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쑥국수 뽕잎냉면 땅콩떡볶이를 아십니까

전통음식 개발한 송학식품 성호정 사장

  • 곽희자 자유기고가

    입력2006-12-06 10: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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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쌀떡, 국수, 냉면, 수제비, 만두… 송학식품에선 안 만드는 게 없다. 2대에 걸쳐 40년 동안 전통음식을 만들어왔다. 남들보다 비싸게 팔면서도 시장점유율은 선두. 그 비결은 지속적인 신제품 개발, 철저한 품질관리와 서비스정신에 있다.》
    설날을 며칠 앞두고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야당리에 있는 송학식품을 찾았을 때 공장 곳곳에선 모락모락 올라오는 하얀 김 사이로 먹음직스러운 가래떡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나왔다. 기다란 가래떡은 찬물에 담가 열기를 식혔다. 그런 다음 일정한 길이로 잘라 노란 상자에 가지런히 눕혔다.

    떡을 떼던 아주머니가 정겹게 건네준 떡 한 조각을 입에 넣으니 쫀득쫀득하고 구수한 맛이 옛 추억을 떠올렸다. 눈을 돌려보니 말린 가래떡들이 자동 절단기를 거쳐 주정액(99% 술 원액)에 샤워한 후 포장돼 나가고 있었다. 다른 쪽 기계에선 냉면과 쫄면이 나오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발에 걸려 마른 뒤 주정액에 잠깐 담겼다가 바로 진공 포장됐다.

    송학식품의 성호정(54·成浩貞) 사장은 “신정과 설은 가래떡의 최대 성수기이기 때문에 이 무렵엔 15∼20일 공장을 24시간 가동한다”고 했다. 이 시기엔 판매량도 평소보다 3배 이상 높은데, 설 보다는 신정 때의 판매량이 더 많다고 했다. 설날에는 신정보다 명절 기분이 더한데다, 가족들끼리 모여 앉아 떡을 써는 재미를 즐기려고 방앗간에서 직접 떡을 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겨울에 많이 나가는 제품이 가래떡과 만두라면 여름엔 단연 냉면과 국수다. 그래서 냉면과 국수 소비가 가장 많은 7~8월에도 20여일 동안 24시간 생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우리 전통식품 맛 내기에 40년. 부친에 이어 2대째 100여종에 달하는 우리 음식을 개발, 생산해온 송학식품은 동종 업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회사로 맛과 품질면에서도 일찍부터 인정을 받아왔다. 올해로 4년째 육·해·공 3군에 떡국 떡을 독점 납품해왔고, 수제비와 국수 등은 92년부터 미국 일본 호주 중국 유럽 등지로 수출했다.



    떡에서 누룽지까지

    송학식품은 5000평에 달하는 경기도 파주의 제1공장과 2000평 규모의 충북 청원 제2공장에서 270여명의 직원이 연간 35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생산품목은 쌀떡(떡국, 떡볶이) 국수(건국수, 칼국수) 냉면 쫄면 당면 수제비 우동 만두 누룽지 김치 등.

    국수류는 밀가루국수를 비롯해 쌀국수 보리국수 메밀국수 감자국수 쑥국수 도토리국수 등 10여종에 달하고, 냉면도 평양식 냉면과 함흥식 냉면 칡냉면 뽕잎냉면 녹차냉면 등 대여섯 가지나 된다. 이중 25개 품목은 OEM으로 하청을 주고 있는데, 한 하청 회사가 한 품목만 생산하도록 하고 있다. 품질과 위생 관리에 철저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다양한 제품으로 재래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신제품 개발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연 매출의 5∼10%를 개발비로 투자하고 있어요. 10여가지 신제품을 개발하면 겨우 한 가지 정도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는데, 쓰던 기계를 이용해 신제품을 개발해도 상품화에 실패하면 5000만∼6000만원의 손해를 입게 돼요. 기계까지 새로 구입했다가 실패하면 1억원이 날아갑니다. 그렇다고 신제품 개발을 등한시하면 발전은 기대할 수 없죠.”

