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지 찾기 어려운 첩첩산중 산골마을의 소외된 사람들
- 일제 수탈 피해 도일(渡日)했다 피폭된 주민 수만 명
- 노부모 사망 뒤 방치되는 원폭2세 환자 사회문제화
3월1일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에 국내 유일의 원폭2세 복지시설인 ‘합천 평화의 집’이 문을 열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피폭자의 자녀를 위한 공간이다. 왜 머나먼 한국 땅에, 원폭 투하 후 60여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이런 공간이 만들어진 걸까. 궁금증을 안고 길을 나선다.
합천에 이르는 길은 굽이굽이 산이다. 마음만 먹으면 제주도도 한나절에 오갈 수 있는 세상이지만, 서울서 322㎞ 떨어진 이 도시에 닿는 방법은 도로뿐이다. 하루에 다섯 번 운행하는 버스를 타면 가는 데만 4시간30분이 걸린다. 소백산맥에서 동쪽으로 뻗은 지맥을 따라 합천에 이르니 가야산(1430m) 남산(1113m) 표류산(1046m) 비계산(1126m) 두무산(1038m) 오도산(1134m) 황매산(1108m) 등 해발 1000m 이상 되는 산들이 둘레를 감싼다. 1962년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마지막 야생 표범이 잡혔다. 동서남북 둘러봐도 평야라곤 없다. 산 중턱 경사지, 깊은 계곡 옆까지 꼼꼼히 흙 골라 펼쳐놓은 논밭이 보일 뿐이다.
억센 산줄기에 가로막힌 땅. 이 지역 사람들은 직접 땅을 일궈 제 먹을 것을 얻으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합천의 주된 산업은 예나 지금이나 농업이다. 꼭 100년 전, 경술국치가 있기 전까지 이곳은 넉넉지 않을지언정 아늑한 그들만의 공동체였다.
원폭 피해자의 12%는 조선인
‘합천 평화의 집’에 도착하자 소장 혜진 스님과 강제숙(42) ‘한국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환우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공동대표가 반갑게 맞아준다. 가정주택을 개조한 76㎡ 규모의 쉼터는 ‘위드 아시아’ 등 여러 시민사회단체가 힘을 모아 마련한 공간이다. 방 3칸과 거실, 부엌으로 구성된 이곳을 혜진스님은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 받는 원폭2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사랑방”이라고 소개했다.
‘왜 원폭2세 쉼터를 지금 합천에?’라는 질문의 답을 구하려면 이제 이곳에서 1945년 8월,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이 도시 전체를 파괴한 날, 방사능 불꽃 속에서 죽어간 이들은 ‘황군(皇軍)’만이 아니었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자료에 따르면 당시 두 도시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은 77만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10만명은 징병, 징용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이었다. 일제의 수탈로 국내 경제가 붕괴되면서 생계를 위해 스스로 일본행 배에 오른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 5만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4만3000명은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7000명은 일본에 남았다.
국내 유일의 원폭1세 복지시설인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안에는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조선인 947명의 신위를 모신 위령각이 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인 8월6일, 매년 이곳에서는 이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가 열린다.
한국에 원폭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건 1973년 합천에 ‘원자폭탄피해자 진료소’가 생기면서부터다. 이곳에 진료소가 생긴 이유는 피폭 조선인 가운데 절대 다수가 합천 사람이었기 때문. 비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히로시마 피폭자의 60%가 합천 출신이다. 혜진스님은 “일제강점기 합천은 일본의 식민 지배로 경제 기반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 땅에서 살 수 없던 농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도일(渡日)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히로시마’
한국원폭2세환우회 한정순 회장.
