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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보도로 본 전두환과 한국 현대사

“全 장군 평가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1980년 6월호)

  • 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全 장군 평가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198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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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광주, 그 비극의 10일간’과 신동아 제작 방해
  • ● 광주 시민 수난사 끈질기게 보도
  • ● 5·18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 ● 全·盧 은닉 의혹 비자금 추적
“全 장군 평가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1980년 6월호)
“全 장군 평가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1980년 6월호)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퇴임 후 30년 만의 첫 인터뷰를 ‘신동아’와 갖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전 전 대통령의 서슬 퍼런 신군부가 언론에 재갈을 물렸을 때 신동아는 용기 있는 보도로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려 분투하면서 민주화의 열망을 싹틔웠다.

1985년 신동아 7월호에 게재된 ‘다큐멘터리-광주, 그 비극의 10일간’ 제하의 특집기사와 관련해 당시 동아일보 출판국장과 신동아부장, 취재기자가 보안사령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는 등 신동아는 1984년부터 1987년 9월까지 당국으로부터 가혹행위, 불법연행조사, 기사 전면 삭제 및 부분 삭제와 수정 등 20건에 이르는 탄압을 받았다.

1987년 10월호는 초유의 제작 탄압 사태를 맞았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 기사와 관련해 그해 9월 20일 밤 국가안전기획부 수사요원들이 신동아 인쇄처인 동아인쇄공업 윤전실을 점거해 인쇄를 중단시켰다. 이후 7박8일에 걸친 기자들의 항의 농성이 이어지며 국내외로 파문이 확산되자 정부는 결국 ‘이후락 씨 증언기사 게재 여부는 언론사 자율에 맡긴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광주사태’ 5년 뒤 기사화

‘요즘 세간에는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임명된 전두환 장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역사적인 ‘10·26 사건’ 후 가장 유명해진 사람이 바로 전 장군이다. 그는 10·26 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이 사건의 수사 전모를 직접 발표 , TV 화면과 신문지상에 클로즈업됐다. 더욱이 지난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임명됨으로써 전 장군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은 한층 높아졌는데, “군은 정치에 관여하지도 않으며 관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전두환’(이하 호칭 생략)은 1980년 6월호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 화제 그 인물〉 ‘중앙정보부장서리 전두환 중장’이 1쪽에 걸쳐 소개됐다. 기자는 전두환의 집권 가능성이 높던 터라 ‘육사 11기의 선두주자요, 보안사령관 겸 중정부장서리인 전 장군에 대한 평가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 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며 평가를 미뤘다.

‘전두환’은 1980년 10월호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 후 과제를 묻기 위한 〈좌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들’(배성동 서울대 정치학 교수, 정범석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한승조 고려대 정치학 교수, 남시욱 동아일보 논설위원 참석)에서도 거론된다.



“국정조사권으로 진상 밝혀야”

1980년 일어난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는 1985년 7월호에 처음 실렸다. 〈특별기획 광주사태〉에 ‘다큐멘터리-광주, 그 비극의 10일간’은 사태의 추이를 32쪽에 걸쳐 소개했다. 이 기사는 5·18의 진실을 최초로 심층보도한 것으로 이후 신동아가 겪을 수난의 서막이 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8년 명칭이 공식화하기 전까지 ‘광주사태’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중봉기’로 불렸기에 당시 신동아도 ‘광주사태’로 표기했다.

1985년 7월호 톱기사는 ‘오늘의 문제를 진단하는 신동아 시론-광주사태, 어떻게 해야 하나’(김영작 민정당 국회의원, 박찬종 신민당 국회의원, 강인섭 동아일보 논설위원 참석)다. 강 위원이 “12대 국회(1985년 5월 13일 개원)는 금기로 돼 있던 광주사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최초의 국회”라고 평가하면서 ‘광주사태의 해결책’을 묻자 여야 의원은 ‘본질’을 다르게 짚었다.

김 의원은 “광주사태를 조사하는 과정에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보이지 않는 유언비어의 위력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광주 시민들의 지역감정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했다는 거예요”라며 ‘유언비어’를 사태의 중심에 뒀다. 반면 박 의원은 “문제는 5·17 계엄확대조치의 정당성에 있고, 5월 18일 새벽에 투입된 부대가 나흘 동안에 찌르고 쏘지 않아도 될 양민들을 쏘고 했다는 데 있다”면서 “국정조사권을 발동해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신동아에 다시금 광주가 거론된 것은 1987년 6월항쟁 즈음이다. 1987년 9월호는 ‘광주사태, 그날의 5가지 의문점’을 통해 ‘왜 그토록 강경한 진압을 했나’ ‘왜 혜성처럼 나타난 시위대 여성 지휘자는 사라졌을까’ ‘왜 21일에 계엄군이 철수했을까’ ‘시위대의 무기 반납을 제지한 복면부대의 정체는 뭘까’ 등을 물으며 해결의 장애물로 ‘사망자 수에 대한 입장차’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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