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호

임태희 대통령실장

윗분 심기 거스르지 않는 데 탁월한 능력

  • 송국건|영남일보 서울취재본부장 song@yeongnam.com|

    입력2010-08-30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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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장전입 전력
    • ‘황제 군복무’ 의혹 받아
    •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포커페이스
    임태희 대통령실장

    7월8일 대통령실장에 내정된 임태희 당시 고용노동부 장관이 과천 고용노동부청사를 떠나고 있다.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현 주중대사)과 정정길 전 대통령실장은 대통령 참모진을 통솔하는 스타일에서 뚜렷이 비교됐다. 류 전 실장이 참모들을 매섭게 휘어잡는 ‘군기반장’ 형이라면 정 전 실장은 되도록 자율에 맡기는 인자한 ‘교장선생님’ 형이었다.

    실제로 류 전 실장이 있던 이명박 정부 1기 청와대는 나름대로 ‘군기’가 잡혀 있었다. 정권 출범 초기여서 긴장한 탓도 있었지만, ‘정권창출의 1등 공신’ 류 실장이 이 대통령의 돈독한 신임을 바탕으로 청와대 조직을 확고하게 장악한 측면이 있다.

    류 실장은 청와대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자신에게 상세히 보고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참모들이 지레짐작으로 사소한 일이라고 판단해 보고하지 않았다가 실장실에 불려가 꾸중을 듣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실세 비서실장’이던 그는 2008년 6월 정두언 의원에게 ‘권력사유화’의 한 당사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4개월 만에 청와대에서 나왔다.

    반면 2년1개월 동안 장수한 정 전 실장은 ‘유(柔)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전형적인 학자 출신인 그는 큰소리를 내는 일이 좀체 없었다. 직원들에게도 예의를 차렸다. 그래서 영(令)이 서지 않았는지 2기 청와대에선 참모들의 일탈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권 일각에서는 “대통령실장을 강성 인물로 바꿔 내부 기강을 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제기됐다.

    임태희는 젊은 정정길?



    그러나 이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의 청와대를 이끌 세 번째 대통령실장으로 ‘강성’과는 거리가 먼 임태희 의원을 발탁했다. 임 실장이 굳이 류·정 전 실장 중 어느 쪽과 가까운지 구분한다면 정 전 실장 쪽에 많이 치우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한 여권 고위인사는 그를 ‘젊은 정정길’이라고 표현했다. 임 실장은 정 전 실장보다 14세 아래다. 한나라당 한 중진 의원은 “임 실장이 윗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했다. 이 의원은 “임 실장과 대화를 하다 의견이 엇갈리면 그는 자신의 견해를 종종 상대방에게 맞춰준다”고 했다.

    임 실장은 이 대통령의 비서실장 전문이다. 이명박 대통령후보 비서실장, 이명박 대통령당선인 비서실장에 이어 이번에 대통령실장이 된 것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앞서 두 번에서 돈독한 신임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임 실장은 이 대통령이 던진 세대교체라는 화두에도 어울린다. 경제관료 출신에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경륜도 고려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앞서 류·정 전 실장은 현실정치 경험이 전혀 없었다. 이 대통령은 취임 초 ‘탈(脫)여의도’를 선언했기 때문에 대통령실장을 비(非)정치인으로 발탁했다 그러나 지난 2년 반 동안의 탈여의도 정치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무엇보다 청와대가 탈여의도 정치를 하는 동안 지방권력의 상당 부분이 야당으로 넘어갔다. 여기에다 한나라당 내부의 알력도 심해져 보수세력 재집권 플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따라서 임 실장 발탁은 청와대가 여의도 정치에 적극 관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은 임 실장은 어떤 인물일까. 그는 한나라당 대표 비서실장, 대변인, 여의도연구소장, 정책위의장, 고용노동부 장관을 역임했다. 정치권에선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와 마찬가지로 일반 국민 사이에서는 낯설다.

    임태희 대통령실장

    이명박대통령(오른쪽)과 임태희 대통령실장.

    임 실장의 고향은 경기도 성남이다. 그는 팬클럽 카페에 올린 글에서 “형편이 어려운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반듯하게 자라기 위해 노력했다. 장학금을 받아야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판교 농촌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 한 시간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부친이 농협조합장을 지냈지만 어린 시절 청계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서울 경동고를 졸업했고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나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두 번의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다. 고교 입시가 있던 시절 희망했던 전기 입시에서 떨어져 후기인 경동고로 진학한 것이 첫 시련이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도 재수를 했다.

    대학 졸업 후 외환은행에 잠깐 다니다가 1980년 행정고시(24회)에 합격한 뒤 1985년 재무부 사무관을 시작으로 1999년까지 14년 동안 경제 관료의 길을 걸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8년 6월부터 1999년 10월까지는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 근무했다. 재정경제부 복귀 2개월 만에 경제정책국 산업경제과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접었다.