1970년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등 시민단체들이 지역별로 피폭자들의 도일 이유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경기도와 전라도 출신자의 절반 이상은 징용 징병 등 일제의 강제징집을 원인으로 꼽았다. 반면 경상도 출신 가운데는 ‘생계 때문’이라고 답한 이가 많았다. 특히 합천의 경우 이렇게 응답한 비율이 95%에 달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판 ‘경상남도 통계연보’를 보면 왜 합천에 유독 생계형 도일자가 많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합천에 사는 조선인의 84.6%는 농사를 지었다. 농가 1호당 평균경작 면적은 2670평(약 8826㎡)으로, 같은 시기 조선의 평균치 4410평(약 1만4578㎡)과 비교해 턱없이 작았다. 일제 말기 본격적인 농작물 수탈이 시작됐을 때 영세농은 버티기 어려웠을 게 분명하다. 벼랑 끝에 몰린 합천 농민들이 찾은 곳이 히로시마였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 거점이던 그곳엔 번성한 군수산업 덕에 일자리가 많았다. 이내 조선인, 그중에서도 합천 주민들의 집단 거주촌이 생겼다.
진 사무국장의 어머니 역시 부모 형제가 모여 살다 한꺼번에 피해를 보았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큰언니 역시 시체도 찾지 못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어머니가 남은 자식들을 데리고 합천으로 돌아와 홀로 키웠다.
“그래서 속사정 아는 사람들은 합천을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러요. 마치 이 땅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마을 어디를 가든 피폭에 얽힌 사연을 쉽게 만날 수 있거든요.”
진 사무국장은 한 회장과 함께 그중 한 가정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저거 두고 어떻게 눈 감을꼬…”
합천군 초계면 박달순(84)씨 댁. 나직한 슬레이트지붕 집 앞에 다다르자 지팡이를 짚은 중늙은이 한 명이 대문으로 터벅터벅 들어가는 게 보였다.
“문택주씨, 문택주씨!”
한 회장이 차창을 내리고 목청껏 부르는데, 꽤 가까운 거리임에도 걷는 속도에 변화가 없다. 진 사무국장이 등 뒤까지 다가가 ‘문택주씨!’ 소리치고서야 비로소 사내가 걸음을 멈췄다. “누군교?” 돌아보는 시선이 텅 비어 있다.
택주(59)씨는 이 집 큰아들이다. 정신지체에 시각장애, 청각장애까지 가졌다. 나이 들면서 조금씩 다리 근육이 뻣뻣해져 이젠 걸음마저 불편하다. 왜 몸 곳곳이 말썽을 부리는지는 병원에서도 알지 못한다. 9년 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택주씨 아버지는 젊은 시절 히로시마로 징용 갔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돌아왔다.
“문둥병 환자가 돼서 안 왔습니까. 몸이 헌 데가 많아 보지도 못해요. 물이 찔긋찔긋 나고 다리가 오그라들고…. 내가 거짓말은 안 하니요.”
박씨는 원자폭탄 열기에 전신화상을 입어 진물이 줄줄 흐르던 남편을 ‘문둥병 환자’라고 했다. 듣는 사람이 차마 못 믿을 것 같은지 몇 번이나 ‘내가 거짓말은 안 하니요’를 덧붙인다. ‘그 꼴을 하고’ 일본서 돌아온 날부터 남편은 한 번도 제 힘으로 돈을 벌지 못했다.
“잘 걷지도 못하고 눈도 실실 안 뵈는데 뭘 했겠능교.”
원폭2세 정신지체 장애인 문택주씨. 이름과 나이를 묻는 질문에 내내 배시시 웃기만 하던 택주씨는 “하고 싶은 얘기 없느냐”고 묻자 “장가들게 중신 좀 서달라”고 했다.
박씨는 둘째, 셋째 발가락이 포개진 모양까지 아버지를 꼭 닮은 택주씨가 ‘문둥병’도 물려받았다고 여기고 있다. 그 아들을 돌보느라 한평생 몸과 마음이 새까맣게 탔다.
“눈이 어두니까 밥상을 앞에 갖다놔도 반찬 집어먹을 줄을 몰라요. 어디 갈 때 있으면 내 손 꼭 붙잡고 댕기지. 지금은 그래도 내가 멕이고 따수이 옷 입히는데, 내 죽고 나면 저거 우짜겠으요. 저러다 그냥 죽겄지. 아이고, 이거 불쌍해서 어째 눈을 감을꼬.”
어머니 말을 듣는지 못 듣는지 택주씨는 시종 배시시 웃기만 했다. 박씨의 소망은 “나 없어도 우리 아들이 죽지 않고 사는 것”. 나라에서 아무리 ‘배급(기초생활수급자수당, 장애인수당)’을 잘 줘도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말짱 헛일’이다.
