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문장 교수는 ‘신동아’ 2000년 1월호에 실린 ‘대한민국 영어 선생님들, 당신네 죄를 아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한국의 영어교육 실태를 통렬하게 비판, 화제를 모았던 신학자다. 그가 이번에 두 번째 글을 보내왔다. 앞서 발표한 글에 대해서 국내외 많은 독자들이 ‘그러면 이교수의 영어학습 방법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요청해왔기 때문이다. <편집자>》
2000년 1월호 ‘신동아’에서 영어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필자의 글을 읽고 한국, 미국, 캐나다에 있는 많은 분들이 전자메일을 보내왔다. 그분들의 요구는 ‘영어학습의 문제점이나 원리는 알겠는데 구체적인 학습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현재 집필 중인 교재가 있다면 원고를 보내줄 수 없겠느냐는 분도 있었다. 대부분 영어로 인한 절박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 글은 이런 주문들을 염두에 두고, 보통 한국인이 영어를 터득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먼저,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첫째, 이 글은 영어로 인해 가질 수 있는 갖가지 고민을 먼저 거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민을 덜어주자는 의도에서 쓰는 것이다. 학문적인 정리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둘째, 영어를 익히는 전체적인 방법론을 이 정도 분량의 글에 모두 담을 수는 없다.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와 관련한 세부 학습방법들을 설명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한국인 영어 학습자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듣기와 발음에 대해서만 설명하려고 한다.
필자의 영어 학습방법을 교재로 만들어 공개하는 것이 책임있는 태도겠지만, 필자의 방법론을 실습할 수 있는 교재들은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우선은 필자의 설명을 통해서 듣기와 발음의 원리와 방법론을 이해하고, 시중에 나와 있는 기존 교재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활용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깨진 독에 물붓기’는 이제 그만
영어에 귀가 트이고 원어민처럼 발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영어 학습자라면 누구나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교재들을 가지고 노력도 많이 했을 것이고, 또한 실망도 많이 했을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나 역시 외국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어릴 때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외국에서 학교를 다녀본 적도 없다. 따라서 주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터득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들을 고스란히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이 질문에 대한 필자의 답변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인 성인이라도 영어에 귀가 트이고 원어민의 발음을 익히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먼저 깨진 독을 보수하는 작업이 선행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인의 듣기 및 발음 학습은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물을 퍼넣어도 독에 구멍이 나 있는 상태라면 물이 고일 리가 없다. 시중에 나와 있는 듣기 및 발음 교재 중에는 좋은 교재도 많지만 그런 교재들을 구입해서 열심히 연습해도 귀가 잘 트이지 않고, 본토 발음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교재들에 문제가 있기도 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물을 담을 독에 구멍이 나 있기 때문이다. 기초공사가 부실한 터에 벽을 세우고 지붕을 올린다고 해서 집이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듣기에 있어서 ‘구멍’은 영어의 소리 자체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발음에 있어서 구멍은 한국어와 영어 소리에 차이가 있는 근본적인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이런 구멍이 생기는 것은 한국인들이 한국어의 소리 세계에 푹 젖어 있기 때문이다. 이건 매우 상식적인 말이지만, 영어 학습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것은 관찰이다.
시중에 있는 듣기와 발음 교재들은 한국인들이 한국어의 소리세계에 젖어 있다는 사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한국인들의 귀는 한국어의 소리를 듣도록 주파수가 맞추어져 있고, 한국인들의 입은 한국어를 발음하기에 가장 편한 조음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이 영어 학습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밝혀내지 못했다. 이것을 밝혀내고 구멍들을 메우면 귀가 열리고 원어민의 발음을 습득할 수 있는 길이 보일 것이다.
시중 교재들의 한계
영미 학자들이 만든 교재로는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구멍을 막기 어렵다. 그건 영어 습득이론 혹은 영어 교수법 자체가 틀려서가 아니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귀와 입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인 학습자에게 맞는(rele vant) 방법을 제시하지 못할 뿐이다. 한국인의 체질에 맞는 방법론은 오히려 사교육 현장에서 제시되고 실험되고 있다. 영미의 영어학자들이 만든 교재들을 번역한 것이 아닌, 순수 한국인 중에서 듣기와 발음을 터득한 사람들이 내놓는 방법들이 그것이다.
그런 교재들이 시중에 많이 있는데, 아직도 영어 듣기와 발음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영어를 터득한 개인적인 체험을 객관적인 방법론으로 승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 영어를 터득한 체험은 영어 학습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영어를 터득한 사람들의 체험을 되풀이할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서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대중적인 방법론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영화를 가지고 귀가 틔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영화를 자료 삼아 듣기 교재를 만들 것이다. AFKN 청취 훈련을 해서 귀가 트인 사람은 자신이 했던 방법을 기초로 교재를 만들 것이다. 한국의 청취 교재들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둘째, 그런 방법론들은 총체적인 방법론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각자의 주특기에 따라서 청취 교재, 어휘 교재, 문법 교재, 독해 교재 등을 별도로 출판한다. 영어 습득과정 전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주는 총체적인 영어학습 방법론은 아직 없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내놓는 갖가지 영어학습 방법론의 타당성(validity)을 면밀히 검토하고 각각의 장점들을 종합한다면 보통의 한국인들이 학습할 수 있는 총체적 학습방법론 비슷한 것이 만들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영어 소리와 한국어 소리의 차이 ]
영어학습의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언제나 단순한 사실의 발견에서 시작한다.
