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 들어온 한 권의 책
20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청년 셋이 의기투합해 만든 에어비앤비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숙박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여행의 개념마저 바꿔놓고 있다(전혀 알지 못하는 현지인의 집에서 머물 기회가 20세기에 있었을까?). 에어비앤비라는 ‘작은’ 예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제4차 산업혁명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이 거듭 강조하듯 극적인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제4차 산업혁명이란 인공지능, 로봇 공학, 자율주행 자동차, 생명공학 등 새로 등장하는 과학기술이 모든 분야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 초등학생이 사회에 나와 갖게 될 일자리의 70%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일자리일 것이고, 가까운 미래에 로봇이 약사 일을 하며, 3D 프린팅에 의한 간 이식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지난 3월 ‘알파고’가 안겨준 막연한 두려움. 우리에겐 그것이 제4차 산업혁명의 첫인상인 셈이다.
이 책은 제4차 산업혁명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 길잡이 구실을 해준다. 지은이 클라우스 슈밥은 다보스포럼의 창립자로, 2015년 말 세계경제포럼 내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동해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해 연구하고 그 결과를 이 책으로 묶어냈다. 책은 제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물리학, 디지털, 생물학 기술을 소개하고 5만 명이 거주하지만 신호등이 하나도 없는 ‘스마트 도시’, 직접적이고 의도적으로 유전자가 편집된 ‘맞춤형 아기(Designer Beings)’ 등 제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새로운 세상의 면면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제3장 ‘제4차 산업혁명의 영향력’이다. 디지털화로 인해 시민은 권력을 얻었는가, 아니면 잃었는가. 노동자를 자영업자로 보는 ‘휴먼 클라우드 플랫폼’은 직업 혁명의 시초인가, 규제 없는 노동 착취인가. 디지털 시대에는 국경이 사라지는데, 그렇다면 세계 체제는 어떤 방향으로 재편될 것인가.
이 책은 인류가 앞으로 맞닥뜨릴 이러한 질문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뿐 답을 제시하진 않는다. 이것이 이 책의 한계는 아니다. 서문에서 슈밥은 ‘과학기술과 사회가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고 밝혔다. 알파고 충격에 빠진 한국과 지구촌은 이제 막 ‘모색’의 출발점을 지났을 뿐이다.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이 대장정에 참여하고픈 사람이라면 읽어봄직한 책이다.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
서가에 들어온 한 권의 책
‘한국의 정체성2’는 ‘타자의 눈에 비친 한국’이다. 일본 교토역 관광안내소 야간 책임자와 망자(亡者)들의 대화라는 소설적 형식으로 얼개를 짰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발명되는 것임을 논한다.
옛 책과 사전 등에서 발췌한 한국에 대한 기록을 전하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중국어사전엔 ‘한국’이라는 항목이 없다. ‘조선’이라는 이름 아래 “중국의 접경국가, 수도는 평양”이라고 적혀 있다. 중국의 역사서에서 ‘한국’은 일관되게 번국(藩國)이다. 송나라 때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된 서긍(1091~1153)은 교토역을 찾아와 관광안내소 책임자에게 한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중국 정사에서 조선의 기원은 기자조선이며 조선은 역사적으로 번국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고구려가 있었는데 당에 복속됐고, 그 후 고려가 일어나 조선에 이르기까지 번국의 예를 갖췄다, 이것이 한반도의 역사에 대해 중국이 인지하던 것의 전부입니다.” 21세기 한국을 바라보는 중국의 시선은 어떨까. 불편하지만,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쓴 서긍이 말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국에 조공을 했으되 그것은 외교적 의례였을 뿐 독립국으로서 중국과 대등했다”고 한국인은 말하고 싶어 하지만 ‘타자의 눈에 비친 한국의 정체성’은 그것과 다르다.
그렇다면 일본의 시각은? “대개 조선은 본조의 속국 번병임은 옛 진구황후가 삼한을 정복한 이래 이것은 대대로 옛 기록에 명백하다.”(야마가 소코, 1622~1685, ‘무가사기’)
저자에 따르면 정체성은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역사적 실재와는 무관하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다. 미국 군정 사령관 정치고문이던 W.R. 랭던이 1945년 쓴 글에 담긴 한국의 모습은 아프다.