원인 모를 질병
어두침침한 방 안에 모자를 두고 돌아서는 길, 한 회장이 “합천에 이런 집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라고 입을 열었다.
“원자폭탄 떨어지고 65년이 흘렀잖아요. 그 무렵 애기 낳을 수 있던 부모들이 다 돌아갈 때가 된 겁니다. 그분들에 의지해 살아온 2세들은 혼자서 바깥출입도 못해요. 원폭2세 쉼터를 만든 건 늦기 전에 이분들을 어떻게든 도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지요.”
다시 차에 오른다. 한참 논길을 달려 찾아간 합천군 율곡면 낙민리에는 진 사무국장의 사촌동생 정영현(43)씨가 살고 있었다. 영현씨는 다운증후군 환자다. 대문을 열자 작은 키, 넓은 미간, 공허한 눈빛의 영현씨가 진 사무국장을 알아보고는 “누나!” 하며 반갑게 다가왔다. 십수년 전 폐암으로 사망한 그의 아버지, 진 사무국장의 외삼촌은 어린 시절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맞았다. 한국에 돌아와 결혼한 뒤 6남매를 낳았는데, 그중 두 명은 태어나자마자 호흡곤란 증세로 숨을 거뒀다. 남은 2남2녀 가운데서도 영현씨를 포함한 2명이 원인 모를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엄마는 없어. 누나 들어와. 왜 왔어?”
짧고 서툴지언정 영현씨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서 역시 원폭2세 다운증후군 환자인 동갑내기 아내 허진영씨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가 잠깐 외출한 사이 부부만 남아 집을 보고 있는 참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전부다. 진 사무국장은 “외숙모가 안 계시면 밥을 굶기 일쑤다. 전기밥통의 코드 꽂는 일조차 힘들어한다”고 귀띔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렵게 아이가 생긴 적이 있는데, 유산되고 말았다고 한다. 부모 대의 원폭 후유증이 두 사람을 거쳐 거듭 유전된 탓인지 아니면 단순한 사고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세 환자도 원폭 피해자다”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상공 580m(±15m) 지점에서 폭발하며 삽시간에 도시 건물 7만6000채 가운데 92%를 파괴했다. 섭씨 수백만도, 압력 수십만 기압의 에너지는 제 힘의 50%를 폭풍으로, 35%를 열선으로, 15%를 방사선으로 변화시키며 지상을 습격했다. 폭심지 반경 1㎞ 이내의 사람들은 열선에 타죽거나 최대풍속 44m의 폭풍에 압사했고, 약 4㎞ 지점의 사람까지 전신 화상을 입었다. 순간방사선 혹은 잔류방사능에 의한 세포 파괴는 훨씬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히로시마 피폭 부모에게서 태어난 원폭2세 다운증후군 환자 전영현씨(오른쪽)와 허진영씨 부부.