영어와 한국어 소리 세계의 근본적 차이는 ‘치-즈’와 ‘김치’의 차이다. 영미인들은 사진을 찍을 때 ‘치-즈(cheese)’를 발음하라고 하는데, 영어식 조음구조로 그 단어를 발음해보면 입 모양이 실제로 웃는 모양 비슷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김치를 발음했을 때에는 웃는 모양이 되지 않는다. 조음구조상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의 듣기와 발음의 궁극적인 문제 해결은 치-즈와 김치의 차이를 극복하는 데에 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필자의 개인적인 학습 여정을 간단히 소개하려고 한다. 이것은 성공담이 아니라 오히려 치-즈와 김치의 차이를 몰랐기 때문에 긴 세월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다.
영어를 습득하려는 사람 대부분이 같은 마음이겠지만, 필자도 오랜 세월 원어민의 발음을 익히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극복하고 정복하려고 했다. 학교 음향도서실에서 발음 테이프를 복사해다가 수없이 반복해서 듣고 연습했다. 영어 음성학 교재들도 여러 차례 정독했고, 시중에 나와 있는, 발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들은 거의 다 섭렵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본토발음과 비슷한 발음은 흉내낼 수 있게 됐고 주위 친구들은 미국 사람의 발음과 비슷하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필자 스스로는 아무래도 본토발음과 똑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무조건 열심히 노력하면 본토발음을 익힐 수 있다는 오기만 붙잡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오로지 듣고 따라하기 연습만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본토발음이 안 되는 것은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영어와 한국어 소리가 다른 근본적인 이유를 캐물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필자가 신학 대학원에 입학한 뒤로는 헤드폰을 끼고 미국 유명 설교가들의 설교 테이프를 같은 속도로 따라 하는 연습을 많이 했다.
그 무렵에는 AFKN-TV 강사도 하고 영어 설교 테이프를 교재로 만들기도 했는데, 영어는 더 이상 손 볼 필요가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발음도 본토발음과 비슷하고, 설교 테이프를 듣고 연습하다보면 완벽하게 될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테이프를 따라 한참을 시끄럽게 떠들다가 곁에 있던 아내에게 물었다. “똑같지?” 그런데 아내의 대답이 필자에게는 거의 충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니요. 한국인으로서는 훌륭한데, 미국 사람같지는 않아요.”
필자는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런가? 이 정도로 연습을 하고서도 원어민의 발음이 되지 않는다면, 외국에서 태어나거나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살지 않고서는 원어민의 발음을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본토발음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가?”
유창한 영어 설교를 목표로 연습하던 필자에게 이것은 큰 고민거리였다. 아내의 솔직한 반응이 필자로 하여금 영어에 입문한 이후 처음으로 한국어와 영어 발음이 다른 근본적인 원인에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치-즈와 김치의 차이
영어 발음이 잘 안되면 분명히 잘 안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영어 듣기는 왜 잘 안되는가? 이것도 마찬가지로 안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영어 원어민들이 한국어를 말할 때 발음이 이상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여기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때까지 필자의 듣기 및 발음 학습의 문제는 이 질문들에 대한 근원적인 이유를 모른 채 ‘무조건’ 열심히 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것도 10년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깨달은 것이었다.
우리는 한국인의 영어 발음이 안 좋은 것도 알고 있고, 영미인이 한국어를 이상하게 발음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이 왜 일어나는지 구명해본 적이 있는가? 선천적으로 구강구조가 다르기 때문인가? 영국이나 미국에서 자란 한국 아이들이 완벽한 본토발음을 내는 것을 보면 선천적인 차이는 아니다. 차이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저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필자가 아는 한 그 원인을 밝히고 설명해 준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영어 발음을 연습하면서도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를 캐묻지 않았는지 필자 스스로도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도 모르면서 그렇게 오랜 세월을 투자했다는 사실에 허탈감도 느끼고 한심한 생각도 들었다.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한동안 속앓이를 하던 필자는 드디어 원인을 깨달았다. 한국인들의 혀는 평상시 윗니-잇몸-입 천장에 자연스럽게 붙어 있는데 반해, 영미인들의 혀는 평상시 아랫니-잇몸에 내려와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차이가 발음과 리듬에 차이를 가져오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필자로 하여금 아예 새로운 영어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었다. 필자는 음성학 교재들을 다시 읽어 보았지만, 그런 설명을 하고 있는 책은 한 권도 없었다. 혀의 높이, 조음 위치에 대한 설명은 있었지만 혀의 위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래도 필자는 확신을 가지고 연습을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혀를 아래에 붙이고 있으려고 했다. “혀를 아래로 붙이고 있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혀가 아래에 있다가도, 딴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새 혀가 위로 올라가 있었다. 좁은 입안에서 평상시 혀의 위치를 옮기는 것이 그렇게 힘든 작업인 줄 몰랐다. 혀를 아래로 내리고 있으면 입 주위의 근육이 덩달아 조금씩 움직였다. 근육을 움직이다 보면 가끔씩 통증이 오기도 하고 근질근질하기도 해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연습을 하다보니, 조음구조의 전환은 영어 실력과 별로 상관이 없는 물리적인 현상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즉 영어 발음이 좋은 것과 영어 실력이 좋은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영미인들은 혀의 위치와 입의 근육이 영어가 가진 소리들을 조음하기 편하게 발달돼 있을 뿐이다. 한국인의 조음구조는 한국어의 소리들을 발음하기 편하게 발달된 것과 마찬가지다.