“한국 민족에게는 그 해로운 결과를 실제로 체험하지 않고는 극복될 수 없는 나쁜 기질이 있다. 분열, 아첨, 과도한 이기주의, 강력한 지역 대립, 반대파에 대한 아량 부족 등이 그것이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지배하에서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결점을 제거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1908~1961)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내가 생각하는 나도 내가 아니고 남이 생각하는 나도 내가 아니다”라고 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도, 타자가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도 실재와는 다를 것이다.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
서가에 들어온 한 권의 책
김광성 화백이 “한지를 접하고 붓 맛을 들인 지 10년 만에 묶어내는 화집”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영상자료 ‘발굴된 과거’를 바탕으로, 1930년대부터 1970년대 영화와 그 배경을 그렸다. 김 화백은 ‘작가의 글’을 통해 “흑백영화 속에서 내가 찾은 것이 서울의 옛 모습만이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온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 때문이 아닐까”라면서 “빛바랜 장면 속 풍경은, 60년대 후반에 마지막 전차를 타본 나와 나의 세대가 공감하는 정한과 연민으로 가득한 정경”이라고 풀이했다.
‘오래 전 서울’ 화집을 열면 형형한 노란빛으로 가득한 ‘1930년대 경성의 밤’이 펼쳐진다. 뒤이어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 영화로 알려진 ‘미몽’(1936)의 용산역을 시작으로 ‘반도의 봄’(1941)의 북촌, ‘집 없는 천사’(1941)의 청계천, ‘자유만세’(1946)의 경성, ‘운명의 손’(1954)의 인천항, ‘서울의 휴일’(1956년)의 한강유원지, ‘자유부인’(1956)의 명동, ‘지옥화’(1956)의 서울역, ‘형제’(1958)의 포항, ‘상록수’(1961)의 청석골, ‘육체의 고백’(1964)의 부산역 풍경이 연이어 나타난다.
책장을 넘기면서 이 시절을 살아온 사람은 추억을 되짚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막연한 향수를 품을 것이다. 곳곳에 등장하는, 화덕에 밥을 올려놓은 채 코고무신을 꿰매는 여인, 수동 스웨터 직조기를 만지는 아낙, 아기를 포대기에 업은 식모(혹은 누나, 언니), 보따리를 머리에 인 처자를 보며 이 시절을 견디게 한 ‘억척스러움’의 가치도 되새길 수 있다. 지식뿐 아니라 ‘체험’을 사기 위해 복각본, 필사본을 사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
작가와의 冊담화
‘천강에 비친 달’ ‘인연1, 2’ 등 불교적 사유가 담긴 소설과 산문을 발표해온 정찬주(63) 작가가 대하 역사소설을 펴냈다. ‘이순신의 7년’은 완전무결한 ‘영웅 이순신’이 아니라 백성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인간 이순신’을 다룬다. 소설 속 이순신은 충청도 아산 사투리로 이야기한다.
▼ 왜 ‘인간 이순신’인가.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이 적지 않다. 거의 모두가 영웅기다. 전라도에 산재한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인간적인 모습에 주목했다. 이순신을 완전무결한 사람으로 그리면 선비, 장수, 승려, 천민의 활약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남도 백성의 역할을 정당하게 대접해주고 싶었다.”
▼ 충청도 사투리로 말하는 이순신, 전라도 사투리로 말하는 장수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장군은 서울 건천동에서 8살 때까지 살다가 어머니 고향인 아산으로 내려가 32세에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품성이 다르게 느껴진다. 이순신은 충청도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후 변방에서 나라를 지켰다. 리얼리즘 관점에서도 방언을 쓰는 게 맞다.”
▼ 천민, 승려, 선비, 장수 등 백성의 의기와 충절에 주목한 까닭은.
“연전연승의 배경에는 몸을 사리지 않은 백성들의 충절이 있었다. 목탁 대신 칼을 든 ‘의승 수군’의 호국 의식이나 장수들의 피 끓는 충정을 다루는 데 그간 인색했다. 천민, 승려, 선비, 장수의 실제 이름을 찾아 소설에 넣었다. 차 한 잔 올리는 마음으로 묻혀 있던 백성들의 이름을 드러냈다.”
▼ 이순신의 삶이 ‘오늘’에 주는 의미는.
“유비무환, 선공후사. 멸사봉공의 정신을 가진 지도자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하다.”
▼ 해전 묘사가 세밀하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해전이 벌어진 곳 모두를 취재했다. 수심이 얼마나 되는지, 배가 얼마나 잠기는지 등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 확인했다. 16년 전 처음 구상하고 10여 년 전부터 유적지를 답사했다. 난중일기,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난중잡록, 열녀실기술, 휘하 장수들의 문중 문집을 참조했다.”
▼ 총 7권이다. 언제 완간하나.
“200자 원고지 8400매 분량이다. 1, 2권이 나왔고 3, 4, 5, 6, 7권이 차례로 나온다. 내년 2월이면 다 나올 것 같다.”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