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상물등급분류 기준에는 ‘미풍양속’ ‘사회질서’ ‘국민의 일반정서’ ‘건전한 정서’ 등 마음대로 갖다 걸 수 있는 코걸이와 귀고리가 수두룩하다.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시대적 조류에 걸맞은 분류기준조차 없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본질은 이처럼 명문화된 규정이나 기준보다 이를 운용하는 등급분류를 담당하는 위원들, 즉 사람의 문제로 이어진다.》
영화 한 편을 놓고 고발과 검찰조사로까지 이어진 일련의 사태는 우리 사회의 기형적이고 유아적인 문화의식의 단면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마광수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나 영화 ‘거짓말’의 원작인 장정일씨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이현세씨의 만화 ‘천국의 신화’ 등 창작물에 대한 음란성 시비가 있을 때마다 수용 방식에 대한 논의가 불같이 달아올랐다가 이내 사그라지던 ‘냄비 현상’이 그대로 재연된 셈이다.
이번 소동으로 어떤 쟁점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절차와 방법에 대한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 다시 한번 제기됐고, 어떤 식으로든 ‘수습’하는 일이 당장의 과제다.
2월10일 흥사단 강당에서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영화인회의, 한국독립영화협회, 언론운동시민연합 등 1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거짓말’ 관련 합동토론회를 열어 서로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애를 쓴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겠다.
영화 ‘거짓말’은 기본적으로 논란의 불씨를 안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영화 내적인 평가에서부터 등급분류제도, 성 표현 수위, 관객과 만나는 방식 등 사회적으로 쉽게 합의를 이루고 꼬인 매듭을 풀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복잡다단한 것은 물론 가치관과 정서의 차이를 인정하고 토론과 조율을 통해 합리적인 대안을 만들어내야 하는 총체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향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오리지널 버전 거짓말’의 일반극장 상영을 허용하라는 주장에 쉽사리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같은 이유에서다. 이처럼 영화 ‘거짓말’을 둘러싼 파문을 정돈하는 데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지만 여기서는 폭을 좁혀 ‘거짓말’ 소동에 불을 붙인 영상물등급위원회(등급위)와 현행 등급분류제도가 안고 있는 ‘가연성’에 대해 살펴본다.
공진협에서 등급위까지, 달라진 게 없다
등급위는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관람등급을 정하는 사실상의 국가기관이다. 지난해 1월 개정된 영화진흥법과 공연법에 따라 99년 6월부터 각종 영상물의 심의를 담당하던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공진협)가 등급위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97년 10월 검열기구로 악명 높던 공연윤리위원회(공륜)가 공진협으로 개편된 지 1년 6개월 남짓 지나 다시 개편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공륜이 공진협으로 바뀐 것과 공진협이 등급위로 바뀐 데는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공진협은 공륜의 심의가 사실상 검열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공륜의 설치근거가 원인무효되면서 ‘마지 못해’ 생긴 기구다.
하지만 등급위는 50년 만에 정권교체를 실현한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문화부와 여당에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보장하고 등급분류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향적인 기구를 만들겠다”는 의지에 따라 법까지 바꿔 만든 기구다. 물론 등급외전용관을 허용해서 명실상부한 완전등급제를 구현하겠다던 계획은 무산했지만 규제적 성격을 최소화하고 등급제를 통해 영화진흥의 바탕을 닦는다는 것이 법 개정 취지였다.
하지만 한국의 영화심의제도는, 정부와 여당의 의지와는 달리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전면 보장’하는 완전한 의미의 등급분류제를 구현하기까지 할 일이 많다. 등급분류기준의 재정비도 절실하고, 분류기준을 합리적으로 적용해 사회적인 동의를 얻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공륜 검열로 고통받은 당사자인 김수용 감독이 등급위 위원장을 맡아 개혁의지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지만 꼬이고 꼬인 문제의 해법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먼저, 공진협과 비교해 등급위의 등급분류제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자. 공진협 시절에는 영화와 비디오의 등급분류 기준을 따로 두었으나 등급위에서는 하나로 통합해 ‘영화·비디오물 수입추천 및 등급분류 기준’을 만들었다는 점이 다르다. 같은 간혹 작품이지만 영화와 비디오라는 매체에 따라 다른 등급을 매기던 모순을 예방한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등급분류 기준이나 현행 등급제에서는 사실상 상영금지 조처에 해당하는 등급보류 기준이 달라진 게 없다. ‘국가 또는 국기를 경건하게 취급하지 아니하거나 국가원수를 모독하는 것’ 등 몇 조항을 삭제한 것에 그쳤고, 여전히 ‘…지나치게 묘사한 것’ ‘…우려가 있는 것’ 따위 주관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할 여지가 많은 추상적인 문구 일색이다.
