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가난한 자의 족쇄,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라”

‘양심적 지식인의 살아 있는 표상’노엄 촘스키 인터뷰

  • 장영준 중앙대 교수·언어학

    입력2006-11-24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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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구제금융을 받은 사람은 한국민이 아니라 국제투자가들입니다. 한국민들은 가혹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은행과 투자가들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사회적 비용을 국민이 떠안은 셈이지요.” 》
    노엄 촘스키 교수의 연구실 정면에는 버트런트 러셀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나를 지탱한 세 가지 열정은 사랑의 갈구, 진리 추구,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라는 러셀의 매니페스토와 함께 -. 비서의 안내를 받아 잠시 기다리자 촘스키 교수가 예의 그 유명한 미소를 지으며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

    촘스키를 소개하는 상투적 꼬리표는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뉴욕타임스), ‘인류 역사상 여덟 번째로 자주 인용되는 인물’(시카고 트리뷴) 등 언론의 평가로부터 ‘현대 언어학의 창시자’ ‘가장 예리하고 끈질긴 사회비평가’라는 학계의 평가까지 무척 다양하다. 지금까지 1000여 편 이상의 논문과 80여 권의 저서를 냈고, 세계 유수의 대학과 기관으로부터 수많은 명예학위와 영예상을 받았다.

    변형생성문법으로 알려진 촘스키의 언어이론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의 일부로 쓰여진 ‘언어이론의 논리구조’가 1955년에 발표된 이래 기존 언어학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다. 유럽과 북미 양 대륙에서 견고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구조주의 언어학은 촘스키의 새로운 언어이론으로 일거에 대치됐고, 변형생성문법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현대 언어학의 대명사로 군림해왔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촘스키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4년 베트남전 반대 데모와 그가 66년 ‘뉴욕타임스’에 발표한 ‘지식인의 책무’란 에세이를 통해서였다. 이후 촘스키는 언어학자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사회비평가로 미국의 개입주의적 외교정책이 내포한 야만성을 신랄하고도 끈질기게 폭로하고, 동티모르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을 고발하는 등 지식인으로서 책무를 다해왔다.



    촘스키 교수는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현대 언어학의 창시자’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심각한 왜곡이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수많은 저서와 논문 중에서 언어학 관련 저서는 고작 스무 권 남짓이다. 나머지 대다수 저작들은 사회비판과 정치분석, 언론분석을 다루고 있으며, 언어학 강의 못지않게 많은 시간을 정치 강연에 할애하고 있다. 평소 그의 언어학 강의에는 전세계에서 300∼500명의 학자가 참석하지만, 그의 정치강연에는 2000∼3000명의 청중이 몰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도 그는 ‘최소주의’라 불리는 자신의 언어이론을 한층 심화하며 왕성하게 논문을 발표하고 있으며, 방대한 양의 책자와 세계 도처에서 하는 강연을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의 본질과 폐해를 파헤치는 작업에서부터 코소보나 르완다 등에서의 인권유린에 대한 고발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강대국에 의한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곳이면 베트남이건 남아공이건 니카라과건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실태를 고발하는 그의 철저한 투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더 나이만은 “세상이 제정신이라면 촘스키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야 하는데 아직도 우리는 헨리 키신저와 같은 인물에게 노벨상을 바치고 있다”고 개탄했다. 1955년 MIT에 자리를 잡은 이래 언어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미국 외교정책 비판과 인권운동을 포함한 끝없는 도전을 시작한 이래 거의 반세기 동안 변함없이 한 길을 걸어온 촘스키의 삶은 현대판 오디세이아라고 할 수 있다.

    언어학자 촘스키, 정치비평가 촘스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작년에 수술을 받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근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건강은 아주 좋습니다. 며칠 전에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곳에서도 아주 많은 강연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1928년 생이시니까 올해 72세가 되시고….

    “잠깐만요. 장교수는 내 나이를 늘리는군요. 미국 나이로는 아직 71세인데, 아마 한국 나이로는 72세가 되겠군요.”