비로소 영어와 한국어 조음구조의 차이를 조금씩이나마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한국 사람의 조음구조를 영어식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한국 사람이 한국어를 발음할 때 미국 사람이 발음하는 것처럼 바꾸어 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어 ‘소리 세계’에 들어간 과정
영어의 발음을 익히는 방법에는 모방하기(mimicking)와 조음구조(articulatory setting)를 조정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음도 알게 됐다. 그동안 필자가 하던 작업은 조음구조를 조정하는 것이 아닌 모방하기였음도 알게 됐다.
영미 학자들이 쓴 영어 음성학 교재에 혀의 위치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나 설명이 없는 것도 이해가 됐다. 자기네 말을 발음할 때 혀의 위치는 당연히 그렇게 돼 있는데, 그들이 그 부분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한국인들의 영어 발음이 잘 되지 않는 이유가 혀의 위치 때문이라는 사실을 영미 음성학자들이 알 까닭이 없다. 그들은 한국어의 조음구조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영어의 개별 자음과 모음을 하나씩 다시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영어 발음이 우리말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차츰 느낌으로 알게 됐다. 조음구조를 바꾸는 연습을 하면서, 두 개 이상의 음절이 오는 경우 영어에는 반드시 리듬이 들어가는 이유가 무언지도 알게 됐다. 리듬을 넣지 않으면 그러한 조음 구조를 가지고는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이론이 아닌 감각으로 깨닫게 됐다.
강세와 리듬이 먼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의 조음구조를 가지고는 강세와 리듬을 넣어서 발음해야 편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영미인은 영어를 발음하기에 가장 편한 조음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영미인들은 사진을 찍을 때 ‘치-즈(cheese)’를 발음하라고 하는데, 그 단어를 발음하면 실제로 웃는 모양이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영어의 조음구조를 연습하고 발음을 익히니 영어가 전혀 다르게 들려왔다. 그때만 해도 필자는 AFKN-TV 프로그램으로 청취 교재를 만들어 강의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듣기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영어를 들을 때 신경을 집중하고 들어야 했을 뿐이다.
그러나 조음구조를 연습하면서는 소리가 다르게 들려왔다. 영어의 소리 그 자체가 들려왔다. 영어 단어들이 아닌 영어의 소리가 다 들려왔다. 영어라는 소리 세계가 처음으로 열리는 느낌이었다. 나의 듣기 실력이 다른 차원으로 뛴 듯했다. 뜻을 알아들으려고 신경을 집중하지 않아도 소리 전체가 들려왔다. 그렇게 영어의 소리 세계가 들리니 ‘이러다 미국인 되는 거 아냐?’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어와 영어 발음의 근본적인 차이가 혀의 위치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소 장황하게 했다. 그러면 평상시 혀의 위치를 조정하고, 조음구조를 바꾸기만 하면 영어 발음의 문제, 나아가 영어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혹은 영어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구든지 필자와 같이 혀의 위치를 조정하고 조음구조를 바꾸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본토발음을 꼭 익혀야겠다고 작심한 사람들은 조음구조를 바꾸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조음구조를 조정하지 않고도 영어를 익힐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한국식 조음구조를 가지고도 멋진 영어를 할 수 있다.
소리 영어를 익히려면 듣기와 발음이 함께 가야 한다. 즉 듣기와 발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필자는 편의상 듣기와 발음을 구분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먼저, 소리 영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 넘어가자. 듣기와 말하기는 소리로 시작해서 소리로 끝난다. 영미인과 대화를 하거나 영어 방송을 들을 때 소리는 한번 들리고 지나가면 끝이다. 소리의 세계에는 마침표도 없고 물음표도 없다. 소리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소리만 듣고서 무슨 뜻인지 파악해야 한다.
