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리장성이 압록강까지 있었다고 왜곡한 중국 ● 사파리가 된 북한, 중국에 돈 내고 이를 구경하는 한국인 ● 중국, 抗日·抗美援朝에 이어 抗韓援朝(한국에 대항해 북한을 지원함) 준비 중 ● 중국 도교 건물터를 고구려 첫 수도 왕궁건물터라 주장 ● 장군묘로 불리던 무덤을 주몽묘라고 강변 ● 주몽이 이끈 졸본부여는 고구려와 따로 존재했다 ● ‘장군총은 주몽의 무덤이며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 주몽부터 5대왕까지는 解氏, 6대 태조왕부터 高氏 ● 한국식 룸살롱 문화로 흥청대는 심양, 과연 우리에겐 중심이 있는가 |
광개토태왕릉 앞에 우뚝 버티고 선 광개토태왕비는 중국인들과 일부 한국인들이 발복(發福)을 위해 잔돈을 던져 놓는 장소가 됐다.
‘신동아’는 중국이 추진해온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실체를 처음으로, 그리고 자세히 밝혀낸 매체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광명일보 인터넷판은 2003년 6월24일자에 동북공정을 펼치는 의도를 밝힌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원제 試論高句麗歷史硏究的幾個問題)’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기자는 이 논문을 입수, 번역해 ‘신동아’ 2003년 9월호에 게재함으로써 대응을 촉구한 바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은 없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삼국유사’는 단군이 1500년간 나라(고조선)를 다스리다 1908세에 산신령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측은 “사람이 어찌 1908세를 살 수 있느냐. 그래서 한국도 단군을 신화 속 인물로 여기고 있지 않느냐”며 단군조선의 실체를 부인하다.
한국 사료는 단군조선에 이어 중국 은(殷)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고조선을 이끌고, 이어 연(燕)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측은 “은나라와 연나라는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나라이니 기자와 위만이 세운 조선은 중국 역사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고조선과 고구려를 도둑맞았다”
중국 한(漢)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설치했는데, 중국은 한4군 중 하나인 현도군(玄?郡)의 고구려현에서 고구려가 태동했다고 보고 있다. 동북공정은 고구려가 중국 영토인 현도군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역시 중국 역사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는 바람에 중국은 고구려사를 한민족에게 도둑맞았다고 분석한다. 중국측은 그들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해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라면 고려 태조인 왕건은 고구려 왕실과 같은 고(高)씨 성이어야 하는데, 왕(王)씨 성을 썼다’고 지적한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 세력은 국호를 조선으로 삼으며 기자조선의 뒤를 이었다고 했다. 그로 인해 중국사의 일부인 고조선도 한국 역사로 빼앗기게 됐다는 것이 동북공정의 주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펼쳐진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사를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때마침 건학 100주년을 맞은 동국대가 서울 중구청과 함께 동국대생과 서울 중구 관내 고등학생을 선발해 고구려 유적지 탐방에 나섰다. ‘신동아’는 동북공정의 정체를 폭로한 3주년을 맞아 이 팀과 함께 만주 지역에 들어가 중국이 고구려사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그리고 동북공정이 지금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동북공정의 위력은 상상외로 강력하고 우리의 대응은 한심할 정도로 무력하다.
[제 1부] 고구려는 없다, 그러나 ‘북한 사파리’는 있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지 못하고 한반도만 차지했을 때 신의주는 불야성(不夜城)이었다고 한다. 신의주의 남쪽에 의주가 있는데 1906년 일제는 의주역을 지나 압록강변(신의주역)까지 경의선을 이었다. 대륙 진출을 노린 일제는 의도적으로 신의주를 발전시켰다. 1913년 신의주를 부(府)로 승격시킨 것. 부는 지금의 시(市)와 비슷하니, 신의주는 의주군보다 크고 발전한 지역이 되었다.
반면 압록강 북쪽에 있는 중국 안동(安東· 1965년 丹東으로 개명)은 어둠의 세계였다. 신의주가 화려해질수록 안동에 있는 중국인들은 신의주와 일제를 동경할 수밖에 없었다. 1911년 일제가 신의주와 안동을 잇는 철교를 완성하자 적잖은 중국인이 신의주로 건너와 화교(華僑)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신의주보다 단동의 밤이 더 밝아졌다. 덩샤오핑(鄧小平)이 단행한 개혁개방의 물결이 단동에까지 몰아친 것. 그로 인해 단동으로 도주하는 탈북자가 많아졌다.
2001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정일은 반세기 만에 뒤바뀐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신의주특별행정구 설치를 계획했다. 다음해 9월 김정일은 중국 자본을 끌어들일 요량으로 중국인 사업가 양빈(楊斌)씨를 행정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중국은 2002년 10월 양씨를 탈세 혐의로 구속함으로써 김정일의 꿈을 간단히 꺾어버렸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단동은 더욱 화려해지고, 신의주는 특구가 되었지만 어둠이 깊어가고 있다.
압록강 단교를 보는 눈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낙동강 전선으로 몰린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전세를 역전시키고, 그해 10월26일 한국군 6사단 7연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에 태극기를 꽂는 쾌거를 이루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일진일퇴가 거듭되던 11월21일엔 미 7사단 17연대가 유엔군 부대 중에서는 최초로 압록강가 혜산진에 성조기를 꽂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참전을 결정했다. 그에 따라 펑더화이(彭德懷)로 하여금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의 의용군 형태로 위장한 26만 대군을 이끌고 1950년 10월19일부터 압록강 철교 등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가게 했다.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중공군의 위세가 커지자 미 공군은 B-29 폭격기 편대를 출격시켜 1950년 11월8일 오전 9시 압록강 철교를 끊어버렸다.
그날 이후 압록강 철교는 ‘압록강 단교(斷橋)’가 되었다. ‘압록강 단교’는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전혀 다른 역사의 현장이다. 한국인의 눈에 비친 압록강 단교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혼쭐난 중국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중국인은 압록강 단교를, 한반도를 거쳐 대륙으로 올라오려는 미국군을 압록강에서 철저히 막아낸 구국항쟁의 상징으로 본다.
중국은 6·25전쟁을 조선(북한)을 지원하며 침략해오는 미국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 전쟁으로 정의한다. 이들에게 보가위국은 항미원조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이러한 정의를 내린 순간 중국은 6·25전쟁에 임의로 개입한 침략국가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자기 나라를 지켜낸 방어국가가 된다. 단동에는 이를 기리는 항미원조 기념탑과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해발 820여 m의 오녀산 정상에 오르면 뜻밖에도 남북으로 1000m, 동서로 300m쯤 되는 평지가 나온다. 풍수지리에서는 한 일(一)자로 된 산 정상을 가리켜 임금을 낳을 수 있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의 명당으로 본다.