    ―그렇군요. MIT에서 교편을 잡으신 후 현대언어학의 창시자로, 또 끈질기고 철저한 사회비평가로 활동하신 지 올해로 약 45년이 되었습니다. 질풍노도 같은 교수님의 삶을 회고한다면 어떤 보람이나 아쉬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답하기가 불가능한 질문이군요. 제 말은 성취가 있었다면 그것은 제 개인적 성취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선 언어학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구조주의로 대표되던 45년 전과 비교해볼 때 언어학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본질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당시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연구 주제와 토픽들이 떠올랐지요. 오늘날의 연구 성과는 사실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45년이 아니라 단 1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던 주제들이 오늘날 연구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변화라고 할 수 있지요. 언어뿐 아니라 시지각이나 인지과정을 포함한 인간 본질과 관련된 모든 것이 분석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45년 전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당시는 행동주의 과학이 압도적으로 군림하던 시기였습니다. 행동주의와 학습만능주의가 지배적인 세계관이었어요.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언어 및 언어관련 학문은 극도로 얄팍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물의 배열을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모든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동주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중요한 것이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로 언어학적 측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정치적인 면에서 같은 질문을 드린다면 어떻습니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1960년대와 70년대에 미국 사회가 좀더 문명화했고, 일정 부분은 그런 조류가 계속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동적 흐름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가려는 강력한 움직임이 있고,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말은 소위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자리잡으면서 점점 더 공격 강도를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권력에 족쇄를 매야”

    ―화제가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씀을 나누기 전에 개인적인 질문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교수께서는 전기나 자서전을 쓰는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후세를 위해 회고록을 집필할 계획은 없으신지요?

    “그런 계획은 없습니다. 사실 엄청난 회고록 집필료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저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입니다.”

    ―온 세상이 뉴 밀레니엄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20세기는 야만적인 대소 규모의 전쟁, 전체주의 실험, 인권유린 등으로 점철된 역사의 실험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수께서는 지난 세기의 경험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저는 밀레니엄이란 단어를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장교수께서 질문을 하시니 그 단어를 사용하는 수밖에요. 20세기의 교훈은 19세기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를지 모르지만, 전반적인 교훈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조간신문을 보면 르완다의 학살에 대한 유엔의 자세한 보고서가 실려 있습니다. 이런 학살로부터 우리는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장교수께서 미국에 있다면, 미국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이러한 학살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교훈은 국가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이 국가 권력을 제한할 수 있어야 국가가 폭력적이고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의 참여야말로 한 가지 방법입니다. 이것을 60년대에는 다른 용어로 부르기도 했는데, 제가 보기에 그것은 민주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타인의 명령을 맹종한다면 민주주의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일부 관측가들은 촘스키 교수를 무정부주의자로 보지만, 그 스스로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libertarian socialist)’로 자처하면서 무정부주의자들과 일정한 선을 긋고 있다. 플라톤-데카르트의 이성주의에 사상적 젖줄을 대고 있고, 루소·훔볼트·오웰 등에게 영향을 받은 그는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의 찬미’에서 묘사한 무계급의 평등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무정부주의적 사회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버트런트 러셀과 존 듀이를 흠모하는 그를 통해서, 우리는 에밀 졸라처럼 앙가주망(사회참여)을 통한 좋은 사회건설을 제1의로 삼았던 지식인의 한 전범을 보는 것이다.

    ―오늘날 초국적기업(megacorporations)들은 ‘테크노피아(technopia)’를 노래하고 있고, 많은 지식인들은 ‘초위기(megacrisis)’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21세기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어떤 것입니까?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인류가 한순간에 파멸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류를 파멸로 이끌 온갖 수단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핵무기나 다른 대량 살상무기가 그 한 예지요. 그리고 그런 위험성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코소보에서의 폭격은 핵 확산의 위험성을 증가시켰음이 명백하지만, 이런 사실은 미국에서는 잘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미국의 보호국인 이스라엘에서조차 전략분석가들이 이런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는 데 말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이 핵무기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인류파멸의 위험성을 높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여간 이러한 대량 살상무기의 위험에 더하여 환경파괴야말로 인류를 파멸시킬 정도에 이르렀고, 지금도 우리는 그러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장기적인 과제라고 볼 수 있다면, 21세기에 뿐 아니라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들이 있습니다.

    현재 아프리카에는 에이즈로 인해 400만, 곧 4000만이 될지도 모르는 고아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의약품을 보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전세계의 엄청난 인구가 기아에 허덕이고 수백만 여성들이 간단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여 출산 과정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정말 시급한 문제들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라는 미국에서조차 약 3000만명이 배고픔을 겪고 있고, 25%의 아이들은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세계적 빈부격차야말로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최근에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해부한 교수님의 저서 ‘Profit Over People’(‘그들에게 국민은 없다’로 번역·출간됐다 -대담자 주)이 번역돼 베스트셀러 상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만, 지식인을 포함하여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일찍, 그리고 강력하게 신자유주의를 비판해온 교수께서 보시기에, 새 시대에도 신자유주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 아니면 대안 모색이 가능한지 말씀해 주십시오.

