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여섯살에 직업으로 택한 시민운동가. 운동도 직업이 된다는 안도감에 신이 났다. 아내도 직장을 접고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우리는 가진 것 없는, 그러나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는 운동가 부부다.》
얼마 되지 않아 학생 신분을 떠나게 된 나는 어디서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사회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걸음을 내디뎌야 할지 몰랐다. 공사판과 이삿짐센터 인부, 학원강사로 전전하던 무렵 나는 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회에 진출한 지 3∼4년 안팎이거나 더러는 사회진출을 준비하고 있던 80년대 학번들의 모임이었다. 그 모임의 상근자로 나는 어정쩡하게 사회에 진출했다. 그때 지금 참여연대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김기식씨나 문혜진씨 같은 이들을 만났다. 둘은 그 뒤 결혼해 부부가 되었다.
‘사회 변화’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으로 시작한 모임이지만 한계 또한 너무도 확실했다. 94년 봄 연남동에서 있었던 한 모임에서 몇몇 사람과 함께 박원순 변호사를 처음 만났다. 새로운 운동을 하자는 얘기가 오갔다. 그 뒤로 더 많은 사람이 몇 차례 더 모인 후 불암산의 한 산장에서 워크숍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때까지 잘 몰랐던 많은 지식인들과 사회운동가들을 알게 되었다. 긴 토론과 논쟁 끝에 ‘새로운 운동단체’를 만들기로 했다. 그해 7월 이글거리던 무더위 속에 나는 용산역 앞 허름한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참여연대의 시작이었다.
운동도 직업이 된다
참여연대 결성을 준비하던 초기에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은 ‘작명’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조직 구성, 사업계획, 재정 마련 등 여러 가지 현안과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지만 다수의 공통된 관심이자 핫 이슈는 단연 ‘명칭’이었다. 사전 논의를 거쳐 압축된 키워드는 ‘참여(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시민’이었다. 각각의 의미와 강조점에 대한 주장을 고려하다 보니 다수가 만족하는 명칭을 만드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명칭 논란의 결정판은 종로성당에서 밤을 새우던 날이다. 그래서 나온 최초의 명칭이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 장고 끝의 악수였다. 만든 이들밖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 긴 명칭은 ‘참여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 ‘참여민주사회 시민연대’라는 기구한 변천을 거쳐 오늘날의 명칭으로 확정되었다. 이 ‘명칭 논란’은 단편적으로 보면 그냥 논란에 불과하지만, 실은 새로운 운동의 위상과 방향에 대한 치열한 검증과 공유의 과정이었다. 시민운동을 시작하긴 했지만 서툴고 불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람을 모으고, 이슈를 만들고, 사업을 진행하는 모든 일이 그전까지 익숙한 발상법과 운동방식으로는 재단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은 책임을 지는 운동이었다. ‘정확한 사실에 기초할 것’ ‘구체적일 것’ ‘대안적일 것’ 그리고 ‘작은 변화와 성과를 만들고 축적할 것’. 그때까지 거대 담론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쉽지 않은 책임들이었다. 실수도 많고 실패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내가 기획했던 ‘서울시의회 의정평가 사업’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유권자의 선택기준 마련을 위해 기획한 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4년의 의정활동 기록을 분석한다는 시도 자체에 다소 무리가 있었고, 그것을 수행할 만한 각 분야의 전문가 진용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계획한 이상 진행해야 했다. 4개월 동안 진행한 프로젝트가 선거일이 다가와도 마무리되지 않자 초조해진 나는 거의 한 달을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며 속기록과 씨름했다.
우여곡절 끝에 300페이지에 가까운 평가서를 마무리해 출판사에 넘기고 출판기념 토론회를 준비했다. 장소를 빌리고, 초청장을 보내고, 발표·토론자를 섭외하고, 잡무를 다 처리했다. 그러나 정작 토론회 당일에 발표자와 토론자 외에 참석한 사람은 10여명에 불과했다. 이미 선거운동 기간에 들어선 시의원들이 내 예상과는 달리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약속했던 주제발표자까지 갑작스러운 일로 불참을 통보해왔다. 물러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 ‘강행’을 결정했고 10여명의 청중 앞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내가 주제발표를 대신했다. 당시의 녹음테이프가 남아 있지만 아직까지 난 한 번도 그 녹음테이프를 들어보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한동안 활동가로서의 내 감각과 자질에 회의를 갖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우스운 일은 다음날 거의 모든 일간지가 비중 있게 이 의정평가서를 보도한 것이다. 참여연대 활동 소식이 실린 1단 기사를 보고도 좋아하던 시절이지만 그날은 하루종일 우울했다.
