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업의 전문경영인은 그저 전문경영인일 따름이었다. 능력과 전문성은 끈끈한 ‘혈연’ 속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돈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사람이 돈을 버는 지식경제 시대는 오너와 비오너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진정한 전문경영인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많은 참석자들은 먼저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의 건강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정초부터 현대를 둘러싸고 불거진 새로운 관심사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 주인공은 박세용(朴世勇·60) 인천제철 회장. 과연 박회장이 이날 행사에 참석할지, 심기는 어떨지에 많은 이의 관심이 쏠렸다.
‘패밀리’만 살아남는다?
박회장은 그룹 종합기획실장, 현대상선 회장, 현대종합상사 회장, 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등 굵직굵직한 자리를 거쳐온 현대의 대표적 전문경영인. 현대라는 울타리를 넘어 한국의 대표적 전문경영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지난해 12월30일 구조조정본부장에서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전격 전보됐다. 그 배경에 대해 갖가지 억측이 분분하던 차에 닷새 후 박회장은 돌연 인천제철 회장으로 발령받아 충격을 더했다.
그를 현대자동차로 보낸 것은 현대자동차의 구조조정 때문이고 인천제철로 옮긴 것은 강원산업과의 합병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는 게 현대측의 해명이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그룹 최고위급 경영인을 불과 닷새 만에 두 번이나 인사조치한 것은 박회장이 현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상식 밖의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정몽구(鄭夢九)·정몽헌(鄭夢憲) 회장 형제의 파워게임에서 박회장이 새우등 터진 격이 됐다는 둥 현대의 구조조정 작업이 끝나면서 그의 ‘용도’가 폐기됐다는 둥 뒷소문이 무성했다.
중동 건설붐 시절, 경쟁업체들의 음해로 교도소까지 갔던 박회장은 당시 교도소에서 배운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지난해 해외 로드쇼를 통해 현대그룹에 대한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를 회복시킨 주역이다. 그는 차분한 성품과 투명한 눈빛, 유창한 영어로 현대의 구조조정 계획을 설득력 있게 런던과 뉴욕 금융가에 전달했고, ‘월스트리트 저널’을 비롯한 해외 언론들도 그를 신뢰, 현대에 대한 우려의 시각을 거뒀다. 92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정주영 명예회장을 위해 발 벗고 뛰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 박회장이었던 만큼 연말과 연초, 두 차례에 걸친 인사는 의혹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박회장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부담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저녁 6시 직전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이 행사장에 들어설 때까지 그는 현대 임원들과 밝은 표정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평소 말을 아끼는 편인 박회장이 그처럼 대화를 주도하는 것부터가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정몽구 회장은 영빈실에 있던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인사한 후 박세용 회장과 김형벽(金炯璧) 현대중공업 회장,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 회장, 유인균(柳仁均) 현대강관 회장과 함께 행사장 입구에 도열해 외빈들을 맞았다. 얼마 후 롯데그룹 신격호(辛格浩) 회장이 입장하자 박회장은 그를 정명예회장에게 안내하면서 자리를 떴다. 정몽구 회장과 함께 있는 자리를 애써 피하려는 듯했다.
박회장의 경우에서 보듯 오너가 여전히 전권을 휘두르고 있는 한국의 기업구조에서 전문경영인의 좌표는 너무도 불안해 보인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갖췄더라도 ‘패밀리’의 일원이 아니면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게 우리나라 전문경영인의 현실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미약하나마 변화 조짐이 드러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경제위기 이후 성과 지상주의가 급속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우리나라에도 전문경영인 시대가 싹을 틔우고 있다.
국내 4대 재벌인 SK그룹에서 전문경영인 출신의 손길승(孫吉丞·59) 회장이 그룹 총수에 오른 것은, 비록 ‘과도기 회장’이라는 시각이 있긴 해도 대단히 의미있는 일로 기록될 만하다. 또한 김정태(金正泰·53) 주택은행장은 스톡옵션을 받는 전문경영인 책임경영제를 국내 은행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벤처 성공시대를 연 메디슨의 이민화(李珉和·47) 회장은 오너이면서도 실무형 전문경영인의 자질을 겸비한 경우다.