평지 정상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데, 현재 이 샘터에는 ‘천지(天池)’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이곳에 이르려면 999개의 가파른 돌계단이나 하늘이 실처럼 보일 정도로 좁다고 하여 ‘일선천(一線天)’이라는 이름을 얻은 좁은 바위틈을 타고 올라야 한다. 군사적으로는 한마디로 난공불락의 요새이고 신선교를 믿는 사람들로서는 더없이 좋은 기도처인 곳이다.
더구나 다섯 선녀의 전설까지 있으니 이 산 정상에는 일찍이 중국식 신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만든 도관(道館·도교 사원)이 있었다. 중국 도교는 이 산을 10대 명산으로 꼽아왔다. 이곳에는 도교와 관련된 건물과 함께 2000여 년의 풍파를 견뎌온 오래된 성벽이 있다.
정상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있는 이 성벽은 견치석을 이용해 촘촘히 쌓은 것이 특징이다. 성문이 있었던 곳은 성벽이 항아리처럼 안쪽으로 움푹 들어온 ‘옹성(甕城)’ 구조인데, 이는 고구려의 성문 형태로 많이 발견되는 양식이다. 천지는 성 안의 우물 구실을 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오녀산성 = 졸본성’에 꿰어 맞추는 중국
이 성벽 때문에 한국과 중국 일본 학자들은 오녀산성이 졸본에 도읍을 정한 고구려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과연 고구려가 이곳을 첫 도읍지로 삼았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고구려를 포함한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두 개의 성을 쌓았다. 하나는 평상시 생활공간인 평지에 쌓는 ‘평원성(平原城)’이고, 다른 하나는 유사시 들어가 항전하는 ‘산성(山城)’이다.
이 원칙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한양에는 평시의 정치·생활 무대인 도성(都城)을 짓고, 유사시를 대비해서는 임금과 주민이 대피해 항전하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등을 지었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오녀산성을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올라가 항전하는 산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 과거 일본 학자들은 이 성을 고구려의 왕실이 있던 도성으로 보았다.
중국이 오랫동안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 공개를 거부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2004년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록하고 난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조건 중 하나가 유적을 발굴한 다음에는 일반인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록함으로써 중국은 만주에 있던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것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셈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을 공개해 한국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1석2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지역에 있던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부이면 이곳에서 살아온 중국 국적의 조선족도 중국인이 되어야 한다. 중국은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털 뽑아 부채질까지 하고 있다.
한국인을 끌어들여 돈을 벌겠다는 중국의 의욕이 새로운 역사 왜곡을 낳고 있다. 즉 오녀산성 안에서 발굴된 모든 건물터를 고구려의 궁전터로 해석하는 오류를 낳은 것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건물터는 왕궁 유적으로 보기엔 턱없이 작다. 왕궁터가 아니라 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 지은 건물터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한데 중국은 일일이 고구려 왕실의 건물터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이 산성이 유사시 대피하는 곳이었다면 고구려는 이곳에 왕궁을 지을 이유가 없다. 왕궁은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평지에 건설했을 터인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녀산성 바로 곁에는 일제가 혼강을 막은 댐으로 생겨난 저수지 환용호(桓龍湖)가 있다. 오녀산 주위엔 고구려 시대의 무덤이 즐비한데, 환용호에 담수할 때 많은 무덤이 수몰됐다고 한다.
환용호에서는 유람선을 타고 나가 오녀산성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광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쩌면 평지에 지었던 고구려 최초의 도성은 환용호 아래로 가라앉았는지도 모른다.
중국은 목적을 정해놓고 유적을 발굴했다.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도성이라는 전제 아래 이곳을 발굴했기에 오녀산에서 나온 건물터 대부분에 고구려 왕궁터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이러한 무리수는 도처에서 발견됐다.
중국 환인현 미창구촌에 있는 가짜 주몽묘. ‘장군묘’라는 표시가 있는데도 중국 측은 주몽의 묘라고 설명한다(왼쪽).<br>중국 집안에 있는 장군총. 주몽의 두 번째 묘이자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추정된다(가운데).<br>고구려의 세 번째 수도인 평양에 있는 주몽의 묘. 1993년 북한은 이 무덤을 대대적으로 개수했다(오른쪽).
오녀산성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달리면 환인만주족자치현 아하향(雅河鄕) 미창구촌(米倉溝村)이 나온다. 옆에 혼강이 흐르는 이곳에는 높이 8m, 둘레 150m쯤 되는 흙무덤이 있는데 중국측은 이 무덤을 ‘주몽의 묘’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은 주몽의 무덤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국내 학자들의 일치된 판단이다. 이 무덤은 모든 부장품이 도굴된 상태에서 발견됐는데 환인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연꽃 등이 그려진 벽화가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
연꽃은 불교와 관련이 깊은 꽃인데, 고구려는 17대 소수림왕 때인 372년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근 400여 년 전에 붕어한 주몽의 묘에 연꽃을 그려 넣을 이유가 없다. 환인 지역에는 상고성자(上古城子·지명) 등 여러 곳에 고구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무덤들이 있는데, 하나같이 강가에 있던 돌을 쌓아 만든 석총(石塚·돌무지무덤)이다.
장례는 매우 엄격한 행사이기 때문에 매장 풍습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강가의 돌로 ‘돌무지무덤’을 쌓는 전통은 집안으로 도읍을 옮긴 다음에도 계속된다. 후기로 가면서 육면체로 자른 큰 돌로 기단을 만들어 그 위에 흙을 올리는 ‘돌기단 흙무덤’을 만들고, 이어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는 ‘봉토돌방무덤(土塚)’으로 변모해갔다.
미창구촌 무덤은 석실을 만들고 흙을 덮은 봉토돌방무덤이다. 이러한 무덤은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 후기에 많이 발견되므로 고구려 1대왕인 주몽의 무덤이 될 수가 없다.
현지인들은 이 무덤을 ‘장군묘’라고 불러왔다는데 유네스코에 등록을 하면서 중국은 이 무덤을 주몽의 무덤으로 바꿔 설명하고 있다. 중국은 왜 이러한 역사 왜곡을 한 것일까. 이유는 결론을 내려놓고 역사를 짜 맞추었기 때문이다.
환인이 고구려 최초의 수도였다면 이곳에는 주몽의 무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발견되지 않자 중국은 이곳에서 가장 큰 무덤을 주몽 무덤으로 정해버린 것이다. 그래야 한국 관광객이 찾아오고,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할 수 있다.