세계 최고 권위의 원폭 연구기관인 일본 히로시마 방사선영향연구소는 “부모의 피폭에 의한 방사능 양과 피폭자 2세의 건강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가 원폭1세들에게는 무상 치료 등 각종 복지를 제공하면서 2세 문제에 손 놓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우리 정부도 같은 의견이다. 일본은 1990년 한국 원폭 피해자들에 대해 ‘인도적 차원’이라는 단서를 달아 40억엔(당시 환율로 248억원)을 지원한 일이 있는데, 정부는 이 돈으로 합천에 원폭1세들을 위한 복지회관을 지었다. 2세 문제에 대해서는 “피폭과 2세의 질환 간 상관관계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아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2005년 3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원폭2세 고(故) 김형률씨다. 평생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침과 폐렴, 기관지확장증 등으로 고생한 김씨는 1995년 입원했다가 우연히 의료진이 자신에 관한 논문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질환이 유전자 변형으로 면역 체계에 이상이 생기면서 발생한 희귀병이며, 발병 원인의 하나로 어머니의 피폭 사실을 검토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합천 출신인 김씨의 어머니는 여섯 살 때 히로시마 원폭 투하 현장에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자신의 고통과 어머니의 피폭을 연결지어 생각한 적 없던 김씨는 원자폭탄이 2세, 3세의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설에 충격을 받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원폭2세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 같이 희귀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영현씨의 누나이자 진 사무국장의 사촌언니인 숙희(44)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대퇴부무혈성괴사증으로 양쪽 다리에 인공뼈를 넣었다. 언제부턴가 다리가 조금씩 불편해오더니 급기야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돼 병원에 갔다가 이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대퇴골이 반 이상 내려앉은 채 부서졌고 그 위 연골까지 부서져 관절을 못 쓰게 됐다”며 “이 나이에 이런 상태로 찾아온 사람은 처음 봤다”고 혀를 찼다. 지난 2000년, 숙희씨가 30대 중반 때 일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환우회 한 회장이다. 그 역시 대퇴부무혈성괴사증으로 서른두 살이던 1990년 오른쪽 왼쪽 엉치뼈에 인공관절을 이식했다. 지금껏 모두 4차례에 걸쳐 대수술을 받았고 앞으로도 몇 번 더 수술대에 올라야 할지 모른다. 그의 형제들도 건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6남매 가운데 큰오빠는 뇌출혈로 사망했고, 작은오빠는 심근경색과 협심증 수술을 받았으며, 자매들은 원인 모를 피부병과 관절 통증으로 고생한다.
빈혈 88배, 심근경색·협심증 81배, 우울증 65배…
김형률씨는 이들을 건강한 원폭2세와 구별해 ‘원폭2세 환우’라고 불렀다. 2002년 환우회를 만들고, 국가가 자신들의 실태를 파악해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폭 피해자의 고통은 개인적인 잘못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일제 강점과 원폭 투하에서 비롯된 거잖아요. 조선인을 일본에서 살게 만든 일본 정부든, 그곳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미국 정부든, 아니면 자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우리 정부든 어느 하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 거죠.”
한 회장은 김씨와의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병이 어머니의 피폭과 관련된 것일 수 있음을 알았다. 김씨의 진정으로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원폭피해자 2세의 기초현황과 건강실태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국내 거주 원폭2세 1226명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원폭2세 남성의 경우 같은 연령대의 보통 남성보다 빈혈(88배), 심근경색(81배), 우울증(65배), 천식(26배), 정신분열증(23배) 등 각종 질환을 앓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피폭 2세 여성의 발병률도 심근경색과 협심증 81배, 우울증 71배, 유방양성종양 64배, 천식 23배, 빈혈 21배, 정신분열증 18배에 달했다. ‘부모의 피폭과 자녀의 질병 사이에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기 어려운 수치다.
인권위는 이 결과의 말미에 “원폭 피해자 2세에 대한 더 정밀한 역학조사 및 분자생물학적 유전학 조사가 실시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 후 5년이 지나도록 정부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사이 김씨는 세상을 떠났고, 상당수 원폭2세는 원인 불명의 질병과 유전에 대한 공포에 속수무책으로 내던져져 있다.
숨기고 싶은 고통
“나는 그래도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사는데, 진짜 마음 아픈 건 우리 아들이에요. 뇌성마비 환자로 태어나서 스물여덟 살이 된 지금까지 한 번 일어나지도 못했거든요. 덩치만 컸지 늘 그 모양 그대로 누워만 있어요.”
한 회장의 고백이다. 그는 자신의 병과 아들의 장애로 마음고생을 하다 우울증에 걸렸다. 그 과정에서 남편과 이혼까지 했다. 시어머니가 돌보는 아들을 가끔 만나러 갈 때면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 한 번 잡아주고 나온다.
“제가 원폭2세 환우회 활동을 한다고 하니 우리 어머니가 ‘지 몸 관리도 못 하는기 뭘 한다고 난리고’ 하며 타박을 많이 했어요. 말로는 ‘몸이나 챙겨라’ 하지만 실은 당신 때문에 자식이 이렇게 되고, 또 손자까지 이렇다는 걸 인정하기 싫으신 거겠죠. 저도 사실 이렇게 활동하지만 마음 한 편으로는 우리 아이가 나 때문에 저런 게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늘….”
