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총선시민연대 선거혁명본부 지휘탑

  • 서영아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입력2006-11-24 14: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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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선시민연대의 최고 의결기구는 상임공동대표단과 상임공동집행위원장단 연석회의. 낙천대상 명단발표 전에는 수시로 모였으나, 명단 발표 이후에는 7~10일에 1회정도 회의를 한다.》
    2월 16일 오후 3시. 서울 서초동에 있는 서울지검 청사 현관엔 취재진이 북적거렸다. 잠시 후 국내 시민운동의 대부 격인 두 인사가 나타났다. 바로 총선시민연대의 최열 상임공동대표와 박원순 상임공동집행위원장이었다. 두 사람은 총선시민연대의 공천반대명단 발표 및 거리집회와 관련, 일부 정치인과 선관위로부터 선거법위반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된 상태였다. 검찰은 이날 두 사람을 상대로 명단작성 과정 및 발표 경위와 서울역 집회 개최 경위 등에 대해 조사했다. 총선시민연대는 이에 앞서 “여야가 낙천대상 명단에 오른 정치인을 공천할 경우 공천철회운동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검찰 조사에 구애받지 않고 낙선운동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시민단체의 이런 당당함과 자신감은 말할 것도 없이 범국민적인 지지에 힘입은 것이다.

    2000년 들어 460개 단체가 결집한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은 시민단체의 영향력과 파급력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잘 보여준다. 시민운동은 짧은 역사에 비해 숨가쁘게 성과를 쌓아왔다. 경실련의 부동산실명제개념 도입과 금융실명제 쟁취, 한의학분쟁 중재 등은 시민단체가 개입해 이룬 획기적 성과였다.

    지난 1월12일 ‘유권자주권회복’을 기치로 출범한 총선시민연대는 정치인들에게는 핵폭탄 같은 존재다. 반면 정치 냉소주의와 무관심에 빠져있던 유권자들에게는 기대 이상의 환영을 받았다. 시민선거혁명의 뇌관 구실을 하고 있는 총선시민연대를 이끄는 주요 시민단체들의 맨파워·조직력·재정 등을 살펴봤다.

    현재 총선시민연대 참가단체 수는 460여 개. 출범 당시 413개 단체로 시작한 단체 수는 계속 유동적인데, 한쪽에서는 참여했다가 솎아내는 과정이,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 참여하는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 출범 당시 단체 대표 전원이 총선시민연대의 대표자회의를 구성하기로 원칙을 세웠다. 그중 문화연대 김정헌 대표, 언개련 김중배 공동대표, 참여연대 박상증 공동대표, 민언련 성유보 이사장, 한국YMCA연맹 이남주 사무총장, 여성연합 지은희 상임공동대표, 환경연합 최열 사무총장 등으로 상임공동대표단을 구성했다.



    그 아래 실무를 담당하는 집행위원회로 상임공동집행위원장단과 집행위원단이 있다. 상임공동집행위원장단은 민예총 김용태 사무총장, 장애인권익문제연구소 김정렬 소장, 여성연합 남인순 사무총장,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 녹색연합 장원 사무총장, 서울YMCA 신종원 시민사회개발부장 등이 맡았다. 집행위원으로는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 녹색연합 김제남 사무처장, 서울환경연합 김혜정 사무처장, 백승헌 변호사, 한국여성단체연합 조영숙 정책실장,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하승창 사무처장 등. 이들과는 별도로 녹색연합 환경연합 여성연합 참여연대 등 10여 개 단체에서 30여명의 인원을 공동사무처에 파견했다.

    총선시민연대의 최고의결기구는 상임공동대표단과 상임공동집행위원장단 연석회의. 낙천대상명단 발표 전에는 수시로 모이던 이들은 명단 발표 이후로는 7~10일에 1회 정도 회의를 한다. 일상적인 활동의 중추는 최열 상임공동대표와 박원순 상임공동집행위원장, 장원 대변인 겸 상임공동집행위원장의 3인방. 일상적 상황에 대한 판단과 처리는 최열 대표와 박원순 집행위원장, 두 사람의 몫이다. 연석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부여받은 권한이다. 여기에 장원 대변인과 김기식 김혜정 조영숙 등 사무처장급 3인방의 즉석회의를 통해 대부분의 상황판단과 대책이 수립된다. 이 자리에는 이태호 정책기획국장이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한다.