답사팀을 이끈 동국대의 윤명철 교수는 이 무덤의 정체를 “졸본이 고구려 최초 도읍지였다면 고구려는 수도를 국내성이나 평양으로 옮긴 다음에도 이곳을 왕족으로 하여금 통치하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부터 주변국과의 관계가 안정됐다. 광개토는 왕이 아니라 황제와 유사한 태왕(太王)으로 불렸다. 수도에 태왕이 있고 지방에는 왕이 있는 중국식 봉건제와 비슷한 통치를 한 것이다. 따라서 이 무덤은 고구려 발상지인 이곳을 맡아 다스렸던 지방 왕이나 왕족을 위해 만든 고구려 중기 이후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주몽은 ‘고구려’ 국명 안 썼다
고구려를 비롯한 한민족은 태양과 함께 조상을 숭배한 전통을 갖고 있다.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조상신 숭배는 중요한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먼 곳으로 이주하는 우리 조상은 신주나 위패를 반드시 들고 갔다. 무덤은 갖고 갈 수 없으니 조상 혼령을 모신 신주를 대신 들고 간 것이다. 국가가 도읍지를 바꿀 때도 이 원칙은 통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국가를 운영하다 수도를 바꾼 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뿐이다).
왕은 권력이 큰 만큼 무덤을 갖고 이주한다. 그러나 모든 왕의 무덤을 가져가진 못하고 나라를 연 첫 임금의 무덤을 갖고 간다. 427년 고구려가 세 번째 수도로 삼은 평양성 근처의 용산 아래, 5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주몽(동명왕)의 무덤이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평양의 동명왕릉은 ‘돌기단흙무덤’ 형태다. 북한은 고구려의 정통성을 잇기 위해 1993년 단군릉과 함께 이 능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는데 한국은 평양의 동명왕릉을 의식적으로 외면해온 측면이 있다.
주몽 왕국은 고구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몽이 왕국을 세우기 전인 기원전 75년에 고구려라는 이름의 나라가 있었다. 주몽이 세운 나라와 그전부터 존재해온 고구려는 어떤 관계일까. 주몽이 나라를 세우기 전 만주 일대에는 ‘조선’이라고 하는 강력한 정치체제가 있었다. 조선은 휘하에 소왕국을 여럿 거느리고 있었다.
한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설치한 이후 그 밑에 있던 소왕국들은 상당한 독자성을 갖고 한4군의 통제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국의 대표가 부여인데 부여를 비롯한 소국들은 한4군을 몰아내고 자국이 중심이 된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의지를 가진 소왕국 가운데 하나가 현도군 고구려현에 있던 고구려였던 모양이다.
현도군의 고구려현과 주몽이 세운 졸본부여는 동일 지역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주몽의 나라와 고구려가 각기 따로 존재하다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 된다. 현도군에 있던 고구려는 꽤 강성해서 중국을 괴롭혔다. 진나라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한(漢)나라가 왕망(王莽)에게 왕권을 빼앗겨,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는 서기 8년부터 23년 사이 15년간 존재했는데 서기 12년 신나라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왕망은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바꿔 표기하게 했다. 주몽에 이어 왕위에 오른 유리는 아버지 주몽이 굴복시킨 비류국 송양의 딸과 혼인하고 서기 13년 부여국을 대패시키고 14년에는 현도군 고구려현을 빼앗았다는 기록을 남겼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강조하는 고구려는 현도군 고구려현에 있었던 고구려다. 중국은, 주몽이 세운 고구려는 한나라 영토인 현도군 고구려현에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중국 역사에 자주 나오는 지방 왕국 가운데 하나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주몽이 세운 졸본부여가 고구려현에 있던 왕국이 아니라면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는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북한의 역사학자들은 주몽이 세운 왕국과 별도의 고구려가 기원전 277년부터 존재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북한 학자들은 고구려는 반(半) 독립적인 상태에서 위만이 이끄는 조선의 통제를 받았고, 현도군이 생긴 다음에도 역시 반독립적으로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解氏에서 高氏로 바뀐 미스터리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므로 성이 해(解)씨가 되어야 한다. 주몽은 원래는 해씨였는데 고(高)씨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여에서부터 아버지인 주몽을 찾아온 유리왕과 그의 뒤를 이은 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6대 태조왕부터 고씨 성을 사용했다. 왜 고구려 왕가는 해씨와 고씨 성을 혼용했는가.
해모수란 인물도 의문 덩어리다. ‘삼국사기’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인연을 맺어 주몽을 낳았다고 하나, ‘삼국유사’에는 해모수는 천제로서 흘승골성에 내려와 도읍을 정해 부여를 세우고 아들 부루를 낳았다고 적혀 있다. 이러한 혼란은 고구려와 부여가 깊이 얽혀 있어 빚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부여와 고구려는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고구려는 28명의 왕이 705년간 통치했다. 그렇다면 왕의 평균 재임 기간이 25.2년인데, 이는 당시 사람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매우 긴 통치 기간이다. 고구려 왕 가운데 가장 오래 통치한 이는 6대 태조왕으로 그는 47년부터 165년까지 무려 118세를 살며 93년을 통치했다. 20대 장수왕은 98세까지 살며 79년을 재임했다. 반면 19대 광개토태왕은 22년을 재임했으나 39세에 붕어했다.
태조왕은 과연 118세를 살았을까. 또 그를 기점으로 고구려 왕의 성이 해씨에서 고씨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 태조는 나라를 세운 첫째 임금에게 붙이는 묘호(廟號)인데 왜 고구려는 주몽이 아닌 6대 왕에게 태조란 묘호를 붙였을까? 태조왕 때에 고구려현에 있던 왕국과 부여, 주몽이 세운 나라가 복잡하게 합병된 것은 아닐까. 고구려는 많은 것이 비밀에 싸여 있다.
기원전 19년 유리왕이 2대 왕에 등극하였다. 서기 2년 유리왕이 용산에서 천제(天祭)를 지내려고 준비해놓은 제물 돼지가 도망쳤다. 그로 인해 담당자인 설지(薛支)란 인물이 압록강의 위나암(尉那巖)이라는 곳까지 쫓아가 돼지를 잡았다. 돌아온 설지는 유리왕에게 위나암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아뢰, 이듬해 유리왕은 수도를 위나암이 있는 국내(國內)로 옮겼다. 국내성 시대를 연 것이다.
오녀산성이 있는 환인현에서 집안시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 정도 걸린다. 환인은 요녕성 소속이나 집안은 길림성에 속해 있다. 환인과 집안 일대는 지세(地勢)가 강원도 남부와 비슷하다.
장군총, 주몽의 무덤(?)
국내는 ‘나라 안’이라는 의미다. 나라는 곧 ‘집’이므로 국내는 ‘집안’이 될 수 있다. 공교롭게도 국내성이 있던 곳의 지금 한자 지명이 집안(集安·과거에는 輯安으로 적었다)이다. 집안 지역에는 두 개의 성터가 있다. 하나는 집안 시내에 있는 국내성터이고 다른 하나는 집안시내에서 북쪽으로 2.5㎞ 떨어진 환도산성(丸都山城)이다.
일부 사료는 국내성에 자리잡은 고구려는 10대인 산상왕 때(196년) 환도산성으로 천도했다가 16대 고국원왕 때 국내성으로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는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한 세트로 보고 있다.
즉 국내성은 평시 생활공간인 평원성이고, 유사시 항전하는 공간이 환도산성이라는 것이다. 환도산성 앞에는 압록강으로 흘러가는 통구하가 해자 구실을 하는 천연의 요새였다.
