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서하지만, 잊지 않는다(可以寬恕, 但不可以忘却)”
- 대학살, 동양 최대 위안소…유네스코 등재
- ‘평화 수호자’ 강변하는 일본과 ‘역사전쟁’
- ‘불가역적 합의’ 한국, 돌고래의 지혜 필요
난징은 인구 800여만 명의 대도시이지만, 인구로만 위상을 따진다면 중국 내 30위 도시다. 난징은 광활한 구릉지 덕분에 천혜의 요새에 안긴 도시다. 황해와 양쯔강은 난징을 물산과 교역 중심지로 키웠다. 삼국시대의 오나라 손권이 도읍을 정하고, 10개의 왕조와 정부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19, 20세기를 거치면서 난징은 굴곡으로 얼룩진 중국 근대사의 압축판이 됐다.
역사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굵직굵직한 사건 대부분이 난징에서 일어났다. 아편전쟁으로 인한 난징조약(1842), 태평천국의 난(1850~1864), 신해혁명(1911),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1912), 국민당 정부 수립(1927), 난징 대학살(1937) 등이 그것이다. 중요성을 따져 순차적으로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사건들이다.
사회주의 중국 건설(1949) 이후 난징은 베이징(北京)보다 주목받지 못했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1978) 이후 다시 산업과 교역 중심지역으로 탈바꿈했다. 오늘의 난징은 중국 굴기(崛起)의 주요 현장이면서 아시아를 휘감았던 침략과 전쟁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다. 일본이 중일전쟁(1937~1945) 때 운영한 동양 최대의 위안소를 그대로 보존하며 역사전쟁을 수행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비가 제법 내리는데도 관람객이 끝없이 늘어섰다. 서양인이 간혹 보이긴 했지만 대다수가 중국인이었다. 기념관을 둘러보던 관람객 중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중국판 홀로코스트
일본군은 중국군 포로와 남성을 색출해 양쯔강 하구와 도심 외곽에 모아놓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한 곳에서 1만 명이 죽은 경우도 있고, 일본군의 총검술과 목 베기 훈련의 희생물이 된 피해자도 많았다. 일본군은 총알을 아끼려고 사람을 생매장하거나 칼로 난도질해 죽였다. 여성과 어린아이들은 석유를 뿌리고 기관총을 난사해 불태웠다. 학살에 가담한 일본군 병사는 ‘산 채로 묻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며 무료함을 달랬다’는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일본군의 성폭행 기록은 치를 떨게 한다. 열 살도 안 된 어린이부터 70대 노파까지 닥치는 대로 강간하고 살해했다. 임신한 여성을 집단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태아를 끄집어냈다는 기록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피해 여성은 5만 명으로 추정된다. 1946년 난징 전범재판에서 당시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를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후 성직자, 역사학자, 외교관 등에 의해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중국은 학살이 시작된 (1937년) 12월 13일을 추모일로 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열고 있다. 중국 정부는 관련 자료를 축적하고 기념관을 확대 증축하면서 지난해 16건의 기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방대한 자료에 비하면 등재 건수가 크게 부족하지만 일본의 거센 반대 속에 이뤄낸 성과였다. 대학살 기념관에는 기억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어록이 곳곳에 붙어 있다.
난징과 야스쿠니
지난해 10월 난징 대학살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대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유엔에 거칠게 항의하며 “일본이 유네스코 분담금을 삭감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세 히로시 일본 문부과학상도 “기록유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유네스코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반발했다. 그는 “학살 증거가 확실하지 않고, 해당국의 반론 기회가 보장되지 않았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 같은 주장은 ‘침략’의 정의가 불확실하다거나, 확인된 역사적 사실을 오히려 조작했다는 일본 극우의 역사 수정주의와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필자는 난징 대학살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허구를 진실로 포장하거나, 특정 사실을 부풀려 가공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사건을 보도한 외국 및 일본 언론, 외교관의 기록 등을 충실하게 모아놓았다. 더하거나 빼려고 애를 쓴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위안부 기록관 세운 기개
난징 시내 리지샹(利濟巷) 거리의 위안부 기록관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5명의 택시 기사에게 기록관 이름을 보여줬지만 모두 위치를 몰랐다. 지난해 12월 문을 연 이곳의 정식 명칭은 ‘利濟巷慰安所舊址陳列館’. 우리말로 옮기면 ‘리지샹 위안부 기록관’이다. 스마트폰 구글 지도로 위치를 검색해보니 ‘군대’라는 표시가 나와 그전엔 군사 관련 시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1937년 일본은 난징 점령 과정에서 30만 명을 집단학살한 뒤 자국 군인들을 위해 40여 곳에 위안소를 만들었다. 규모가 가장 큰 곳이 국민당 장교 거주지던 ‘리지샹 위안소’다. 강제로 끌려온 중국, 조선, 동남아 여성들이 이곳의 8개 건물에서 위안부로 고통을 겪었다. ‘임신한 위안부’ 사진으로 알려진 박영심 할머니(북한에 거주하다 2006년 작고)가 2003년 이곳을 방문해 진실을 증언했고, 이후 중국 안팎에서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문화재로 지정됐다. 미성년자 출입과 사진촬영이 금지된 기록관 안에는 처참한 모습의 위안부와 각종 검사기, 출산 시설과 도구, 주사기, 콘돔 등이 전시돼 있다.