무서운 주주들
전문경영인 시대의 도래는 이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로 인식되고 있다. 국내 기업은 물론, 유수의 다국적 기업들과도 전면전을 벌여야 하는 오늘날, 어떤 경영방식이 생존에 더 효율적일 수 있는가는 개별 기업의 선택에 달려 있다. 유능한 전문경영인이 단지 오너와 혈연관계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팽(烹)당하는 것도 비상식적인 일이지만, 전문적인 사업 지식과 비전을 갖췄다면 굳이 오너라고 해서 경영일선에서 배척할 까닭이 없다.
증권시장이 성장하고 외국인들의 투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도 전문경영인 시스템에 힘을 실어주는 요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김태일 상무는 “요즘은 주주들이 경영실적을 꼬치꼬치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오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 또한 계열사들의 독립경영이 웬만큼 확보돼 주주들의 의사에 반하면서까지 이를 그룹 차원에서 통합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의 본격적인 한국 진출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기업들의 소유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과거에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단기 수익을 챙기는 데만 열중했지만, 투자규모가 커지면서 이제는 긴 안목으로 자신이 투자한 기업의 경영실태와 지배구조를 주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삼성전자의 경우 외국인 투자지분이 50%를 넘는데 이들이 이건희(李健熙) 회장의 영향력을 문제 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마련한 ‘선진 공시문화 정착 방안’은 증권시장의 발달에 힘입어 바뀐 경영인관(觀)을 잘 보여준다.
금감원은 이 방안에서 벤처기업들이 최고경영자의 학력이나 경력 같은 주요 인적 사항을 공시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경영자가 ‘과거에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상세하게 기록하게 했다. 기업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잣대의 하나가 바로 전문경영인의 자질이라는 뜻에서다. 이 규정은 기술과 아이디어 등 인적 자원이 기업 성장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는 벤처기업에 우선 적용하겠지만, 머지않아 대기업에까지 확대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경영인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데는 재벌 총수의 독단 경영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한몫하고 있다. IMF 위기가 업계 전반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했을 때 국민들은 경제위기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가 기업 오너들의 ‘황제경영’에 있음을 알게 됐다. 이들이 단기 차입금을 끌어들여 무모한 투자와 신규 사업 진출을 남발한 결과 고금리 부담을 이겨내지 못해 수많은 기업이 무너졌고, 직원들은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거리로 내몰렸다.
최종현과 손길승
현재 워크아웃 상태에 있는 A그룹에서 임원을 지낸 K씨는 황제경영의 실상을 이렇게 전한다.
“회장말고는 계열사의 매출액이나 순이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룹 총 매출액은 물론 각 계열사의 매출액도 회장이 즉흥적으로 정했고, 계열사끼리 서로 기업 내용을 알지 못하게 했다. 회장이 ‘올해 매출액 성장률을 몇%로 해야겠다’고 하면 계열사 사장들은 그것에 맞춰 매출 목표를 수정했다.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회장이 말하는 수치는 회사의 부실을 숨기고 은행과 여론을 속일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회장은 간부회의를 주재하면서 50대 임원들에게 예사로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미친놈’ ‘너 같은 놈한테 월급 주는 내가 바보야’ 같은 폭언은 단골메뉴였다. 임원들은 어떻게 하면 당장 회장에게 욕을 먹지 않을까만 궁리할 뿐, 곪아터지고 있는 회사 사정을 알리고 대안을 직언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기업 총수들이 모두 전횡과 독단경영을 일삼았던 것은 아니다. 오너가 전문경영인과 완벽한 팀워크를 발휘해 기업을 살찌운 사례도 적지 않다. 고(故) 최종현(崔鍾賢) 전 SK그룹 회장과 손길승 현 SK 회장의 관계가 그 한 예. 두 사람 사이에는 오너와 전문경영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철저한 상명하복 관계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 많다.
노태우(盧泰愚) 전대통령의 사돈이기도 한 최회장은 김영삼 정부 초기에 이른바 6공 비자금 사건으로 검찰에 소환된 그룹총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최회장은 검찰에서 6공에 정치자금을 제공했는지, 그 대가로 특혜를 받았는지에 대해 집중 추궁당했다. 누구를 시켜 정치자금을 제공했는지도 수사 대상이었는데, 당시 그룹 기획조정실장으로 최회장을 보필했던 손회장이 ‘심부름꾼’으로 거론됐다.
