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21세기 한국 자주적 세계화론

문민정부 개혁설계사 박세일 전 청와대수석의

  • 박세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석좌교수

    입력2006-11-24 13: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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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세일 전 청와대 수석비서관은 본지 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금융혁명, 신기술과 정보혁명, 전사회의 총체적 구조조정, 동북아 지역의 다자간 경제·안보 협력체제 구축 문제 등 ‘세계화 5대 파도’를 능동적으로 헤쳐나가야 우리 나라가 일류국가가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번호에는 이러한 세계화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자주적 세계화’의 방안을 소개한다.》
    우리 나라는 주지하듯이 공동체적 가치와 위계적 질서를 중시하는 문화가치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우리와는 문화가치적 전통이 크게 다른 미국식 세계화 노력은 우리 나라에서는 하나의 제도로 뿌리를 박기 어려울 것이다. 우려곡절을 겪다가 결국은 실패하든지 아니면 한국식 변형이 나올 것이다. 물론 미국식 제도가 모두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배우고 모방해야 할 제도도 실은 대단히 많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미국의 제도나 기준이 글로벌 기준(Global standards)이라는 이름으로 지극히 무비판적으로 도입되고 강요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대단히 곤란하다.

    따라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우리 식으로 바꾸어야 할 것은 우리 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한마디로 자기 정신을 차리고 세계화를 해야 한다. 근대화가 서구화가 아니듯이 세계화가 미국화는 아니다. 그동안 IMF에서 빌린 돈을 갚느라 경황이 없었지만 이제는 차분하게 미국식 세계화가 아니라 우리 문화와 전통과 역사에 맞는 자주적 세계화의 모델을 모색할 때가 됐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세계화, 즉 한국의 현실에 맞는 자주적 세계화이기 때문이다.

    세계화 정보화라는 공동여건 속에서 서로 다른 정치경제 시스템들이 상호경쟁하게 될 21세기를 맞이하여 우리에게 맞는 자주적 세계화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민족 생존전략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자주적 세계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다섯 가지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첫째, 대외적으로는 세계금융질서의 개혁이고 둘째, 대내적으로는 신국가혁신체제(新國家革新體制)의 구축이다. 셋째는 공동체윤리와 연대의 복구이고 넷째는 국가를 경영할 국가개혁세력의 형성이고, 다섯째는 국가개혁과 혁신전략을 수립할 독립된 두뇌집단의 조직이다.



    첫째, 세계금융자본질서의 개혁이 시급하다.

    지난 호에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세계화 5대 파도 중 가장 거센 분야가 바로 세계금융자본시장인데 이 시장의 주도권은 현재 미국이 쥐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진행중인 세계금융자본시장의 대형 투기장화, 카지노화를 이대로 방치하고는 세계자본주의에 미래는 없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우리 나라와 같은 개발중진국, 작은 개방경제(small open economy)를 가진 나라의 자주적 세계화의 길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자주적 세계화, 아시아형 세계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세계금융자본질서의 모색이 시급하다 하겠다.

    주지하듯이 세계금융자본시장의 거래규모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거대해지고 있다. 1992년에도 이미 1일 거래량이 8200억 달러나 되던 거래규모가 지속적으로 커져 99년 말 현재 1일 거래량이 2조 달러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 금융자본시장의 거래는 대부분이 무역이나 직접투자라는 실물거래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일어나는 거래가 아니다. 실물을 위한 거래가 아니라 자본 자체를 거래대상으로 삼는, 즉 외국환거래 주식투자 채권시장거래 등등이 대부분이다. 99년 현재 무역이나 직접투자라는 실물거래를 수반하는 거래량과 자본 자체를 거래대상으로 하는 거래량의 비율이 약 1 대 50이 된다. 대부분이 한마디로 돈장사다.

