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 그 비극의 10일간’과 신동아 제작 방해
- 광주 시민 수난사 끈질기게 보도
- 5·18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촉구
- 全·盧 은닉 의혹 비자금 추적
1985년 신동아 7월호에 게재된 ‘다큐멘터리-광주, 그 비극의 10일간’ 제하의 특집기사와 관련해 당시 동아일보 출판국장과 신동아부장, 취재기자가 보안사령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는 등 신동아는 1984년부터 1987년 9월까지 당국으로부터 가혹행위, 불법연행조사, 기사 전면 삭제 및 부분 삭제와 수정 등 20건에 이르는 탄압을 받았다.
1987년 10월호는 초유의 제작 탄압 사태를 맞았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 기사와 관련해 그해 9월 20일 밤 국가안전기획부 수사요원들이 신동아 인쇄처인 동아인쇄공업 윤전실을 점거해 인쇄를 중단시켰다. 이후 7박8일에 걸친 기자들의 항의 농성이 이어지며 국내외로 파문이 확산되자 정부는 결국 ‘이후락 씨 증언기사 게재 여부는 언론사 자율에 맡긴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광주사태’ 5년 뒤 기사화
‘요즘 세간에는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임명된 전두환 장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역사적인 ‘10·26 사건’ 후 가장 유명해진 사람이 바로 전 장군이다. 그는 10·26 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이 사건의 수사 전모를 직접 발표 , TV 화면과 신문지상에 클로즈업됐다. 더욱이 지난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임명됨으로써 전 장군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은 한층 높아졌는데, “군은 정치에 관여하지도 않으며 관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전두환’(이하 호칭 생략)은 1980년 6월호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 화제 그 인물〉 ‘중앙정보부장서리 전두환 중장’이 1쪽에 걸쳐 소개됐다. 기자는 전두환의 집권 가능성이 높던 터라 ‘육사 11기의 선두주자요, 보안사령관 겸 중정부장서리인 전 장군에 대한 평가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 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며 평가를 미뤘다.
‘전두환’은 1980년 10월호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 후 과제를 묻기 위한 〈좌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들’(배성동 서울대 정치학 교수, 정범석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한승조 고려대 정치학 교수, 남시욱 동아일보 논설위원 참석)에서도 거론된다.
“국정조사권으로 진상 밝혀야”
1980년 일어난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는 1985년 7월호에 처음 실렸다. 〈특별기획 광주사태〉에 ‘다큐멘터리-광주, 그 비극의 10일간’은 사태의 추이를 32쪽에 걸쳐 소개했다. 이 기사는 5·18의 진실을 최초로 심층보도한 것으로 이후 신동아가 겪을 수난의 서막이 됐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8년 명칭이 공식화하기 전까지 ‘광주사태’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중봉기’로 불렸기에 당시 신동아도 ‘광주사태’로 표기했다.1985년 7월호 톱기사는 ‘오늘의 문제를 진단하는 신동아 시론-광주사태, 어떻게 해야 하나’(김영작 민정당 국회의원, 박찬종 신민당 국회의원, 강인섭 동아일보 논설위원 참석)다. 강 위원이 “12대 국회(1985년 5월 13일 개원)는 금기로 돼 있던 광주사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최초의 국회”라고 평가하면서 ‘광주사태의 해결책’을 묻자 여야 의원은 ‘본질’을 다르게 짚었다.