    송학식품처럼 전통음식을 만드는 회사는 군소업체까지 전국에 100여개에 달해 이들보다 앞서가려면 꾸준한 연구를 통한 신제품 개발에 매진해야 된다는 것. 제품의 다양화는 경쟁력을 확보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슈퍼마켓이나 대형 할인매장에 가보면 가래떡 한 가지에도 다양한 상표를 단 제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 이 때 소비자의 선택은 어느 회사의 이름이 더 눈에 익었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소비자의 다양한 기호를 충족시키는 여러 가지 제품을 선보임으로써 회사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송학(松鶴)’이라는 이름은 성사장의 부친 성귀현씨(78)의 아호에서 딴 것으로, ‘소나무와 학처럼 귀하고 오래 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주부들에게는 이미 친숙한 이름이다.

    성귀현씨는 일본에서 식품사업을 하다 광복을 맞으면서 대구로 돌아와 한동안 고물상을 했다. 그러다 1960년 부산으로 내려가 동구 범일동에서 송학식품을 설립하고 국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성호정 사장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1946년 경북 영천군 화북면 대천리에서 2남4녀의 맏이로 태어난 성사장은 아버지가 벌여놓은 사업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일에 파묻혀 살았다고 한다.

    “다른 형제들은 다 놀러나가도 나는 놀지 못했어요.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엔 아버님이 아예 거래처 중에서 스물 몇 군데를 떼주면서 배달에서 수금까지 책임지게 했습니다. 말이 ‘거래처’지, 대부분 ‘뻥튀기’ 장사를 하는 가난한 상인들이었어요(뻥튀기 재료가 밀가루에 사카린을 넣어 뽑은 국수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니 수금이 제대로 될 리 없죠. 어떤 날은 미수금을 받으러 가보면 이사를 가버리고 없을 때도 있었어요. 이럴 때는 아버님께 혼이 났죠. ‘어떻게 거래처 사람이 이사를 가도록 모르고 있었느냐’고.

    자전거 행상으로 재기 발판

    대여섯 명의 직원을 데리고 시작한 부친의 사업은 성사장이 중학교 2학년이 됐을 무렵엔 직원이 50여명에 이를 만큼 번창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2년 후 공장을 넓힐 계획으로 공장 한 곳을 내놨다가 사기를 당하면서 사업은 기울기 시작했다. 부친은 3년동안 소송에 매달리느라 공장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성사장이 고교를 졸업할 무렵엔 하나 남은 공장마저 남의 손에 넘어갔다. 남들 보기도 뭣해서 더는 부산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성사장이 배정고교를 졸업하던 해 그의 가족은 빈털터리인 채 서울로 올라왔다. 영등포구 신길동에 거처를 잡고 삼각지에서 뻥튀기 장사를 시작했다. 맏이인 성사장이 실질적인 업주였다.

    뻥튀기 기계를 한 대 사다 놓고 과자를 만들어 하루는 수원, 하루는 인천으로 나가 팔았다. 자전거에다 뻥튀기 한 자루를 싣고 아침 일찍 출발하면 정오쯤 수원에 닿았는데, 그 때부터 구멍가게들을 돌며 과자를 팔았다. 한 자루를 다 팔고 나서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아 집으로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다음날엔 같은 방식으로 인천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2년을 뛰어다녔더니 국수 뽑는 기계 한 대를 살 돈과 시장판에 작은 가게 하나를 얻을 돈이 생겼다. 다시 국수 장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70년 신길동 신남시장에 8평짜리 가게를 얻어 국수 기계 한 대를 놓고 온 가족이 국수 만들기에 나섰다. 성사장은 이때부터 대표자 명의를 자신으로 하고 아버지의 훈수를 받으며 사업을 꾸렸다. 가족들이 국수를 만들어 놓으면 국수를 내다 파는 일은 성사장 몫이었다.

    “매일 아침 40관이나 되는 국수를 자전거에 싣고 상점들을 돌며 파는데, 다들 거래처가 있다 보니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예요. 하루는 아침에 들렀다 퇴짜를 맞은 ‘경남상회’라는 가게를 낮에 다시 찾아가서 사정을 했어요. ‘아침부터 돌아다녔는데 하나도 못 팔았다. 부산에서부터 국수를 만들었는데, 물건이 좋으니 일단 한 번 받아다 팔아봐라. 대신 밀가루를 당신 가게에서 소매가에 사다 쓰겠다’고. 한참 사정을 했더니 딱해 보였던지 가게 주인이 ‘놓고 가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첫 거래처를 뚫었어요.”

    주인은 그 후 1년쯤 성사장과 거래하면서 그의 성실함에 반해 적극적으로 돕게 됐다.