특히 ‘미풍양속’ ‘사회질서’ ‘국민의 일반정서’ ‘건전한 정서’등 마음대로 갖다 걸 수 있는 코걸이와 귀고리가 수두룩하다.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시대적 조류에 걸맞은 분류기준조차 없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본질은 결국 명문화된 규정이나 기준보다 이를 운용하는 등급분류를 담당하는 위원들, 즉 사람의 문제로 이어진다.
문제는 법이 아니라 사람
등급위는 위원회 운영과 관련한 사항을 심의 의결하는 ‘위원회 위원’과 실제 등급분류 심의를 담당하는 ‘소위원회 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위원회 위원은 소위원회에서 등급보류 판정을 내렸을 경우 상급심의기구 구실도 한다.
문제는 일상적으로 영화에 대한 등급분류를 담당하는 소위원회가, 법 개정 취지를 살리고 창작물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물론 관객들의 볼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전향적인 판단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는 것이다. 전문성이나 개혁성을 갖췄다고 보기 어려운 ‘직업 심의꾼’까지 들어 있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
특히 공륜 때 심의위원이던 사람이, 공륜심의가 사실상의 검열로 위헌 판결을 받아 개편된 공진협이나 더 나아가 표현의 자유와 관객들의 볼 권리를 신장하겠다고 개편한 등급위의 소위원회 위원을 여전히 맡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존립 근거가 달라졌다면 등급심의를 담당하는 사람도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 영화 등급을 분류하는 일이 개인의 정서나 주관에 적잖이 영향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이 바뀌지 않고서는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
그런데 등급위 소위에는 공륜과 공진협을 거쳐 등급위에 이르기까지 자리를 지킨 ‘장수 위원’이 영화·비디오쪽만 무려 7명이나 있다. 조희문(공륜-영화본심의/공진협-영화등급), 영화수입추천위원 이경순(공륜-비디오본심의/공진협-영화등급), 비디오수입추천위원 신찬균(공륜·공진협-비디오수입), 영화예심위원 장영오(공륜·공진협-영화예심), 영화예심위원 조문진(공륜-영화본심의/공진협-영화수입), 비디오예심위원 강용선(공륜·공진협-비디오본심의), 비디오예심위원 김화(공륜-비디오본심의/공진협-비디오 청소년심의) 등이 그들이다. 업무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라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히 직업처럼 일해야 하는 상임예심위원에 이들이 몰려 있는 것은 딴 뜻이 있다는 의혹을 사고도 남는다.
이 밖에 공륜과 공진협에서 영화 비디오 게임 광고 등 매체를 옮겨다니며 자리를 지킨 위원이 있는 거나, 공륜과 공진협 때 심의위원을 지냈고 등급외전용관 허용반대 등 심의규정 적용 때마다 보수적 견해를 밝혀온 조희문씨가 지원과 진흥업무를 주관하는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자격으로 규제라는 성격이 강한 등급위 등급분류위원까지 겸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심의가 밀실에서 진행된다는 점도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소위원회는 등급보류 결정 후 등급위에 ‘영화진흥법과 등급보류 규정에 의하여 등급을 보류’한다는 단 한 줄의 의견에 위원들이 서명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물론 회의록도 공개하지 않았다.
‘거짓말’에 등급보류 의견을 낸 영화등급분류 소위원회는 위원 중에 감독과 배우 등 영화제작에 직접 관련된 인사가 있기 때문에 개인 의견을 밝히지 않고 통합의견서를 작성해 제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심의 과정과 토론내용이 공개돼 공론화하는 것이 말 그대로 ‘사회적 합의’를 이뤄가는 과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등급위의 결단이 필요한 대목이다.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등급위의 등급분류가 영화를 보는 관객들 입장에서 이뤄지기보다는 검열과 통제에 중점을 뒀던 공륜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등급위가 관객들에게 볼 권리를 보장하면서 편의를 제공하는 장치가 아니라 권력이 되고 있다는 비판에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지난해 1월 법개정 때 ‘15세 관람가’ 등급을 없앴다가 시행 6개월 만에 원래대로 돌려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등급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부의 무원칙과 행정편의주의가 맞물린 결과지만 등급위의 권력화를 부채질한 셈이다.