그러자 최회장은 검사에게 “손실장은 내 아랫사람이 아니라 내 친구이자 동업자”라며 그를 감쌌다. 최회장의 진술이 검찰 관계자를 통해 바깥에 알려지면서 비자금 사건으로 잔뜩 움츠리고 있던 재계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다.
최회장은 그 전부터도 전문경영인에 대한 철학이 남달랐다. 최회장의 출근시간은 오전 11시였다. 그리고는 두세 시간 회장실에 머물다 오후 2∼3시면 퇴근했다. 최회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회사에 오래 있으면 계열사 사장들이 내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일을 못 하게 된다. 전문경영인들이 내가 있는지 없는지 몰라야 스스로 판단해서 경영노하우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업무에서도 최회장은 그룹 차원의 신규 사업 등 굵직굵직한 사안에 대해서만 보고를 받을 뿐 웬만한 일은 대부분 사장 전결로 처리하도록 했다.
대우그룹이 무너진 이유를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관계와 연관지어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대우 계열사의 회장을 지내고 지금은 B사 사장을 맡고 있는 O씨가 그렇다.
그에 따르면 김우중(金宇中) 대우 회장과 창업멤버들은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김회장을 깍듯이 모셨지만 술자리 같은 사적인 만남에서는 스스럼없이 ‘형님’ ‘아우’ 하는 사이였다. 이런 관계는 기업 경영에도 나타나 계열사 전문경영인인 창업멤버들이 김회장을 견제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김회장이 해외에서 큰 사업을 따오면 자금 조달과 재무 책임자인 L씨가 사업 이행 여부를 결정했다. 김회장이 따온 사업은 대부분 추인됐지만 가끔은 L씨의 반대로 사업이 보류되기도 했다. 재무 전문가로서 판단한 것인만큼 김회장도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하지만 바람직하던 이 관계는 90년대 중반 대우가 최고경영진을 젊은 층으로 교체하면서 성격이 달라졌다. 창업멤버들이 하나 둘 최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일선에서 물러났고 이들의 자리는 김회장의 비서를 지낸 젊은 경영인들이 메웠다. 김회장과 나이가 비슷했던 창업멤버와는 달리 젊은 경영인들은 김회장보다 적어도 열다섯 살 이상 아래였다.
“세대교체가 분명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게 사실이지만, 대우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창업멤버들이 대우 관계사로 나가거나 아예 은퇴해버리자 자연히 김회장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구조로 변했다. 요즘 창업멤버들끼리 만나면 ‘만일 우리가 대우에 그대로 있었다면 대우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하고 한탄한다.”
이런 분석은 공감할 만하다. 김회장의 세계경영이 본격화한 90년대 중반부터 대우에서 버블현상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특히 재무 분야의 투명성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창업멤버들이 대우를 떠난 시기와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이명박은 2만1번째 경영자
한 기업의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위상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일반인들은 그 차이를 피부로 느끼기 어렵겠지만, 오너와 전문경영인 사이에는 좀처럼 접점을 찾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한때 ‘이명박(李明博) 신화’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말단사원으로 입사해 35세에 사장 자리에 올랐고 마침내 현대건설 회장에 오른 이씨의 성공 스토리는 TV 드라마 소재가 되기도 했다.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인 한라그룹 정인영(鄭仁永) 회장이 한 번은 “이명박 회장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정회장은 “한국에 큰 기업이 모두 몇 개나 되느냐”고 반문했고, 2만개 정도가 기업다운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답을 듣자 정회장은 “그러면 이군은 2만1번째 경영자일 뿐”이라고 가볍게 받아넘겼다.
이회장이 비록 당대 최고의 경영인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정회장의 눈에는 그가 경영의 최고책임자인 오너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한낱 ‘능숙한 심부름꾼’ 정도로 비쳤던 것이다.
삼성전자가 세계 유수의 반도체 업체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 K씨. 그는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창업주가 자서전에 ‘그가 찬성했기 때문에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다’고 썼을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그가 몇 년 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삼성전자를 떠났다. 삼성 관계자가 전하는 속사정은 이렇다.