위안부 기록관은 난징 대학살 기념관에 이어 2017년 유네스코 등재를 앞두고 중국과 일본의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은 일본군 위안부 실태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 했으나, 일본의 반발과 유네스코의 권고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유네스코가 중국, 일본, 한국 등 관련국의 공동신청을 장려한다고 했지만, 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유네스코 분담금을 많이 내는 일본의 눈치를 본 결과라는 분석이 많았다. 중국은 2017년에 다시 등재를 추진하기로 했고, 일본 정부는 이에 반대하고 있어 양국은 또 한 차례 ‘역사전쟁’을 벌일 판이다.
이런 와중에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한국은 한마디로 ‘딱한 처지’에 놓였다. 지난해 말 우리 정부는 ‘불가역적 사안’으로 한일의 위안부 문제 타결을 선언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재협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정부가 미국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장을 찍었다면 이것도 있는 그대로 소상하게 밝히고 국민의 이해를 구할 일이다. 허약한 국력 때문인지, 아니면 정부의 인식 부족 탓인지 국민은 연유를 알 수 없어 더 답답하다.
난징 위안부 기록관 관계자는 필자에게 “일본의 잔학상을 세계에 알리고 진실을 숨기려는 시도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곳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보란 듯이 위안부 기록관의 문을 여는 중국에 부러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한국인으로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9월에는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대만 타이베이(臺北) 시내 중심가에도 위안부 기념관이 문을 연다고 한다.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정부가 딴소리를 하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필자가 난징을 방문 중이던 4월 23일, 한국과 중국의 학술단체가 난징대에서 영토주권 관련 심포지엄을 열었다. 한국의 독도재단과 난징대 남해연구소가 비정상적인 영토분쟁을 정리하고 동아시아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자는 내용이었다. 한국은 독도 문제를 집중 거론했고, 중국은 댜오위다오(釣魚島, 일본명 센카쿠열도)의 영토주권을 주장했다.
사회주의 가치관 강조
중국은 난징 대학살, 위안소 운영 등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세계에 알리면서 댜오위다오와 같은 영토분쟁에서는 한국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우리로선 댜오위다오 분쟁의 전후, 좌우 사정을 잘 살펴야 하겠지만, 중국으로서는 국익 관점에서 효과적인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이를 두고 중국이 역사적 진실을 존중하고 주변국과 공동번영을 위해 미래 지향적 행보를 한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최근에는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외적으로 ‘힘’을 과시하고 내부적으로 ‘국가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일본이 헌법을 재해석해 ‘전쟁 가능 국가’로 변신하고 군사 대국화를 지향하며 동북아 평화를 위협할 때, 중국은 중화주의를 내세우며 인민의 일치단결을 외친다. 양국이 자국 이익을 위해 패권적 행보에 나선 것이다.
지난해부터 시진핑 중국 주석이 강조하는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의 실천과 강화는 중국의 미래를 걱정스럽게 한다. 난징을 비롯해 중국 전역에는 부강(富强), 민주(民主), 문명(文明), 자유(自由), 평등(平等) 등의 단어로 시작하는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이 곳곳에 붙어 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돼, 학생들은 점수를 받기 위해 24자를 달달 외워야 한다. 우리가 1968년 발표한 국민교육헌장을 학생들에게 암기하도록 강요하던 것과 비슷하다.
주요 내용은 ‘국가, 사회, 인민이 중국 사회주의를 성공시키기 위해 5000년 역사와 전통에서 시대정신을 찾고, 중화민족 발전에 필요한 정신 역량을 키운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 의한 지배력 강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확산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는 오히려 중국 사회주의가 위기에 직면했거나 조만간 그럴 수도 있다는 ‘자기고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해 시진핑 주석은 “국가와 민족은 사상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돼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당과 사회 전체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선전교육을 깊이 전개할 때”라고 강조했다. 곧바로 중국의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는 ‘사회주의 가치관 담기’가 하달됐고, 온라인 공간에선 검열과 통제가 강화됐다.
자율적 선택을 배제한 주입식 사회주의 교육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사회체제의 유연성을 키우지 않고, 정신교육으로 국가를 발전시켜야 할 정도라면 중국의 미래도 그렇게 밝지는 않아 보였다. 한국은 이런 정책이 야기할 부작용의 피해를 직접 받을 수 있는 주변국이다.
2016년 중국은 역사와 전쟁하고, 국가를 강화하며, 시장을 키우는 세 마리 토끼를 쫓고 있다. 특히 장쑤성 난징은 과거를 품고, 현재를 뚫으며, 중국의 미래를 개척하는 거대 산업도시로 변신하고 있다.
새우등과 돌고래
5월 6일 스타이펑 장쑤성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현대차, LG, SK그룹 총수가 모두 그를 만나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장쑤성의 위상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장쑤성의 면적은 중국 전체의 1%에 불과하지만, 국내총생산(GDP)은 중국 31개 성·시·자치구 중 2위다. 한국 4대 그룹이 이미 수출 전진기지를 만들고 대륙 소비시장 진출의 돌파구로 삼은 곳이다.‘사람 있는 곳에 시장 있고, 시장 있는 곳에 돈이 넘쳐난다’는 난징에서 생존과 발전, 이웃과 함께 번영하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 한국이 중국과 일본의 고래싸움에 낀 새우 신세로 전락하지 않고, 영민한 돌고래처럼 날렵하게 유영(遊泳)할 수는 없을까. 일본이 우익의 본색을 읽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듯, 우리는 중국의 격변 현장에서 중화의 실체를 꿰뚫고 국운 개척의 기회를 찾아낼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