    그는 이렇게 주위의 도움을 받으며 차츰 기반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 밴 절약정신도 사업을 일으키는 데 한몫 했다. 당시 국수가 가장 많이 팔리던 곳 중 하나가 남대문시장이었다. 노점 상인들이 점심으로 국수를 주로 사먹었는데, 성사장은 남대문에서 국수를 삶아 파는 가게를 거래처로 확보해 하루 80관씩 배달했다. 그 무렵 자전거에 국수를 가득 싣고 언덕배기를 오를 때면 아이들이 뒤에서 자전거를 밀어주고 10원씩 받았다. 성사장은 그 돈을 아끼려고 국수를 40관씩 나눠 싣고 두 차례씩 남대문시장으로 실어다 날랐다.

    성사장은 나름대로 시장조사를 한 결과 국수 소비가 많은 곳이 재래시장임을 알게 됐고 이에 따라 시장 상점들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첫 단계로는 가격을 다른 곳보다 싸게 해줬고, 다음에는 ‘송학’이라는 이름의 친목회를 만들면 친목회 운영비 전액을 대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상인들의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한 집, 두 집 거래처가 생겨나더니 나중에는 시장 내 23개 상점이 모두 송학식품 국수를 받아 팔게 됐다.

    뒤에 그는 사업이 커져 직원을 두고 일할 때도 수금만큼은 꼭 자신이 직접 하러 다녔다. 수금하면서 상인들과 얼굴을 익히고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맨투맨식 거래처 관리와 적극적인 판로 개척에 힘입어 성사장은 몇 년 지나지 않아 2000평 규모의 시장 전체를 세내 공장으로 사용할 만큼 사업이 번창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실내 건조실이 따로 없었고 건조법도 몰랐기 때문에 국수를 뽑으면 모두 햇볕에 말렸다. 그래서 날씨가 조금만 좋지 않아도 국수를 뽑을 수 없었다. 특히 장마철이나 샛바람이 부는 이른 봄과 가을은 국수를 뽑기가 가장 나빴는데, 이런 날이면 손을 놓고 놀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국수를 널어놓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국수가 홀랑 젖어 땅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른 봄이나 가을에는 아무리 햇볕이 좋아도 바람이 세게 불기 때문에 국수를 말릴 수가 없었다. 국수는 서서히 말라야 발도 단단하고 맛도 좋다. 센 바람 때문에 짧은 시간에 마르면 바삭바삭 부서지기 때문에 내다팔 수가 없다.

    날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탓에 주문이 쇄도해도 많은 양을 만들 수가 없었다. 60∼70년대에 쌀이 부족한 나머지 ‘분식의 날’을 정해 일주일에 두 번씩 밀가루 음식을 먹게 한 때가 있다. 이 시기에 걸핏하면 국수가 동나기 일쑤였다. 고르지 못한 날씨 탓에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실내 건조법이 개발되고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그런 어려움은 완전히 해소됐다. 실내 건조법 개발은 우리 식품업계가 위생적으로도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요즘엔 모두 실내 건조실에서 국수를 말린다. 온수 보일러에서 뜨거운 물을 계속 데워 여기에서 발생하는 열을 선풍기를 이용, 국수에 골고루 퍼지게 해 적당한 습도와 바람을 쏘여 말린다.

    성사장은 국수에 이어 떡국용 쌀떡도 생산했다. 그러나 쌀떡 역시 거래처를 뚫기가 쉽지 않았다. 생각 끝에 그는 매일 새벽녘이면 따끈따끈한 가래떡을 썰어 설탕과 함께 들고 다니면서 이른 시간에 빈 속으로 시장에 나온 상인들에게 요기를 시키며 떡 선전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래떡은 건국수와 달리 어느 정도 수분이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에 방부제를 넣지 않으면 한여름에는 2∼3일, 겨울에도 5일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기껏해야 하루에 팔 양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통기간이 이렇듯 짧으니 거래처도 서울과 경기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곳으로 팔려간 물건들도 걸핏하면 유통기간을 넘겨 반품되곤 했다. 그래서 반품률이 20∼30%에 이르렀다.

    바늘귀만한 틈도 없어야

    그러나 성사장은 92년 주정살균법을 개발, 적용하면서 반품률을 2∼3%선으로 떨어뜨렸다. 주정살균법은 99% 알코올 원액에 제품을 담그거나 원액을 제품에 뿌려 방부성을 높인다. 성사장은 일본 식품업계에서 이 기술을 배워와 직접 실험해봤다. 이는 병원에서 소독을 위해 알코올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살균효과와 함께 방부효과도 컸다.

