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해보자는 취지로 말한 것인데 반개혁적 발언으로 몰아”
- “회의 참석자한테 듣고 여러 명의 장교에게 전파”
- “회의 참석자로부터 들었다면 100% 날조된 주장”
- 하필 ‘정중부의 난’이 일어난 날에…
2003년 1월 서울 용산의 연합사령부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남재준 당시 연합사부사령관(오른쪽).
“누가 발설했는지 다 파악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남 총장이 ‘잘해보자’는 좋은 취지로 말한 건데 이를 전해들은 일부 군법무관들이 반개혁적 발언으로 몰아간 것이다. 남 총장은 이 일로 치명타를 입었다. 임기를 채우기 힘들 것이다.”
최근 군 안팎을 시끄럽게 했던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의 ‘정중부의 난’ 발언의혹에 대한 군 고위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내일신문’에 따르면 8월31일 오전 계룡대 육군본부 사무실에서 남 총장이 일반참모회의(일명 일참회의)를 주재하면서 ‘정중부의 난’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위 관계자는 “(총장이) 실제로 그런 발언을 했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회의 참석자가 아닌 그의 말은 현 단계에선 ‘사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정중부의 난’ 발언이 공식적으로는 사실무근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남 총장은 이에 대한 ‘문화일보’의 확인 요청에 “전혀 사실이 아니다. 본인은 물론 참석자 누구도 그런 얘기를 안했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육본 인사참모부장 윤일영 소장도 기자들에게 자신의 메모장을 보여주면서 “(회의에서) 정중부의 ‘정’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남 총장을 거들었다.
윤 소장의 적극적인 진화 덕분인지 대세는 남 총장이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윤광웅 국방부 장관도 최근 이 사건과 관련해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총장의) 말을 옮기는 과정에 와전된 것 같다. 해프닝으로 끝났으니 잊어버리자”고 무마에 나섰다. 사건 초기 민감하게 반응했던 청와대도 없던 일로 치부하는 분위기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청와대 관계자는 “군에서 세 경로를 통해 보고가 올라왔는데 다 사실무근이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남재준 육군참모총장
과연 ‘정중부의 난’은 일어나지 않았던 걸까. 취재 결과 남 총장의 부인과는 별개로 문제의 발언은 ‘실체’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서 ‘실체’가 있다는 말은 남 총장이 그런 말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는 뜻이 아니라 남 총장이 그런 말을 했다고 주변에 전파한 사람의 존재가 확인된 것을 뜻한다.
군내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회의 참석자 중 한 명이 사무실로 돌아와 휘하 영관장교에게 ‘회의 때 총장이 한 발언’을 지시사항 전달 차원에서 말해줬는데 그 중에 ‘정중부의 난’이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얘기를 전해들은 영관장교는 다시 이를 여러 명의 장교에게 전파한 것으로 확인됐다.
육본 인사참모부장의 말대로 회의석상에서 정중부의 ‘정’자도 나온 적이 없다면 발언 전파자가 어떤 의도에서든 없는 얘기를 꾸며냈거나 그의 귀 구조에 심각한 이상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정중부’라는 역사 속의 특정인물을 거론했다는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와전이 아니라 날조 또는 환청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하간 두 경우 다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전자라면 육군의 최고위직을 음해한 것은 물론 허위사실 유포로 군과 청와대의 갈등을 부추긴 셈이므로 처벌받아 마땅하다. 후자라면 신체기관에 중대한 결함을 지닌 장교가 총장 주변에서 근무한다는 얘기이므로 적절한 인사조치를 하거나 국군통합병원으로 보내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반면 육군의 수장이 쿠데타 가능성을 암시하는 그런 위험한 발언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적당히 넘어가거나 덮을 일이 아니다. 국가기강 차원에서 또는 정권안보 차원에서 진상을 규명하고 발언의 진의를 확인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이 사건 전개과정을 보면 윤 장관의 말마따나 해프닝으로 보인다. 발설자가 있다고는 해도 전언에 의한 것이므로 증거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또 육본 모 영관장교가 말한 대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말실수를 했을 가능성이 있기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을 듯싶다.
“군검찰은 북한의 정치보위부”
그렇긴 해도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이면의 의미가 만만치 않다. 발언의 실체 여부를 떠나 그날 회의석상에서 남 총장의 ‘지시사항’을 통해 청와대와 여권에서 추진하는 군 사법개혁에 대한 군 지휘부의 불만이 표출됐기 때문이다. 남 총장은 이날 회의 때 군검찰을 북한의 정치보위부에 비유하며 군검찰 독립에 대한 반대 소신을 피력했다.