    세계금융자본시장의 총거래 중에 소위 단기 투기성 거래는 얼마나 될까? 위에서 본 세계금융자본시장에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1일 거래량 2조 달러 가운데 약 40%가 2일 안에 거래된다. 그리고 약 80%가 7일 안에 거래된다. 따라서 7일 안에 거래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단기 투기성 거래라고 본다면 총거래의 약 80%가 단기 투기성 자금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세계금융자본시장의 거래량이 급속히 거대해지고 단기투기화하면서 세계금융자본시장의 불안정성 내지 불확실성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본래 금융시장은 구조적으로도 대단히 불완전한 시장이다. 소위 정보의 불완전성(imperfect information)도 크고,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도 일어나기 쉬우며, 더구나 경제적 요인 못지않게 일시적 집단심리(herd psychology)가 자금 흐름에 주는 영향도 대단히 큰 시장이다. 그런데 이렇게 구조적으로 취약한 세계금융자본시장에서 엄청나게 거대한 규모의 투기적 자본이 초를 다투면서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따라서 규모가 작은 개방경제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같은 처지라 하겠다. 아무리 금융개혁을 잘 하고 아무리 거시경제지표가 튼튼하다고 할지라도 그 어느 나라도 어느 산업도 세계금융시장의 단기투기자본의 공격대상이 되면 살아 남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언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시대가 되고 있다. 좀 과장하여 이야기하면 점점 통제가 불가능한 세계금융혁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소수가 세계자본 흐름 주도

    그런데 하나의 문제는 이러한 변화에 더하여 세계금융자본시장의 주요정보가 소수의 미국회사에게서 독점적으로 생산된다는 점이다. 소위 무디스사 등의 국제신용평가기관이 그들이다. 개별국가나 개별기업의 신용도, 투자적격여부 등을 조사하고 발표하는 이들 기관의 조사결과가 얼마나 공정하고 객관적인 것인지 그리고 비정치적인 것인지 아무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여하튼 이들의 발표가 세계자본의 흐름에 주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더욱 심각한 또 하나의 문제는 세계금융자본시장의 주요의사결정이 점점 소수 자연인들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금융자본시장에서 차지하는 뉴욕 월스트리트의 비중이 아주 커지면서 미국의 재무장관이나 연방은행 총재가 세계자본의 흐름에 끼치는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다. 동시에 월스트리트에 집중해 있는 세계의 주요 투자은행과 증권기관들이 M·A를 통하여 초거대화하면서 이들 기관의 CEO, 자금담당이사 등 소수 자연인들에게 세계금융자원배분의 주요 결정권한이 급속히 집중하고 있다.

    컬럼비아대학의 바그와티(Bhagwati) 교수는 1998년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실린 그의 논문에서 앞으로 세계는 미 재무부-월 스트리트의 이해복합체(Wall Street-Treasury Complex)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미국은 앞으로 군산복합체제(Military-Industrial Complex)를 경계해야 한다고 한 경고와 유사한 이야기다.

    환언하면 미 재무성의 고위관리와 월 스트리트의 지배자들이 공동의 이해를 가지고 계획적으로(혹은 음모적으로) 세계금융자본시장을 특정 방향으로, 즉 월 스트리트에 유리한 방향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계한 것이다.

    필자는 일반적으로 음모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우리가 직시해야 한다. 즉 현재 세계금융시장에는 미국의 가장 우수한 경영대학원 법과대학원을 나온 영재들이 몰리고 있다, 이들이 최첨단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여 새로운 금융상품 새로운 금융기법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개발하고 있다,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미국의 재무성 관료들도 따라가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세계금융시장의 새로운 기술혁신·금융혁명을 미행정부가 제대로 감시하고 규제하기에 점점 역부족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따라서 미정부는 재무성 고위관료나 연방은행책임자들로 대개 월스트리트에서 수십년간 금융경험을 쌓은 성공한 경력자들을 데려다 활용하고 있다. 최근에 퇴임한 재무성의 루빈 장관이나 현재 연방은행 총재인 그린스펀도 모두 월스트리트 출신이다. 심지어 세계은행의 총재도 월스트리트 출신이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다음과 같은 경향이 워싱턴을 중심으로 미국의 세계경제정책에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세계경제의 발전을 월 스트리트의 발전, 즉 미 금융가의 발전에 연계시키는 사고다. 더 나아가 월 스트리트의 안정과 발전을 세계경제의 안정과 발전을 재는 잣대로 보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필자는 바그와티 교수도 이러한 경향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이미 세계적으로는 단기투기자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미국 주도의 IMF 등을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새로운 세계금융질서를 구축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백 번 옳은 이야기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미국 정부만이 이 문제해결에 대하여 소극적이다. 그들이 왜 소극적인지는 알겠다. 그러나 IMF 금융위기를 겪은 우리 나라가 왜 이 문제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연대하고 미국의 양심적인 지성인들과 연대하여 미국정부를 설득해야 한다. 사실 미국의 저명한 대학교수나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단기자금에 대한 규제와 신금융질서기구의 필요성을 지지하고 있다. 양식 있는 정치인들까지도 이에 동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와 우리 지식인들은 침묵하고 있다.