소리가 곧장 의미로 전환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머리 속에서는 끊임없이 ‘소리 쭭 단어, 숙어, 문장의 철자화 쭭 의미’로 이어지는 과정이 되풀이 된다. 소리를 듣고, 그것을 눈 앞에 활자화한 다음, 머리 속에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가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들은 문장을 애써 해석하는 동안 소리는 한없이 흘러만 간다.
영어로 하는 강의실에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강의 시간 내내 들려오는 소리들과 씨름을 해야 한다. 독해를 할 때에는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사전을 찾고 해석이 어려운 문장은 두번 세번 반복해서 읽을 여유가 있다. 그러나 소리의 세계에서는 그런 여유가 전혀 없다. 직청직해를 안 할 수가 없게 돼 있다. 직청직해는 권장 사항이나 선택 사항이 아니다. 직청직해를 못하면 그것은 듣기를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청해(listening comprehension)는 독해(reading compre-hension)보다 훨씬 더 어렵다. 어려운만큼 더 철저하고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한데, 한국인 학습자들은 지금까지 듣기는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흔히 영어 듣기를 공부하려면 AFKN이나 영화 대본을 가지고 만든 청취교재를 가지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직접 AFKN을 보고 듣거나 영화를 반복해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AFKN이나 영화가 아니라 영어의 소리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본적이고 체계적인 소리 학습교재다. 영어청취 실력을 키우기 위해 AFKN이나 유선 방송의 영어 방송들, 혹은 영화 등을 많이 보고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소리 자체를 듣는 훈련이 돼 있는 상태에서 영어 방송을 들으면 실력이 쑥쑥 늘게 된다. 소리 자체를 듣는 훈련이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듣게 되면 계속해서 단어를 듣고 뜻을 듣게 된다.
그러면 영어 듣기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요원해진다. 컨디션 좋은 날에는 조금 잘 들리다가, 몸이 피곤한 날에는 잘 안 들리는 현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필자와 같은 열정으로 10년의 세월을 ‘무식하게’ 투자해야 단어들을 거의 알아 듣는 수준에 도달할 것이다. 영어 소리 듣기 학습을 한 다음에 AFKN이나 영화 교재들을 활용하고, 영어 방송들을 듣게 되면 영어 듣기 실력은 그야말로 빠르게 늘 것이다. 체계적인 소리 듣기 학습을 위해서는 다음의 원리를 기억해야 한다.
(1) 원리 - 영어 소리 자체를 들어야 한다
영어 듣기 학습의 최종 목표는 듣는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다. 소리 자체를 듣는 것이 최종 목표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인이 영어를 듣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영어의 소리 자체를 학습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단어를 들을 수 있다. 지금까지 영어 듣기 훈련이 밑 빠진 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영어의 소리 자체를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영어 듣기 학습은 단어를 가지고 했다. 영어를 들으면서 ‘내가 아는 단어 없나’ 생각하면서 영어를 들었다. 영어가 조금 들린다는 말은 내가 아는 단어가 약간 들린다는 의미였다. 영어 방송을 보거나 들으면서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려고 애쓴다. 우리의 귀에 들리는 것은 소리들인데 소리를 듣지 않았다.
예를 들어 보자. 가사를 알고 있는 팝송은 시끄러운 시내버스 안이나 복잡한 백화점 안에서 들어도 단어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들린다. 그러나 가사를 모르는 팝송은 조용한 장소에서 집중해서 들으려고 해도 무슨 말인지, 무슨 단어인지 잘 들리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영어를 소리로 듣지 못하고 단어로 듣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필자는 중학교 3학년 때 영문학을 전공한 교생에게 AFKN 듣기에 대해 처음 얘기를 듣고, AFKN 듣기를 시작했다. 그 때 경험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처음 AFKN을 들을 때에는 소리가 윙윙 거리기만 했을 뿐 아무 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필자는 ‘내가 외운 단어도 많은데 적어도 아는 단어들은 들리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했다.
AFKN에서 필자가 처음으로 알아들은 단어는 ‘yesterday’였다. ‘예스터데이’라는 친숙한 소리가 귀에 들어왔는데, 그 뜻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와이-이-에스-티-이-아르’ 하고 철자를 읊다가 ‘어제’라는 뜻으로 연결됐다. 단어장을 가지고 영어 단어를 외웠을 뿐 그렇게 미국 사람의 발음을 듣고 외운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예스터데이’라는 소리와 ‘어제’라는 한국어 의미가 순간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yesterday 같은 쉬운 단어를 바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 한심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영어 방송에서 처음으로 단어를 들었다는 사실이 흐뭇했다.
그 이후로 더 많은 단어를 알아듣기 위해서 AFKN을 열심히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병 때문에 학교를 1년 휴학한 동안에는 AFKN을 거의 끼고 살았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에도 수업이 없는 자투리 시간에는 이어폰을 끼고 살았다. 한 학기가 지난 다음에야 어떤 친구가 보청기를 끼고 다니는 줄 알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AFKN을 녹음한 다음에 받아쓰기 연습도 많이 했다. 녹음기를 여러 대 망가뜨린 것은 물론이다.