이를 전해들은 군 법무병과 장교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청와대도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남 총장의 발언내용에 대해 국방부와 별개로 자체조사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기무사와 감사관실 조사를 통해 ‘정중부의 난’은 사실무근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청와대에도 그렇게 보고했다. 하지만 민정수석실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소동이 벌어진 것일까. 또 사실무근으로 결론이 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9월3일 오후 국방부와 청와대는 ‘정중부의 난’을 언급한 ‘내일신문’ 기사로 발칵 뒤집혔다. 이 기사의 첫머리에 실린 ‘남재준 육참총장 발언으로 유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어차피 문제가 되면 사표 쓰고 아무 때나 나갈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다. 이거 너무한 것 아니냐. 무슨 문민화냐. 옛날 ‘정중부의 난’이 왜 일어났는지 아느냐. 뭘 모르는 문신들이 (무신들을) 무시하고 홀대하니까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군검찰 독립은 무슨 황당한 얘기냐. 이는 인민무력부 안에 정치보위부를 두자는 것으로 북한식과 똑같다.… 나 이거 용납 못한다.… (한 참석간부에게)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고 이걸 막아라. 관련 의원을 따라다니며 로비를 해라. 못 막으면 이번에 진급은 없다. 만일 제도개선이 이뤄지면 법무병과는 폐지해야 한다.… (또다른 참석 간부에게) 성우회를 찾아가 로비를 해라. 선배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그들의 힘으로 막아야 한다.”
‘내일신문’은 같은 지면에 남 총장에게 확인취재한 내용도 실었다. 남 총장은 ‘정중부의 난’에 대해 “황당한 얘기”라며 “거기서 정중부 얘기가 왜 나오겠나. 상식적으로 간부회의 때 참모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그런 발언을 했겠느냐”고 부인했다.
‘정치보위부’ 발언과 관련해서는 그 표현을 썼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검찰권이 지휘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을 때 문제가 있을 수도 있기에 광범위하게 여론을 수집해 육군의 안과 의제를 낼 때는 분명한 논리를 제시하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또 로비 지시 부분에 대해서는 “육군의 명확한 논리를 세워 필요하다면 관련자들을 설득시키라고 한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국방부장관의 우려
‘정중부의 난’ 발언 소문이 군 안팎에 퍼지기 시작한 것은 문제의 회의가 열린 8월31일 오후부터였다. YTN을 비롯한 일부 언론사 기자들이 이 같은 소문을 듣고 탐문취재에 나섰다. ‘정중부의 난’ 외에 ‘정치보위부’ ‘로비’ 등의 발언이 장교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로비 소문을 그럴 듯하게 만드는 데 한몫한 사람은 법무병과의 최고위직인 국방부 법무관리관 박주범 준장이었다. 공교롭게도 박 법무관리관은 이날 저녁에 몇몇 법무장교와 더불어 ‘로비대상’인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을 만나 식사를 함께했다. 최 의원은 군 사법개혁안의 대표 발의자다.
그런데 사실 이날 자리는 갑자기 마련된 것이 아니었다. 한 달쯤 전에 잡힌 약속이었다. 우연의 일치였던 셈이다. 어쨌든 박 법무관리관은 최 의원에게 군 사법개혁에 대한 군 지휘부의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도 ‘정중부의 난’ ‘정치보위부’ 등 이날 오전 계룡대 육군본부 회의석상에 나왔다는 남 총장의 발언이 화제에 올랐다.
회의석상에서 남 총장으로부터 최 의원에 대한 ‘로비’를 지시받은 것으로 지목된 사람은 육군 법무감(대리) 민홍철 대령이다. 실제로 민 법무감은 최 의원을 만나려고 했으나 최 의원측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날 오후 군 법무병과의 고위직 인사는 국방부 고위관계자와 만났다. 이 자리에서 국방부 고위관계자는 법무병과 고위직 인사에게 “육군총장이 사법개혁에 강하게 반대하니 힘들지 않겠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음날 청와대에도 남 총장의 발언에 대한 소문이 흘러들어갔다. 이날 아침 경호실 관계자가 청와대에 파견 나와 있는 모 영관장교에게 “남 총장 얘기 들어봤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즈음 민정수석실도 군쪽에서 정보를 입수하고 자체 조사에 들어갔다. 기무사는 그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석간인 ‘내일신문’이 취재를 시작한 것도 이때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도 하루 전인 9월1일 회의 참석자들과 법무병과 장교들을 상대로 확인취재에 들어갔다. 먼저 기사화한 곳은 ‘내일신문’이다.