    IMF의 개혁만이 아니라 지역차원에서 아시아통화기금(AMF)이라는 제도적 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옳은 주장이다. 그런데 미국이 이를 반대한다고 하여 우리 정부는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비록 일본이 먼저 주장했다 해도 그 기본방향이 옳으면 이를 적극 지지해야 한다. 기술적인 문제에 의견차이가 있다면 서로 논의하면서 개선하면 될 것이다.

    한마디로 세계금융질서의 개혁은 대단히 시급한 과제다. 단기투기자본에 대한 규제, IMF 개혁 등 산적한 문제의 해결에 우리는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세계에 우리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이의 실현을 위하여 민관(民官)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 없이는 세계자본주의의 건강한 발전도 약소국의 자주적 세계화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새로운 국가혁신체제(國家革新體制)를 구축해야 한다.

    최첨단 신기술 분야에서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선진국의 새로운 정보통신혁명과 유전자혁명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과학이나 기술의 차이는 더욱 커지고, 선진국들의 기술패권주의는 더욱 강화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이미 IMF 위기를 맞기 이전부터 우리의 기술수준(중화학 공업 등)이 선진국과 후진국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여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예컨대 가까이 있는 일본의 선진기술장벽은 넘을 수가 없고 동시에 동남아시아나 중국의 저임금 추격도 이겨내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국가 차원에서 이 문제를 푸는 확실한 방략이 나오지 않고 있다.

    산업정책을 포기한 것을 잘못이다. 올바른 산업정책의 부재가 몇몇 산업분야에 공급과잉문제를 일으켜 금융위기를 가져오지 않았던가? 아무리 세계화 시대라 하여도 여전히 국가는 중요하다. 시장만능주의는 잘못이다. 정부가 나서서 민관합작(民官合作)의 신산업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다만 그 집행방식이 과거 정부주도의 경제성장시대와는 달라야 할 것이다. 더 시장친화적(市場親和的)이고 시장조화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의 실패를 줄일 수 있는 공무원에 대한 올바른 보상제도·교육제도·감사제도의 개혁, 즉 관료개혁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정부가 주도하되 민관학(民官學) 합동의 신산업정책, 신과학기술정책, 신기업정책이 나와야 한다. 여기에 올바른 교육정책과 노동정책이 결합해야 한다. 종합적이고 새로운 국가혁신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 새로운 미래 비전과 청사진을 전제로 민관학이 함께 노력하여 3자간의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그리하여 선진국의 기술·정보패권주의를 극복하고 그들과 우리 간 정보와 지식의 격차를 축소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하여 시급한 일 하나는 교육부와 노동부 그리고 과기처의 통합이다. 이를 하나로 묶어 미래부(未來部)로 명명하고 신국가혁신체제 구축을 주도하게 해야 할 것이다.

    국가혁신체제의 구축은 결국 개별기업이 단기이익 추구에 급급하지 않고 성장력의 극대화를 위한 슘페터적 혁신(Schumpeterian innovation)의 주체가 돼야 성공할 수 있다. 끊임없는 기업혁신을 통하여 ‘투자가 투자를 부르는 경제’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 이를 위하여 정부는 학계와 더불어 산업정책적 지원, 산업기술개발 인프라, 교육과 훈련 인프라, 그리고 노사관계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우선 대학과 정부출연 연구소 그리고 기업연구소들이 더욱 긴밀히 연결해 무엇보다 이들이 새로운 세계수준의 정보와 기술의 공급원, 그리고 신지식의 끊임없는 생산지가 돼야 한다. 중고등학교가 수동식 암기와 입시의 지옥이 아니라 다양한 정보를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하고 자신의 창의성을 마음껏 개발할 수 있는 창조의 장이 되어야 한다. 학교 가정 직장이 첨단 정보통신기술로 긴밀히 연결된 거대한 평생학습장이 돼야 한다.

