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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①

痛恨의 38선, 소련 견제 위한 미국의 정치공작 산물

  • 진석용 대전대 교수·정치외교학 qintzu@dju.ac.kr

痛恨의 38선, 소련 견제 위한 미국의 정치공작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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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8월15일 이후 한반도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우리 민족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38선이 그어졌고 남북은 분단됐다. 북한 정권의 적화통일 야욕에서 빚어진 6·25전쟁은 남북의 분단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남과 북은 서로 굳게 문을 걸어 잠갔고 이념대립의 골은 깊어만 갔다.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은 반목과 적대행위로 점철된 남북 분단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남북한 국민이 본래 하나라는 평범한 진실 앞에 많은 사람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열강의 이해관계에 둘러싸인 남북한 통일의 길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진다. 과연 한반도는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통일의 새 역사를 펼칠 수 있을 것인가. ‘신동아’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남북분단의 역사를 새로 조명하고 민족통일의 가능성을 전망하는 특별연재를 기획했다. 그 첫 회로 38선 획정의 진실을 다룬다.
痛恨의 38선, 소련 견제 위한 미국의 정치공작 산물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을 결정한 후 38선을 경계로 미소(美蘇) 양군이 진주하고, 이후 남북에 각각 단독정권이 수립되면서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진행돼왔고, 당시의 비밀문서들도 거의 공개됐기 때문에 관련 사실 대부분이 밝혀졌다. 그런데도 38선의 획정과 분단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이유는 같은 사실을 놓고서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와 인과관계를 어떻게 엮을 것인가를 두고 이견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과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종합하면 38선 획정에 대해 크게 두 각도에서 볼 수 있다. 하나는 38선은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해 미소가 일시적으로 합의한 군사적 활동 경계에 불과했는데, 나중에 이것이 불씨가 돼 분단으로 가고 말았다는 이른바 ‘군사적 편의설’이다. 분단의 책임 문제를 논할 때, 이 설에 따르면 미소의 책임은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대신 남한과 북한에 각각 단독정권을 세운 정치세력의 책임이 커진다.

다른 하나는 미국과 소련은 처음부터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한쪽도 단독 지배할 자신이 없어 상대방의 단독 지배를 막는 선에서, 즉 38선을 기준으로 반분하는 것으로 각각의 야심을 실현했다는 이른바 ‘정치적 음모설’이다. 다시 말해 미국과 소련이 처음부터 반씩 나누어 차지할 작정을 하고 38선을 그었다는 주장이다. 이 설은 38선이 획정될 때부터 이미 분단이 예정돼 있었다는 추론으로 이어진다. 이 경우 분단의 책임은 거의 전적으로 미국과 소련에 돌아가고, 특히 38선에 의한 분할을 처음 제안한 미국 쪽이 더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다.

만일 미국과 소련이 그런 의도로 양국간 조약의 형태로 체결한 것이 있다면 후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얄타밀약설이나 포츠담밀약설 등과 같이 ‘설’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정치적 음모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체로(그런 명시적인 증거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지만)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그것이 바로 분단의 구조적 원인이 됐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대부분의 사건은 그 원인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원인의 원인을 추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연쇄적인 인과관계를 공간적으로 어느 범위까지, 시간적으로 언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에 따라 여러 가지 설명이 나올 수 있다. 보통 공간적으로 인접한 사건과 시간적으로 근접한 사건이 더 중요한 원인이 된다.

또 시간과 공간의 범위 외에도, 분석의 차원과 단위에 따라 설명이 다양해질 수 있다. 국제정치의 경우 국제정치체계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구조’의 수준에서 설명을 시도할 수도 있고, ‘과정’의 수준에서 인과관계를 구성할 수도 있다. 또한 원인의 단위를 정책결정자와 같은 ‘개인’으로 볼 수도 있고, ‘국가’로 볼 수도 있고, ‘전체로서의 국제정치체계’로 볼 수도 있다. 38선과 분단의 원인에 관한 설명도 이와 같은 어려움을 내포한다. 이 글에서는 ‘중요한 원인’으로 간주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38선의 획정 경위를 설명하고자 한다.

일반명령 제1호

38선이 한반도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맥아더 장군이 일본군 무장해제의 지침으로 ‘일반명령 제1호’를 발포한 1945년 9월2일이다. ‘일반명령 제1호’에는 한국을 38선을 경계로 해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각각 점령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러한 내용을 소련이 통지받고 수락한 시점은 8월15~16일이다. 이에 따라 소련군은 8월24일 평양에 입성하고, 8월26일에는 38선을 폐쇄함으로써 북한 점령을 완료했고, 미군은 9월8일 서울에 진주해 남한 점령을 끝냈다. 그렇다면 8월15일 이전 어느 시점에 38선이 계획됐으며, 38선을 계획한 미국과 이 제안에 동의한 소련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일반명령 제1호’ 초안은 일본이 항복할 가능성이 높아진 1944년 말부터 미군 내에서 검토됐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점령지역 할당에 관한 제1절은 8월10일 밤부터 11일 아침에 걸쳐 국무-육군-해군의 3부조정위원회에서 작성됐다. 8월11일 3부조정위가 보고한 제1절 초안의 한국 관계 항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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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석용 대전대 교수·정치외교학 qintzu@d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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