한 회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환우회 활동을 하다보면 자꾸만 자신의 ‘내림(遺傳)’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그것은 몸의 고통 못지않게 마음을 괴롭힌다.
피폭자들 가운데서도 이 부분 때문에 환우회를 못 마땅하게 여기는 이가 많다. 원폭2세 가운데 환자가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무 탈 없이 멀쩡한 자식들까지 사회적으로 차별받게 될까 두려워서다.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만난 한 원폭1세 할머니는 “2세 문제를 취재하고 있다. 어르신 자식들은 괜찮냐”는 질문에 “우리 애들은 다 건강하다”더니 슬쩍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다 좋은 건 아닌데 굳이 얘기 안 할라고. 넘들 보면 원폭피해라고 알리니께 안 좋더라고….”
현재 합천에서 원폭 피해자로 등록한 이는 650여 명이다. 이들이 낳은 자녀는 18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환우회에 가입한 합천 사람은 60여 명에 불과하다.
“그 카메라 뽀사삔다”
‘위드 아시아’등 NGO와 원폭2세 환우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국내 최초의 원폭2세 복지시설 ‘합천 평화의 집’ 전경.
합천군 쌍책면 순평리 전상근(73)씨도 사진기자의 카메라를 보고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전씨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징용 간 합천 사람이다. 여덟 살 때 피폭된 그는 군 제대 후부터 온몸이 쑤시는 후유증을 앓고 있다. 자식들도 원인 모를 병에 시달린다. 큰딸 옥람(48)씨와 작은딸 연희(41)씨는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전씨는 이들의 사진이 찍힐까봐 불안해 했다.
사진은 안 찍고 말씀만 듣겠다고 약속하며 마주 앉은 뒤에도 몇 번이나 ‘찍기만 해봐라’ 엄포를 놓았다. 방구석에 오도카니 앉은 연희씨는 그 소란을 표정 없는 얼굴로 멍하니 보기만 했다. 함께 있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는 두 딸 옆에서 전씨는 살아온 얘기를 풀어놓았다.
“내가 잊지도 않아뿌러. 내가 스물네 살 먹었고, 애들 엄마는 스무 살 먹고. 그때부터 아픈 거야. 고만 몸이 아프기 시작했지.”
육체적 고통보다 더 괴로운 건 변해가는 자식들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건강하던 두 딸이 중학교 무렵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 있는 아들마저 고교 졸업 후 이상해졌다. 전씨는 지금 부인이 날품 팔아 벌어오는 얼마와 매달 일본 정부에서 나오는 건강보조금 30여만원으로 중년이 된 세 자식을 먹이고 입힌다.
그가 사진 찍는 걸 거칠게 막은 건 경남 진해로 시집간 막내딸 때문이다. 4남매 중 한 명, 건강한 막내만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살고 있다. 사위는 처갓집 아픈 형제들 얘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조심스러운 마음에 울컥 분이 솟은 것이다. 원폭피해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피폭 사실은 되도록 드러내고 싶지 않은 비밀이다. 건강한 자녀가 섞여 있을 경우 더욱 그렇다.
치아가 다 빠져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발음으로 전씨는 끊임없이 자식 걱정을 했다. 그가 부서진 몸을 추스르며 악으로 깡으로 자식들의 울타리가 돼줄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더 남았을까.
先지원, 後규명
합천을 돌며 10여 명의 원폭2세를 만났다. 이들은 다운증후군 같은 염색체 이상 질환부터 정신지체, 피부병, 관절뼈와 연골이 부서지는 고관절염까지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합천에서도 외곽 농촌 마을에 점점이 흩어져 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노부모와 그들이 없으면 생존조차 할 수 없는 중년 자녀의 조합, 이것이 이번에 만난 합천 원폭2세 환자의 전형이었다. 진 사무국장에 따르면 용주면 장전리에는 이미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정신지체 장애인 형제 둘만 서로 의지하고 사는 집도 있다. 그는 “두 명 중 형의 상태가 조금 나은 편인데, 그래도 정신연령이 열 살 정도밖에 안 된다. 늘 어머니 손에 이끌려 다니다가 단 둘이 남은 모습을 보면 딱하다”고 했다.