    장인 영향으로 정치입문

    그는 그리 길지 않은 관료생활을 접고 2000년 16대 총선을 통해 정치에 입문하기로 결심한 이유로 IMF사태를 꼽는다. 국민들이 IMF 외환위기로 고생하는데도 공무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이어서 정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의 한 지인은 그가 군 생활을 하면서 신군부 실세였던 장인인 권익현 전 민정당 대표의 영향을 받아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을 것이라고 했다.

    임 실장은 1982년 공군장교로 입대해 오산기지에서 근무하다가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로 전입했다. 보안사에서는 정치를 담당했다는 말도 있다. 청년장교로 미래의 꿈을 그리고 있을 때 정치의 속살을 깊숙이 들여다봤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그 때 보안사는 ‘정치인 사찰’을 예사로 하면서 정치 전반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러나 이런 군 생활의 경험보다는 당시 거물급 정치인이던 장인의 영향이나 후광을 받아 정치에 입문했다고 보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임 실장은 2009년 9월22일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지명된 뒤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위장전입과 재산 미신고 문제로 야당 의원들로부터 호된 질책을 당했다. 그는 의혹의 일부를 시인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권 전 대표의 이름도 청문회장에서 거명됐다. 야당 의원들의 거센 추궁에 그는 장인의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 군복무 중이던 1983년과 재무부에 근무하던 1985년 권 전 대표 지역구인 경남 산청으로 위장전입한 사실을 실토했다. 군인과 공무원 신분으로 선거판에 뛰어든 전력이 있는 셈이다.

    인사청문회에선 또한 장인의 비호를 받아 ‘황제 군복무’를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오산에서 복무하던 1983년 일반대학원 수업을 이수하고 석사 학위를 딸 수 있었던 것은 군 생활에서 특혜가 있었기 때문 아니냐는 추궁이었다. 임 실장은 퇴근 후 서두르면 저녁수업에 참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명했다. 또 임 실장이 오산기지에서 국군보안사로 전입된 과정에서도 권 전 대표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에도 장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진 그는 2000년 16대 총선 때 고향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첫 금배지를 달았다. 3선을 거치면서 유난히 눈에 띄는 이력이 네 번의 ‘비서실장’ 직함이다. 이 대통령 이전에도 그는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시절 당 대표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표가 당권을 잡았을 때는 대변인을 맡았다. 정치에 입문한 지 10년밖에 되지 않지만 한나라당의 여러 지도자로부터 두루 신임을 받은 셈이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그가 ‘무색무취’하다는 의미가 된다. 2007년 대선 한나라당 후보 경선 당시 그는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 측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지대에 있었다. 양쪽 진영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들로 구성된 ‘중심모임’에도 이름을 올렸다.

    “대통령이 원하는 대답만 할 것”

    임태희 대통령실장

    2007년 12월20일 임태희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고현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 당선증을 전달받고 있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임 실장에 대해 ‘결단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윗사람과 논쟁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아마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보다는 대통령이 원하는 대답만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바로 정정길 전 실장 스타일이 그랬다.

    임 실장 발탁에 대해 다른 한나라당 의원은 “그는 특정 실세의 따뜻한 배려를 받고 있는 사람 아니냐”고 했다. 이상득 의원이 인수위 구성 때부터 그를 후원했고 이번에 청와대 입성 과정에도 작용했을 거라는 항간의 소문을 의식한 지적이다.

    임 실장은 그동안 당에서 젊은 3~4선 그룹인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이 당 쇄신을 촉구할 때도 한걸음 비켜서 있었다. 한 당직자는 임 실장을 전형적인 ‘선비 스타일’로 꼽았다. 과단성이 없고 관료 냄새가 물씬 난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른 당직자는 “임 실장은 저녁 모임에 나가서도 잡담을 하지 않는다. 식사 자리에서도 ‘토론형’”이라고 전했다. 임 실장이 승승장구하는 데 대해 “실제보다 과대포장됐기 때문”이란 말도 한나라당 주변에서 들을 수 있다.

    반면 당내에서 그를 호평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가 당직을 맡았을 때 보좌했던 사무처 직원은 “임 실장이 윗사람에게 자기 생각을 잘 얘기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예스맨’은 결코 아니다”라고 했다. 윗사람이 어떤 사안을 놓고 확고한 결정을 내린 뒤 의견을 물어보면 선택을 존중하기 위해 자신의 견해를 내놓지 않지만, 망설이고 있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견해를 강하게 제시 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경제 지식이 해박해 공식회의 석상에서 이런저런 정책 아이디어도 곧잘 낸다고 한다.

    당의 다른 관계자는 “임 실장은 포커페이스다. 사람을 대할 때 항상 미소를 약간 머금고 있는데 속마음을 전혀 모르겠더라”고 했다. 하지만 그 관계자도 “예스맨은 아니다”고 했다. ‘노’라는 말을 할 때도 용어를 가려 순화해서 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예스맨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예스맨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가 한번 데리고 있던 사람을 끝까지 챙기는 데 대해서도 당내에선 긍정적인 목소리가 많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보좌진을 내보낼 땐 “나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내 이름을 팔아도 좋다”고 격려해준다. 또 정부 인사가 있을 때면 자기 사람들을 적극 챙긴다. 한 당직자는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어느 모임에서 임 실장을 만나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다는 원로 정치인은 “생각이 반듯한 젊은 정치인이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입 무거워 MB에겐 딱이다”

    임 실장은 의원 시절 국정감사 대상 정부 부처에 대해서도 결코 모난 언행을 하지 않았다. 정부 부처 공무원들을 불러놓고 호통 치는 일도 없다. 이런 모습은 경제관료 출신 의원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한솥밥을 먹던 선배·동료·후배인 만큼 되도록이면 격려해주고 이런저런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공무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자세를 보인다.