당시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의 순익을 올릴 만큼 호황을 누리고 있었는데, 그래서 당시 사장이던 K씨의 목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무렵 삼성전자는 매출이 신통치 않은 신라호텔의 객실 절반을 사용해 호텔 매출의 절반을 책임지고 있었다. 사실상의 계열사 지원이었다. 그러다 보니 K사장은 마치 신라호텔의 최고경영자처럼 행동했는데, 이에 대해 삼성의 오너 패밀리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삼성전자 사장이면 삼성전자 경영에나 신경 쓰지, 왜 신라호텔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는 얘기였다. 더욱이 신라호텔은 이건희 회장 내외도 자주 찾는 곳인만큼 신라호텔을 쥐고 흔드는 것은 명백한 월권행위라는 것이었다.
이 메시지를 접한 K사장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느라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그는 그 해 연말 그룹 인사 때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인사조치가 신라호텔 건 때문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삼성전자의 오늘이 있기까지 기여한 바를 생각하면 그런 전격성 인사는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오너 앞에선 왜 작아지는가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위상 차이는 그들이 이끄는 회사의 규모나 산업에 끼치는 영향력과도 무관해 보인다.
93년 제2이동통신(지금의 신세기통신) 사업자 선정 때의 일이다. 재벌그룹 오너들이 회장단의 주축인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정부로부터 사업자 선정권을 위임받았다. 최종 후보는 포항제철과 코오롱그룹 컨소시엄. 사업자를 최종 결정하기 위해 전경련 회장단이 자리를 함께했다. 전경련 회장단 멤버이기도 한 이동찬(李東燦) 코오롱 회장이 사업자 후보 당사자로 참석했고, 정명식(丁明植·69) 포철 회장도 당사자 자격으로 자리를 함께했다.
공기업인 포철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대기업은 아니지만 자산 규모로 보면 재계 랭킹 5∼6위 그룹과 맞먹었다. 또한 기간산업의 주요 소재인 철강을 생산, 공급하고 있었던만큼 산업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은 1∼2위급이었다. 반면 코오롱은 자산 규모로 재계 20위권이었고, 섬유를 주 업종으로 하는만큼 산업에 끼치는 영향력도 포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회장은 전경련 회장단과 함께 시종 밝은 표정으로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면서 결과를 낙관했던 데 비해 정회장은 허리를 반듯이 세운 채 무릎을 붙이고 깍듯한 자세로 일관했다. 마치 어려운 윗사람들을 대하는 자세였는데, 오너의 ‘영원성’과 전문경영인의 ‘일회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결국 자금력 등 사업능력에서 월등히 앞서는 포철이 1대 주주가 되긴 했는데, 그것으로 끝이 난 게 아니었다. 포철은 자신보다 지분이 불과 1% 적은 2대 주주 자리를 코오롱에게 내줘야 했다. 제2이동통신의 대주주 구성이 이렇게 된 게 오너인 이회장과 전문경영인인 정회장의 무게 차이 때문이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한국의 전문경영인들이 하나같이 ‘오너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존재’였던 것은 아니다. 경제발전 과정에 상당하게 이바지한 전문경영인도 적지 않다. 일부는 창업자 못지 않게 기업의 성장은 물론, 국가경제 발전에 견인차 노릇을 했다.
우선 전자 업종에서는 강진구(姜晉求·73) 삼성전기 회장(전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전문경영인으로 꼽힌다. 62년 동양방송에 입사, 삼성과 인연을 맺은 후 ‘전자산업을 맡으라’는 이병철 창업주의 지시에 따라 전자산업에 투신, 오늘의 삼성전자를 일으킨 한국 전자업계의 산 증인이다. 평사원으로 삼성에 입사해 회장직에 오른 첫 케이스.
98년 LG인화원 회장을 마지막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헌조(李憲祖·68) LG전자 고문은 강진구 회장과 함께 우리나라 전자산업을 이끌며 ‘별들의 전쟁’을 치렀던 전자업계 원로 전문경영인. 국내 전자업계의 ‘영업과장 1호’인 금성사 판매과장으로 출발, LG전자 회장에까지 올랐다.