환도산성은 견치석을 이용하는 전형적인 고구려성 축조술로 만들어져 있다. 이 산성은 오녀산성보다 훨씬 커서 기병(騎兵)이 들어올 수 있다. 산성 안에는 말의 목을 축여주었다는 음마지(飮馬池)가 남아 있다. 이렇게 큰 산성을 쌓았다면 고구려의 국력은 오녀산성을 쌓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해졌음을 뜻한다. 반면 국내성 터는 환도산성 규모에 비해 너무 작다. 평원성인 국내성을 환도산성보다 작게 만든 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집안시 일대에는 강돌과 잡석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이 도처에 있다. 1만2000여 개에 달하는 무덤 가운데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광개토태왕릉이다. 광개토태왕릉 앞에 광개토태왕비가 있다. 이 능은 ‘태왕릉을 산처럼 안정되고 바위처럼 단단하게 해주소서’라는 뜻을 가진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란 한자를 새긴 벽돌이 발견됨으로써 광개토태왕릉으로 확인되었다. 광개토태왕릉은 환인 미창구의 가짜 주몽 무덤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듯, 아래쪽에 무너지긴 했지만 큰 기단석이 있고 그 위에 강돌과 잡석을 쌓아 올린 돌무지무덤의 형태이다.
집안에서 광개토태왕릉과 비석 이상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장군총이다. 거대한 기단석을 두부 자르듯이 잘라서 7층으로 쌓아 올린 장군총에 대해 중국 학자들은 장수왕의 무덤일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윤명철 교수를 비롯한 국내 학자들은 이 무덤은 주몽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은 윤 교수의 설명.
“광개토태왕릉과 비교하면 이 무덤은 큰 공을 들여서 만들었다. 두부 자르듯 올려놓은 돌이 세월과 풍우로 인해 밀려나지 않도록 아랫돌엔 턱을 만들어놓았다. 예사 건축물이 아닌 것이다. 고구려가 졸본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면 당연히 주몽의 무덤도 옮겨와야 한다. 시조인 주몽의 무덤은 어떤 무덤보다 잘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은 주몽의 무덤이면서 동시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반 무덤과 달리 돌을 반듯하게 잘라 7층으로 올리고 그 위에는 제사를 지내는 건물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매년 10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동맹’이라는 축제를 열었다.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는 성을 한자 ‘解’로 쓰긴 했지만, 해는 태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초기 왕이 태양을 뜻하는 해를 성으로 가졌다면 이들은 천손(天孫)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매우 철저히 하늘에 제를 올렸을 것이다. 장군총이니까 이름이 비슷한 장수왕의 능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은 윤 교수의 설명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고구려는 거친 기마민족이었다’는 가정도 다시 검토해보아야 한다. 이유는 장군총을 비롯한 수많은 고구려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 때문이다. 벽화에는 수렵도처럼 용맹한 모습도 있지만 춤추는 여인을 그린 그림도 적지 않다. 무덤에 벽화를 그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예술적 기질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길이가 2m는 넘을 것 같은 돌을 반듯반듯하게 잘라 장군총을 만들었다면 고구려의 철기 제조술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기마민족이면서 상당한 문화민족이었다.
광개토태왕비를 만든 거대한 돌은 집안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돌은 지금도 자동차로 8시간 달려야 도착하는 백두산 지역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인들은 얼음이 꽝꽝 언 한겨울에 백두산에서부터 이 돌을 끌고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인들은 벽화에 천문도를 그려놓을 정도로 계절과 시간 변화에 민감했다.
지금 이 땅에서 유행하는 풍수지리는 통일신라 말기 도선(道詵)국사가 중국에서 배워와 이론을 정립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무덤에는 풍수의 핵심인 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의 사신도를 그려놓은 것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도선국사가 중국에서 배워오기 전 우리 민족은 고유한 풍수사상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재주는 우리가 넘고 돈은…
지금 중국은 고구려를 그들 역사 속에 나온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로 환치해놓고 자기 멋대로 분류하고 개방해, 한국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 와중에 북한은 볼거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재주는 한민족이 부리고 돈은 누가 버는 이 희한한 현실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그의 세 아들 남생, 남건, 남산이 권력을 놓고 갈등하다, 남생이 먼저 당나라에 투항해 당나라군을 끌어들였다. 이에 남건과 남산이 군대를 동원해 맞섰으나, 셋째인 남산도 당나라군에 항복했다. 둘째인 남건은 끝까지 투쟁했으나 그의 부하들이 배반해 평양성 문을 열어줌으로써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자살에 실패한 남건은 보장왕과 함께 당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었다.
지금 김정일 정권은 미사일을 펑펑 쏘며 주변국을 위협하지만 경제력이 바닥났기 때문에 조만간 내분을 일으키며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이때 위기에 몰린 김정일 세력이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에 ‘북한 정세를 안정시켜달라’고 도움을 요청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중국이 ‘기다렸다’는 듯이 심양(瀋陽)군구의 부대를 투입해 북한의 불안을 잠재우고, 친중(親中) 정부를 세우는 것을 우리는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을 것인가.
돌이켜보면 한민족은 통일신라 시기를 제외하면 ‘조선’과 ‘고구려’와 ‘한(韓)’을 번갈아 국호로 사용해온 사실이 발견된다. 한민족 최초의 국가는 조선(고조선)이고 이때 한반도 남쪽에 삼한(三韓) 있었다. 그 뒤를 이어 고구려를 대표로 한 삼국시대가 열렸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멸망하자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한 고려가 등장하고 이어 조선이 탄생했다. 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는데 이 전통이 이어져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생겼다.
한국은 대외적으로는 고(구)려(KOREA)로 불린다. 북한의 국호는 조선이지만 그들도 대외적으로는 KOREA를 사용한다. 그러나 KOREA의 대표는 한국이므로 지금 한반도는 ‘남쪽의 고구려’와 ‘북쪽의 조선’이 대립하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의 고구려와 북의 조선 중에서 세 번째로 한반도를 통일할 주체는 누가 될 것인가. 윤 교수는 “남북한은 모두 고구려의 정통성을 따르고 있으므로 통일한국의 국호를 ‘한고구려’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심양 서탑거리 유감
고구려는 고조선과 함께 다민족 체제를 이끈 나라였다. 고구려 왕국 안에서 말갈(여진)족과 선비족 등 여러 민족이 공생했다. 고구려가 이러한 민족을 상대로 통일전쟁을 벌이거나 때로는 연합전선을 펼쳐가며 하나로 묶어냈다. 그리고 중국이라고 하는 이민족에 대해서는 강력히 저항함으로써 자기만의 정치체와 역사체를 만들어왔다. 이러한 고구려의 정신과 능력이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를 하나로 잇는 힘찬 동력이 될 수 있다.