    직장도 이제는 더 이상 노사대립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사대립은 20세기적 산업주의시대의 현상이다. 세계화 정보화 시대의 직장은 노사가 상호신뢰하고 협력 하여 신기술 신지식을 공동학습하고 공동개발하는 장이 돼야 한다. 노사가 함께 슘페터적 혁신에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세계경쟁 속에서 지식노동자도 살고 기업도 산다.

    신국가혁신체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와 기업문화도 크게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 재벌개혁의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는 회사지배구조 개혁은 다음의 문제가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 나라의 회사는 미국식 지배구조를 그대로 본받을 수 없다고 본다. 회계의 투명성, 경영의 책임성 등을 높이는 문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적용해야 할 보편적 원칙이기 때문에 우리도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주주 중심 기업관(shareholder capitalism)’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유럽이나 일본에서 나타나는 소위 주주, 경영자, 근로자, 채권자, 소비자 등 기업관련 당사자들의 이해의 조화를 목표로 하는 ‘이해조화형 기업관(stakeholder capitalism)’이 바람직하고 공동체적 가치관이나 전통문화와 정서에 더 잘 어울릴 것이다.

    현재 구조조정과 관련하여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문제도 너무 미국식 일변도로 진행하고 있다. 오랫동안 관행이 돼온 장기고용제도의 이 점을 가능한 한 살리고 지키는 방향에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노력이 강화돼야 한다. 고용조정 대신에 노동시간이나 임금수준을 조정하는 등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무조건 자유해고라는 미국식 고용조정방식만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려 하고 있다. 이는 종업원의 애사심 충성도 헌신성 등 우리 나라의 가족주의적 기업문화의 장점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특히 노동자들의 동기유발 애사심 직장만족도 등이 생산성 향상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지식노동자의 시대, 지식기반의 경제가 오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해고의 자유만을 찬미하는 것은 대단히 이율배반적이다. 결국 엄청난 문화적·경제적 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물론 구조조정과정에 해고가 불가피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것은 해고라는 결과가 아니라 종업원을 아끼는 마음, 가능한 한 해고를 피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다. 그러한 ‘기업의 마음’ ‘기업의 문화’가 있어야 한다.

    기업에 이러한 마음과 문화, 에토스가 없으면 앞으로 어디서 기업발전의 새로운 활력을 찾을 것인가? 어디서 종업원의 충성과 애사심, 지식노동자의 헌신과 열정, 기업 내 숙련 축적과 협력적 노사관계 등을 만들어낼 것인가?

    결국 세계화를 하되 우리는 자주적 세계화를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서구와 다른 문화와 역사와 전통을 지닌 아시아국가들이 본받을 만한 ‘아시아형 세계화’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공동체윤리와 연대의식의 복구다.

    세계화의 폐해 중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가 공동체의 붕괴라는 것은 지난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세계화 자체가 사회의 소득과 부의 분배를 크게 악화시키는 경향을 가진다. 따라서 여러 이유로 세계화의 흐름을 타지 못하는 낙후계층에 대하여 공동체적 배려가 반드시 제도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단기적인 경제성장은 있겠으나 장기적으로는 공동체가 분열하고 피폐해져 결국 세계화의 도전에 실패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9년째 장기호황을 누린다는 미국도 세계화에 따른 소득과 부의 분배악화는 예외가 될 수 없다. 1973년 제1차 오일 쇼크 이후 오늘날까지 미국의 소득분배는 계속 악화되고 있다. 지난 25년간 미국의 최하 20%에 속하는 계층의 실질소득은 약 15% 떨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 세계화과정 속에 극단의 시장개인주의(market individualism)를 추구하면서도 공동체적 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제도적·정신적 요인을 우리 나라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미국은 독점자본 엄격 규제

    흔히 미국은 기업활동의 천국이라고 한다. 분명히 기업의 자유가 크게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기업의 자유는 공정하고 엄격한 법과 제도의 규율하에서만 허용된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듯이 미국의 독점금지법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가혹하다. 이번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내에서 가장 우수한 민완 검사들이 대기업의 독점화와 시장지배의 폐해를 막기 위하여 한시도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고 있다. 검찰은 독점화 가능성이 보이면 항상 기소하고 법원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대기업에 분할명령도 한다.