    “많은 지식인들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장교수 말씀이 사실이기를 바랍니다. 지식인들은 대개 기존 체제를 압도적으로 지탱합니다. 소수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소외되지요. 지난 20~25년 동안의 사회정책은 경제법칙이 아니라 부와 권력을 소수에 집중시키려는 국가정책에 의해 디자인돼왔습니다. 그 결과 극소수만이 동화 속의 번영을 노래하고, 나머지 대다수 국민은 가난한 잉여인간으로 살아가게 됐습니다. 극도의 빈부격차가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 의해 고안된 것입니다.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지요. 물론 우리는 이것을 막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떻게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막을 수 있습니까?

    “먼저 신자유주의 담론에는 엄청난 속임수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어떤 부문은 신자유주의 질서에 굴복했고, 어떤 부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초국적 기업은 신자유주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데, 이 점은 마치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같지요.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시장원리가 적용되지만, 부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사상의 핵심은 그러니까 당신이 만일 제3세계에 살고 있다면 시장원리에, 경제법칙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부유한 특권층이라면 당신은 공적 자금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그 비용과 위험부담은 모두 사회로 이전됩니다. 이럴 수 있는 장치로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금융기관이 있습니다.

    IMF는 외환위기에 처한 나라들을 ‘구제’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 국제금융기관들은 결국 (외환위기를 겪은 국가들에 투자한) 투자가들을 구제한 것이고, 해당 국가 국민들에게 극심한 비용을 전가함으로써 은행가와 투자가들이 이익을 보게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험의 사회화입니다.

    부유한 투자자는 위험한 투자를 하면서, 공적 부문이 그 위험을 보전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IMF와 같은 기관이 나서는 것이지요. 미국은 생산과 연구개발에 국가가 주도권을 행사하고, 따라서 비용도 사회적 전이가 용이하지만, 이득은 사기업이 차지합니다. 사기업들은 시장원리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사기업은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적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기업은 하향식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오직 경영자나 소유자만이 명령과 결정을 내리고, 아랫사람은 그저 그것을 집행할 뿐입니다.

    초국적 기업들은 정부와 달리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며, 웬만한 국가들보다 덩치가 더 크고 강력합니다. 소위 무역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40~50%가 이들 초국적 기업의 내부거래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 말은 이것은 자유무역이 아니라 통제무역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기업간 전략적 제휴를 통해서 가령 IBM과 도시바가 합작을 하기도 합니다. 시장원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조직적 프로그램이 이러한 합작을 통해 강화됩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합작 기업들은 강력한 국가의 공공지원을 받고, 위험비용은 사회로 이전시키며, 시장원리를 회피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고안해냅니다. 이렇게 해서 신자유주의는 현실이 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됩니다.

    그러면 대안은 없는가? 시장원리가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적용되고, 부유층과 특권층에는 무용지물인 신자유주의에 대안은 없는 것일까요? 한 가지 가능성은 누구든지 시장원리에 복종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자들은 절대로 시장원리를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따라서 올바른 대안은 모든 사람이 시장원리를 받아들이도록 사회적으로 강제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안이 강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은행가나 투자가에게만 이익이 돌아가지 않고 모든 국민에게 이익이 분배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IMF 이후, 누가 한국을 소유하는가”

    ―한국과 말레이시아는 모두 19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아주 상이한 대응방식을 취했습니다. 즉 한국은 IMF의 가혹한 요구조건들을 수용한 반면, 말레이시아는 IMF의 요구사항을 거부했지요. 현재 두 나라는 모두 외환위기를 탈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교수께서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제금융을 받은 사람은 한국민이 아니라 국제 투자가들입니다. 한국민들은 가혹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은행가와 투자가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사회적 비용을 국민이 떠안은 셈이지요.

    말레이시아는 다른 방식을 취했습니다. 장교수도 아시겠지만, 그들은 자본의 국외 유출을 통제한 결과 모든 경제학자들의 비난을 초래했지요. 경제학자들은 말레이시아가 재난을 자초했다고 주장했지만, 결과는 딴판이 되었어요.

