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년 만에 첫 우승…“아무도 잠들지 말라”
- 주급 5만 원 받던 선수가 EPL 득점왕 경쟁
-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모두의 마음속 불꽃”
- ‘돈’에 젖은 그라운드에서 ‘축구 가치’ 되찾다
그때다. 감독이 위엄 있게 손을 든다. 선수단을 향해, 그리고 팬들을 향해 잠시만 가만히 있어달라고 정중하게 청하는 신호다. 그러자 마치 긴박한 경기 중에 감독으로부터 엄중한 지시를 받은 것처럼, 거대한 스타디움을 꽉 채운 홈 팬들의 함성이 거짓말처럼 잦아든다. 잔뜩 준비해온 거대한 깃발들은 격렬하게 나부끼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제야 보첼리는 더욱 평안하게 ‘네순 도르마(Nessun Dorma)’를 부를 수 있었다.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장중한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말라’는 노래다.
Dilegua o notte Tramontate stelle! tramontate stelle!
사라져라, 밤이여! 희미해져라, 별이여! 희미해져라, 별이여!
All'alba vincero! vincero, vincero!
새벽이 되면 나는 승리하리라! 승리하리라, 승리하리라!
영광의 노래
오랜 세월, 한 세기를 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열망해온 리그 우승의 최고 절정, 바로 그 순간에 울려 퍼질 만한, 전승기념곡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 곡을 보첼리가 드디어 제대로 부르자 수많은 관중도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감독의 오랜 친구, 보첼리의 아리아를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른 채 들을 수 있었다.특히 인상 깊은 장면! 가만히 손을 들어 선수단과 관중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가만히 친구 보첼리의 손을 잡아줌으로써 영광의 노래가 스타디움을 가득 채울 수 있게 한 것은 레스터시티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이 보여준 또 하나의 ‘작전 지시’였다.
그리고 곧장 에버튼과의 홈 경기가 시작됐다. 우승을 이미 확정 지었는데도 라니에리 감독은 시즌 내내 이어진 견고한 실리 축구를 여지없이 관철시켜 그러지 않아도 경기 시작 때 두 줄로 나란히 서서 승리자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우울해진 에버튼 선수들을 3-1로 몰아붙였다.
영국에서 가장 큰 도시 런던과 두 번째로 큰 도시 버밍엄 사이, 인구 40만의 소도시, 특히 인도계 이민자가 많아 다인종, 다문화의 격류를 살아온 레스터 팬들은 경기 내내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며 선수들과 자신들의 영광을 노래했다.
레스터시티의 우승이 ‘역사적’이라는 수사(修辭)로도 부족한 것은 단지 132년 만의 우승만이 대단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돈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그라운드가 돈의 잔치로 흥건하게 젖은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거의 최하위 수준의 경제 규모를 지닌 빈약한 팀이 막강한 자금력을 쏟아부은 절대강자들을 시즌 내내 여유 있게 따돌렸다. 그러니까 중반 이후에 반전하고 막판에 행운의 역전 드라마를 쓴 게 아니라,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 내내 시즌을 주도하면서 축구라는 경기의 의외성과 돈으로도 다 채울 수 없는 그 순도 높은 스포츠의 가치를 제대로 입증했기 때문이다.
열혈 축구팬이 아니라면 팀 이름조차 생소하다. 레스터시티(Leicester City Football Club) 우승! 그런데 레스터? 어디지? Leicester? 돌풍의 팀이 됐다 해서 축구에 문외한인 미국 사람들에게도 이 도시가 관심의 대상이 됐는지, 이 복잡한 알파벳을 몇몇 미국인에게 발음해보라고 한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면 대개의 미국인들이 ‘라이체스터?’ ‘라이시스터?’ ‘리체스터?’라고 되묻는다. 영국 현지 발음으로 ‘뢰에엑스터’라고 들려주면 다들 비웃거나 화를 내면서 이게 어딜 봐서 ‘뢰에엑스터’냐고 항의하는, 그럴 정도로 낯설고 작은 도시, 레스터!
열혈 축구팬이라면 몰라도 그저 주말 깊은 밤에 리버풀이나 첼시, 맨체스터유나이티드나 토트넘의 경기를 보려다가 그 강자들의 맞상대인 Leicester? 아하, 레스터! 하며 몇 번 보다가 말았을, 바로 그 소도시의 작은 팀 레스터시티가 프리미어리그 2015-2016 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1884년 창단 이후 132년 만에 우승! 이것 말고 또 달리 역사가 어디 있겠는가.