    뿐만 아니다. 미국의 조세법은 그 내용과 집행이 엄정하기로 유명하다. 한마디로 미국에서 조세포탈은 그대로 기업활동의 포기를 의미한다. 금융산업관련법의 대단히 상세한 규제조항들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이외에도 소비자보호법, 제조물책임법, 근로자권익보호를 위한 각종 노동관련법, 환경보호관련법 등이 대단히 구체적이고 그 적용과 집행이 대단히 엄정하다.

    미국에서는 소송을 할 때 변호사비용 등의 소송비용을 각자가 부담하는 본인부담제도이기 때문에 대기업을 상대로 개인이 얼마든지 소송을 할 수 있다. 만일 패소자부담제도라면 패소시 대기업의 변호사비용도 제소한 개인이 부담해야 해 그만큼 대기업에 대한 국민의 제소 가능성은 낮아진다. 반면에 우리 나라는 주지하다시피 패소자부담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독점금지법 위반이나 소비자보호법 위반의 경우 등에서는 실제 발생한 손해 내지 피해의 3배까지를 대기업에 배상시킨다. 소위 3배 배상제도가 그것이다. 따라서 대기업의 부당 불법행위에 대한 규제 효과가 그만큼 높다. 동시에 개인이 대기업의 잘못을 제소하여 큰 부자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는 현재 약 100만명의 변호사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착수금 없이 성공보수제로 일한다. 제소시에는 돈을 요구하지 않고 성공시 소송가액의 20~40%를 보수로 받을 것을 전제로 소송활동을 한다. 따라서 피해를 본 개인이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하기가 대단히 쉽다. 미국에서는 1년에 약 2만 건의 회사상대소송이 일어나고 있다.

    한마디로 대기업과 대자본의 횡포와 타락 가능성을 견제하고 순치할 법적·제도적 장치가 대단히 잘 갖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기업에 대한 법적·제도적 견제는 한편으로 대기업의 경제활동에 대한 사회적 정당성(legitimacy)을 크게 높이는 기능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호에서도 지적했지만 미국사회의 주류에는 아직 칼뱅주의적 금욕정신과 근면의 노동윤리가 지배적이다. 부자들이 근면하고 사치하지 않으며 자신이 쌓은 부를 자식들에게 세습하지 않는다. 전국적으로 4만개가 넘는 공익기금을 만들어 자신의 재산을 공익을 위한 활동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각종 자선활동에 기부한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부자들이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으며 부(富)의 사회적 정당성이 대단히 높다.

    사회안전망 구축해야

    세계화과정에 공동체적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약자보호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social safety net)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국가 혼자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할 수는 없다. 정부와 기업의 노력, 종교단체, 시민단체 등 각종 지역공동체의 협조, 그리고 본인 자신의 자구노력 들이 효율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따라서 실업보험 등 제도로 나타나는 사회적 안전망 구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시민사회에 이웃 사랑과 이웃 나눔의 공동체적 가치관과 윤리를 재창조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단순한 시혜적 안전망이 아니라, 공동체적 연대감과 공동체적 나눔의 정신이 뒷받침되는 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들의 자원봉사활동(voluntarism)이 대단히 활발한 미국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이웃의 공부를 못 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무보수 가정교사를 자원하는 활동, 병약자·노인·장애인 등의 거동을 보조하고 그들의 각종 사회활동을 도와주는 활동, 영세지역에서 무료탁아 활동, 학대받는 아동보호양육활동, 젊은 이혼모의 정신적 상담과 경제적 지원활동, 환경보호와 소비자보호를 위한 고발활동, 지역문화 활성화 활동 등 수많은 공동체적 연대를 실천하는 자원봉사활동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미국 성인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반드시 주 평균 4시간 이상의 자원봉사를 하고 이러한 자원봉사활동단체가 전국에 약 140만개나 된다.