    한국 경제는 매우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누가 한국을 소유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 말은 말레이시아와는 달리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외국인 소유주에게 팔려나갔다는 것입니다. 한국이 위기에 빠져들자 저평가된 한국의 자산이 싼 값에 팔려나갔어요. 마치 떨이시장 같았습니다. 생각해봅시다. 30년 넘게 한국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된 기업과 재산이 서구 세계에 헐값에 팔려나갔던 것입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지만, 한국과 말레이시아는 기본적으로 상이한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기에 단순 비교는 무리일 것입니다. 3년 전 동아시아가 겪은 위기는 결국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에 원인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아시아의 위기는 멕시코 위기 몇 년 후에 발생했고, 멕시코 위기는 러시아 위기, 브라질 위기에 뒤이어 터졌습니다. 사실 자본 흐름이 자유로워진 이후 외환위기는 주기적으로 발생해왔고, 아시아 위기는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 세계무역기구(WTO)나 IMF 등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강요하는 금융기관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자간 투자협정(MAI)은 한국 언론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자간 투자협정이 조인되면 가령 마이크로소프트나 제너럴 모터스(GM) 같은 회사에 어떤 이익이 돌아가는지 간단히 설명해 주시지요.

    “OECD나 서방선진7개국(G7) 등의 강력한 경제집단은 언론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자간 투자협정이 언론에 알려지면 통과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다자간 투자협정이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올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기업 수뇌들은 협정을 비밀리에 통과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지요.

    그러나 다자간 투자협정을 통과시키려는 시도가 언론에 알려지자 그들은 일단 한발 물러섰습니다. 지난번 시애틀 WTO 회의에서 다시 한 번 협정을 통과시키려고 했으나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됐고, 그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요. 유럽연합(EU)은 현재 변형된 형태의 다자간 투자협정을 비밀리에 통과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협정이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믿지만, 협정이 가져올 파괴적인 결과를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자간 투자협정은 기업의 투자결정이 자유롭게 이뤄지고, 개별 국가가 경제적 성장이나 결정에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비 수준이나 근로기준에 대해서, 또는 어떤 곳에 투자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개별 정부는 아무런 권한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다자간 투자협정이 발효되고 나면 어떤 산업을 발전시키고, 어떤 부문에 투자를 할 것인가 등등이 정부의 권한을 벗어나게 됩니다. 모든 결정권이 투자가들의 손아귀에 귀속되어, 그들 천하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미 사람과 똑같은 존재로서 모든 권한을 가진 사기업들이 다자간 투자협정하에서는 인격체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소유하게 됩니다. 가령 제너럴 모터스가 멕시코에 지사를 설립하면, 멕시코 지사는 멕시코 회사와 똑같은 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자연인은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장교수가 뉴욕에 와서 미국인과 똑같은 권리를 달라고 하면, 아마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아마 2초 만에 감옥에 갈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사기업이 그렇게 하면 같은 권리가 주어집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장 교수나 내가 이런 사기업들의 행태가 못마땅하여 고발하고자 해도 고발할 권한이 없는 반면, 사기업들은 개인을 고발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사기업들은 인격체의 권한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자간 투자협정의 본질입니다.”

    NGO의 역할

    ―한국은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뼈저리게 경험한 나라입니다. 경제회복과 빈부격차의 해소 등이 시급한 과제겠지요. 다시 말하면 사회체제의 모델로 미국식과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럽의 지식인들은 교수님의 정치분석에 동의하면서도 미국의 체제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데, 유럽 지식인들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의견에 동의하는 유럽의 지식인들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미국의 사회체제가 유럽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럽, 특히 독일이 미국보다 더 나은 사회안전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는 유럽사회가 더 역동적이라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유럽의 사회체제는 교회나 봉건제도 등과 같은 반동적 기관들의 작용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미국은 그렇지 않았지요. 미국은 극도로 비즈니스화한 사회이고, 유럽식 사회안전망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유럽사회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럽은 현재 권력과 재산을 (국민에 대해 전혀 책임지지 않는) 중앙은행에 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은 기본적으로 은행에 기반을 둔 연합체이고 유럽 중앙은행은 어떠한 미국은행도 가지지 못한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지만 이러한 지적은 이미 대표적 주류 우익 언론인 ‘포린 어페어즈’도 지적한 것입니다. 유럽은 거대한 권력을 중앙은행에 넘김으로써 반민주적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문제들도 많습니다. 기존 사회안전망이 점차 후퇴하고 있는 것이 한 예입니다.”