    장원 대변인과 백승헌 변호사, 정대화 교수로 이뤄진 공동대변인단의 활약상도 두드러진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국장을 지낸 백변호사는 법적 대응이 필요한 일이나 선거법을 검토하는 과정에 큰 역할을 하고 있고, 상지대 정대화교수(정치학과)는 총선시민연대의 논리개발과 정책개발부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바로 이들이 이번 선거혁명의 사령탑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선시민연대의 맨파워를 상세히 살펴보자.

    시민운동에 삶을 걸다

    상임공동대표이자 상근 지도부인 최열 환경연합 사무총장(51·환경연합 사무총장)은 ‘미스터 그린’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한국환경운동의 개척자. 그가 환경운동에 눈을 돌리게 된 시기는 79년 옥중에서였다. 강원대 농화학과를 다니다 교련반대 시위로 강제징집됐고, 대학을 졸업한 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 79년 명동 YWCA위장결혼식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민주화투쟁과정에서 고초를 겪었다. 82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세워 한국 환경운동의 개척자가 됐다. 88년 지금의 환경연합의 전신인 공해추방운동연합을 만들었다. 이 단체는 93년엔 환경운동연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지난 1월 지금의 이름인 환경연합으로 바뀌었다. 그는 94년 유엔환경상, 골드만환경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인 환경운동가로 인정받고 있다.

    박원순 상임공동집행위원장(44·참여연대 사무처장)은 80∼90년대 많은 양심수 사건을 변론한 대표적 인권변호사의 한사람. 94년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맡으면서는 아예 변호사 일을 중단했다. 이른바 긴급조치 9호 세대로, 75년 서울대 법대 1학년 때 유신체제에 항거해 할복자살한 고 김상진 열사 추모식에 참여했다가 투옥돼 제적된 뒤 단국대 사학과에 재입학했다. 80년 사시 22회에 합격, 대구지검 검사로 1년여 근무하다 인권변호사로 변신해 권인숙양 성고문사건, 미문화원사건, ‘한국민중사’ 사건 등을 맡았다. 그가 펴낸 ‘국가보안법 1, 2, 3권’은 사계의 고전이 돼 있다. 그는 시민사회활동가 120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지난 10년간 가장 뛰어난 시민운동가’로 뽑히는 등 대중적 인지도도 매우 높은 편이다.

    장원 상임공동집행위원장 겸 대변인(43·녹색연합 사무총장)은 대전대 환경공학부 교수이기도 하다. 부산 수산대 환경공학과와 서울대 환경대학원을 거쳐 미국 필라델피아 드렉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해가 89년. 91년 배달환경연구소를 만들었다. 92년 김포쓰레기 매립장 문제를 중재할 때는 아예 집을 김포로 옮긴 뒤 주민들과 불법쓰레기 투척을 감시하는 활동을 하며 중재안을 마련하는 등 현장을 중시하는 환경생태운동을 펼치고 있다.

    글을 싣는 사람에게 돈을 받고 지적재산권을 주장하지 않는 환경 월간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발행하는 등 발상의 전환을 통한 아이디어가 장기. 지난해 집을 충남 금산군으로 옮긴 후 생태마을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이들 임원진 3인방의 지도 아래 총선시민연대의 실무는 사무처장 3인방이 책임진다. 사무처장 겸 집행위원을 맡은 김기식(34) 참여연대 정책실장은 요즘 한창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진 참여연대 지킴이. 93년 참여연대의 전신인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인 연합’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민변 박원순 변호사,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 등과 함께 이듬해 참여연대를 발족해 기획정책부장 사무국장을 거쳐 정책실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 인류학과 85학번. 학생운동을 하다 일찌감치 노동현장에 투신, 5년간 일했다.