중국은 하(夏)·상(商·은나라라고도 함)·주(周)로 이어지는 중국 고대사의 지평을 넓힌 단대공정(斷代工程)에 이어, 독립 열기가 강한 소수민족인 장족(藏族, 중국 발음으로는 ‘짱주’. 서장자치구에 많이 거주하는 티베트족)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기 위해 서북공정을, 중국 내 최대 소수민족(1400여만명)인 장족(壯族, 중국 발음으로는 ‘좡주’. 광서자치구에 주로 거주)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기 위해 서남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고조선과 고구려사를 삼키는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
중국 중앙정부는 중화주의를 확산하기 위해 이러한 공정을 펼치고, 지방정부는 관광산업을 부흥시켜 돈벌이를 한다는 차원에서 이 공정에 적극 참여한다. 동북공정을 통해 중국 지방정부가 얻고자 하는 것은 한국 관광객의 돈이다.
조선의 광해군은 명-청 교체기의 동북아 세력 변화를 제대로 읽고 대처했다. 그러나 광해군을 쫓아내고 집권한 인조는 동북아 정세를 잘못 읽고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를 지지하다 청나라의 공격을 받고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병자호란).
그로 인해 그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 당시 청나라 수도인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때 두 사람이 머무르던 곳이 지금의 서탑(西塔)거리라고 한다.
지금 서탑거리는 심양시 최대의 유흥가다. 이곳에는 KTV라고 하는 한국식 룸살롱이 즐비하다.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밤문화가 발달했는데, 이곳의 유행을 이끄는 것은 한국의 투기자본이라고 한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자취가 있는 곳에 한국식 룸살롱이 즐비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한국은 동북공정의 실체를 과소평가하고 돈 자랑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인의 허영속에 고구려의 원혼이 울고 있다.
1950년 미군기의 폭격으로 끊어진 압록강 단교(오른쪽 위). 이 단교를 중국은 항미원조전의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다(왼쪽). 북한쪽 압록강가에서 동초 근무 중인 북한의 국경경비여단원(오른쪽).
지금 한국은 단군 이래 가장 잘사는 시기를 맞았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만달러에 육박하고, 연간 국방비는 대략 200억달러로 중국의 추정 국방비인 300억~500억달러에 버금간다. 세계 10위의 강국으로 성장한 한국은 신라와 고려에 이어 세 번째로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때 항왜원조와 항미원조전을 성공시킨 중국이 ‘항한원조(抗韓援朝·한국에 맞서 김정일이 이끄는 북한을 지원함) 보가위국’을 준비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의 1인당 GDP는 1000달러 수준이다(2005년 1411달러). 중국은 14개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이중 중국보다 확실히 잘사는 나라는 1인당 GDP 5000달러 수준의 러시아뿐이다(2005년 5341달러). 그러나 러시아는 북경조약(1860년) 등을 통해 청나라의 영향력이 미치던 연해주 지역을 차지했으므로, 중국의 대(對)러시아 감정은 그리 좋지 않다. 또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연해주 지역은 잘살지도 못하므로 중국인들은 ‘러시아의 매력’에 혹하지 않는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대인 중국이 동북아의 강국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핵 보유와 더불어 국경을 맞댄 나라들보다 잘사는 것이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중국은 한족(漢族)을 포함해 56개 민족으로 구성돼 있는데, 55개 소수민족은 대개 변경지역에 포진해 있다. 중국이 주변국보다 잘살고 강한 나라로 존재하는 한 이들의 독립 노력은 미약해질 수밖에 없다.
좋은 예가 내몽고자치구의 몽골인들이다. 이들은 바로 곁에 조국 몽골(1인당 GDP 547달러)이 있는데도, 중국에서 살기를 원한다. 중국이 몽골보다 훨씬 더 잘살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1인당 GDP가 1만달러대인 통일한국이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兩手兼將의 동북공정
‘풍요의 유혹’은 강력하다. 통일한국이 압록-두만강변의 도시를 집중적으로 개발한다면, 길림성의 연변조선족자치주나 장백조선족자치현의 조선족들이 흔들릴 수 있다. 중국에서 14번째로 많은 소수민족인 조선족이 동요하면 나머지 소수민족 가운데 일부도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통일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세력을 업고 있으므로, 중국은 통일한국의 등장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북한을 흡수통일한 한국이 대륙으로 기운을 뻗치기 전에, 중국은 항한원조를 준비해야 한다. 통일한국이 등장하기 전 중국은 압록-두만강변에 사는 중국 국적자들의 정신을 다잡아놓아야 하는 것이다.
중국은 결코 간단한 나라가 아니다.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들과 수교한 개혁개방정책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냥 개혁개방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개혁개방을 했다. 그 결과 경제를 성장시키면서 대만을 철저히 고립시키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의 묘수를 선보였다.
이러한 중국은 한국인 자본을 끌어들여 낙후한 동북지역을 발전시키고 동시에 이 지역 중국인의 정신을 다잡는 양수겸장을 염두에 두고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
장마철인 지난 7월말 단동엔 장대비와 안개비가 뿌렸다. 압록강은 장대비가 내릴 때를 제외하곤 끊임없이 안개를 피워 올렸다. 안개비가 내릴 때 유람선을 타고 신의주 쪽으로 접근해보았다. 인적이 드문 강변 부두에 어선과 경비정 수십여 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중 큰 배의 상갑판엔 AK(아카보) 소총을 둘러멘 국경경비여단원 두 명이 어슬렁거리며 동초(動哨)를 서고 있었다.
북한은 전연(전선)지대인 휴전선 북쪽엔 인민군을, 전연지대가 아닌 해안지역엔 경비총국 산하의 해안경비여단을, 조(朝)-중(中) 국경지역엔 경비총국 산하 국경경비여단을 배치하고 있다. 국경경비여단을 지휘하는 경비총국은 인민무력부의 통제를 받으므로 국경경비여단은 보병 위주로 편성된 정규군의 성격이 강하다.
단동은 한국 관광객들로 왁자지껄했다. 덕분에 단동은 요녕성에서 여섯 번째로 크고, 중국 변경도시 가운데 가장 번창한 도시가 되었다. 유람선을 탄 한국인들이 “안녕하세요-”라고 외치자 강변에 쭈그려 앉아 있던 북한 남자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순간 ‘북한은 살아 있는 사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동은 압록강 하구에서 상류로 30㎞쯤 올라온 곳에 있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상류 쪽으로 20여 분쯤 더 올라 간 관전현 호산진 호산촌엔, 최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호산장성(虎山長城)’이 있다. 명나라 때인 1469년 중국인들은 이곳에 탑호산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탑호산성 유적을 발굴해내면 중국은 명나라 때 압록강까지 진출했음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1990년 중국학자들은 이곳을 조사해 명나라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산성 유적을 찾아내고, ‘이 산성이 진한(秦漢)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리고 명나라 시대의 성을 복원한 후, 동네 이름을 따서 ‘호산장성’이라고 이름지었다. 산에 있는 성이면 호산산성이라고 해야 할 텐데 왜 호산장성이라고 했을까. 여기에는 중국의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중국의 만리장성은 전국시대 연(燕)·제(齊)·조(趙) 등 여러 나라가 각기 고립된 장성을 쌓음으로써 시작되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이 성들을 잇고 서쪽으로 더 쌓아감으로써 만리장성의 역사를 만들었다. 그후 여러 왕조에 걸쳐 이곳저곳에 성을 쌓고, 명나라 때 이 성들을 연결하는 것을 완료해 지금의 만리장성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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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장성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한글 간판을 붙여놓은 박물관 외관. 고구려 우물터에서 나온 통나무배를 중국 진한시대의 신주(神舟)로 설명한 안내문. 청일전쟁 때의 호산보위전을 과장되게 설명한 안내문(왼쪽 부터).