‘12세 관람가’ 등급과 ‘15세 관람가’ 등급을 통합했다가 되돌린 과정은 자세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애초 ‘15세 관람가’ 등급을 없앤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15세 관람가 등급이 12세 관람가 등급으로 합쳐진 것이다. 15세 관람가 등급을 없애는 것에 대해 “‘미성년자는 볼 수 없는 영화’와 ‘어린이 영화’로 양분될 수밖에 없고, 청소년 관객을 배제함으로써 산업적으로도 손해”라는 견해도 있다. “두 등급을 통합하면 실제 적용에서는 낮은 등급을 분류기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성 표현이나 폭력언어 등의 기준이 좀더 엄격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반면 15세 관람가 등급 폐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12세 등급과 15세 등급을 합친 것은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인지능력에 큰 차이가 없고, 실제 영화관에서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구분하기 어려우며 구별하지도 않는 현실을 고려한 것”이라며 “청소년이 볼 수 있는 영화의 폭을 넓히자는 입법 취지를 반영해서 운영하면 득이 더 많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영상물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여지가 중학생보다 고등학생들에게 더 크게 나타난다는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배경과 정황을 종합하면 문제는 등급분류 위원들의 적용기준이다. 다시 말해 15세 등급을 주던 영화를 12세 관람가로 등급을 내주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이는 12세 관람가 등급과 15세 관람가 등급을 통폐합한다는 법 개정 취지를 살리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정부는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을 영화가 15세 관람가 등급이 없어져 18세 관람가 등급을 받아서 손해”라는 제작, 수입업자들의 항의에 못이겨 지난해 12월16일 영화진흥법을 개정해 15세 관람가 등급을 부활시켰다. 관객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결과적으로 등급위의 권력화에 힘을 실어준 꼴이 된 것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런 등급위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준 것이 ‘거짓말’ 사태다. ‘거짓말’이 처음 등급보류 판정을 받은 99년 8월, 등급위가 문제 삼은 것은 ‘사도-마조히즘 등 비정상적 성행위’와 ‘여고생 교복이 성행위에 직접 연관된 장면’‘욕설과 지나친 대사’등이었다.
‘거짓말’의 소모적인 싸움
등급위의 등급보류 기준에는‘성·음란 등의 과도한 묘사로 건전한 가정생활이나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을 때 음란묘사로 규정해 등급보류한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인체의 특정부분을 확대하여 노출하거나 성행위 장면이 지나치게 음란하고 선정적인 것’‘기성·괴성을 수반한 원색적이고 직접적인 성애를 묘사한 것’‘사회통념에 어긋나는 변태적 성행위, 동성애, 혼음, 매매춘, 강간, 윤간, 근친상간, 시간, 수간 등의 성행위를 지나치게 묘사한 것’‘아동 및 청소년을 성폭력·유희의 대상으로 직접묘사 한 것’ 등으로 세부조항을 두고 있다.
위원들은 ‘거짓말’에 대해 “아무리 전향적으로 본다 해도 등급보류 기준을 넘어설 수는 없다”고 항변했다.
그리고 11월9일 ‘거짓말’은 두 번째로 등급보류 판정을 받았다. 10월26일 영화소위가 참석 위원 합의로 등급보류를 결정했고, ‘거짓말’은 등급위 운영규정에 따라 상급심에 해당하는 위원회에 회부됐다. 이어 11월9일 등급위원회의(위원회)에서도 2개월 동안 등급보류 결정을 내렸다. 전체 위원 15명 중 14명이 참석한 위원회에서 표결 결과는 10대 4, 등급보류 결정이 났다. 8월 결정 때보다 등급보류 결정에 반대한 위원이 2명 늘었다.