    사회복지 분야에 관심이 많은 그는 참여연대사회복지위원회를 이끌며 의약품 납품비리를 폭로, 의약분업 합의안 도출에 이바지했다. 98년 신동아그룹 외화도피사건을 물고 늘어질 때는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이 기자들에게 “임기 내에 김기식만큼은 구속하고 말겠다”고 발언했다가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순발력과 샘솟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데다 최근 낙천·낙선운동 관련 TV토론에서도 만만찮은 논리를 펴 주변에서 “지나치게 뜨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듣고 있다.

    역시 사무처장 겸 집행위원을 맡고 있는 김혜정(38) 서울환경연합 사무처장은 지역환경운동에서 성장해 중앙으로 진출한 환경연합의 여걸. 건국대 중문과 2학년이던 88년 고향 울진에서 청년 교사들과 ‘울진 반핵운동협의회’를 창립해 원전건설 반대운동을 시작했고, 이듬해 환경운동연합의 전신인 공해추방운동연합의 핵 평화부 간사를 맡아 본격 환경운동가의 길로 나섰다. 한전이 지난해 그를 ‘한전의 악녀’로 선정했을 정도. 환경운동연합 환경조사국장에서 연초에 서울환경연합 사무처장으로 ‘승진’했다. “최소한 10만명 정도의 시민이 각종 환경단체 회원으로 활동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바람. 지난해 그린벨트 해제 반대를 위한 농성을 벌일 때는 농성장에 쳐들어온 반대자의 식칼을 맞을 뻔했다. 최근 낙천·낙선운동에 전력투구하고 있지만, 정치가 빨리 정상화해 지역단위 풀뿌리 환경운동에 매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또 한 명의 사무처장 겸 집행위원인 조영숙 여성단체연합 정책실장(39)도 총선시민연대에서 상근하고 있다. 세종대 80학번.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거쳐 여성운동으로 활동반경을 넓혀온 활동가. 81년 대학에서 제적당한 뒤 84년부터 87년까지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에 몸바쳤다. 96년 여성단체연합으로 자리를 옮겨 사회개발부장과 정책부장을 거쳐 현재 정책실장을 맡고 있다. 여성단체 연합의 정책책임자로서 여성의 정치적 권한 확대와 여권 신장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고 단체 관련 국제협력관계를 도맡아 처리하는 일꾼이다.

    이들 사령탑과 호흡을 같이 하며 이들을 보조하는 이태호(33) 정책기획국장(참여연대 시민감시국장)은 낙천·낙선운동의 사전준비작업을 도맡다시피 한 실무자. 서울대 서양사학과 재학 시절 총학생회 사무국장을 지낸 운동권 출신. 95년 참여연대 조직부장을 맡으며 눈부시게 활약했다. 정책부장 기획부장을 거쳐 지금은 시민감시국장직을 맡고 있다. 지난해 국정감사 모니터팀으로 일한 경험이 국회의원에 대해 칼을 갈게 된 계기. “모니터팀의 출입조차 막는 국회의원들을 보며 이들이야말로 개혁에 가장 큰 걸림돌이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무려 9년간 학생운동을 했다. 졸업 뒤에도 학생운동을 계속한 이유에 대해 “80년대 학번이 벌여놓은 운동을 80년대 학번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고 말하는 그는 글 솜씨가 뛰어나 참여연대에서 문장가로 정평이 나 있다.

    이밖에도 시민운동권의 차세대 리더로 꼽히는 인물 중 상당수가 총선시민연대에 여러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상임공동집행위원장을 맡은 한국여성연합의 남인순 사무총장(42)은 여성연합의 탄탄한 이론가이자 실무자다. 79년 세종대 3학년 때 시위를 주동해 강제 자퇴를 당한 뒤 인천에서 야학을 처음으로 조직하고 오랫동안 위장취업 생활을 하다가, 86년 대중적 공개운동을 모색하던 진보적 여성운동과 결합했다. ‘일하는 여성의 집’ ‘인천여성노동자회’에서 일하는 여성들과 함께했고, 94년부터는 한국여성단체연합 중견간부로 일하고 있다.