    또한 기존 비닐 포장을 진공 포장(비닐봉지를 한 번 더 코팅함)으로 바꾸고 포장지 속에 탈산소재를 넣어 봉지 속에 남아 있는 산소를 모두 흡입해 세균이 살 수 없게 했다. 이렇게 하자 유통기간을 2개월로 연장할 수 있었다. 방부제를 전혀 넣지 않고도 유통기간이 길어지자 대량 생산은 물론 전국 중·소도시 판매도 가능해졌다.

    성사장은 이 기술로 국내 식품업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면서 사업을 크게 키웠다. 주정살균법에 힘입은 대량 생산으로 전국 판매망을 갖추고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매년 2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94년에는 생산품목을 더 늘리느라 충북 청원에 제2공장을 설립했다.

    92년 성사장은 쌀국수를 개발, 남아도는 쌀 문제를 해결했다는 공로로 농림수산부가 주는 석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쌀이 모자라던 시절, 정부는 재래종 벼보다 수확량이 많은 통일벼를 장려했는데, 이에 따라 많은 농가에서 통일벼를 심어 쌀 수확이 크게 늘었다. 통일벼는 정부에서 전량 수매해줬는데, 나중엔 쌀이 남아 돌아 창고에서 썩는 지경이 됐다. 그래서 쌀막걸리와 쌀과자들이 생산됐는데, 소비는 미미했다. 이때 성사장은 쌀로 국수를 만들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성사장이 만든 쌀국수는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와 매스컴에 힘입어 92년 예비군 훈련장에 처음 납품됐다. 이듬해에는 육군에 이어 해군과 공군에까지 납품됐다. 당시 3군 장병은 60만명. 이들에게 한 달에 네 차례씩 쌀국수를 먹였으니 매달 60만kg(80kg짜리로 7500가마니)의 쌀이 소비됐다. 당시 정부는 이런 제품을 개발한 업체에 2년간 독점 납품할 수 있는 혜택을 줬다. 송학식품은 군 납품을 통해 매출을 크게 늘린 것은 물론 제품 홍보효과도 톡톡히 봤다.

    또한 그해부터 감자 수제비와 호박 수제비를 만들어 국수류와 함께 미국 일본 중국 등지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수출 제품 수송은 냉장 컨테이너를 이용하는데, 그 경비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성사장은 상온에서 일반 컨테이너로 운송할 수 있고 2개월의 유효기간을 6개월까지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성사장은 “식품은 인체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어느 한 과정도 소홀히 하면 안된다”고 한다. 아무리 완벽하게 제품을 만들었다 해도 유통과정에 바늘귀만한 구멍 하나만 생겨도 금세 변질되기 때문에 조금도 방심할 수 없다는 것.

    “10년 전 영등포의 한 식당에서 전화가 왔어요. 손님이 우리 회사 냉면을 먹고 돌아가셨으니 책임을 지라는 거예요. 놀라서 달려가보니 사망자는 고혈압 환자인데 낮에 막걸리를 많이 마신 상태에서 차가운 냉면을 먹다가 갑자기 혈압이 올라 변을 당한 것이었어요. 같이 먹은 친구들은 아무 이상이 없는데 혼자만 그렇게 됐어요. 다행히 이 사실을 안 가족들이 냉면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인정했지요. 사람들은 냉면을 먹고 탈이 나면 무조건 냉면이 잘못된 걸로 생각합니다. 육수가 잘못될 수도 있고, 고기가 잘못될 수도 있는데 이런 건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사정이야 어떻든 좋지 않은 일로 언론에 한 번이라도 오르내리면 타격이 매우 크기 때문에 성사장은 소비자의 항의 전화가 오면 현장에 바로 달려간다고 한다. 불상사의 원인이 제품에 있지 않다 해도 그렇다는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는 것. 식품회사의 이런 약점을 이용해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금품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

    지난해 송학식품은 가짜 냉면 육수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다. 또다른 ‘송학식품’ 때문이다. 이 회사 대표 이모씨는 10여년 동안 성사장의 물건을 팔던 중개상으로 한동안 송사장과 동업해 냉면을 생산하기도 했다. 이씨는 94년 같은 업종의 회사를 만들어 독립했는데, 회사를 분리할 때 송학 상표를 사용하지 않기로 송사장과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씨는 송학식품의 인지도 때문에 계속 송학 상표를 도용했고, 성사장은 상표 사용을 중단하라고 권고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98년에는 내용증명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도 이씨의 상표 도용이 계속되자 성사장은 지난해 이 회사를 고소했다. 하지만 이씨는 400여만원의 벌금을 내고도 송학 상표를 계속 사용, 성사장은 다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마침내 지난해 12월16일자로 이 회사에 대해 더 이상 물건을 만들지도, 팔지도 못하게 압류조치를 내려 지금은 상표 사용을 중지한 상태라고 한다.