김 의원은 “광주사태를 조사하는 과정에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보이지 않는 유언비어의 위력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광주 시민들의 지역감정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했다는 거예요”라며 ‘유언비어’를 사태의 중심에 뒀다. 반면 박 의원은 “문제는 5·17 계엄확대조치의 정당성에 있고, 5월 18일 새벽에 투입된 부대가 나흘 동안에 찌르고 쏘지 않아도 될 양민들을 쏘고 했다는 데 있다”면서 “국정조사권을 발동해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신동아에 다시금 광주가 거론된 것은 1987년 6월항쟁 즈음이다. 1987년 9월호는 ‘광주사태, 그날의 5가지 의문점’을 통해 ‘왜 그토록 강경한 진압을 했나’ ‘왜 혜성처럼 나타난 시위대 여성 지휘자는 사라졌을까’ ‘왜 21일에 계엄군이 철수했을까’ ‘시위대의 무기 반납을 제지한 복면부대의 정체는 뭘까’ 등을 물으며 해결의 장애물로 ‘사망자 수에 대한 입장차’를 들었다
1988년 1월호는 〈특집〉 ‘새 대통령 선출 이후-‘광주사태’는 진상부터 규명해야’(한상진 서울대 사회학 교수)를 통해 “광주사태 진상 규명이 차기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라고 주장한다. 당시는 제6공화국 출범을 앞둔 시기로, 이때부터 제5공화국 분석 기사가 본격적으로 실렸다. ‘제5공화국 권력의 뿌리 하나회’ 기사는 ‘제5공화국 정권을 창출한 주도 세력은 대부분 박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하나회 멤버였다. 하나회를 통해 다져진 정규 육사 출신 장교들의 결속이 12·12 사태의 명운을 가름했다’고 평가하며 하나회의 존재를 드러냈다.
1988년 3월호에 실린 ‘쟁점! 무엇이 ‘광주’의 진상인가’는 민주화합추진위원회 증언, 공수대원 수기, 국방부 발표, 광주사태 문서 등을 총동원한, 진상 규명을 위한 질문서다. 이로써 “정권탈취 위해 고의 유발한 것” “결코 유언비어만은 아니다!” “암장, 화장 의혹도 있다” “적어도 150여 명 피살” 등의 증언을 이끌어냈다.
1988년 5월호엔 광주민주화운동 무장시민군의 수기 ‘광주시민은 왜 총을 들었나’(광주 시민군 박남선)가 실렸다. 시민군 작전상황실에 모인 사람들의 ‘조직도’를 비롯해 진압군의 교도소 인근 무차별 난사, 시민전사 수백 명에 관한 ‘설명’이 수록돼 당시 정황을 새로이 알렸다.
신군부 ‘광주 공작설’
1988년 8월호엔 ‘국회 광주문제 공방 쟁점중계-광주 발포책임자는 누구인가’가 실렸다. 기자는 ‘7월 5일 13대 국회 본회의에서 광주 사단장 출신의 정웅 국회의원이 ‘광주사태’를 ‘집권을 노린 군부의 음모’로 규정짓고 ‘12·12 사태 주동자들(장내 소란…), 다시 말해 군부독재자들과 이 땅에 기필코 민주화를(장내 소란…) 꽃피우겠다는 광주 애국시민들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며 끝까지 맞서 투쟁한 사실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이라면서 이 행위는 명백히 의거였음을 천명하는 바이다’라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국회 쟁점-강경진압 지시자, 발포명령권자, 정웅 사단장 책임 문제, 광주진상 규명 문제를 정리했다.
1988년 12월호는 ‘물거품 된 전두환 영구집권 시나리오 : 88년 정권교체를 위한 준비연구 전문’을 게재했다. 2000년까지 전두환의 계속 집권을 계획한 극비 문서의 내막을 추적했다.
1989년 1월호엔 ‘前 광주 505보안대 수사관의 폭로수기 “내가 정웅 장군을 체포 수사했다”’(허장환)가 실렸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지구보안대 상사이던 허씨가 12월 6일 평민당사에서 양심 발언을 한 뒤 후폭풍이 거세졌다. 허씨의 폭로는 ‘당시 실세인 신군부 세력이 사태를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로 ‘광주 공작설’의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1989년 2월호는 〈심층특집〉 ‘아직도 뜨거운 쟁점, 전두환 처리’로 전두환에 대한 법적 책임 추궁을 강조했다. 같은 호에 실린 ‘광주의 진상, 아직도 은폐되고 있다’는 “국회에 광주특위가 구성돼 문서검증 및 현장 확인을 하는 한편 청문회를 열어 관계자들을 소환·신문했으나 국민이 기대한 진상규명에는 접근조차 못한 채 숱한 의문만 부풀려 놨다”고 비판했다.