    젊은 활동가들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하승창(39) 사무처장 역시 집행위원을 맡고 있다. 한때 경실련의 기둥이던 그는 지난해 경실련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직한 뒤 수개월간의 진로모색 끝에 함께 경실련을 나온 경제정의연구소 멤버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시민행동’을 만들었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기업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기업감시운동’과 ‘조세낭비감시운동’, 개인정보 보호운동인 ‘푸른방패운동’ 등을 펼치고 있다. 연세대 사회학과 80학번으로,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90년 삼민동맹 사건에 연루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92년 9월 경실련에 발을 들여놓은 뒤 7년간 경실련에서 개혁을 촉구하는 시민운동을 주도한 활동가다.

    역시 집행위원을 맡고 있는 김제남 (37)녹색연합 사무처장. 장원 사무총장과 함께 녹색연합을 일궈낸 주인공이다. 91년 ‘푸른한반도되찾기 모임’을 이끌다 94년 장원총장의 배달환경연구소와 통합해 녹색연합을 만들었다. 덕성여대 83학번. 학생운동을 하다가 87년 졸업 뒤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북부지역 간사를 맡아 일했고 88년 ‘나라사랑 청년회’라는 청년대중조직을 만들었다. 지난해 11월말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WTO(세계무역기구)의 ‘뉴라운드 협상’에는 30여개 국내 NGO연합체인 ‘WTO뉴라운드 반대 민중행동’의 대표단 7명 중 한 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총선시민연대가 막강한 조직력을 갖게 된 데는 YMCA라는 회원 수십만의 조직이 힘을 보탠 덕도 컸다. 서울 YMCA 신종원 시민사회개발부장(40)도 집행위원을 맡고 있다. 80년대 후반 처음으로 환경문제를 소비자운동과 연결하는 녹색소비자 운동을 제안한 주인공.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80학번. 학생 때는 기독학생회에서 활동했고, 87년부터 서울 YMCA간사로 시작한 ‘Y맨’.

    소비자운동부터 의약분업안 합의, 걷고싶은 도시만들기운동 등 관여하지 않는 분야가 없고, 10여년간 YMCA시민중계실에서 활동한 덕에 참신한 정책을 많이 내놓는 ‘아이디어 뱅크’로도 통한다. 총선시민연대에서는 전체 유권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도 정치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해온 20∼30대 청년층을 대상으로 전국 50개 지역에 가칭 ‘청년유권자 연대’를 만들 계획이다.

    이들 선거혁명의 주역들이 일상적으로 활동하는 공간은 바로 시민단체다. 한국의 시민단체는 언제 이렇게 성장한 걸까. 한국의 시민운동은 지난 몇 년 사이 그야말로 양적으로 급팽창했다. ‘시민의 신문’이 낸 ‘2000년 민간단체 총람’에 따르면 99년 9월 현재 한국의 민간단체는 2만여 개. 97년 조사치에 비해 정확히 2배 늘어난 수치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사회학)는 “이중 70%가 80년대와 90년대에 새로 창립된 단체들”이라며 이는 “독재치하에서 억압돼온 시민사회가 급격히 자율성을 회복하면서 결집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은 “정부=국가의 시대는 지났고,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가 세 개의 축을 형성하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라는 대세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정부의 시민운동권에 대한 공조의 손짓도 한 몫을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연초 신년사에서도 “새 천년은 정부, 시장, 시민사회가 국가와 세계발전을 위한 3대 축을 이루고 서로 협력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 선언, 시민사회를 정치개혁의 파트너로 삼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한국의 시민운동을 설명할 때 흔히 세대별로 일제치하에서 시작해 역사와 전통을 가진 흥사단이나 YMCA를 1세대, 경실련 참여연대 등 종합 시민단체들을 2세대, 환경단체를 위시해 정치개혁 행정개혁 부정부패 인권 언론개혁 교육개혁 여성운동 소비자 교통문제 복지 외국인노동자 청소년 등 각 분야의 전문NGO들을 3세대로 구분한다. 이들은 사안에 따라 수시로 다양한 형태의 연합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시민운동이 엄청나게 성장한 듯해도 여기서 ‘메이저’에 해당하는 단체는 그리 많지 않다. 시민운동권에서 흔히 시민단체의 ‘빅 4’로 거론하는 단체는 참여연대 경실련 환경연합 녹색연합. 부문별 단체를 포함하면 산하에 진보적인 여성단체 28개를 포괄하는 여성단체연합이 추가되기도 한다.