    ―지난번 시애틀에서의 WTO 회의에서 다자간 투자협정이 실패로 돌아간 데에는 비정부기구(NGO)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컸습니다. NGO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나 할까요. 교수께서는 NGO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맞습니다. 비정부기구의 역할이 컸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자간 투자협정은 지난 3년 동안 비밀리에 진행됐으므로 아무도 그 실체를 몰랐었지요. 자료 공개를 거부해오다가 기업계가 책자를 발간하게 됐고, 언론이 뒤를 캐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언론도 그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풀뿌리 시민단체들에 의해 비밀이 공개됐습니다. 다자간 투자협정이 비밀리에 진행돼왔기에 한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NGO의 역할은 앞으로뿐만 아니라 언제나 중요합니다. 한국의 노동권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것이 거저 주어진 선물일까요? 아니면 신의 선물로 주어졌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많은 풀뿌리 조직과 민중의 투쟁에 의해 쟁취됐습니다. 과거에나 현재나 역사는 늘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봉건주의가 무너진 것은 왕과 여왕들이 권력을 더 이상 유지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자간 투자협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원도 없고 언론의 지원도 받지 못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상호 연결된 풀뿌리 조직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권력이 집중된 집단으로 하여금 후퇴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시애틀 사건은 단지 한 예에 지나지 않아요. 제가 알기로는 인터넷으로 연결된 이런 풀뿌리 조직들이 올 봄에 다시 한 번 전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스위스의 다보스에서 개최된 세계 경제각료회의를 의미한다.-대담자 주).”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몇몇 독과점 사기업이 인터넷과 같은 기본적인 소통수단을 지배하게 허용한다면 어떠한 사회적·문화적 결과가 초래되겠습니까? 랄프 네이더 같은 사람은 공중파의 공공성을 주장하면서 사기업이 소유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교수도 기억하시겠지만 인터넷은 공공의 창의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공공의 주도에 의해, 국가기관에 의해 개발됐는데, 이 공공의 성취물이 불과 수년 전에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사기업에 넘어갔습니다. 1995년이었지요. 그것은 엄청난 선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공공재가 사기업에 넘어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 결정이 비밀리에 이뤄졌음은 물론입니다. 이제 사기업은 권력을 다원화하고 민주주의를 신장하는 도구로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려 합니다. 지금 투쟁이 벌어지는 분야지요.”

    ―그러니까, 인터넷이 기존 주류 언론 매체에 대항하는 매체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다자간 투자협정이 무산된 것도 인터넷 덕분이지요. 시애틀에서의 성과도 마찬가집니다. 동티모르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촘스키 교수는 1975년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강제 병합된 직후부터 세계 언론과 지식인 사회의 침묵 속에서도 인도네시아 군이 저지른 반인륜적 만행을 규탄하고 세계 여론에 호소했으며, 인도네시아 군에 대한 미국의 부도덕한 지원을 폭로해왔다. ―대담자 주).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동티모르에서의 만행에 대해 수많은 저항과 데모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인터넷이 등장하게 되자 산발적이고 개별적인 저항그룹과 데모가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멕시코의 예를 볼까요? 인터넷이 없었다면, 사파티스타 농민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멕시코군에 의해 단 5분 만에 몰살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멕시코 내에서뿐 아니라 국제사회로부터 충분한 정보와 지지를 이끌어냈고, 멕시코 정부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교수님의 책은 언어학 분야를 제외한다면 한국 독자들에게 잘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amazon)이나 Z-Net을 통해 교수님의 책을 사거나 글을 접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인터넷의 세계 시장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인터넷은 이중적입니다. 어떤 목적에 이용하느냐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지요. 인터넷은 이제 거대한 홈쇼핑 센터로 변했고, 국민들을 각성시킬지도 모르는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는 물건을 사기 위해 모니터 앞에 달라붙어 있게 만들지요. 인터넷은 거대한 시장을 창출했을 뿐입니다.”

    “누구를 위한 세계화인가”

    ―이렇게 보면 오늘날 다방면에서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자본의 세계화가 빨라지는 한편, 인터넷 등을 통한 저항세력의 세계화도 확산하고 있습니다.

    “물론이지요. 세계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장교수께서 자본의 이동을 언급했는데, 그것도 세계화의 한 양상이지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람의 이동이 아니라 자본의 이동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자유무역을 신봉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는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자유무역의 근본 원리임을 간파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갈 수 없다면, 자원이 적절하게 분배될 수 없고, 자유무역은 불가능하지요.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은 또 다른 세계화의 한 양상이 될 것입니다. 인권의 세계화, 사기업이 초래하는 각종 문제들의 세계화 등도 현재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세계화가 있을 수 있지요.”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결국 부정적인 측면이 더 나타나지 않을까요?

