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개업의였던 외조부로부터 가통을 이어받아 30년 동안 모성 건강 확보에 매달려온 산부인과 전문의 박용균(57) 고려대 구로병원 원장은 요 근래 그가 즐기던 요리는커녕 식구들과 저녁을 함께 하기도 쉽지 않다.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워낙 많은 큰 병원의 원장을 맡고 있는 데다가, 대한산부인과학회 이사장, 고려대의대 주임교수 등 학교와 학회에서 맡은 보직 또한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어렵게 한다.
그런 그가 1월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 일찍 병원에 들러 일을 보고 돌아와 모처럼 앞치마를 둘렀다. 편안한 마음으로 재료를 다듬는 그의 웃음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며 가장 즐거워하는 이는 여전히 정정함을 잃지 않고 있는 여든살의 노모다. “예전에는 곧잘하던 애가 요즘은 영 솜씨를 보이지 않더니…”라며 모처럼 소매를 걷어붙인 아들의 요리를 한껏 기대하고 있다.
그가 오늘 가족들에게 선사할 요리는 데리야끼 스테이크. 데리야끼는 단맛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구이에 자주 사용하는 양념장의 하나로, 원래는 장어뼈와 구운 대파, 고추 등에 물엿과 간장을 넣고 대여섯시간 졸여 만든다. 그러나 그는 이런 번거로운 절차 대신 불고기 양념을 응용해 소스를 만들기로 했다.
간장에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같은 양으로 섞은 다음 설탕을 듬뿍 넣고 마늘, 생강, 후추를 넣어 장을 만드는 것. 파와 양파를 넣지 않기 때문에 불고기 양념과 다른 맛을 내는데, 여기에 하루 정도 고기를 재놓으면 육질도 훨씬 부드러워지고 스테이크 소스 없이도 담백한 고기맛을 즐길 수 있다.
이 조리법은 71년부터 85년까지 미국에서 의사생활을 하던 시절, 그가 교포들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다. 연한 부위의 쇠고기 안심을 아무런 양념 없이 그릴에 구운 다음 소스를 살짝 곁들여 먹는 미국식 스테이크를 한국인 입맛에 맞도록 개량한 일종의 ‘퓨전요리’다.
원래 그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육식을 즐기는 편인지라 미국 음식에 적응하기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김치와 고추장 맛에 길들여진 한국인. 음식 연구가들에 따르면 김치나 치즈 같은 발효식품은 강한 ‘중독성’이 있어 한번 길이 든 후에는 ‘영원히’ 그 입맛을 버리지 못한다고 한다. 박원장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하고 돌아온 이들의 얘기 역시 “의식주 가운데 다른 건 다 적응하겠는데, 먹는 것만큼은 도저히 안 되더라”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비슷한 재료를 가지고 한국식으로 음식을 만들며 이국생활에 지친 자신의 혀를 달래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 있는 ‘퓨전요리’는 그런 이름이 붙기 전부터 제가 태어난 곳을 떠나 사는 이들이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음식조리법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 싶다.
양념장을 흡수한 고기를 꺼내 보기 좋게 베이컨으로 감싸는 그에게 “요리를 어떻게 정의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둔 것인 양 즉시 ‘종합예술’이라고 답한다. 음식 자체의 맛과 향은 물론이고 음식이 담긴 모양, 식탁 분위기 등이 모두 어울려야 제 감흥을 준다는 얘기다. 그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요리의 시각적 효과. “음식은 입에 앞서 눈으로 즐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우리 요리가 일본요리에 비해 외국인들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원인이 미각(味覺)이 아닌 미각(美覺)에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스테이크 요리의 진짜 실력은 굽기에 달려 있다고 했다. 미국에 살던 시절, 제법 넓은 농장을 가지고 있던 그는 종종 사람들을 불러모아 스테이크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또 차 안에 항상 목탄과 기름을 준비해놓고 식구와 야외로 나가기를 즐겼는데, 이 때도 굽기만큼은 그의 몫이었다. 지금 그가 사는 서울 서초동의 한 빌라 정원에는 그의 실력을 증언해줄 바비큐 그릴이 놓여 있다. 요즘도 반상회 때면 단지에 사는 이웃사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이 물건은 박원장이 미국에서부터 사용하던 것이다.
미리 불을 붙여놓은 그릴 속의 목탄은 어느새 포일로 감싼 쇠판을 달구어놓은 상태. 자,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굽기 실력을 감상할 시간이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불기운이 올라오게끔 구멍을 숭숭 뚫고 그 위에 고기와 새우를 하나하나 올려놓았다. 그리고 고기 색깔을 눈으로 가늠하며 적당히 익도록 때에 맞춰 뒤집어주었다. 그가 즐기는 스테이크 굽기 정도는 미디엄과 웰던의 중간 정도. 먹기에 적당하기론 미디엄이지만, 혹시 모를 병균 감염을 염려하는 까닭에 조금 더 익힌다.
자신 만만하게 그릴을 점령한 그의 옆에서 빨간 앞치마를 두르고 조수 노릇을 하는 큰 아들 장원씨(30)에게 아버지의 요리실력을 평가해달라고 하자 빙긋 웃기만 한다. 자신에 비하면 아버지의 실력은 대단치 않다는 무언의 표시. 이에 껄껄 웃음을 터뜨린 박원장은 “저 아이가 혼자 외국 생활을 하며 익힌 솜씨가 나보다 나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고기를 굽는 동안 아내 이미영씨(53)는 이미 식탁 가득 성찬을 준비해놓고 메인디시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식당이 아닌 가정집에서 주부 혼자 이렇게 격식을 차린 음식을 단숨에 해내기는 쉽지 않을 성싶은데, 사람 좋은 박원장이 워낙 자주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통에 ‘선수’가 됐다고 한다.
다 익은 고기가 식탁으로 올라오자 그는 냉동실에 얼려놓은 잔을 꺼내 맥주를 따라 마시며 벽면 장식장을 살펴보라고 권한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다양한 모양의 산부인과 의사 인형들이 가득하다. 자신의 직업인 산부인과 의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보인다.
“생명의 신비와 탄생의 경건함을 알리는 텔레비전 프로가 자주 방영되는 덕인지, 한동안 기피과목이던 산부인과에 요즘 들어 우수한 인재들이 다시 몰리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더없이 반가운 일이지요. 나라가 튼튼하려면 가족이 건강해야 하고, 그 출발은 주부의 건강입니다. 산부인과는 바로 나라를 튼튼히 하는 학문이지요.”
정말 맛있는 그의 요리를 시식하며 잠시 의사와 요리사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두 직분은 ‘건강하라’가 가장 흔한 인사가 된 이 시대에 다같이 ‘생명’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