김대중, 김영삼 기고
1989년 7월호는 ‘전두환의 백담사 200일, 반격설의 진상’으로 ‘국회증언을 앞둔 전두환씨 캠프의 마지막 노림수’를 짚어봤다. 1989년 8월호 ‘증언거부 최규하의 항변’은 “서면증언을 하겠다”는 최 전 대통령과 “서면증언은 국민들의 알 권리와 공개정치원칙에 위배되므로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해야 한다”는 국회의 대립을 조명했다.1989년 12월호는 ‘12·12 10년, 兩金이 말하는 박정희, 전두환’ 기획을 통해 당시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글을 게재했다. ‘그러나 역사가 그들을 단죄할 것이다’(김대중) ‘민족정기를 위해 청산해야 할 시대’(김영삼)가 당시 기고문의 제목이다.
하지만 그해 12월 31일 청문회에 출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5공 비리에 대한 직접 개입을 전면 부인하면서 5공비리특위는 막을 내렸다. 5공 비리 사건은 1988년 12월 10일 발족한 5공비리 특별수사부의 수사를 통해 전 전 대통령의 친·인척 10명과 장세동 전 안기부장, 이학봉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등 47명을 구속, 29명을 불구속 입건하며 종결됐다.
1990년 2월호는 ‘전두환 증언, 이것이 위증이다’로 2시간 10분에 걸친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 증언, 야당 측 의견 등을 종합해 분석했다. 또한 ‘최규하씨에게 보내는 공개장’(이수인 경남대 정치학과 교수)을 통해 “최규하는 12·12 쿠데타의 하극상 활극을 가장 정확하게 해설할 수 있는 당사자이자 현장 목격자, 광주판 인디언 토벌대의 활약 전모와 명령 책임자를 밝힐 수 있는 최후의 증인”이라며 “증언대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1991년 2월호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증언-전두환과 하나회 군맥’이 실렸다. 이 글은 1973년 윤필용 장군 사건의 수사책임자로서 말썽 많던 군 사조직 하나회의 전모를 최초로 밝힌 강창성 당시 육군보안사령관이 당시 수사 과정과 결과를 처음으로 털어놓은 본격 증언으로서 가치가 있었다.
이와 함께 〈특집〉 ‘긴급동의, 이것만은 다시 생각하자 ‘광주보상 왜 하필 국민모금인가’’(이종오 계명대학교 사회학 교수)가 실렸다. 1990년 12월 10일 강영훈 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던 광주보상지원위원회가 모금지원 담화문을 발표한 데 따른 비판이었다.
‘광주항쟁 당시의 피해가 공권력의 남용 혹은 공권력을 사용한 범죄였다는 사실이 규명된다면 배상책임은 당시의 책임자들과 국가에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를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모금으로 충당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1991년 12월호는 ‘김용갑 전 총무처 장관 최초 본격 발언-전두환, 노태우 정권교체, 6·29 전후의 청와대’를 실었다. 김 전 총무처 장관이 1987년 6월 10일 시위 현장을 보고 나서 4·13 호헌조치(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고, 모든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조치)의 철폐와 민의의 수용만이 난국 타개의 처방이란 결론을 내리고 직선제 수용 등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심한 배경이 담겼다.
이듬해 14대 대통령선거(1992년 12월 18일)에서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가 민주당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YS의 대통령 취임 무렵인 1993년 2월호는 ‘이 광주의 절망을 어찌할 것인가’(문순태 소설가, 전남일보 주필)를 수록했다. 다음은 이 기고문의 한 대목.
배상, 명예회복, 기념사업회
1993년 5월호는 ‘광주항쟁,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하라’(유남영 변호사) 기사로 법안 제정을 촉구했다. 유 변호사는 “YS 정부가 이를 어떻게 처리하는가는 5·6공 정권과의 차별성을 가름하는 척도가 될 것”이라며 “광주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입법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사상자 등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 기념사업회의 설립 등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3년 7월호는 ‘12·12 출동 하나회 군부 全명단’을 실었다. 12·12에 대해 황인성 총리는 ‘합헌’이라고 하고 김영삼 대통령은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하는 상황에서 하나회 군부의 명단·사진을 비롯해 12·12 반란체계도, 광주진압군 지휘체계도를 공개했다. 뒤이어 ‘80년 국보위의 언론장악 ‘대외비’ 계획-신군부는 10·26 직후부터 집권 꿈꿨다’를 통해 ‘12·12 주도세력들이 10·26 직후부터 당시 보안사 내에 언론대책반을 두고 언론 장악을 탐색한 실태’를 고발해 ‘12·12 주도세력들이 집권을 모색한 증표’를 제시했다.