    “세계화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장교수가 여기에 올 수 있다는 것도 세계화입니다. 문제는 어떤 종류의 세계화냐, 누구의 이해관계에 따른 세계화냐 하는 것입니다.”

    ―지난 세기의 가장 큰 승리자 중 하나는 바로 과학인 것 같습니다. 과학은 원자탄, 유전자 변형(GM)식품, 생명복제, 게놈 프로젝트 등을 가능하게 했는데, 이는 마치 고삐가 풀린 망아지 같다고 할까요? 이런 경향에 대해 교수님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십니까? 말하자면, 과학도 인간의 얼굴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장교수 말씀은 주로 테크놀로지에 관한 것이지요. 과학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고, DNA를 비롯한 인간 생명의 비밀을 밝혀주었습니다. 문제는 과학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느냐 하는 것이지요. 장교수가 염려하는 것도 바로 그런 측면이겠지요. 비유하자면 과학은 마치 망치와 같습니다. 망치는 누군가의 두개골을 부수는 데 사용할 수도 있고, 집을 짓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망치 쪽에서는 상관없지요. 문제는 과학이 어떠한 제도적 환경 아래서 발전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테크놀로지는 급속도로 변화, 발전합니다. 주로 국가의 이니셔티브에 의해서였습니다.”

    ―언어학, 생물학, 신경생리학, 인공지능, 두뇌과학 등을 포함하는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 특히 짧은 기간에 괄목할 만큼 발전했습니다. 앞으로의 인지과학의 주요 연구과제는 어떤 것들입니까?

    (1950년대 말 미국의 매사추세츠 공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인지과학은 인접 학문적 성격뿐 아니라 오늘날의 지식기반 사회에 비추어볼 때 21세기의 핵심적 분과학문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직은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인지과학에 대한 인식이 한국에서도 점차 높아가고 있음에 견주어보면, 인지과학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대담자 주)

    “과학 발전은 다분히 기회주의적입니다. 제 말은 사람들은 뭔가에 대해 부정확하게, 그렇지만 어느 정도 그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면 그 이해의 단계에서 연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이슈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요. 단지 우리가 아는 한도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할 뿐입니다.

    언어학을 예로 들어볼까요. 언어의 가장 명백한 사실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이나 정신의 상태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장 교수와 제가 마음만 내키면 지금 야구에 대해 토론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다소 부적절할지는 몰라도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지요. 제가 손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다른 것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어와 인간 마음의 핵심적인 속성입니다.

    언어를 연구하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언어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 모릅니다. 언어 연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나쁜 선례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연구가 가능한 것만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주로 인간의 언어능력에 개입하는 메커니즘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이것은 시각이든 분자생물학이든 언어 연구든 마찬가지입니다. 작동되는 메커니즘과, 그것의 기저에 흐르는 원리를 터득합니다. 세포활동의 기본적 메커니즘은 후에 이런 저런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관련하여 가장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인간의 연구에서는 직접 실험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고양이나 원숭이를 이용해서 시각체계라든가 기타 등등을 알아냅니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고양이나 원숭이를 해부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고양이나 원숭이를 해부해서 인간의 언어를 연구하는 것은 마치 박테리아를 연구해서 포유류의 생식을 알아내려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일이지요. 그래서 새로운 비침투적 테크놀로지를 통해 두뇌의 작용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직접 실험을 할 수 없는 한계를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지요.”

    ‘플라톤의 문제’ vs ‘오웰의 문제’

    ―촘스키 교수께 언어학을 공부한 학생으로서 언어와 관련된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조지 오웰은 ‘정치와 영어’라는 에세이에서 정치적 수사법과 글쓰기가 모호한 미사여구로 이루어진 허구라고 지적했습니다. 정치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언어사용의 문제입니다. 도대체 권력자들이 진실을 말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본질적으로 그들의 의도를 숨기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촘스키 교수의 두 가지 특이한 이력에 대해 궁금해하고 질문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언어학자인 교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사회비평가가 되었는가, 혹은 양자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네. 그 문제에 관해 자주 질문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장교수가 만일 목수라면 인간이기를 그만두는 것일까요? 목수는 목수 일만 해야 하고 인권에는 관심을 가지면 안 될까요? 언어학자라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것일까요? 물론 아니지요. 정치학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정치적 언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촘스키 교수께서는 이성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언어를 설명하면서, 소위 ‘플라톤의 문제(Plato’s Problem)’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입력에 비해 출력이 훨씬 더 많은 현상이지요. 그런데 정치적 측면에서는 이성의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수께서 ‘오웰의 문제(Orwell’s Problem)’라고 명명했듯이, 수많은 학습과 반복을 하고서도 곧바로 교훈을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왜 이런 괴리가 나타날까요?