이날 위원회에서는 영화 자체에 대한 논쟁보다는 등급위의 위상과 현행 법체계에 대한 논의에 비중이 실렸다. 부분 수정으로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거짓말’을 두고 영화소위, 위원회를 거치면서 몇 차례 토론을 벌였고, 사회적으로 화제가 돼 수차례 공방이 벌어졌는데, 이는‘등급보류’의 본질적인 문제는 정돈되지 않은 법과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위원들은 만약 위원회가 ‘거짓말’에 등급을 내줄 경우, 전문성을 고려해 위원회의 권한을 위임한 영화소위의 결정을 뒤집는 것이 타당한가와 위원회는 등급보류 기간만 정하는 것이 아니라 등급위의 최고 의결기구로서 영화소위의 결정을 검증하는 권한도 갖는 것이냐를 놓고 고민했고, 결국 후자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어 토론을 했지만 위원들은 ‘미풍양속과 사회질서 유지’라는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영화에 대한 쟁점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를 만드는 작업도 사회적 통념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활동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영화의 산업적인 특성과 그동안의 논의를 통한 사회적인 분위기의 변화를 이해하자”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위원들은 ‘등급위 존재의미가 부당하고, 위원들이 몰지각한 검열관으로 매도당하는 분위기’에 대해 한결같이 반감을 드러냈다. ‘거짓말’에 대한 등급보류 결정을 두고 “등급위 내부와 사회적 합의없이 등급위 위원들 개개인의 문제로 공격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엄연히 법에 따른 규정이 있고, 법에 등급을 보류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사실상 모든 영화에 다 등급을 내주라는 주장은 초법적인 발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등급위는 지난해 12월29일 ‘거짓말’에 ‘18세 관람가’ 등급을 내주었다. 오리지널 버전에서 17분 가량이 삭제된 ‘거짓말’은 영화에서 여고생으로 등장하는 Y의 신분이 고등학생임을 드러내는 장면이 사라지고, 성기나 욕설이 들어간 대사 일부가 지워졌다. 6개월 가량의 논란이 겨우 몇 장면 삭제하는 선에서 어물쩍 수습된 것이다.
등급위가 ‘거짓말’에 대해 등급보류 결정을 뒤집어 등급을 내준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사회적인 공감대를 만들거나 어떤 합리적인 대안도 내지 못하고 소모적인 다툼으로 끝났다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따라서 영화계 한쪽에서는 현행 등급위와 등급분류제도가 헌법에 위배된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 신청을 하는 등 적극적인 개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역시 두 차례 등급보류를 받은 독립영화 ‘둘 하나 섹스’ 제작진은 실제로 헌법 소원을 내려고 준비 중이다.
등급위는 검열기구인가
지난해 9월16일 헌법재판소 판례에 따르면 지금의 등급위도 사실상의 검열기관으로 위헌 소지가 다분하다. 헌법재판소는 옛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과 관련한 위헌제청에 대해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공진협)는 그 구성, 심의 결과의 보고 등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공연법에 의하여 행정권이 심의기관의 구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고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검열절차를 형성하고 있는 점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으므로, 공진협도 검열기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판결했다. 이는 옛 공연윤리위원회(공륜)의 사전심의가 ‘사실상의 국가기관이, 사전에 상영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것은 검열이고 위헌’이라는 요지의 헌법재판소 판결에 따라 민간자율기구를 표방하며 새로 출범한 공진협도 검열기관이라는 판결이었다.
비록 지금 등급위는 문화부가 청소년보호위, 영진위, 변협, 방송위원회 등 11개 단체에서 선정한 위원을 예술원 회장이 추천하고 대통령이 위촉해 영상물등급위를 구성했으나 공연법에 따라 문화부의 행정권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보기 어렵다. 공연법에는 등급위에 필요한 운영 경비를 국고에서 보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등급는 99년 예산 중 5억700만원의 국고보조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문화부 전체 예산의 약 20%에 이르는 액수다. 국정감사 때 문화부 산하기관으로 감사를 받는 것도 문화부의 행정권 아래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공진협을 검열기관으로 규정한 판례에 비춰 법률적으로 면밀하게 따져야겠지만 등급위는 적어도 민간자율기구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 등급위 구성부터 순수한 의미의 ‘민간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지금처럼 파행을 답습하게 되고, 등급분류 위원과 영화 제작자·감독 모두가 상처투성이가 되는 불행이 거듭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등급보류가 문제가 되는 것은 등급보류 조치를 받으면 사실상 상영이 원천 봉쇄돼, 창작물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 당하는 것은 물론 제작자는 엄청난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또 관객쪽에서도 볼 권리를 제약 당하는 결과가 된다. 등급보류 조항이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당연히 등급외 영화도 상영할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완전한 등급분류제가 꼴을 갖추려면 등급외전용관 설치 허용은 필수다. 등급외전용관를 허용하는 문제는 공동 정부내에서 자민련의 극렬 반대로 번번이 벽에 부딪혔으며, 옛 국민회의와 문화부도 정치적 흥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부작용은 있겠지만 등급외전용관을 허용하고 완전등급분류제를 하루 바삐 도입하는 길이 우리 사회의 문화의식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뜻 있는 대다수 국민들의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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