아울러 7월호에는 〈단독입수 비밀자료〉 ‘유산된 노태우 측 ‘광주’ 해결 구상’이 실렸다. 이 보고서는 1987년 7월 20일 현대사회연구소가 작성해 상부에 보고한 것으로, 청와대와 안기부 측의 반발로 배포 즉시 회수, 폐기됐다. 광주 문제 해결이 역사적 당위라는 입장과 함께 대선(1987년 12월 16일)에서 노태우 후보의 짐을 덜자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문서 공개를 통해 그 시기에 광주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1993년 10월호는 ‘전두환 합수부측 최초 본격 반론 “정승화 측이 반란군이다”’, 1994년 11월호는 앞의 기사에 대한 반론 격인 ‘정승화 인터뷰 “전두환, 10·26 때 직무유기했다”’를 수록했다. 정씨는 “저 사람들(신군부)도 그때는 내가 죄 없다는 걸 인정하고 별의별 좋은 소리를 다 하다가 엉뚱한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시행해놓고는 원점부터 잘못됐다고 허위 조작한 것이오”라고 밝히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1995년 5월호는 ‘충격증언 미 선교사 피터슨의 광주항쟁 현장기록-신군부, 광주 폭격까지 계획했다’를 실었다. 필자인 아놀드 피터슨 목사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내내 현장에 있으면서 중요 장면을 지켜봤기 때문에 그의 증언록은 진상을 밝히는 데 중요 자료로 여겨졌다. 그는 미 공군이 미국인 구출을 위해 병력특파를 준비했고, 사건 직후 군 당국 조사 결과 사망자는 832명이며, 당시 군이 헬기 기총소사를 했다는 증거 사진을 제시했다. 아울러 ‘5·18 광주민주화운동 수사실록-검찰 확인, 신군부 ‘전두환 옹립계획’’을 통해 5개월여 진행된 검찰 수사 막바지 추이를 보도하면서 ‘집단발포 경위’가 논쟁의 핵심임을 알렸다.
“구세력과 손잡고 권력 비호”
하지만 민간 차원의 고소고발사건이 쏟아지는데도 검찰이 기소유예,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리자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11월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를 선언했다. 이후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해 12월 3일 군형법상의 반란수괴죄를 적용해 신군부 측 핵심 인사 11명을 구속기소하면서 5공 비리 수사를 시작했다.1996년 1월호는 〈특집〉 YS 통치행태, 결단이냐 정략이냐-‘5·18 특별법’ ‘YS식 결단 그 배후와 파장’이 실렸다. 기자는 “전 국민적 대의명분이 될 수 있었던 5·18 사건 관련자 단죄 문제를 김영삼 대통령 또는 검찰이 사려 깊지 못한 방법으로 처리함으로써 또다시 지역 간 반목을 낳는, 5·18의 국민적 명분을 훼손하는 결과가 돼버렸다”며 “구세력과 손잡고 권력을 장악하고 비호해온 현 정권도 예외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세기의 재판 詳報’
아울러 〈특별기획〉 ‘12·12, 5·18 단죄’에서는 “전두환은 공수부대장에게 진압격려금을 내려보냈다”(5·18 당시 정보부 전남지부장 정석환 비망록)는 증언을 통해 전두환이 ‘초기’부터 진압작전 상황을 챙기고, 재경 전남인사들로 특별 민심 순화 활동팀을 구성해 급파했다는 의혹을 전했다. ‘완전공개/검찰작성 ·· 사망자 165명 부검자료-계엄군’ ‘시민사냥’ 결정적 증거 찾았다’도 실었다. 부검자료를 확보·인용함으로써 유언비어의 일부가 사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임신복을 입고 거리에 나온 임신 8개월 부녀자를 계엄군은 총으로 쏘아 죽였다. 19살 젊은 여자의 젖가슴도 대검으로 찔렀다. 31살 청년은 대검으로 추정되는 흉기를 맞아 머리가 부서진 채 광주교도소 앞에서 발견됐다. 환갑도 훨씬 지난 노인이 곤봉에 맞아서 사망했다. M16(계엄군 사용)과 카빈(시위대 사용) 소총으로 분류된 부검기록은 당시 의사들이 아닌 검찰이 작성했다.’