인도 사람이 많아서 도시의 닉네임이 ‘커리타운’이기도 한, 현지 사람들도 영국다운 풍광을 보려면 가까운 노팅엄으로 간다는 작은 도시 레스터의 ‘예고된 기적’. 그 중심에 라니에리 감독이 있다.
부자 구단이 득실득실한 EPL에서 레스터시티는 최약체로 분류되며 2015-2016 시즌을 시작했다. ‘스카이스포츠’는 시즌 개막 전 프리뷰 프로그램에서 레스터시티의 최종 성적을 14위로 전망했다. 그나마 스카이스포츠의 예측은 우호적인 것이었다. ‘가디언’의 평론가들은 이 팀을 ‘강등권’으로 분류했고 BBC도 강등권인 19위로 예상했다. 더욱이 시즌 개막을 코앞에 두고 라니에리 전 그리스 국가대표팀 감독이 부임하자 ‘아니, 왜?’라는 반응과 더불어 “언제쯤이면 라니에리가 경질될 것인가?” 하는 잉글랜드 특유의 냉소적 유머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라니에리는 팀 바깥의 허튼 소리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선수들에게 집중했다. 그가 선수들을 믿지 않으면 선수들 또한 스스로를 믿지 않을 만큼 위축된 팀이었다. 주전 11명의 이적료를 다 합해도 420억 원 정도다. 손흥민이 토트넘으로 옮길 때 이적료가 400억 원. 라니에리 자신도 30년 지도자 생활 동안 1부 리그 우승 경험이 없다. 그런 감독이기에 ‘돈’은 당연히 없고 ‘가오’조차 없는 구단과 선수들과 팬들을 위해 라니에리는 우선 ‘존중’의 태도를 취했다.
오전엔 공장 노동자
시즌 막판인 5월 15일 현재 득점왕 경쟁을 벌이는 레스터시티의 제이미 바디. 아마추어 리그에서 공을 찬 선수다. 공장에 일을 다니면서 축구를 했다. 그런데 이 선수가 지금 EPL득점왕 경쟁을 벌이는 스타가 돼 있다. 난적 뉴캐슬을 상대로 시즌 13호 골을 넣으며 한때 정규 리그 득점 선두를 달리던 순간은 10경기 연속 골의 기록을 세운 날이기도 한데, 네덜란드 출신의 터프가이 뤼트 판 니스텔로이가 2003년 3~8월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서 뛸 때 기록한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다 경기 연속골(10경기)의 재연이었다. 도저히 잉글랜드 8부 리그의 스톡스브리지 파크 스틸스 출신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위업이다.바디는 8부 리그에서 2010년까지 세 시즌 동안 107경기에서 66골을 터뜨리는 활약을 펼쳤는데, 그러는 동안 생계를 위해 오전에는 치료용 부목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이 팀에서 바디가 받은 주급은 30파운드, 우리 돈 5만3000원쯤에 불과했다. 공만 차서는 최소한의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는 돈이다.
최근 감독과의 불화로 징계를 받은 크리스털팰리스의 이청용은 벌금으로 5000만 원가량을 내게 됐는데, 이 액수는 이청용의 주급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주급이라고 할 수도 없는 돈을 받던 선수가 5부 리그 플리트우드 타운을 거쳐 2012년 레스터시티로 이적한다. 레스터시티로 옮길 때 바디의 이적료는 100만 파운드(약 18억 원)였다. 라니에리 감독은 바디 같은 선수들을 존중하면서 함께 뛰었다. 바디는 감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우리와 얘기할 때 패스할 곳을 찾듯이 눈을 맞춘다.”
이 같은 리더십은 조(兆)만장자들이 클럽을 인수하고 억(億)만장자들이 앞다퉈 투자하고 수백억 원을 받는 감독과 스타들이 경쟁하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매우 귀한 덕망이다. 오랫동안 2부 리그를 전전하다가 겨우 1부 리그에 턱걸이한 레스터시티. 선수 자원이 충분치 않아서 부상을 입어도 어쩔 수 없이 주전으로 나가 버텨야만 하는 약체 팀의 구성원에게 가장 중요한 동기 유발 요인은 바로 그것, ‘존중’이었다.
냉철한 현실인식
라니에리는, 과도한 목표를 설정한 후 심하게 다그치고 그러다 여의치 않으면 ‘그래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아’ 같은 말로 정신 승리를 하고는 조용히 가방을 싸서 다른 팀으로 떠나가 버리는 독전관(督戰官)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선수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이런 사례를 보자. 어떻게 되든 레스터시티의 우승으로 막을 내릴 시즌이었지만, 챔피언의 최종 확정은 첼시가 토트넘과의 36라운드 경기를 2-2 무승부로 마친 순간이었다. 이 무승부로 인해 레스터시티는 남은 경기를 다 패하더라도 우승하는 최후의 승점을 확보했다. 레스터시티가 맨체스터 원정에서 우승을 확정 짓지는 못했지만 곧이어 벌어진 첼시 대 토트넘의 무승부로 이날 132년 만의 역사를 쓴 것이다.