    임 실장은 고용노동부 장관 시절이던 지난해 11월 큰딸을, 올해 3월 막내딸을 각각 시집보냈다. 두 번 다 청첩장을 돌리지 않았고 축의금도 사양했다. 공직자로서의 몸가짐이 배어 있다고 인정해줄 만한 대목이다.

    민주당 온건파 중에서도 이런 임 실장의 스타일을 높이 평가하는 의원들이 있다. 대통령실장 인사가 났을 때 민주당은 공식적으로 ‘회전문 인사’라고 비판했지만 임 실장 개인의 자질 문제를 들추진 않았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임 실장 내정자는 정부에서 오랫동안 공무원으로 일을 했고, 국회에서도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무난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다.

    요컨대 임 실장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가에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극명하게 교차하는 독특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경기도 지역 언론사의 한 기자는 임 실장을 오랫동안 취재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정리한다.

    “호평하는 사람이나 악평하는 사람이나 틀린 얘기가 아니다. 그만큼 임 실장의 스타일은 보기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는 임 실장이 ‘맞춤형 보좌’에는 제격이라는 말이 된다. 비서실장이 자기 생각을 너무 많이 내비치고 말을 많이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크렘린’으로 통할 만큼 입이 무거우니 이런 점이 중요한 이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딱 아니냐.”

    이 기자는 임 실장이 청와대로 들어가면서 의원직 포기 결단을 내린 점도 높이 샀다. 정치인이 한번 금배지를 떼면 다시 달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임 실장은 8월2일 첫 청와대 직원 조례에서 ‘무한책임론’을 강조한다.

    “청와대는 최종 책임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선 안 되며 무한책임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청와대는 모든 문제의 귀착점이자 해결처가 돼야 한다. 정부 출범 때 국민성공시대를 만들겠다고 한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약속을 되새기며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실천에 힘쓰자.”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그인지라 그간 자리 욕심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2009년 9월 개각을 앞두고 그는 자기의 전공을 살려 지식경제부 장관직을 강력히 희망했다. 그러나 친박계인 최경환 의원에게 돌아갔고 임 실장은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고용노동부 장관을 맡았다. 당시 그는 동료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격하게 울분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번 당·정·청 개편 때도 임 실장은 총리 자리를 은근히 기대했다는 전언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임 실장이 중요한 역할을 할 부분이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임 실장은 소위 ‘모피아’ 출신으로 대기업과 노동계 모두에 대해 견제심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IMF 당시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과 노동계의 무리한 요구가 외환위기의 요인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정치권 일각에선 그가 이 대통령이 대기업을 압박하며 친서민 정책을 펼치는 점을 잘 보좌할 것으로 본다. 홍준표 원내대표-임태희 정책위의장 시절 두 사람은 서민지원 정책과 관련해 약간의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홍 원내대표는 서민혜택을 늘리자고 했는데 임 의장은 원론적으로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 압박 부분에선 두 사람의 의견이 같았다고 한다.

    노동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쌓여 있는 그가 2009년 9월 고용노동부 장관에 임명됐을 때 최대 노사현안은 타임오프제(유급 노조활동시간 제한 제도)였다. 여권 내에선 민감한 문제였지만 평소 노사 문제에 관심이 많던 그가 큰 무리 없이 일을 처리했다는 평이다.

    또 이명박 정부 들어 최악의 상황으로 빠진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일에도 임 실장이 일조할 부분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는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있던 지난해 10월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과 비밀리에 만나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제를 조율한 바 있다. 앞서 그해 8월 말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참석을 위해 서울을 찾은 북한 조문사절단을 비밀리에 접촉하기도 했다.

    임태희와 김태호의 다른 처지

    지금도 그는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선 남북 정상이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대북 전문가는 “임 실장이 이재오 특임장관 등과 함께 남북정상회담의 막후 채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미 한 차례 남북정상회담 특사 역할을 한 만큼 다시 맡기지 않겠느냐는 거다.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자신의 핵심 측근인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을 베이징에 보낸 바 있다.

    임 실장은 김태호 총리 후보자와 함께 세대교체의 두 축을 이루고 있다. 김 총리 후보자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므로 국민을 직접 상대하면서 자기 정치를 할 수 있는 반면 임 실장은 대중 정치인으로 뜰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의원직까지 내놓고 이 대통령의 숨은 손발이 된 임 실장으로선 홍보나 이미지가 아닌 이 대통령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드는 ‘실질적인 실적’을 내어 거기에서부터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짜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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