    “그 얼마 전 언론에 ‘경기도 파주시 송학식품에서 가짜 육수를 만들었다’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어요. 그러니 다들 우리 회사가 그런 줄 알고 난리가 났죠(성사장의 회사는 파주시 교하면 야당리에, 이씨의 회사는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에 있다). 백화점과 대형 매장들은 물건을 빼가라고 아우성이고…. 그래서 생각다 못해 파주시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사고 경위서를 쓴 다음 시장 직인을 찍어 전국의 거래처로 보냈어요. 결국 오해는 풀렸지만, 매스컴에 회사 이름이 한 번 오르고 나니 영향이 엄청나더군요. 지금도 송학식품을 ‘불량식품 만든 회사’라고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요.”

    송학식품의 제품은 다른 회사 제품보다 값이 15%정도 더 비싸다. 성사장은 “그만큼 질 좋은 원자재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국수를 만드는 밀가루는 시중에 나와 있지 않은 고급품으로, 제분회사에 따로 주문해 공급받고 있다.

    “밥 굶는 이들을 직접 만나보라”

    제품을 만드는 과정도 세분했다. 떡쌀의 경우 대개 세척기에 바로 쌀을 넣어 씻는데 비해 송학은 연미기로 쌀을 두 번 닦아낸 후 세척기에 넣는다고 한다. 떡국은 물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금방 퍼지고, 적게 들어가면 딱딱해져 끓일 때 간이 깊이 배지 않아 질기고 맛이 없다.

    송학에서 만든 떡으로 떡국을 끓였는데 너무 퍼져서, 혹은 너무 질겨서 먹을 수가 없다며 양념값까지 물어내라고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때는 “같은 제품이라도 조금씩 차이가 날 수 있다”고 정중히 사과하고 떡 한 상자를 보내며 조리법까지 자세히 알려 준다고 한다. 그런 다음 그 조리법대로 끓였을 때 떡국맛이 어땠는지도 반드시 확인한다. 불평하는 고객을 확실한 서비스를 통해 영원한 고객으로 만드는 전략이다.

    송학의 제품은 전국 53개 대리점과 유명 백화점, 대형 매장 등을 통해 판매되고 있어 판로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IMF체제 때는 이 회사도 예외없이 어려움을 겪었다. 서민용 식품이라 당시에도 판매량은 20%정도 늘었지만, 거래처들이 문을 닫으면서 자금이 제대로 회수되지 않았던 것. 더구나 원자재값은 20% 이상 올랐다. 직원들 월급 채워주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은 그만둘 수 없었다. 성사장은 독실한 크리스천. 젊은 시절 몸이 많이 아파 자살까지 기도했다가 신앙의 힘으로 위기를 이겨내고 다시 사업을 하게 되면서 “이 회사는 하나님 것이다. 돈을 벌면 불우한 이들을 위해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현재 100여곳의 시설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인가가 나지 않아 정부 보조가 전혀 없는 곳들이다.

    회사가 어려울 때 한 경리 직원은 성사장에게 “한 2년만 지원을 중단했다가 회사 사정이 좀 좋아지면 다시 돕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가 핀잔만 들었다. 성사장은 “아마 직원들 중엔 ‘남 줄 돈으로 우리 월급 좀 더 주면 안되나’ 하고 원망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끼니를 못 잇는 사람들을 직접 보면 그런 말은 못 할 겁니다”고 한다.

    5년 전 그는 한 정신지체인 수용소 사람들이 쌀이 없어 밥을 굶는다는 소리를 듣고 직접 가서 확인한 적이 있다. 사실이었다. 그 자리에서 쌀을 대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30명이던 수용자들이 지금은 350여명으로 늘어나 한 달이면 40kg짜리 쌀 50포가 들어가지만 한번 한 약속이라 지금껏 지켜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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