중국에서 나오는 모든 사료는 ‘명대에 완성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하북성(河北省) 발해만 연안의 산해관(山海關)이고, 서쪽 끝은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감숙성(甘肅省)의 가욕관(嘉틾關)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도 산해관에 가면 노용두(老龍頭)라는 곳에서 바다(발해만)에 맞닿아 있는 만리장성을 볼 수 있다. 또 그곳에서는 ‘이곳이 바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호산장성 복원 공사가 끝난 1990년대 중반, 중국은 엉뚱한 주장을 내놓았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 아니라 호산장성이라는 것. 호산장성 옆에는 조악하게 만든 박물관이 있는데, 이 박물관 외벽에는 한글로 ‘중국 명(明) 만리장성 동단(東端) 기점’ ‘만리장성에 이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다’ ‘기점(起點)에 가지 않으면 유감을 남긴다’는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만리장성 남쪽은 중원(中原)이고 바깥은 몽고족과 동이족 등이 사는 곳으로 여겨왔다. 중국이 만리장성 바깥으로 군대를 출동시켜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많지만, 그들이 정치와 역사를 만들어온 공간은 만리장성 남쪽이었다. 그런데 호산장성으로 인해 만리장성이 압록강가에 이르게 된다면 중국의 역사와 정치 무대는 갑자기 넓어지고, 만리장성 바깥에서 활동해온 대표적인 동이족인 한국인의 정치와 역사 무대는 현저히 오그라든다.
중국은 이러한 역사 인식을 한국인에게 강요하기 위해 박물관 외벽에 한글로 ‘만리장성 동단 기점’이라는 문구를 써붙여 놓은 것으로 보인다. “뿌드득-” 이가 갈리는 무서운 역사왜곡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은 복원한 산성을 만리장성의 일부로 만들어야 했으니, 이 성을 고립된 호산산성이 아니라 다른 성과 연결된 호산장성으로 이름지은 것이다.
서기 598년과 612년 수(隋)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패배했다(고수전쟁). 645년과 668년에는 당(唐)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는데(고당전쟁), 668년 전쟁에서 당나라가 승리함으로써 고구려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중국의 고구려 침략이 계속됐으니, 1500∼2000년 전 중국은 압록강가에 중국식 성을 지었다고 추정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고조선과 고구려가 존재하던 시절 중국 세력이 압록강가에 성을 세웠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 고구려가 압록강가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호산촌은 압록강 하구에서 30㎞쯤 들어온 단동에서 차로 20분쯤 걸리는 곳에 있으니, 압록강 하구로부터는 대략 100리 안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사서에는 ‘648년 내주(萊州)를 출항한 3만여 명의 당나라 수군이 압록수를 100여 리 거슬러 올라가 박작성(泊灼城)이라는 고구려 산성에 이르렀다. 박작성에서는 성주인 소부손(所夫孫)이 기병을 이끌고 나와 대항하다 무너졌다. 박작성은 산을 의지해 요새를 구축했고 압록수가 가로막고 있어 견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호산촌에서 발견된 산성 유적은 박작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산성을 조사할 때 중국 학자들은 산성 안쪽에서 지름 4.4m, 깊이 11.25m의 큰 우물터를 발굴했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고구려인은 산성을 쌓으면 반드시 산성 안에 우물을 만들었다. 발견된 우물의 안벽에는 고구려 산성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견치석(犬齒石, 뒤에서 설명)이 쌓여 있었는데, 이 우물터에서는 기원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3.7m 길이의 통나무배가 출토되었다.
귀찮을 정도로 한국인을 따라다니며 물건을 파는 중국 소녀들(왼쪽). 호산장성 앞에는 실개천에 불과한 압록강의 샛강이 조·중 국경을 만들고 있다. 금행(禁行)이라는 글귀와‘일보과(一步跨)’를 새긴 돌이 이곳이 국경선임을 알려준다.
중국측은 우물 안에서 나온 통나무배를 ‘진한 시대 옛 우물터에서 발견된 신비스러운 배’란 뜻으로 ‘고정신주(古井神舟)’로 명명했다. 그리고 진한 시대의 유적지임을 강조하기 위해 박물관에 진시황의 등신상과 한무제 때의 자료를 많이 진열해놓았다. 우물의 발견으로 고구려 박작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지만 중국측은 박작성의 ‘박’자도 거론하지 않은 것이다.
압록강 중류에 있는 집안(集安)에는 고구려가 서기 3년부터 427년 사이 두 번째 도읍지로 삼았던 국내성이 있다. 국내성에 자리잡은 고구려 왕실은 압록강 수운(水運)을 통해 주변국과 무역했다. 중국이 위-촉-오 삼국으로 나눠 대립하던 시절, 고구려의 동천왕은 오나라의 손권과 동맹을 맺고 무역을 하며 위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따라서 고구려는 중요한 물류망이자 국내성 입구인 압록강 하구를 안전하게 지켜야할 필요가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고구려는 압록강 하구에 서안평성(西安平城·현재 중국에서는 ‘애하(쾴河)라고 하는 압록강 지류 곁에 있다고 하여, ‘애하첨고성(쾴河尖古城)’으로 부른다), 구연성(九連城), 박작성, 그리고 대행성(大行城)을 지어 압록강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도시를 강 북쪽에 건설했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도 한강 북쪽에 있다. 고구려의 국내성도 압록강 북쪽(중국 집안시)에 있었으므로, 압록강 방어성도 북쪽인 중국 땅에 건설되었다.
이 성들은 1차적으로는 압록강으로 올라오는 위협세력을 제거하는 구실을 한다. 그리고 요동지역을 거쳐 육로로 압록강으로 진격해오는 위협세력이 있으면 이를 막는 구실도 했다. 한마디로 중국과의 전투를 위해 세워졌으니 이 성은 중국을 바라보는 형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호산장성을 한반도를 바라보는 형태로 복원했다. 한반도에서 오는 위협을 막는 형태인데 그 이유는 박물관 진열품을 통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박물관에는 진한시대 전시물 이상으로 ‘갑오(甲午)중일전쟁’과 ‘일아(日俄·러일)전쟁’에 관한 전시물이 많았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은 갑오년이다. 동학군을 막지 못한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병력을 출동시켜 동학군을 무너뜨리고 평양성으로 쳐들어가 성 안에 있던 청나라 군대를 패배시켰다.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출해 요동반도를 장악했다.