    “먼저 용어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언어연구는 이성주의 원칙에 기반을 두지만, 언어 자체는 별개지요. 마찬가지로 정치적 분석은 이성주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정치 자체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가 그런 용어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절한 용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주어진 정보가 적은데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플라톤 자신이 제기한 문제였습니다. 플라톤은 그 물음에 스스로 대답하기를, 사물을 이해하는 능력이 우리 유전자에 내재한다는 것이었지요. 저는 플라톤의 생각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인간은 그렇게 많은 정보를 받고서도 왜 그렇게 아는 것이 없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제가 ‘오웰의 문제’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정보에 대한 접근을 막으려는 기득권자들의 끊임없는 방해공작입니다. 가령 다자간 투자협정에 대해서는 엄청난 정보가 있지만, 장교수도 아시다시피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비밀에 부치려는 세력의 치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국민들이 그것을 알면 당장 저항운동이 일어날 것을 알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한사코 그것을 비밀에 부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알고 보면 수많은 광고업체, 홍보회사, 텔레비전, 매스미디어 등이 한 통속입니다. 이런 기관들이 전체주의 권력구조에 해가 될 수 있는 정보가 국민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놀랍지만 사실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것은 언제나 사실이었고 서구와 같은 자유세계에서는 새로운 형태로 출현할 뿐이지요.

    권력자들이 국민을 폭력에 의해 통제할 수 있을 때는 이런 여론 조작이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국민을 더 이상 폭력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면, 마침내 사상통제와 프로파간다(선전)가 필요하게 됩니다. 광고 산업이나 정치학 서적을 들춰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들입니다.

    문제는 지식인들이 이런 관행에 일조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민의 사상을 통제하라, 그러지 않으면 통제권을 벗어날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기술이 고안됐습니다. 오늘날 광고는 거대한 산업이 됐습니다. 기업들은 국민들로 하여금 오직 물건을 사는 데만 혈안이 되도록 유도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켜거나 신문을 펴는 순간 우리는 사기업의 이러한 노력에 압도되고 맙니다.”

    ―화제를 좀 바꾸겠습니다. 교수께서는 30여년 전인 1966년 ‘뉴욕타임스’에 쓰신 ‘지식인의 책무’라는 글에서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을 폭로하고, 정부가 내세우는 명분과 동기, 숨겨진 의도 등을 분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선 지식인이란 무엇입니까?

    “지식인이란 기묘한 용어입니다. 지식인이란 기본적으로 특권적 자원을 사용할 수 있고, 특별한 훈련을 받아서 그들의 정신을 다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특권을 누리지 못합니다. 가령 일주일에 50시간을 식당에서 일한다면, 세상의 문제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겠지요. 작가거나 대학강단에 있다면,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개별 정부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실제적인 정치·경제적 힘은 거대 다국적 기업이 가지고 있습니다. 즉 거대 기업은 모든 불만을 정부로 쏠리게 하고 그들은 장막 뒤에서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시스템 아래서 지식인들이 책임소재를 가려내기는 더 어려워진 듯합니다.

    “정부의 통계표를 보십시오.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지출이 OECD 국가에서는 증가했지만, 가난한 나라에서는 감소하거나 정체상태입니다. 레이건 정부 시절에 사기업에 대한 정부의 공공보조금과 위험부담률은 급팽창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신자유주의의 목적입니다. 이런 것을 알기 위해 ‘뉴욕타임스’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자체가 거대 사기업이기 때문이지요.