    이러한 자원봉사활동, 무보수의 공익 증진활동, 이웃사랑활동이야말로 미국사회의 공동체적 연대를 강화하는 강력한 접착제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냉엄한 시장논리하에서 무한경쟁을 하는 대단히 개인주의적 사회이면서도 다른 한편 이와 같은 공동체를 위한 자원봉사활동, 이웃사랑활동이 대단히 왕성하기 때문에 미국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유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국사회는 시장개인주의가 가져오는 공동체해체 위기를 극복하는 나름의 제도·의식 그리고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물론 우리 나라에도 미국식 법률제도와 칼뱅주의적 정신 그리고 자원봉사의 문화가 무조건 그대로 들어와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저들의 노력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를 반성해보자는 말이다.

    환언하면 우리는 이 세계화의 도전 속에서 공동체적 윤리와 연대를 강화하는 어떠한 법적·제도적 노력을 해야 하는가, 우리의 역사와 전통 속에 있는 어떠한 사상적·정신적 가치를 계승 발전시켜 이를 사회지도층이 솔선수범해야 하는가, 어떠한 문화적·가치적 전통을 다시 살려 내 이웃사랑과 이웃나눔의 시민문화를 다시 활성화할 것인가 등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 없이 세계화란 이름으로 무조건 미국식 시장개인주의 도입을 서두르면 그러한 세계화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올바른 자주적 세계화 전략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 미래 국가개혁주체를 형성하여야 한다.

    세계화는 단순한 국제화와는 다르다. 미국화(美國化)는 더더구나 아니다. 세계화는 단순히 국가간 경제교류의 증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제3의 물결이라고 하는 신기술혁명이 수반하는 문명사적 변화다. 따라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 개인과 자연의 관계 등 모든 근대적 가치와 산업주의적 패러다임이 바뀌는 변화다.

    그 결과 모든 조직(학교 정부 기업 정당 언론 사법 등)과 모든 정책(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이 모두 재창조(reinventing)돼야 한다. 한마디로 총체적 구조조정과 개혁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를 보면 한마디로 ‘개혁이 경쟁하는 시대’다. 어느 나라가 시스템의 총체적 개혁과 구조조정을 더 잘하는가를 놓고 서로 경쟁하는 시대다. 이에 성공하면 그 나라와 국민은 21세기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승자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패자가 되는 것이다. 승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자주적 세계화에 성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1세기 자주적 세계화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세계화라는 도전을 올바로 해결할 ‘의지와 능력’을 가진 정치세력이 등장해야 한다. 한마디로 미래 한국을 개척할 정치적 주체세력을 형성하는 문제다. 미래개혁세력, 정책능력세력, 전문가세력의 정치적 등장이 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나라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개혁의 과제일 것이다.

    광복 후 처음에는 독립운동세력이, 그리고 다음에는 군부세력이 우리 나라의 정치를 지배해왔다. 그 후 민주화세력이 우리 나라의 정치를 책임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 나라는 독립운동을 하고 민주화투쟁을 하던 시절의 극한 대립적 권력투쟁형 정치, 권위주의적 1인 지배의 사당(私黨)정치, 돈에 의존하는 금권정치, 지역감정을 볼모로 하는 분열정치, 무(無) 비전과 무(無) 정책의 아마추어 정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정치에는 비전과 정책보다는 구호와 돈이 중심이고 팀이나 시스템보다는 개인이나 연고가 중심이다. 이래서는 분명히 21세기 세계화의 도전, 지난 호에서 지적한 5대 도전을 결코 이겨낼 수 없다.

    이제는 권력투쟁형 정치에서 국가경영형 정치로 바뀌어야 한다. 구호에서 비전으로, 돈에서 정책으로, 개인에서 팀으로, 지역분열에서 국민통합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가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 우리의 비극은 지금까지 정치에는 프로지만 국가경영에는 아마추어가 너무 오랫동안 국정을 맡았던 것은 아닌가?