    사실 어떤 식으로든 시민단체들을 비교하는 것은 금기에 속한다. 활동 자체가 비교가 불가능한 자율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 그럼에도 굳이 세속적인 잣대를 들이대자면 재정구조 회원 상근활동가 영향력 자원봉사자 등을 통한 유추는 가능할 것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89년 7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결성을 기점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까지는 재야단체 아니면 관변단체만 존재하던 상황에 정부정책을 감시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시민운동이 선을 보인 것이다. 경실련의 초기 주체들은 학생운동과 기독교운동 인사들이 주축. 특히 학현그룹 소속 경제학자들과 변호사 등 전문가 그룹의 결합을 통해 확보된 전문성은 이전 재야운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현재 지부 30여개에 회원수 2만5000명. 그러나 경실련 박병옥 정책실장에 따르면 회비를 온전히 내는 회원수는 많지 않다. 서울의 경우 3000명 정도.

    경실련의 10년 역사는 말 그대로 영욕의 과정이었다. 출범 이래 경제정의 실현을 위한 금융실명제 실시 촉구, 토지공개념의 공론화, 재벌의 경제력 집중완화 운동에서부터 최근의 국회의원 의정활동 감시, 정부예산 남용 비판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활동을 했지만, 97년 비디오 테이프 사건에 이어 지난해 사무총장의 신문칼럼 표절시비를 계기로 심한 내홍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깊고 묵은 상처는 사실 초기 관련자들의 대대적인 정·관계 진출이라는 지적이 많다. 특히 문민정부 시절 관계자들의 정·관계진출과 출마 시도 등으로 당시 경실련은 ‘정(政)실련’으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사임한 유종성 사무총장의 뒤를 이은 이석연 사무총장은 취임 직후 ‘정치권으로 갈 사람은 지금 떠나라’고 선전포고하기도 했다. 이 총장 취임과 함께 체제를 정비한 경실련은 2000년을 재도약기로 규정하고 경제정의와 더불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시민단체로 거듭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경실련은 총선시민연대에 참여하지 않고 따로 공천부적격인사 명단을 발표하는 등 독자행동을 해왔으나 최근 총선시민연대와 공조를 선언했다.

    94년 9월 비판사회학자와 인권변호사, 학생운동권 출신이 주축이 된 참여연대의 출범은 좀더 ‘낮은 곳으로 임한’ 시민운동의 전개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민중과의 연대와 권력감시운동을 화두로 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노선 설정 덕에 ‘좌실련’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게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의 회고. 초기에 설정한 노선대로 참여연대는 출범 이후 부패방지법 제정운동, 부정재산 환수운동, 소액주주운동, 작은권리찾기운동 의정감시활동 등을 통해 90년대 중후반 시민운동을 이끌었다.

    출범 당시 200여명에 불과하던 회원수는 2월 현재 7000명(서울)에 육박하고 있다. 재정 자립도도 가장 뛰어나다. 국민의 정부 들어 가장 주목받는 시민단체로 참여연대를 꼽는 데 주저하는 시민운동가는 거의 없다.

    환경연합은 회원 규모나 활동의 대중성 측면에서 시민단체 빅4중 가장 앞서가는 단체다. 현재 회비를 내는 회원만 전국 6만4000명에 이른다, 시류를 타지 않는 꾸준한 활동을 통해 묵묵한 지원자를 가장 많이 포용하고 있는 환경연합은 전지구적 화두로 부상한 생태계 생명운동 반핵운동 지구온난화 등 인류공통의 문제를 고민한다. 특히 98년부터 계속해온 동강살리기 운동은 민간단체들의 대규모 연대활동을 통해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낸 성공적인 운동으로 꼽힌다. 라디오광고와 거리서명운동, 각계 인사들의 연대농성 등 다양한 운동방법이 선보였다.