    지식인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건전한 양식(common sense)’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국민의 관심과 비난을 정부로 돌리려는 사기업의 선전 전략은 명확합니다. 국민들이 정부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으로 사기업의 선전술은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사기업의 끊임없는 선전의 결과 정부의 긍정적인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아예 사라져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세금 징수원이 오면 사람들은 그가 돈을 훔쳐간다고 생각하고 그를 미워합니다. 그가 공공기금을 조성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지요. 정부가 공공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를 도입하면, 사람들은 곧바로 그에 반대하도록 훈련받았습니다.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게 되면 사기업 권력집단은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늘 국민의 불평불만을 정부로 향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인도네시아군이 1975년 동티모르를 침략하여 인종청소를 자행한 직후부터 25년 넘게 교수께서는 동티모르인들의 고통을 세계에 알리고 인도네시아군의 만행을 고발해왔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야만적 만행을 현재 체첸 공화국에서 러시아군인이 저지르고 있지만 유엔의 개입이 없습니다. 세계 지식인들의 가시적인 움직임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국제사회는 체첸에서 자행되는 만행에 대해 목이 터져라 떠들고 있습니다. 체첸 문제는 모든 곳에서 주요 국제문제가 되었어요. 동티모르와는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국제사회는 동티모르에서 학살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지난 25년 동안 진실을 외면해왔으며,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동티모르에서의 학살이 인종청소에 이르게 된 배경과 관련해 인도네시아에 무기를 원조한 지미 카터에 대해서는 지금도 전혀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동티모르인들은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고, 산악지역에서는 아직도 공포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지만, 미국은 단 3초 만에 이 모든 것을 중지시킬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항공기로 식량을 공수할 수도 있지만, 역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장교수는 동티모르 문제를 얘기하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못 보았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학살에 미국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에 비해 체첸은 사정이 다릅니다. 체첸의 학살은 모든 미국 신문의 1면을 도배하고 있어요. 적국의 범죄행위를 비난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거울로 자신의 흉한 얼굴을 보는 것은 물론 쉽지 않겠지요. 그러면 유엔은 왜 체첸에서 벌어지는 만행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가? 아주 간단합니다. 어떤 조치를 취한다는 것은 곧 핵전쟁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차이나에서 저지른 미국의 만행에 대해 국제 사회가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역시 아니지요. 왜냐하면 초강대국은 막을 수 없으니까요.”

    당신이 살 세상, 당신이 선택하라

    대가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했던가. 대담시간 내내 그는 소년처럼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의 빈곤이나 인권유린 문제 등을 언급할 때는 눈에서 광채가 나고 어조가 높아지는 어쩔 수 없는 ‘양심’ 그 자체였다.

    대담이 시작된 지 약 한 시간이 지나자 비서가 시간이 다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촘스키와의 면담은 보통 30분 이상은 허용되지 않는 데다, 이미 일정이 줄줄이 잡혀 있어 비서의 초조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필자는 대담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많은 사회문제들, 일정부분은 학교 교육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현재의 학교 교육은 순종과 경쟁 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수께서는 12살까지 템플 대학이 운영하는 듀이식(미국의 교육사상가이자 사회비평가인 존 듀이의 교육원리를 말함─대담자 주) 실험학교를 다녔는데, 학년이나 우열 구분이 없고 자율과 창조성을 강조하는 학교였다고 하지요. 바람직한 교육제도에 대한 교수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습니다. 때문에 교사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교사들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호기심과 흥미를 죽여 없애고 복종과 훈련만 강조합니다. 학생들은 정해진 루트를 따라야 합니다. 대단히 잘못된 것이지요.

    이 곳 MIT는 제가 다닌 초등학교와 매우 유사합니다. 가령 물리학 과목을 수강한다고 해봅시다. 이 곳에서는 강의를 열심히 듣고, 교수가 말하는 것을 잘 받아썼다가 시험지에 그대로 써내면 당장 학교를 떠나라는 통보를 받을 겁니다. 학생은 도전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교수가 틀렸다고 지적해야 하며,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훈련은 모두 그런 목표하에 이루어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대학원은 실패한 것입니다.”

    ―교수께서는 역사에 이름도 없는 헌신적이고 용기있는 보통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좋은 사회를 위한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지식인과 민주세력, 시민단체에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지 선택해야 합니다. 억압과 파괴의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생태계의 파괴로 우리 손자들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한편에서는 유례없는 경제적 부를 누리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그런 세상을 우리가 원합니까? 아니면 이런 세상을 바꾸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대담을 마친 후 니카라과에 있는 딸의 안부를 묻자 촘스키 교수는 순간적으로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보통 아버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도 그는 니카라과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수탈과 인권유린에 대한 언급을 잊지 않았다.

    교수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진이라며 손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네 살배기가 ‘국제 테러’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 있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아이가 우연히 집어든 책이라고 강조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

    그러나 그의 연구실을 나서면서도 한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그의 끈질기고 철저한 비판이 있는데도 미국이라는 사회는 왜 변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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