영어 소리를 듣고 단어로 옮겨 적는 연습을 열심히 했다. 국내에 스크린 잉글리시라는 것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필자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녹음하고 집에 와서 그것을 받아쓰는 작업을 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대사뿐만 아니라 관중들이 웃는 대목까지도 다 외웠다.
나중에 AFKN-TV 청취교재를 만들 때에도 단어를 가지고 했다. 주요 품사들은 써 주고 소위 말하는 기능어(function words)들은 빈 칸으로 남겨 들으면서 채워 넣을 수 있도록 교재를 만들었다(대부분의 청취 교재들이 이런 패턴으로 돼 있다. 단어 듣기를 훈련하는 것이다). yesterday에서 시작하여 AFKN-TV 강사를 하기까지 단어를 듣고 뜻을 듣는 훈련을 지독하게 했다. 그래서 못 알아듣는 단어가 거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필자가 영어의 조음구조를 연습하면서 깨달은 것은 그렇게까지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서도 귀가 트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영어의 소리 자체를 듣는 훈련을 받았다면 몇 개월 만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을 10년의 세월에 걸쳐 그야말로 ‘무식하게’ 씨름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억울하게 생각됐다. 우리 귀에 들려오는 것은 소리들인데, 정작 소리는 듣지 않고 아는 단어를 들으려 했고, 또 무슨 뜻인지 들으려고 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10년 세월 동안 영어 소리 그 자체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그야말로 한번도 없었다. 방송에서 들리는 본토발음을 통해 필자에게 입력돼 있던 발음을 하나하나 교정해 나갔을 뿐이다. 그것을 실력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원리가 부재한 학습 방법을 따르느라 비경제적으로 세월을 허비한 셈이었다.
만일 우리가 전혀 모르는 러시아어를 공부한다고 하자. 알파벳도 단어도 모르는 사람에게 러시아어 방송을 틀어주고 무슨 뜻인지 들어보라고 주문했다고 하자. 무슨 뜻인지 들어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조금 지나면 어쩔 수 없이 소리 그 자체만 듣게 된다. 단어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뜻을 들으려고 해도 자동적으로 소리를 듣는 쪽으로 관심이 옮겨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갓 건너와 영국이나 미국의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이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고, 단어를 모르니까 저절로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하기 때문에 귀가 금방 트이는 것이다. 한국에서 하는 영어 듣기는 이 단계가 없는 것이 결정적인 약점이다. 이것을 필자는 ‘구멍’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미 단어를 많이 외워 소리 듣기를 망친 한국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소리를 들어도 눈앞에 단어들이 어른거리는데 이러한 현상을 치유할 방법이 있는가? 아니 치유가 가능한가?
치유는 충분히 가능하다. 한국인 영어 학습자들이 영어 소리 자체를 듣는 훈련만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3개월 내지 6개월이면 귀가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2) 방법 - 소리와 씨름하라
영어의 소리 세계를 정복하는 체계적인 방법을 필자는 대체로 5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 1단계:자음과 모음 학습 ▲ 2단계:영어의 리듬 및 소리 세계의 변화 학습 ▲ 3단계:단어 학습 ▲ 4단계:기본 문장 학습 ▲ 5단계:응용 학습이다. 여기서 4, 5단계의 학습은 소리의 흐름이 의미로 전환되도록 하는 훈련이다.
이렇게 5단계의 소리 학습을 마치게 되면 AFKN이나 영화를 가지고 듣기 학습으로 들어가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물론 철자와 병행해도 상관이 없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5단계 소리학습을 하는 동안에는 다음 세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사실 필자의 이 5단계 소리 듣기 훈련을 교재 없이 설명하기는 어렵다. 독자들이 읽고 나름대로 응용해서 활용하기를 바란다).
첫째, 영어 철자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영어의 소리 듣기 훈련은 영어의 소리 그 자체를 듣도록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영어 소리 듣기 훈련을 하는 동안에는 철자를 사용하면 안된다. 지금까지 영어 청취 교재들은 철자를 가지고 했는데, 이것은 듣기 훈련을 방해하는 것이다. 철자를 사용하는 것은 한국인을 위한 영어 음성 훈련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모르고 하는 짓이다. 소리를 듣고 단어를 써넣도록 하는 훈련도 듣기를 도와주는 훈련이 아니다. 시중에 출판돼 있는 대다수 듣기 교재들이 영어 철자를 가지고 훈련시키는데,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다.
필자가 알아본 바로는 시중에 나와 있는 듣기 훈련 교재 가운데 좋은 교재가 꽤 있다. AFKN 교재, 영화 교재 등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교재가 많다. 영어의 소리 듣기 훈련을 어느 정도 마친 다음, 소리와 철자를 병행해도 밑 빠진 독이 아닐 때 그러한 교재들을 활용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의 5단계 소리 학습이 끝나면 소리와 철자가 병행되어도 듣기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단어를 가지고 만든 AFKN 교재나 영화 교재들을 가지고는 귀가 트이지 않는다.