이들이 대부분 빈곤과 무기력에 허덕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혜진스님은 “가난을 떨쳐보려고 히로시마에 갔다가 몸만 상해 돌아온 부모들이 무슨 수로 돈을 벌었겠나. 자연히 아들 딸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킨 경우가 많아서 부모와 자녀가 똑같이 아프고, 가난하고, 못 배운 집이 많다. 외부의 도움 없이는 희망이 없는 분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합천군 안에 이런 가구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990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밝힌 국내 원폭1세 피해자 수는 2307명. 피폭자 1인당 평균 자녀 수는 약 2.4명이다. 그러나 ‘한국원폭피해자 복지대책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쓴 김정경씨는 “피해를 숨기고 사는 원폭1세들까지 감안하면 국내 원폭2세의 수는 약 2만5000명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1990년 조사 당시 응답자 가운데 41%는 한 명 이상의 자녀가 원폭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답했다. 이 수치를 2만5000명에 대입하면 원폭 후유증 문제를 겪는 원폭2세가 우리나라에 1만명 이상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2005년 비밀 해제된 1974년 보건사회부 작성 3급 비밀 문서에는 “실태 파악 결과 원폭 피해자의 후손들에 대한 건강관리가 크게 우려되고 있다. 이들에 대한 치료와 재활 대책을 위해 3개소에 80병상 규모의 치료센터 및 재활원 설립이 요망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미 정부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한 회장은 “그로부터 35년이 흘렀는데 상황은 오히려 나빠졌다. 아픈 사람이 있는 게 현실이라면 일단 자활 능력이 없는 원폭 2세 환자들에게 생계비와 의료비를 지원하고, 병과 유전 사이의 인과관계는 시간을 두고 밝혀내는 ‘선지원 후규명’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1000명이 3.3㎡씩
2008년 11월 합천이 지역구인 한나라당 조진래 의원은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와 그 피해자 자녀의 실태조사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한국 원폭피해자 및 원폭2세 환우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등 시민단체가 동참해 만든 이 법안에는 △원자폭탄에 의해 피해를 당한 한국인 피해자 및 그 자녀 등에 대한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 △의료비 및 진료비 지원을 통한 건강권 보장 △생활지원 및 기념사업을 통한 인권, 명예회복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1년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은 채 사실상 방치돼 있다.
원폭2세 환자와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직접 팔을 걷어 붙인 것은 이 때문이다. 강제숙 공대위 공동대표는 “한국인 원폭1, 2세들은 군 위안부 할머니처럼 일제 식민지 지배로 고통을 겪은 피해자인데 그동안 차별받고 아픔을 숨기며 살아왔다. 그들의 아픔이 본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사회가 알려줘야 한다”며 “정부에서 못 한다면 더 늦기 전에 시민사회단체에서라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첫걸음으로 원폭2세 가운데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부모의 도움 없이도 안정적으로 생활하면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요양시설 건립을 추진 중이다.
현재 합천군의 땅 3.3㎡ 가격은 5만원 대. 1000명이 각각 5만원을 내 땅 3.3㎡씩을 후원하면 3300㎡가 모인다. 이 부지에 시민사회단체나 뜻을 같이하는 기업 등에서 모은 기금으로 요양시설을 짓겠다는 계획이다. 3월1일 쉼터 개소와 함께 구성한 후원인단에는 전화(055-934-0301)로도 참여할 수 있다. 한 회장은 “그동안 ‘원폭2세 환우’ 문제를 혼자서 끌어안아온 부모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요양시설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했다.
합천을 떠나오는 길, 고 김형률씨가 언젠가 환우회 카페(http://cafe.daum. net/KABV2PO)에 올려놓은 글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보통 사람의 단순한 소망이 제게는 너무 힘든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꼭 지키고 싶습니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이 가지는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이 꿈은 지금 합천에서 성치 않은 자식 걱정에 눈조차 감지 못하는 노부모들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원자폭탄 투하 후 65년, 내내 잊히고 소외돼온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첫걸음이 합천에서 지금 막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