용산역 홍등가에서
참여연대 사무실이 있던 용산역 앞은 그다지 환경이 좋은 곳이 못 된다. 도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되지 않아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많고 서울 시내에 몇 군데 남지 않은 홍등가가 있다. 밤이 되면 행인들 소매를 끄는 홍등가의 ‘삐끼’ 아줌마들이 곳곳에 나와 있다. 참여연대의 활동가들을 포함해서 각종 회의와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두 번쯤 이 아줌마들에게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더구나 참여연대 사무실의 규모가 커져 사무실을 홍등가 안쪽에 있는 건물 2층으로 나눴다. 처음에는 그냥 아무 말 없이 무시하거나 뿌리치고 지나갔지만, 그때마다 실랑이하는 것이 귀찮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이 다가오는 아줌마에게 먼저 아는 척 웃으며 목례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대부분은 순간적으로 당황하게 되고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갈 수 있었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삐끼’ 아줌마들은 나를 동네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96년 참여연대는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을 핵심 캠페인으로 추진했다. 전·노 두 전직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을 비롯하여 굵직굵직한 부패사건이 연이어 터진 시기였다. 연일 캠페인과 서명운동 그리고 각종 토론회가 이어졌는데, ‘맑은사회만들기운동’의 실무팀장이었던 이태호씨는 일주일에 사나흘 이상 사무실에서 밤을 새웠다. 워낙 일이 많아서였지만 재미있는 것은 낮에는 늘 졸거나 잠자기 일쑤였다. 컴퓨터 앞에 조용히 앉아 있거나 회의 도중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십중팔구 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밤만 되면 정신이 돌아와 일을 하는 것이었다. 새벽에 일찍 출근하는 활동가는 사무실 열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맞벌이 운동가 부부
96년 ‘맑은사회만들기운동’의 하이라이트는 삼풍참사 1주기 추모사업이었다. 성수대교 앞에서 삼풍백화점까지 거리행진을 한 뒤 추모음악회를 여는 행사였다. 예상치 못했던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2000여 명에 가까운 시민이 모여 시가행진을 한 뒤 삼풍백화점을 둘러싸는 ‘인간띠 잇기’ 행사를 진행하였다. 하늘도 유족들의 슬픔을 아는 듯 비가 그치지 않았고 참석자들은 비에 흠뻑 젖은 고인들의 넋을 기리는 마음에 숙연했다. 이 사업은 참여연대가 최초로 시민들과 함께 한 사업이다.
96년말 지금의 아내가 갑작스러운 선언을 했다. 자신도 직장을 그만두고 사회운동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겉으론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론 ‘이거 큰일이구나’ 싶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로 직장생활에 늘 회의를 느끼고 있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결혼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라 은근히 걱정이 됐다. 하지만 말릴 수도 없는 일. 소비자운동에 관심이 있던 아내는 서울 YMCA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다. 97년 4월 우리는 아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지겨운 10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러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집도 먼 탓에 우리는 나가는 시간도, 돌아오는 시간도 각자인 한집의 하숙생 같은 결혼생활을 했다. 하지만 서로의 일과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어 행복했다.
아내와 내가 각각 속한 단체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 벌어지는 재미있는 일들도 있다. 서울 YMCA 시민중계실에서 근무하는 아내는 한동안 소비자상담실을 전담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98년말부터 참여연대의 시민권리국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민원·상담인들을 만나고 있다. 자연스레 집에 돌아가 이런 저런 민원사항들과 상담인들에 관해 얘기를 하게 되는데, 같은 사람을 만난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이다. 이런 분들의 공통점은 대체로 시민단체가 해결하기 어려운 민원을 갖고 오는 경우가 많고 또 시민단체를 두루 섭렵하다보니 그 노하우와 고집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농담삼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교환하자는 말을 했다. 서로의 활동에 충고를 하고, 아이디어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자칫 바쁜 시간과 일에 쫓겨 소홀하거나 건조할 수 있는 결혼생활에 큰 활력소가 된다.
지난해 가을 나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았다.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아이를 처음 만난 감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을 얻은 그런 기분 말이다. 하지만 그 감격과 기쁨 속에 있는 것도 잠깐. 일과 육아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아내와 나는 일을 택했다. 마음이 아프지만 아내의 탓도 나의 탓도 아니다.
지금 아이는 조금 먼 곳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리고 나는 주말마다 아이와 행복한 해후를 한다. 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아이가 자랄 세상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
가끔 나는 주위의 지인들로부터 ‘왜 시민운동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사회를 바꾸고 싶은 소망도 있고 사명감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가운데서 배우고 사고와 행동의 폭과 깊이가 생기는 그런 일이 나에게는 시민운동이다. 물론 약간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경제적 어려움은 일부분이다. 그 외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고 나는 시민운동을 하면서 그런 어려움들을 헤쳐나가고 있다.
나는 아직 내 ‘전망’을 무엇이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내가 20년, 30년 후에도 운동가로 살아갈지는 모르겠다. 또한 지금 그렇게 자신하는 것도 어쩌면 경솔한 태도일 것이다. 다만 앞을 내다보고 살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지난 몇 년간 시민운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NGO의 시대’ ‘제5의 권력’… 어느덧 시민운동은 이 시대의 문화 코드가 되었다. 시민단체들도 예상치 못했던 부패정치인에 대한 낙천·낙선운동의 열기는 성장한 시민운동의 위력을 실감케 한다. 이제 더 많은 시민들이 시민운동을 지켜보고 참여하고 있다. 시민운동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느 정도 발전할지 섣불리 예측할 순 없다. 하지만 이 사회에 변화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거기에는 시민운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자리에 서 있길 스스로 바란다. 지난 6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