둘째, 소리 듣기 훈련은 발음 기호로 한다. 다소 단순하게 말한다면, 영어의 소리 세계는 자음과 모음의 결합에 불과하다. 영어의 자음과 모음을 터득하면 소리는 다 들을 수 있다. 자음과 모음이 결합하여 음절을 만들고, 음절들이 연결돼 리듬을 만든다. 영어의 자음 모음과 리듬을 익히면 영어의 소리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지만, 영어를 외국어로 학습하는 한국인은 영어 소리를 나타내는 발음 기호들을 먼저 익혀야 한다. 번거로운 절차 같지만 이것을 반드시 익혀야 한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듣기와 말하기는 소리로 시작해서 소리로 끝나기 때문이다.
문자 영어의 학습은 철자를 가지고 해야 하지만, 소리 영어의 학습은 발음기호를 가지고 해야 한다. 발음기호는 소리 세계를 나타내는 기호다. 철자를 외우기도 번거로운데 발음기호까지 학습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발음기호를 통해서 소리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 1, 2단계를 학습하는 동안에는 의미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소리인데, 관심이 의미에 가 있으면 소리를 듣지 않게 된다. 1, 2단계의 소리 듣기 훈련은 들리는 소리 그 자체가 무슨 소리인지 습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소리 그 자체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 3, 5단계 학습에는 의미 파악을 연습하지만 철자가 아닌 발음기호를 가지고 한다.
① 1단계:영어의 자음과 모음의 학습 - 영어의 소리 세계는 자음과 모음의 결합이다. 자음과 모음의 결합은 음절인데, 기본 음절들을 발음기호로 듣는 훈련을 한다. 이것은 소리를 소리로 듣기 위한 훈련이다. 영어가 단어와 문장만이 아닌 소리의 세계를 가지고 있음을 터득하게 돕는 훈련이다.
② 2단계:리듬의 학습 - 영어는 음절과 음절이 연결될 때 반드시 리듬은 들어간다. 2음절 이상의 소리에는 예외없이 리듬이 들어간다. 단어에서 리듬을 우리가 강세라고 부르는 것이다.
③ 3단계:단어 학습 - 각각의 단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소리들을 외워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철자를 가지고 단어를 외웠지 소리를 가지고 단어를 외운 적이 없다. 그러니 들리는 영어 소리가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것은 듣기 훈련 교재가 아닌 어휘 교재들을 통해 습득해야 한다.
④ 4, 5단계:문장 학습 - 직독직해를 하는 것처럼 직청직해를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영어 문장들을 소리로 익히는 것인데, 이것은 소리의 흐름을 외우기 위한 것이다. 영화의 필름이 연결되어 돌아가는 것처럼, 영어 말이란 (소리)-(소리)-(소리)-(소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문자 영어라면 전체 문장을 눈으로 반복해 읽고 독해를 할 수 있겠지만, 말은 한번 흘러가면 그만이다. 소리의 흐름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올라가면 우리가 말하는 듣기(listening comprehension)가 가능해진다.
영어 발음의 원리와 방법:본토발음과 본토 리듬
우리가 영어 발음을 익히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습득해야 하는데 이는 ① 자음과 모음 ② 리듬이다. 필자는 자음과 모음을 익히는 것을 본토 발음을 익힌다고 말하고, 영어의 리듬을 익히는 것을 본토 리듬을 익힌다고 말한다. 즉 영어에는 본토발음 뿐만 아니라 본토리듬도 있다. 이것은 듣기 훈련의 1, 2단계와 함께 연습하게 된다.
필자는 영어와 한국어의 발음 차이를 가져오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 혀의 위치라고 했다. 따라서 본토 발음을 익히기 위해서는 혀의 위치를 바꾸고 조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개별 자음과 모음을 익힐 때 혀의 위치를 바꾸고 조음구조를 바꾸는 훈련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서도 훌륭한 영어를 익힐 수 있는데, 그것은 영어의 고유한 리듬을 터득하는 것이다. 본토발음이 되지 않으면 본토리듬을 익히면 된다. 본토 리듬을 익히면 원어민들이 알아듣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키신저와 같은 사람의 발음이 본토 발음과는 다르지만 본토 리듬을 가지고 있는 좋은 예다.
(1) 본토 발음 훈련
우리말의 자음 모음과 영어의 자음 모음에는 차이가 있다. 영어에는 우리말에 아예 없거나 우리말 소리와 다른 자음들이 있기 때문에 발음에 당연히 차이가 생기게 된다. 자음과 모음이 달리 발음되는 이유는 영어와 한국어의 조음구조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며, 조음구조가 다른 이유는 혀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본토발음을 습득하려면 본토발음을 내는 사람들의 조음구조와 혀의 위치를 가지면 된다.
혀의 위치를 조정하려면 입 주위 근육이 함께 조정돼야 편하다. 그런데 한국인 성인이 근육을 조정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까지 쓰지 않던 근육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 성인들이 영어의 조음구조를 만들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매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의 조음구조를 가지고도 영어의 리듬은 훌륭하게 습득할 수 있기 때문에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다.