당태종이 침공했을 때 항복했던 고구려의 백암성 유적. 성벽 앞에 튀어나온 부분이 ‘치’다. 중국은 이 성이 연나라의 산성이라고 주장한다(오른쪽).
일본은 청나라와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을 맺어 승리를 확인하고, 요동반도를 할양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개입으로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주는 굴욕을 맛보았다(3국간섭). 평양에서 청나라군을 패배시킨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 호산진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던 모양이다. ‘당연히’ 청나라 군대가 패배했는데 박물관측은 음향과 입체 전시물을 통해 ‘호산보위전’을 과장되게 보여줌으로써, 이곳이 중국 방어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1904년부터 1905년 사이 벌어진 러일전쟁 때도 일본군은 이곳을 통과해 심양과 대련으로 진출했다. 박물관은 일본이 호산을 점령했을 때 자행한 잔혹상을 보여줌으로써 호산이 중국의 최변방 지역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압록강 단교가 성공한 항미원조의 상징이라면 호산장성은 실패한 항일원조(抗日援朝)의 전적지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중국측은 박물관 입구에 중국 육해공군 병사를 그린 대형 벽화를 걸어놓음으로써, 이곳을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최전선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중국은, 자국 영토인 이곳에 고구려를 둘 수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를 보기 위해 애써 이곳을 찾아온 한국인들은 명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설명을 듣고 답답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압록강 하류에는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가 쌓여 생긴 크고 작은 섬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덴 서울의 여의도처럼 한쪽으로는 압록강 본류(本流)가 흐르고 다른 쪽에는 본류에서 갈라져 나온 샛강이 흘러, 한쪽 강변으로 붙은 형태의 섬이 적지 않다. 샛강 가운데 서울 시내의 청계천보다 폭이 좁은 것도 있어, 과연 이것을 섬으로 봐야 할지 의심되는 것도 적지 않다.
강을 국경으로 할 경우 한쪽으로 붙은 섬은 종종 영유권 갈등을 일으키는 대상이 된다. 북한과 중국도 강에 있는 섬에 대한 영유권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압록-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았다. 그런데 1960년대 중국과 소련 간의 갈등이 첨예해지자, 중국은 북한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압록-두만강 본류 상에 있는 섬 영유권을 모두 북한에 넘겨주는 조치를 취했다. 덕분에 압록강에서는 실개천에 불과한 샛강만 있어도 그 섬은 모두 북한이 영유하게 되었다.
박물관 옆에 있는 실개천이 바로 압록강의 샛강이므로 방산마을이 있다고 하는 실개천 저쪽의 섬은 북한의 영토다. 실개천 위에는 노란 바탕에 회색으로 ‘금행(禁行·다니지 마시오)’이라고 써 붙인 나무다리가 걸려 있었다. 다리를 지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 다리를 달리거나 개울을 첨벙첨벙 건너 북한 땅으로 갈 수 있었다.
호산장성 반대편을 찾아가자 역시 에둘러 가는 압록강의 샛강이 조-중 국경을 만들고 있었다. 그곳에는 나무다리 대신 ‘한 걸음만 뛰면 북한 땅에 도달할 수 있다’와 ‘매우 가깝다’는 뜻의 한자 ‘일보과(一步跨)’와 ‘지척(咫尺)’을 새긴 돌이 놓여 있었다. 실개천에 불과한 샛강에는 북한 땅을 더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나룻배가 있었다.
그리고 북한 사람에게 음식물이나 물건을 던져주지 말라는 중국어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몹시 거슬리는 문구가 아닐 수 없었다. 경고문에 쓰인 북한 사람을 ‘동물’로 바꿔 적으면, 이곳은 물로 만든 해자(垓字)를 경계로 안에 갇힌 동물을 구경하는 완벽한 사파리가 된다.
고구려를 보기 위해 돈을 써가며 달려온 한국인들은 고구려 대신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역사왜곡과 동족이 있는 사파리를 보고 간다….
요동반도와 압록강 일대의 고구려성 위치도.
다음날 찾아가본 곳은 등답현 서대요향 관둔촌에 있는 고구려의 백암성(白巖城)이다. 고구려는 육로를 통한 중국 세력의 침입을 막기 위한 1차 방어선으로 요하 동쪽에 성을 여러 개 쌓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백암성과 안시성(安市城)이다.
요동반도의 요동(遼東)은, 요하(遼河) 강 동쪽에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고려 우왕 때 최영 장군이 추진했던 ‘요동정벌’의 그 땅이다. 고려가 요동정벌을 계획한 것은 그곳을 우리의 역사무대로 보았다는 것인데, 이때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반대해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회군) 개성을 공격함으로써,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열었다. 요하 서쪽은 요서(遼西) 지역이다.
요하 때문에 이곳에 있는 중국 지방정부의 이름이 요녕성(遼寧省)이 되었다. 1345㎞에 이르는 요하는 서만주의 젖줄인데, 요하와 나란히 흐르다 하류에서 복잡하게 갈라져 서해로 흘러가는 요하와 합수되는 큰 강이 혼하(渾河)다. 요녕성 성도(省都)이자 동북지역 최대 도시이며, 중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대도시인 심양(瀋陽, 인구 800만)이 바로 혼하 중류에 있다. 이러한 혼하로 흘러드는 큰 지류가 뒤에서 설명할 태자하(太子河)다.
박작성이 함락되기 3년 전인 645년, 당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동을 공격했다.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과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안시성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양만춘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저항이 거세 점령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습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다.
당시 백암성 성주는 손대음(孫代音·‘孫伐音’이라는 기록도 있다)이었는데, 그는 요동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군에 항복했다. 백암성을 장악한 당나라군은 성 이름을 암주성으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를 안고 있건만 백암성은 고구려 산성에서 나타나는 ‘치(雉)’를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성으로 꼽힌다.
성을 둥글게 쌓으면 적의 공격을 막기 힘들다. 그래서 톱니바퀴의 톱니처럼 밖으로 튀어나온 공간을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치다. 치는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으므로 적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거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적군을 공략하기 쉽다. 백암성에는 55m와 61m 간격을 두고 세 개의 치가 나란히 나와 있다. 치의 높이는 9m에서 10m 정도다.
치는 적의 공격을 가장 세게 받게 되므로 단단하게 지어야 한다. 고구려 시대에는 성을 공략하는 무기로 돌을 쏘는 충거(衝車)와 직접 부딪쳐 성벽을 무너뜨리는 당거(撞車)가 사용됐는데, 치는 충거가 쏘는 돌과 당거의 공격을 받아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아주 크고 튼튼한 돌을 치의 받침돌로 썼다. 그리고 그 위에 큰 돌을 9층 내지 10층까지 쌓는데, 뒤로 조금씩 물리면서 쌓는 ‘퇴물림 방식’으로 올렸다.
