는 하등의 재산권도 인정되지 않았다. 결혼한 여성은 남편의 소유물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남편이 사망하면 모든 재산권은 아들에게 넘어갔다. 

이러한 전통을 뒤엎은 이가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였다. 그는 여성의 지위를 강화하고 많은 권리를 부여했다. 여성이 교육받을 권리, 재산을 소유하고 경제활동에서 능동적으로 참여할 권리,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까지도 인정했다. 한마디로 이슬람의 성장이 중동 지역의 여권을 신장시켰다. 유럽 사회에 비해 당시 이슬람 여성의 지위와 권리는 월등했다. 

‘옥스퍼드 이슬람사전(Oxford Dictionary of Islam)’을 보아도, 이슬람 사회의 몇 가지 특징이 금세 눈에 띈다. 우선 그들은 영유아의 살해를 금지했고, 특히 여아 살해를 준엄하게 경고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법정에 출두할 권리를 인정했다. 또 여성의 재산권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지참금에 대한 대목은 꽤 인상적이다. 

‘종래에는 시아버지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인정되어온 것이 지참금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를 결혼한 여성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고유 재산으로 간주한다.’ 

이 기회에 샤리아에 대해서도 강조할 부분이 있다. 이슬람 법률이 도입되자, 이슬람 세계에서는 결혼이 기혼자라는 신분을 부여하는 징표가 아니라, 여성의 동의를 전제로 한 민법상의 계약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슬람 사회 역시 가부장 사회였다. 그 점은 기독교 사회나 유교 사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 차이가 있다. 이슬람 사회는 결혼을 민법상의 계약으로 보았고, 지참금을 여성의 재산으로 인식했다. 그 밖의 재산에 대해서도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했다. 그런 점에서 샤리아는 진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14세기 이후 코란 본래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원리주의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그러자 여권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퇴색했다. 여성의 지위는 갈수록 약화되었다. 오늘날 이슬람 내부에도 여권신장을 외치는 목소리가 없지 않으나, 역사의 시계는 한참을 거꾸로 돌아간 것 같다. 


조선 시대 송순 분재기.

조선 시대 송순 분재기.

조선 전기까지도 이 땅의 여성들은 재산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었다. 동산과 부동산을 자신의 명의로 소유했고, 자신의 뜻대로 물려주거나 매각할 수 있었다. 남편이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권리를 남편의 사후에도 계속 행사할 수 있었다. 

1432년(세종 14) 6월 27일자 ‘실록’에는 여성의 재산권 행사에 관한 한 가지 흥미로운 사건이 기록돼 있다. 요점을 간추려보면, 개국공신으로 판부사(종2품)를 지낸 이화영의 배우자 동씨(童氏)가 불법을 저질렀다는 내용이다. 이화영은 자신에게 일정한 물품을 납부할 ‘봉족(奉足)’ 30호를 둘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 더해 123호를 추가로 점유했다. 문제는 이화영이 사망한 뒤에도 아내 동씨가 그들에 대한 권리 행사를 계속했다는 사실이다. 

동씨는 봄·가을마다 봉족들에게 물건을 받아 사용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봉족이 벼슬길에 나가지도 못하게 막았다. 이는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엄밀한 의미로는 일체의 봉족을 국가에 반환해야 했다. 그런데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법이 정한 30호의 봉족에 대해서는 이화영의 아들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조정의 고관과 담당 부서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상의한 결과,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다. 세종은 그들의 견해를 두루 참작해 다음과 같은 최종 결론을 내렸다. 

“전에 (법에 따라) 나눠준 30호 가운데서 10호는 동씨(童氏)가 차지하라. 나머지 20호 및 (이화영이 호적에서) 누락해 빼돌린 장정들은 모두 새로 군역을 정하라.” 

조정은 수년 동안 계속된 과부 동씨의 불법행위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의 노후 보장을 위해 10호의 봉족을 계속 사용하게끔 했다. 나머지 인력에 대해서만 법에 따라 환수 조치하도록 하는 데 그쳤다.


성종, 과부의 재산권 행사 제한

15세기 한국 사회에서는 과부의 재산권을 제한하려는 시도가 가시화됐다. 사안이 무척 중대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토의했다. 1490년(성종 21) 6월 8일, 성종은 혈육이 없는 과부가 재산을 임의로 처분하는 것이 옳은지 여러 신하에게 물었다. 그 재산은 과부가 사망한 뒤에는 남편의 형제와 조카에게 상속될 것이었다. 왕명에 따라 토의에 참석할 대상이 영돈녕(정1품) 이상의 고관과 의정부, 6조, 한성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신하로 정해졌다. 

신하들의 의견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심회 등 11명은 과부가 마음대로 재산을 매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홍응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매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사신을 비롯한 신하 5명도 동의했다. 이철견 등 3명은 매각을 빙자해 과부가 다른 사람에게 증여하지 못하도록 주의할 것을 요구했다. 

이극돈은 과부가 처분하는 재산이 소액에 국한된다면 괜찮다고 했다. 그에 반해, 유순은 어떤 이유로도 매각을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이집 등 18명은 매입자는 남편의 친족에 국한해야 한다고 조건을 붙였다. 

내가 보기에, 성종의 본의는 과부의 재산 매각을 금지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가 심해 최종 결정을 미루었다. 

16세기가 되면서 과부의 재산권 행사에 국가는 더욱 깊숙이 개입한다. 1537년(중종 32) 12월 5일, 중종은 과부 손씨가 죽은 남편의 서녀에게는 재산을 너무 많이 주었고, 양자(강여숙)에게는 조금만 물려주었다며 시정 명령을 내렸다. 

신기하게도 근대 초기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가부장권이 강화됐다. 젠더의 양극화가 심해진 것이다. 서양에서는 일터와 가정의 분리가 이런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는 견해가 있다. 도시가 발달하고 산업이 더욱 분화된 결과 그렇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슬람 문화권과 한국 사회에서는 왜 여성의 소외가 더 강해졌을까? 서양 사회에서와 마찬가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을까. 좀 더 깊은 연구가 뒤따라야겠다.


신동아 2018년 9월 호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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