자음과 모음에 대한 설명이 좀 더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단지 [a] 두 소리는 주의를 요하기 때문에 설명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발음할 때 혀 끝이 아랫니와 잇몸 사이에 자연스럽게 붙어 있고 입 안 공간으로 들리지 않는다. 우리말의 [애]와 비슷한데, 우리말을 발음할 때보다 턱이 더 많이 내려온다. 턱을 많이 내린다는 말은 턱을 내리는데 시간이 더 걸린다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말의 [애]처럼 짧게 발음이 되지 않고, [애애]와 같이 발음된다. 한국어의 [애]가 영어의 []보다 짧게 발음되는 것은 입을 조금만 벌리고 발음하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백]과 영어의 [bg]을 비교해보면, 영어는 [배액] 처럼 발음된다. [bm]의 발음은 [배앰]이 된다. 다음 소리들은 혀 끝이 아랫니와 잇몸 사이에 자연스럽게 붙어있으면서 발음된다. 예) ps, sm, gp, mp, kb 등 [a]:[a]의 발음방법은 []를 발음할 때와 비슷하나 입 모양을 약간 둥그렇게 하는 기분으로 발음한다. 우리말의 [아]와 비슷하지만, 우리말의 [아아] 처럼 발음된다. 이것은 [a]의 발음도 []와 같이 입을 많이 벌리면서 발음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bam]의 발음은 [밤]이 아니라 [바암]이다. 권투 선수 Ali는 [알리]가 아닌 [아알리]로 발음된다. 우리말의 [달리기]를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다알리기]가 된다.
필자가 아는 분 가운데 미국의 어느 유수한 의과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분이 있다. 처음 교수가 되었을 때 [a] 발음 때문에 무안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분의 성은 안씨다. 한번은 전화가 와서 ‘닥터 안 스피킹’ 하고 말했는데, 상대방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하니까, 상대방이 ‘닥터 아안’이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일부러 알아 듣지 못하는 척한 것이 아니다.
우리말의 [아]는 영어의 소리 세계에는 없는 소리기 때문에 그런 에피소드가 얼마든지 있다. 우리말의 [아]는 턱을 조금만 내리고 입술을 조금만 벌리고도 충분히 발음된다. 그래서 [아] 소리가 겹치기로 와도 부담이 없다. 예를 들어, [파나마 가다 만난 사람마다]와 같이 [아] 소리가 이어져도 발음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조음 구조상 이것이 어렵다. 영어의 [a]는 턱을 많이 내려야 하고, 더군다나 혀 끝은 아랫니와 잇몸 사이에 붙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영어에서는 [a]를 겹쳐서 발음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래서 banana는 [b n n]로 발음된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감사합니다]를 외국 사람이 발음하면 [감사] [합니다]로 한번 쉬었다가 힘겹게 발음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가암사] [하압니다] 이렇게 발음한다. 그들의 조음 구조가 그렇게 발음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2) 본토 리듬의 훈련
영어에는 음절과 음절 사이에 반드시 리듬이 들어간다. 영어와 한국어의 소리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영어의 개별 자음과 모음이 한국어의 자음, 모음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영어가 가지고 있는 리듬이다. 본토 발음은 잘 되지 않더라도 본토 리듬을 익히면 훌륭한 영어를 할 수 있다.
영어에는 1음절, 2음절, 3음절, 4음절 및 5음절 단어가 있다. 2음절 이상의 단어들에는 반드시 강세가 들어간다. 단어뿐만 아니라 문장의 경우에도 2음절, 3음절, 4음절 및 그 이상의 음절들로 문장이 이루어지는데, 문장도 음절로 구성되기 때문에 리듬이 들어간다. 예를 들면, [im pa s bl](impossible)이라는 4음절 단어의 리듬과 [hwt taim iz it] (What time is it?)이라는 4음절 문장의 리듬은 동일하다. 소리의 강약은 장단을 의미한다(주의―실제 발음은 [hw tai mi zit]이 된다. 여기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펴보자. 이론에 앞서 이런 변화들은 소리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실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이미 다 아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에 본토 리듬 훈련의 핵심이 들어 있다. 그것은 이러한 리듬을 한국어에 넣어 읽었을 때 일어나는 변화 때문이다. 영어의 본토 발음이 아닌 한국어 발음으로 읽는다고 할지라도 영어 리듬을 한국어 문장에 넣어 읽으면 한국식으로 읽는 것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2음절 소리를 예로 들어보자. [기린]이라는 소리는 반드시 [기이 린] 혹은 [기 리인] 둘 중의 하나로 발음된다. [기이]와 [리인]은 강하게 발음도 되고 길게도 발음된다. 3음절 소리를 보자. [국가의]라는 소리는 [구욱가의] [국가아의] 혹은 [국가의의]로 발음된다. 영미인들은 이렇게 밖에는 발음을 못한다! [우리는 영어를 잘 할수 있다] 라는 소리를 영어 리듬을 넣어 읽는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우우리는 영어어를 자알 하알수 있다아] #(이것은 필자가 임의로 리듬을 준 것이다). 영어 본토발음이 아닌 국산 발음으로 해도 한국말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마치 외국인이 하는 한국말 비슷하게 들릴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감각으로 알게 되면 본토 리듬을 익힐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본토발음이 아닌 순수 국산발음이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본토 리듬을 익힌다면 외국인들이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는 훌륭한 영어가 된다.