마침내 12·12 및 5·18 사건 재판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 쿠데타 주역에게 법의 단죄가 내려졌다.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1심)에서 역사적 재판이 열린 것이다.
1996년 9월호는 〈인물연구〉 ‘12·12, 5·18 재판장 김영일 깐깐하고 꼼꼼한 원칙주의자’를 통해 ‘세기의 재판’ 분위기를 전하는 한편 ‘광주항쟁 가두방송의 여인, 전옥주의 충격고백수기-“간첩조작 성고문도 버텨냈다”를 수록해 광주 시민의 가혹한 수난사를 다시 조명했다.
1996년 10월호와 11월호는 ‘12·12 5·18 ‘1심’ 선고 판결문 전문’을 분할해 수록했다. 신동아는 입수한 판결문을 소개하며 “전직 대통령의 판결 기록은 우리 후손과 후세 사가들에게 오늘의 현장을 전해줄 생생한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라고 밝혔다.
1996년 10월호는 ‘5·18 살상 진실규명은 이제부터’(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를 실었다. “1심 재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신군부로 대표되는 세력들이 만들어낸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는 숙제는 그야말로 지금부터 풀어나가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은 1997년 4월 17일 전두환에게 무기징역 및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에게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9600만 원을 최종 확정했다.
1997년 6월호 ‘5·18 민주화운동 17주년-아직 깊은 지역 간 골 기념일만으로 메워지나’는 “4월 22일 관계부처 장관회의에서 기념일 지정을 비롯한 5·18 관련 정부 방침을 결정한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사면은 죄를 씻어준 게 아니다”
1998년 2월호에는 〈집중취재〉 ‘문민검찰 25시③ 12·12, 5·18 사건 결정의 굴곡사-정치권력 풍향 따라 뒤집고 또 뒤집고’가 실렸다. 제15대 대통령선거(1997년 12월 18일) 직후인 1997년 12월 22일, 대통령 김영삼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관련자를 모두 특별사면해 두 전직 대통령은 구속 2년여 만에 출소했는데, 이 기사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기자는 “12·12 및 5·18 사건에 대한 검찰 결정의 굴곡사는 정치권력 풍향에 따라 흔들리는 ‘해바라기 검찰’의 백미”라며 12·12 및 5·18사건 무혐의 처분 결정 라인, 12·12사건 기소유예 처분 결정 라인 등의 실명과 사진을 공개했다. 아울러 비밀에 부쳐진 검찰의 무혐의 처분 결정문 사본을 단독 보도했다. 또한 〈추적〉 ‘추징금 비상 검찰수뇌부의 특급지령! 숨겨진 전두환 재산을 찾아라’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각각 은닉한 1000억 원대 비자금을 추적했다.
한편 미국의 12·12, 광주 해명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도 꾸준히 나왔다. 1985년 7월호에서는 ‘광주사태 당시의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 특별 인터뷰 “미국은 사과할 일이 없다”’에서 밝힌 미국 측의 해명을 비판했다. 1989년 9월호는 ‘미국의 12·12, ‘광주’ 해명에 의혹 있다’를 실었다. 이 기사는 당시 미 국무성이 국회 광주특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서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미국 정부 성명서’ 등을 분석해 문제점을 제기한 것이다.
2004년 5월호부터는 ‘미 비밀문서로 본 격동의 80년대’ 연재를 진행하며 발굴된 미 비밀문서 가운데 광주민주화항쟁 초기 글라이스틴 대사의 오판, 5·18을 전후한 미국의 침묵과 분노, 글라이스틴 대사가 ‘가장 균형 잡힌 광주 보고’라고 평가한 보고서를 조명해 의문 해소를 시도했다.
2002년 11월호는 한상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인터뷰를 실었다. 이 위원회는 군사정권 시절 자행된 인권 탄압을 추적했다. 한 위원장의 발언엔 전두환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담겨 있다.
‘전두환, 노태우는 1997년 대법원에서 군사반란죄로 유죄판결이 확정됐습니다. 그 사람들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대통령이 됐던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군사반란 및 내란죄 유죄 확정이 됐고 나중에 사면받았지만, 사면은 재심을 통해 죄를 클린하게 해준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