전자업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또 한 사람의 전문경영인으로 김광호(金光浩·60) 전 삼성전관 회장을 들 수 있다. 그는 98년 건강상의 이유와 후진 양성을 위해 퇴진하기까지 35년간 전자와 반도체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판 경영인이다. 강진구 회장과 이헌조 회장이 가전 분야에 오래 몸담았던 반면 김회장은 반도체 분야에서 뼈가 굵어졌다. 삼성전자 수원·기흥공장 건설 당시 비만 오면 진흙탕으로 변하는 공사현장을 군화 차림에 오토바이를 타고 누벼 ‘워커와 오토바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자동차산업 분야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으로는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 전성원(全聖元·67) 전 현대자동차 부회장을 꼽을 수 있다. 정회장의 경우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이지만, 재벌 집안의 후광을 업은 기업인이라기보다는 전문경영인에 가까운 인생 역정을 보여준다. 67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한 후 ‘포니 신화’를 이룬 것을 비롯(정회장은 해외에서 ‘포니 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32년간 현대자동차를 키워왔다.
지난해 초 그는 정주영 회장의 명령 한 마디에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현대자동차를 두 말 없이 정몽구 회장에게 넘기고 대신 현대산업개발을 할양받아 현대에서 분가, 전문경영인의 현주소를 확인케 했다. 최근 암 진단을 받아 미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해군 중령으로 예편한 뒤 현대자동차에 합류했던 전성원 전부회장은 정세영 회장과 함께 현대자동차를 이끈 쌍두마차였다. 영업상무, 판매본부장, 수출본부장 등을 거치면서 뛰어난 해외시장 개척능력을 발휘해 포니 신화에 이어 미국 시장에 엑셀 돌풍을 일으킨 주역이다.
전문경영인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던 곳은 화학 분야. 자동차나 가전 등 소비재 산업에 비해 사업 내용이 복잡하고 전문 지식이 필요해 전문경영인이 역량을 발휘할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성재갑(成在甲·62) LG석유화학 회장 겸 LG화학 대표이사 부회장은 ‘화학산업의 전도사’ ‘화학의 대부’로 불리는 LG그룹 공채 출신 전문경영인. 63년 락희화학공업사에 입사, 30년 만인 94년 공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LG화학 대표이사에 오른 이후 정보전자소재와 석유화학, 첨단 생명공학 분야를 이끌고 있다. IMF체제 하에서도 과감한 구조조정과 유동성 개선, 비용 절감, 수출 총력체제 구축 등에 성공, LG의 기업문화를 양 중심에서 가치 중심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대상그룹의 고두모(高斗模·62) 회장은 97년 8월 그룹 오너인 임창욱(林昌郁)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뒤 회장 자리에 올랐다. 무역과 해외금융에 정통한 고회장은 미원의 인도네시아 현지법인 사장을 지내면서 그룹 해외사업 부문을 반석에 올려놓았다고 평가받는다. 미원그룹이 대상그룹으로 새출발한 후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재계의 주목을 끌기도. 전문경영인 출신 회장답게 계열사 사장들에게 최대한 자율권을 주고 꼭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만 조정 역할을 맡아 ‘열린 기업’을 지향한다.
성낙정(成樂正·73) 전 한화그룹 총괄부회장도 87년 한화그룹 고문으로 영입돼 그룹의 대외창구 노릇을 자임하는 등 어려운 시기에 회장을 보필해 그룹을 이끈 인물이다.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나온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국전력에서 평사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정수창, 두산 회장 두 번 역임
전문경영인의 위기관리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 것은 지난해 작고한 정수창(鄭壽昌) 전 두산그룹 회장의 경우 그는 평사원으로 입사해 두산그룹 회장을 두 번이나 지낸 인물. 그는 샐러리맨 출신의 ‘비오너 사장 1호’이자 ‘비오너 재벌그룹 회장 1호’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창업주가 일제시대 소화기린맥주 주식회사 취체역일 당시 기획과장으로 입사했던 그는 69년 동양맥주 사장에 올라 전문경영인이라는 낯선 용어를 만들어냈다.