    서울환경연합 김혜정 사무처장은 환경연합의 올해 주요사업으로 유전자조작식품 추방, 물 절약과 댐건설 반대를 통한 강 살리기, 기업의 환경감시 모니터활동 강화 등을 소개한다. 이에 맞추어 조직개편을 단행, 지역 조직을 강화하고 옴부즈맨 위원회를 두는 등 활동의 투명성과 자기비판기능도 강화키로 했다. 또한 회원확대 특별기구를 독립기구로 분리해 올해 말까지 회원 10만명을 확보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방침이기도 하다.

    녹색연합은 94년 4월 91년부터 환경 및 생태보존운동을 해오던 ‘푸른한반도되찾기 모임’과 배달환경연구소가 합쳐져 재창립대회를 열고 출범한 단체. 전국 지부까지 합쳐 1만5000명의 회원이 있다.

    녹색연합은 현장 조사에 매우 강한 단체로 알려져 있다. 4대강 살리기 운동, 그린벨트해제반대운동, 동강살리기 운동, 갯벌보존 운동, 야생동물 보호운동 등을 했고 백두대간의 새 개념을 복원하고 녹색순례를 통해 국토사랑을 일깨우기도 했다. 96년 대만핵폐기물 북한 반입 반대운동을 위해 장원 사무총장 등이 대만에까지 달려가 삭발농성시위를 벌인 일화는 지금도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다.

    녹색연합 역시 올해 가장 역점을 두는 부분은 회원 늘리기 사업이다. 올해 활동영역을 생태계 보존운동, 대안에너지개발, 생명안전의 세 영역으로 구체화한 것도 시민 참여도를 높이려는 방안이다. 녹색연합 김제남 사무처장은 “백화점식 사업보다는 집중사업을 특화하는 것이 시민참여도를 높일 수 있다고 본다”고 말한다.

    시민운동 없는 세상을 꿈꾸며

    시민운동도 사람이 하는 것. 시민운동의 성과가 증폭되면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시민운동가도 속속 배출되고 있다. 한국 시민운동단체의 인적 구조는 대체로 상징적 대표성을 가진 60대 이상의 대표, 실무를 책임지는 40∼50대 사무총장, 30대 간부, 20대 실무간사로 이뤄져 있다.

    공동대표단은 대부분 사회 명망가들로 구성된다. 경실련의 유현석 조창현 이종훈 이종석 대표, 참여연대의 박상증 김중배 대표, 환경연합의 김진현 이세중 정학 대표 녹색연합의 강문규 노융희대표 등.

    공동대표단이 각 단체의 상징성을 대변하는 존재인데 비해 실무책임은 상근 활동을 하는 사무총장 내지 사무처장급에서 맡는다. 이 급에서 이미 많은 시민운동 스타들이 배출됐다. 경실련 이석연 사무총장은 지난해 말 경선을 통해 선출됐지만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 환경연합 최열 사무총장, 녹색연합 장원 사무총장은 비교적 장기집권한 실무자들. 세 사람은 이번 총선시민연대를 이끄는 핵심 인사들이기도 하다.

    단체마다 30대 상근 활동가들이 실무자급의 허리 구실을 하는데 경실련에는 박병옥 정책실장, 고계현 시민입법국장, 김서진 기획실장이 있다. 총선시민연대를 주도하는 참여연대에는 김기식 정책실장, 이태호시민감시국장, 김민영 사무국장, 박영선 문화사업국 국장, 이승희 경제민주화위원회 간사가 두드러진다. 환경연합은 김혜정 서울환경연합 사무처장, 황상규 정책실장, 유수훈 조직국장, 이상훈 환경조사팀장이 주축을 이룬다. 또 녹색연합에는 김제남 사무처장, 김혜애 시민참여팀장, 김타균 정책부장, 서재철 환경보전부장 등이 활동하고 있다.