이렇게 하면 치나 성벽은 첨성대처럼 약간 뒤로 기운 모양이 되는데, 이렇게 쌓은 치나 성벽은 직벽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 백암성의 치 윗면에는 망을 보거나 성벽을 부수기 위해 달려드는 적군을 공격할 수 있는 가로세로 5m 정도의 공간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성벽 밖으로 나오는 돌은 매끈하게 다듬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부분은 개 이빨(犬齒)처럼 뾰쪽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견치석’이란 말이 생겼는데, 견치석은 다른 돌과 맞물리는 기능을 한다. 견치석으로 쌓은 성벽은 외부에서 압력을 받을 경우 맞물리는 정도가 강해져 오히려 더욱 단단해진다. 백암성에서는 폭이 3m쯤 되는 성벽 한쪽이 무너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견치석 모양의 돌이 수북했다.
고구려인들은 화강암으로 성을 쌓았다. 그러나 백암성만은 석회암으로 만들었다. 이유는 바로 곁에 석회암 채석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채석장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고구려인들은 이곳에서 견치석 모양으로 석회암을 떼어내 퇴물림 방식으로 치와 성벽을 쌓았다.
환용호에서 본 오녀산. 고구려의 첫 수도는 환용호에 수몰되었는지도 모른다. 견치석으로 쌓아올린 오녀산성 유적(작은 사진).
전국시대 가장 강한 나라는 전국을 통일한 진(秦)이었다. 기원전 228년 진은 한(韓·우리와는 상관없는 나라임)나라를 멸망시키고 조(趙)나라를 압박해 역수(易水)강까지 쳐들어왔다. 조나라가 무너지면 연나라가 공격을 받게 된다. 위협을 느낀 연나라의 태자 단(丹)은 자객 형가(荊軻)에게 진시황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형가는 진시황 암살에 실패해 죽임을 당했다.
분노한 진시황은 기원전 226년 군대를 동원해 연나라 수도를 공격했다. 그러자 겁을 먹은 연나라 왕 희(喜)가 요동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자 단을 죽여 그 목을 진시황에게 바쳤다. 아들의 목을 바치며 화해를 요청한 것인데, 진나라는 공격을 계속해 기원전 222년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때부터 이곳에 흐르는 강을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 태자 단을 기려 ‘태자하’로 불렀다고 한다.
태자하 옆에 있으니 중국은 이 산성을 연나라의 성, 즉 연주성산성으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연나라가 쓰러진 후 선비족은 5세기 무렵 북위(北魏)를 세워 140여년간 중국 북부를 통치하다 한족(漢族)에 동화되었다. 중국으로서는 대한민국의 뿌리가 된 고구려보다는 한족에 동화된 연을 이 땅의 주인으로 삼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성을 고구려의 성으로 확인해줄 수 없다.
1963년 중국은 이곳에 ‘연주성산성’이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고 1990년 같은 이름을 새긴 비석을 또 세웠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펼치기 훨씬 이전부터 고구려 지우기를 해온 것이다.
[제 2부] 고구려는 있다, 그러나 미스터리가 넘쳐난다
고구려는 아직도 많은 것이 미스터리인 왕국이다. 고구려를 우리 역사로 주장하는 사람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을 정도로 고구려는 베일에 싸여 있다. 건국과정부터가 그렇다. 여러 사료에 나오는 고구려의 건국 과정을 정리하면 이렇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朱蒙·광개토태왕비에는 ‘추모(鄒牟)’로 기록돼 있다)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인 해모수다. 해모수는 성(城) 북쪽에 있는 청하(淸河)에서 놀고 있던 하백의 딸 유화(柳花)와 정을 통하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일로 유화는 잉태를 했고 그로 인해 하백에게서 쫓겨나 우발수에 있다가 부여의 금와왕에게 구출돼 알을 낳았다.
그 알에서 남자아이가 나왔는데 아이는 활을 잘 쐈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했으므로, 그는 주몽으로 불리게 되었다. 부여의 왕자들은 주몽을 시기해 죽이려 했다. 위기를 느낀 유화는 주몽에게 “남쪽으로 가면 뜻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며 도주를 권유했다.
주몽은 왕실의 말을 훔쳐 타고 세 명의 친구와 도망쳐 비류수(沸流水)에 이르렀다. 그의 뒤에는 추격군이 있었다. 이에 주몽이 “나는 황천(皇天·천제) 아들이며 (물의 신) 하백의 외손이다”라고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줌으로써 추격병을 피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졸본부여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딸만 있었는데, 주몽은 졸본부여 왕의 딸인 소서노와 결혼했다. 그곳에서 세력을 키운 주몽은 기원전 37년(‘삼국사기’ 근거) 왕국을 세우고, 이듬해 송양이 이끄는 비류국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기원전 33년에는 행인국을, 기원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이때의 주몽 왕국은 고구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 도교의 성지인 오녀산
사료에 따라서는 주몽이 왕위에 오른 곳을 ‘흘승골성(訖升骨城) 또는 ‘홀본(忽本)’으로 적고 있는데, 이것은 졸본을 다르게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를 알려면 졸본(卒本)부여가 어디에 있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중국 학자들과 일본 학자들은 요녕성 신계시 환인만주족자치현 환인진 유가구촌에 있는 오녀산성을 졸본으로 보았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두 번째로 많은 것이 만주족(여진족의 후예, 1000여만명)이다. 고유의 문자와 말을 갖고 있던 여진족(후금)은 1625년 심양을 성경(盛京)으로 바꿔 부르며 도읍지로 삼아 청나라를 세우고, 1644년 북경으로 천도해 중국 전체를 장악했다. 하지만 급격한 한화(漢化)정책을 채택해, 지금 그들의 문자를 읽을 수 있는 만주족은 1%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환인현은 말과 글을 잃어버린 만주족을 위한 자치지역이다.
환인(桓仁)은 단군의 할아버지인 천제 환인(桓因)을 연상시키나, 한자가 다르다. 본래 회인(懷仁)현이었다가 환인현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니, 단군과는 전혀 관련 없는 지명이다. 환인현을 가로지르는 강이, 심양시를 관류하는 혼하(渾河)와 혼동하기 쉬운 ‘혼강(渾江)’이다. 심양의 혼하는 요하로 합류되지만, 환인의 혼강은 수풍댐 상류의 압록강으로 흘러든다.
오녀산성이 졸본성이라면 혼강은 비류수가 된다. 고구려가 졸본을 수도로 삼은 기간은 40년이다. 그래서인지 오녀산에서는 고구려와 관련된 전설이 거의 전하지 않는다. 오녀산(五女山)은 이 곳에 있던 다섯 선녀가 혼강에 살며 사람을 괴롭히던 괴물과 싸워 함께 죽은 것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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