(3) 본토 리듬 학습에 나타나는 변화들
본토 리듬을 학습할 때 다음과 같은 변화들을 주의해야 한다. 먼저 음절과 음절이 연결될 때 발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철자를 가지고 이러한 변화들을 설명하려면 매우 복잡해진다. 또 불필요한 설명이 많다. 그런데 이것을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서 설명하면 변화의 원리를 쉽게 익힐 수 있다.
소리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다른 모든 언어에도 있다. 가령 우리말의 ‘천리’의 실제 발음이 [철리]가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영어에도 있다. 한국인들이 그러한 변화 원리를 이론적으로는 모르면서도 모두 그렇게 발음하는 것처럼,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이론적으로는 모르면 실제 상황에는 그렇게 발음하고 있다. 이것도 영어의 조음구조로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만, 한국인에게는 먼저 이론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다음 세 가지 변화를 간략하게 설명해보려고 한다.
첫째, 모음과 모음 사이에 [t]가 오는 경우 약하게 발음한다 (주의:영국 영어에서는 원래의 음가대로 발음한다). 예) [rai tr] [nei tiv]. 이 경우 흔히 [t]를 [r]처럼 발음하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다. 또, [wtr]를 [w rr]로 발음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이 두 소리는 엄연히 다른 소리다.
원래 [t]를 제대로 발음하려면 혀 끝이 위 잇몸에 강하게 붙었다 떨어져야 하는데, [t]가 모음 사이에 오면 이것이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혀 끝이 [t]의 자리에 가긴 가는데, 혀 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그냥 위 잇몸에 가볍게 닿게만 하고 바로 떨어뜨리면서 발음하는 것이다. 이것이 발음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r]를 발음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r]는 혀가 입안의 어느 부위에도 닿지 않아야 한다. [t]가 모음 사이에 오더라도 강세를 받는 경우에는 원래대로 발음한다. 예) [ tend]
둘째, 강세를 받는 음절의 앞이나 뒤에 [i], [] 혹은 [u]가 오는 경우에 이 모음들이 약해진다. 즉 [이] [에] [우]로 발음하지 않고, 우리말의 [으] 처럼 발음한다. 영어에서는 이것을 schwa(셰와 - 히브리어에서 온 표현)라고 한다. [p li:s]나 [f mi li]의 경우 [펄리스, 패밀리]로 발음되지 않고, [퍼리스, 패밀리]로도 발음하지 않고, [플리이스, 패애믈리]로 발음한다.
대부분의 교재들은 의미어(meaning words)와 기능어(function words)를 구분하고, 의미어(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등)는 강세를 받아 잘 들리는 반면에 기능어(관사, 전치사, 인칭대명사 등)는 강세를 받지 않기 때문에 잘 안 들린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도 정확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면 의미어 자체 안에서도 강세를 받지 않고 약해지는 음절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n] 다음에 [t]가 오는 경우 [t]가 [n]과 같이 발음된다. 이것은 [t]를 발음할 때의 혀의 위치와 [n]을 발음할 때의 혀의 위치가 같기 때문이다. 예) [sen tr, en tr]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인 영어 학습자들의 가장 큰 고민인 듣기와 발음을 정복할 수 있는 원리와 방법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했다. 자음과 모음(본토발음), 그리고 본토 리듬에 관하여는 지면도 좁고, 실제 실습을 겸하지 않고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기에 더 자세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영어 듣기와 발음에 대해서 이전보다는 정확한 관점을 갖게 되고 실제로 도움을 얻기를 바란다.
영어를 제2국어로 하든, 모국어와 공용하든, 아니면 영어 교육을 강화하든 결국에는 한국인이 영어를 터득할 수 있는 방법론이 등장해야 한다.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를 모국어로 하려는 것이 아닌 한 우리는 한국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법론이 필요하다. 조기 유학도 하고, 어릴 적부터 외국에 나가서 살면 영어가 잘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온 국민을 영어사용 국가로 내보내 교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영어 교육을 위해 영어 원어민을 떼거리로 불러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영어 실력을 늘리는데 도움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의 영어 학습은 영어 원어민이 가르쳐줄 수 없는 부분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외국인에게 영어를 배우는 것이 만병통치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영어 학습에 뚫린 구멍이 어떤 건지 새삼 깨닫고, 본토발음 뿐만이 아니라 본토리듬을 익혀 영어의 듣기와 말하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