    대부분 학생운동권 출신인 이들 386 상근활동가들은 90년대 시민운동을 지금까지 이끌어온 주력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각 단체의 진짜 손발 노릇을 하는 것은 이름 없는 간사들이다. 참여연대는 올해 간사 공채에서 해외석사출신 등 12명을 충원, 현재 60여명의 간사가 활동중이다. 환경연합의 경우 자원활동가들이 뒤섞여 늘 80여명이 북적거린다. 녹색연합도 40여명의 상근 실무자가 일한다. 경실련의 경우 현재 인턴을 포함해 50여명의 간사가 활동하고 있는데, 지난해 두 번째 경실련 파동 이후 간사들이 많이 바뀌어 ‘신인’이 많다.

    이들 상근활동가들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받으면서 헌신성과 소명의식만으로 일해왔다. IMF 이후 단체의 살림이 어려워지자 몇 개월씩 월급을 못 받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구조조정 대상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이들은 근본적으로 ‘자기 부정’의 상황에 처해 있다.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시민운동이 없어도 되는 세상, 활동가가 없어도 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 어찌됐건 이들 상근 실무자들은 자원봉사자와 자원전문가집단과 함께 시민운동의 3대 축을 이루며 ‘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하고 있다.

    어느 조직이든 사람만으로 안 된다는 건 철칙이다. 우수한 인력에 탄탄한 재정까지 갖춘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재정 문제는 시민단체들의 아킬레스건이다.

    “홀로 잘난 체하며 정작 시민을 따돌리고, 권력을 비판하면서 권력을 닮아갔으며, 연대를 말하면서도 조직이기주의에 빠졌다. 자금 마련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프로젝트를 하고, 권력을 추구한 경우도 많았다”

    지난해 10월6일 녹색연합이 마련한 ‘생태적 고백’ 자리에서 나온 녹색연합 현직 활동가들의 고백이다. 이런 뼈아픈 고백의 시간이 마련된 계기는 96년 녹색연합이 한국통신이 발주한 생태계 정보 공공데이터베이스 구축사업을 진행하던 중 한 사진작가의 식물사진 4000여 컷을 당사자 동의 없이 사용한 일. 사진작가의 항의와 손해배상 청구로 큰 타격을 입은 녹색연합이 그간의 활동방식을 반성하고 새 출발을 다짐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녹색연합 김제남 사무처장은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재정 기반의 취약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회원들의 회비로 재정자립을 이룬 시민단체는 아직 한 군데도 없다. 대부분 전체 예산에서 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 이런 사정은 당연히 조직운영과 사업추진에 필요한 자금마련을 위해 수익사업을 벌이거나 각종 프로젝트를 통한 정부와 기업의 지원에 의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생겨나기도 한다.

    총선시민연대가 공천반대자 명단을 발표하자 정치권에서 시민단체들의 도덕성을 거론하며 들고나선 것도 정부보조금이다. 관변단체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정부보조금을 받아왔다. 시민단체가 정부보조금을 받기는 지난해가 처음. 공공의 이익과 관련된 각종 정책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다. 경실련에 1억2000만원, 녹색연합에 9000만원이 지급됐다. 또 환경연합은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과 공동으로 1억1000만원을 받았다. 참여연대만은 지원금 공모에 응하지 않았다. 잡음이 일자 경실련 이석연 사무총장은 “경실련 문을 닫더라도 더 이상 정부지원금은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재정자립해야

    시민단체들은 왜 재정자립을 못하는 걸까. 참여연대 김민영 사무국장은 “이는 바로 시민운동에 대한 시민참여 기반의 취약함과 맞물려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8월 월간 ‘참여사회’가 서울시민 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는 시민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 수준을 잘 보여준다. 조사대상자의 85.6%가 시민단체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회비를 납부하고 있는 시민은 4.7%에 불과했던 것.