‘내일신문’은 9월2일 육군본부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고 이날 저녁 남재준 총장과 전화통화를 하기에 이른다. 그 와중에 윤광웅 국방부 장관이 내일신문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기사화에 대한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내일신문’은 윤 장관의 전화를 받고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확신을 갖게 돼 기사를 쓰기로 최종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9월3일 ‘내일신문’이 기사를 내보내자 선수를 뺏긴 ‘오마이뉴스’가 부랴부랴 후속보도를 했다.
기사가 나온 후 윤 장관은 군검찰 고위관계자를 불러 ‘더 이상 사태가 확산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 총장은 자신의 발언에 대한 법무병과 장교들의 반발을 의식해서인지 수석부관을 민홍철 법무감에게 보내 이번 사태의 수습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언론보도로 알려진 남 총장의 발언 내용은 ‘정중부의 난’을 빼고는 표현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남 총장의 수석부관 오현택 중령의 설명을 들어봐도 그렇다. 오 중령은 ‘정치보위부’ 등 남 총장의 군검찰 관련 발언에 대해 “(남 총장이)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부인한 적이 없다”며 “군검찰이 군 지휘권으로부터 독립할 수는 없다는 취지로 말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 중령은 다만 ‘정중부의 난’ 발언의혹에 대해서는 “그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회의 참석자 중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부인했다.
이 사건의 내막을 잘 아는 군 관계자에 따르면, 발언 전파자는 문제의 발언을 수첩에 적어놓았고 그것을 내보이며 다수의 장교들에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려주자 오 중령은 “우리가 알기로 회의 참석자 중에는 그런 말을 노트에 적은 사람이 없다. 만약 그 사람(발언 전파자)이 회의 참석자라면 그는 절대 군대 생활하면 안 된다. 100% 날조·모략이므로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문제의 발언이 설사 있었다고 해도 이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당일 회의내용에 대한 녹취록이 없기 때문이다.
육본 기획관리참모부 정책조정과 관계자는 “일반 참모회의의 경우 녹음은 하지 않고 기록만 한다”고 말했다. 오 중령은 “결국 회의 참석자들의 증언을 서로 비교해 진실을 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우리가 자체 조사한 결과 회의 참석자 중 누구도 그런 말을 외부에 전파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단언했다.
“회의 참석자 중엔 없다”
확신에 찬 오 중령의 설명대로라면 ‘정중부의 난’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직적인 음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발언 전파자’의 존재가 확인된 만큼(전파된 얘기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최소한 아무런 근거 없이 그런 소문이 나돌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데 무리는 없을 듯싶다.
의혹을 부채질한 ‘정황증거’ 중 하나는 남 총장의 발언이 있었던 8월31일이 바로 834년 전인 1170년 정중부가 ‘무신의 난’을 일으킨 바로 그날이라는 점이다.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두고 군 주변에서는 문제의 발언이 총장에게 매일 올라간다는 ‘소사(小史)’에서 연유한 게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 중령은 “예전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총장에게 어떠한 소사도 올라오지 않는다”고 부인했다.
남 총장은 군내에서 신망이 두텁기로 소문나 있다. 올봄 역대 육군참모총장들이 연루된 육군회관 공금비리 수사 당시 소극적으로 처신했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을 빼고는 부정적인 평이 별로 들리지 않는다.
군수사기관 고위관계자는 남 총장의 성격에 대해 “청렴, 강직, 고지식이라는 말로 대변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남 총장은 자신에게 제공된 새 관용차를 마다하고 원래 타던 중고 승용차를 고집하는 등 근검절약 정신이 몸에 밴 사람이라는 것. 또한 공사를 구분해 사적인 용도로 차를 쓸 때는 꼭 손수 운전한다고 한다. 한 예비역 장교는 남 총장의 별명이 ‘독일 병정’이라며 “대단한 원칙주의자”라고 평했다.
남 총장은 5공 시절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할 때 한번에 하지 못하고 두 차례나 미끄러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12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부관으로 반란군측의 총에 맞아 숨진 고 김오랑 소령이 동기인데, 그의 무덤을 찾아가 울분을 터뜨린 일로 밉보인 탓이라고 한다. 또다른 예비역 장교도 “금전관계가 깨끗하고 청렴결백하고 매우 사려 깊은 분”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군 고위관계자는 “남 총장의 발언은 참여정부의 국방정책에 대한 군내 불만과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 아니겠냐”고 조심스레 말했다. 군과 청와대 주변에서는 남 총장이 군검찰 독립에 반대하는 소신을 강하게 피력하다 ‘뜻하지 않게’ 설화를 입은 것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