72세 때인 91년, 두 번째로 두산 회장을 맡았을 때는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페놀 유출사건으로 그룹의 명운이 경각에 달했다. 당시 그는 “나는 로봇이 아니라 전문경영인”이라며 위기 수습을 진두 지휘, 2년 만에 보란 듯이 난국을 극복한 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두산그룹에서는 박용만(朴容晩·45) 전략기획본부 사장도 주목할 만한 전문경영인이다. 두산은 국내 그룹 가운데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효율적으로 구조조정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 아이디어 대부분이 박사장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미국 보스턴대 경영학 석사 출신인 박사장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1조1416억원의 현금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다른 기업들에 ‘구조조정의 교과서’로 활용됐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경기고 2년 후배인 윤영석(尹永錫·62) 한국중공업 사장은 대우의 간판 전문경영인. 64년 김회장과 함께 한성실업이라는 무역회사에 입사하며 만난 이후 김회장이 대우실업을 창업하자 1년 뒤 합류했고 ‘대우호(號)’가 자초하기 직전까지 동고동락했다. 98년 한국중공업 사장에 임명되면서 30년 넘게 몸담았던 대우를 떠나 공기업 경영인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이 밖에도 수많은 전문경영인이 창업주를 도와 기업을 일궜고, 오너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경우나 그룹에 위기가 닥쳤을 때는 오너를 대신해 기업을 살려냈다. 그 비결은 자신이 몸담은 기업에 대한 초인적인 헌신과 지대한 애정이었다. 이들의 땀과 눈물이 밑거름이 되어 그 뒤를 잇는 차세대 전문경영인들이 탄탄하게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고 있다.
차세대 전문경영인의 대표주자 가운데 한 사람인 휠라코리아 윤윤수(尹潤洙·54) 사장은 전문적인 경영노하우를 바탕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는, 진정한 의미의 전문경영인이다.
그의 지난해 연봉은 20억원대. 그는 92년 휠라코리아 사장이 된 후 지금까지 회사에 1200억원의 순이익을 올려줬고, 그에 따라 지금까지 보너스를 포함, 120억원을 받았다. 회사에 벌어준 돈의 10분의 1을 성과급으로 받은 셈이다.
윤사장은 97년 ‘내가 연봉 18억원을 받는 이유’라는 책을 펴내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떠올랐고, 이탈리아의 휠라그룹이 전세계 해외법인들에 ‘휠라코리아를 보고 배우라’고 할 만큼 세계적으로 경영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성공신화는 사람이 만든다
의료장비 전문 벤처기업인 메디슨의 이민화 회장은 초음파 진단기를 국내 최초로 개발, 상업화에 성공하면서 벤처 성공신화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86년 제1회 벤처기업 대상을 받았고 현재 한국벤처기업협회 회장을 맡아 젊은 벤처기업인들의 좌장 노릇을 하고 있다.
한국의 ‘휴렛팩커드’로 불리는 삼보컴퓨터의 이홍순(李洪淳·40) 사장도 우리 기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전문경영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10월 미국 ‘포브스’지는 세계 PC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e머신즈’의 성공비결을 소개하면서 모기업인 삼보컴퓨터와 이사장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올해 ‘e머신즈’를 미국 나스닥 증시에 상장하는 것을 비롯, 삼보컴퓨터를 세계 최고 수준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야심을 가진 그는 “직원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하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할 만큼 인재 교육을 경영의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고 있다.
현재 국내 최고의 인터넷 스타는 다음커뮤니케이션이다. 이 회사의 주식 시가총액은 재계 6위 한진그룹의 전 계열사를 사고도 남을 정도. 이 회사 이재웅(李在雄·32) 사장은 다음(www.daum.net)을 국내 인터넷 서비스업체 최초로 500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하도록 성장시켜 야후코리아와 1, 2위를 다투기에 이르렀다.
다음의 성공은 인터넷 붐에도 힘입은 바 크지만 이사장의 사업 열정, 합리적인 사고, 과감한 결단력에서 비롯한 측면이 크다.
그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에서 박사과정을 밟다 인터넷 비즈니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핫메일 서비스에서 힌트를 얻어 무료 e메일 서비스를 시작하는 등 과감한 결단력이 돋보인다.
한국 경제는 이제 지식경제, 디지털경제 시대로 급속히 전환하고 있다. 과거에는 기업의 성패가 편중된 자본을 어떻게 확보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갈렸지만, 이제는 지식과 정보를 어디에서 얻고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관건이 되고 있다. 자금시장이 활짝 열린 오늘날, 새로운 성공신화는 사람이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런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 전문성과 효율성, 합리성을 겸비한 전문경영인이다.
휠라코리아 윤윤수 사장은 “오너 한 사람의 무모한 의지만으로 사업을 벌이던 시대는 끝났다”며 “디지털경제 시대에는 정교한 지식과 선견지명이 있어야만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런 지혜를 가진 경영자라면 그가 오너 출신인지,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출발한 전문경영인인지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디지털경제가 전문경영인 전성시대의 만개를 재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