    재정자립도가 비교적 높은 참여연대도 지난 연말 기준으로 79% 선에 머물고 있다. 참여연대는 98년부터 카페운영 등의 수익사업을 벌이는 한편 지난해 8월부터는 자동응답전화 모금을 시도하는 등 시민의 힘에 기대는 재정자립기반을 다지기 위해 애쓰고 있다. 경실련은 올해 말까지 회원확대사업을 통해 재정자립도를 50%까지 끌어올린다는 방침을 세웠다.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은 “근본적으로 기부문화와 참여시민문화의 확산, 특히 공공재단의 직간접적 지원체계가 활성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사무처장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공공재단에 모인 돈이 3600조원인데 그중 기업이 낸 돈은 7%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모두 개인이 낸 것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이러한 필요성을 반영하듯 인권재단, 여성재단, 아름다운 재단 등 공익재단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한편 이번에 낙천낙선운동을 벌이는 총선시민연대에는 출범 초기부터 지금까지 지지자들의 성금이 끊이지 않아 시민운동의 물적 토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간 시민운동을 논할 때는 으레 ‘시민 없는 시민운동’ ‘명망가 중심의 시민운동’ ‘백화점식 시민운동’이란 ‘주석’이 따라다녔다. 시민운동권 내부에서도 이 점은 인정한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사회학)는 “한국의 시민단체가 강한 정책지향성을 갖고 있는 점과 시민참여가 부족한 점은 상호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시민의 소극성과 무관심이 정책개발을 하는 전문가나 지식인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고, 이러한 엘리트 집단의 과도한 개입이 시민운동의 방향을 대중적 참여보다는 언론에 의존하거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쪽으로 정착시켰다는 지적이다.

    사실 냉철한 눈으로 한국의 시민운동을 들여다보면 여기 저기 허점과 거품이 보인다.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하승창 사무처장은 “특히 시민운동이 성장하면서 대표자들이 정치적으로 과잉포장되는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령 낙천·낙선운동이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싸우고 국민들은 박수만 치는 대리전이 아니라 유권자들이 나서는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이번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은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관행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 낙천·낙선운동이 젊은 층, 특히 네티즌들에게 널리 번져나가는 현상에서 시민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제4세대 시민운동이다.

    각 시민단체들도 ‘사이버 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미 경실련에서 이탈한 경제정의연구소팀이 주축이 돼 지난해 출범한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네티즌을 대상으로 한 시민운동을 시작했고, 참여연대도 사이버 참여연대 활동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환경연합, 녹색연합 등도 네티즌을 겨냥한 ‘사이버’ 전담팀을 만들었다. 낙천·낙선운동의 열기가 가장 활발한 곳도 인터넷상의 총선시민연대 사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월12일부터 한 달 동안 39만여 명이 이 사이트를 다녀갔고 온라인 지지서명은 2만여 건에 이른다.

    반면 요즘 시민운동의 흐름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가장 큰 우려는 시민단체들간의 노선 차이에 따른 갈등. 가령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기존 시민협 산하 단체들과 최근 총선시민연대를 조직한 단체들 사이에서는 완연히 다른 주장들이 드러난다. 이 가운데 중산층을 대변하는 시민운동을 표방했던 경실련이 연대활동에서 배제되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경실련이 총선시민연대에 참여하지 않고 따로 움직이는 현상이 대표적인 경우. 경실련은 총선시민연대가 출범하기 이틀 전 공천부적격자 명단 164명을 따로 발표해 큰 파장을 불렀다. 이에 대해서는 입장에 따라 견해가 갈리지만, 경실련과 총선시민연대 양측에 모두 문제가 있다는 시각에 귀기울일 만하다. “굳이 따로 노는 경실련도 문제지만 적극적으로 연대하자고 손길을 내밀지 않는 총선연대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시민운동권의 세대교체

    한편 시민운동을 이끄는 지도자군의 세대교체는 대세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번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을 계기로 시민운동의 리더십이 경실련에서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한 연대세력으로, 명망가와 원로들을 중심으로 한 운동에서 실무자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단체간 연대를 통한 사회세력화 움직임은 21세기 시민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흐름이기도 하다. 103개 시민단체가 함께 발표한 ‘2000년 선언’에 이은 개혁네트워크 구상에 따르면 시민운동의 지방화에 뿌리를 둔 상설 연대 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역동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긴 해도 외화내빈 상태고 외국에 비하자면 태동기에 불과하다”는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의 고백처럼, 국내 시민단체의 위상엔 거품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거품 속에서 또한 발전의 싹을 엿볼 수 있다. 그 발전은 시대적 요청이자 시민주권사회라는 대세의 반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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