그 순간, 라니에리 감독은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에겐 ‘2002년 4강 신화’ 이미지가 강렬하지만, 지금 히딩크 감독은 바로 그 무승부를 통해 레스터의 우승을 확정 지어준 첼시의 감독이다. 라니에리는 히딩크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흔치 않은 일이다. ‘당신들의 무승부가 아니어도 우리는 곧 우승할 것’이라는 식의 자존심이 프리미어리그 감독의 전형이다. 그러나 라니에리는 전화를 걸었고, 나중에 히딩크는 이렇게 말했다.
“심판의 종료 휘슬이 울리고 나서 라니에리 감독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우리가 무승부를 기록한 데 대해 고맙다고 했다. 나도 그에게 챔피언이 된 것을 축하한다고 했다. 그들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이제 더는 레스터의 우승이 놀랍지도 않다.”
‘듣보잡’ 라니에리를 시즌 내내 무시했던 조세 무리뉴 전 첼시 감독도 “라니에리 감독과 레스터는 다른 팀들의 존경과 칭찬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모자랄 정도”라고 이미 시즌 중반에 상찬했다.
그렇다고 라니에리가 존중, 즉 온정의 감수성으로만 성취를 이룬 것은 아니다. 진정한 존중은 따스한 감정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냉정한 현실인식이 존중의 출발이다. 시즌 초반 라니에리는 “다른 팀들이 수영장을 갖춘 빌라에 산다면 우리는 지하실에 살고 있다”고 냉혹하게 팀을 평가했다. 그러면서 보첼리가 열렬히 불러준 ‘투란도트’의 아리아 가사처럼 “너희들 내면의 활활 타오르는 불을 찾아라. 이런 기회는 다시 안 올 것인 만큼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라”고 외쳤다.
마음속 불꽃
이런 측면은 또 어떠한가. 라니에리는 이탈리아 언론 ‘코리엘레 델라 세라’와의 인터뷰에서 시즌 첫날 선수들과 나눈 대화를 이렇게 회고했다.“첫날, 나는 이런 약속을 했다. ‘너희들을 믿겠다. 너희들이 최선을 다하는 한, 전술 얘기는 최소화하겠다.’ 물론, 이것이 이상적인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축구는 화학이 아니며, 세상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규칙 같은 것은 없다.”
여기서 ‘규칙’은 오늘의 유럽 축구에 한해 말한다면 ‘돈’이다. 돈의 강박이 경기장을 지배한다. 일찍이 1990년대에 우루과이의 소설가이자 축구평론가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선수들은 고액 연봉을 받으며 매일 뛰어야만 하는 노동자”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후 세계 축구는, 특히 유럽 축구는 ‘머니 게임’으로 치달았다.
2015년 기준으로 맨체스터시티의 마누엘 페예그리니 감독은 약 70억 원, 리버풀의 위르겐 클롭 감독은 약 123억 원,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루이 판 할 감독은 약 128억 원, 아스널의 아르센 벵거 감독은 약 146억 원의 연봉을 받는다. 무리뉴 전 첼시 감독이 약 149억 원을 받아 연봉 랭킹 1위였다. 이 최고 연봉자는 중도에 물러났고, 2위인 벵거 감독은 ‘라니에리는 9개월 만에 우승인데 당신은 12년 동안 뭘 했느냐’는 홈 팬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참고로, 유럽 전체를 보면 바이에른 뮌헨의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약 245억 원의 최고 연봉을 받는다. 최고 선수 리오넬 메시(약 160억 원)보다 훨씬 많은 연봉이다. 연봉 25억 원 정도로 시작한 라니에리는 강등권에서 벗어나는 17위를 시작으로 순위가 오를 때마다 약 1억7000만 원씩 받기로 한 다양한 인센티브 계약의 효과로 83억 원에 달하는 보너스를 확보했다.
거액을 챙기게 됐다고 해서 레스터시티의 위업에 흠집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라니에리라고 청정지역에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와 그의 선수들은 이번의 위업을 돈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그들의 권리이고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연봉과 이적료와 광고료와 중계권료가 그라운드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라니에리는 주눅이 든 선수들을 존중하는 한편 축구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라니에리는 앞서의 인터뷰에서 “이탈리아에서는 선수들이 축구를 즐기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그렇다 보니 훈련에서의 집중력도 떨어지고, 자기 확신도 약해지고, 모든 것이 의무가 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