    이제 프로들이, 비전을 가진 전문가들이 국가경영을 맡아야 한다. 이제 더는 주먹구구식 국가경영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하고 국가경영의 새로운 구상과 패러다임, 현장장악력과 과감한 돌파력이 필요한 시대다.

    요즈음 벌어지고 있는 정치개혁 논의도 사실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선거구제도 논의, 공천제도의 민주화, 정치자금제도의 합리화 등등의 모든 논의가 실은 새로운 미래개혁주체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국가경영의 전문가세력들이 정치에 등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돼야 한다. 그렇지 않은 정치개혁논의는 모두 정치적 기득권 세력간의 나누어먹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반(反)역사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개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지금 우리의 병은 이 시대를 사는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지 않고 모두가 이 시대의 객(客)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점에 있다. 자기 나라 일을 남의 나라 일처럼 생각하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사회의 기득권층에는 국가의 장기발전과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적고 개인의 단기과제 해결을 위한 동분서주만 있는 편이다. 국가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네트워킹은 적고 개인 출세를 위한 네트워킹에만 바쁘다.

    지도층의 이러한 풍조는 새로 등장하는 젊은 세대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다. 젊은 미래세력들도 국가경영능력을 키울 생각은 아니하고 있다. 머지 않아 이 사회의 주인이 된다고 하는 긴박감과 사명감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도 개인의 출세와 눈앞의 치부에만 급급해 보인다. 이렇게 해서는 우리 나라에 희망이 없다. 제도개혁뿐 아니라 미래세력의 자각이 없이는, 그들의 대오 각성이 없이는 새로운 역사는 창조되지 않는다. 주인은 없고 모두가 객인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시대적 소명을 자각한 역사창조세력의 형성 없이 어떻게 새로운 역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해서든 가까운 장래에 우리 나라 미래세력 전문가세력 국가경영세력 민주개혁세력의 자기반성이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이들 미래개혁의 주체세력이 정치적으로 등장할 수 있어야 하겠다. 물론 미래세력은 현 정치권 안에서도 나올 수 있고 기존 정치권 밖에서도 등장할 수 있다. 여하튼 새로운 비전, 새로운 정책, 새로운 팀 정신을 가진 새로운 국가경영 전문집단의 정치적 등장 없이는 새로운 역사는 창조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주적 세계화는 성공할 수 없다.

    다섯째, 독립된 두뇌집단이 조직되어야 한다.

    자주적 세계화의 성공을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싱크탱크(Think tank, 두뇌집단)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이 싱크탱크가 중심이 되어 미래 한국의 청사진을 그려야 한다. 지난번에 논의한 세계화의 5대 도전, 5대 과제에 대하여 구체적인 정책안과 추진전략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단히 구체적인 연구와 토론, 심층적인 정책분석과 전략개발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엄청난 지력과 정보력, 경험과 경륜, 창의력과 기획력, 그리고 정성과 열정이 집중되어야 한다. 각 분야에서 최고의 학자, 교수, 관료, 기업인, 언론인, 시민운동가 등 우리 사회의 모든 연구역량이 조직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총동원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미래 한국의 청사진과 전략을 (1)장기적 관점에서 (2)공익과 국익을 우선하는 관점에서 (3)세계적 안목과 이해를 가지고 (4)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로 한국적 가치와 문화의 맥락 속에서, 가슴에 와 닿게 그려야 한다. (5)그리고 구체적 현실적 추진전략도 함께 세워야 한다. 추진전략을 세우는 데는 반드시 멀게는 1987년 이후, 가까이는 1993년 문민정부 이후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각종 ‘개혁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왜 어떤 개혁은 성공했고 어떤 개혁은 실패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연구와 반성없이 새로운 설계에만 급급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정부연구소와 기업연구소는 있으나 위와 같은 일을 해낼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민간 싱크탱크’가 하나도 없다. 솔직히 말해 우리 나라에서는 먼 훗날을 생각하면서 국가발전의 비전과 전략을 세우려는 조직이나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미국에는 1945년에 약 62개에 달하던 민간 싱크탱크가 1996년 말 현재 1212개에 달하고 있다. 이들 싱크탱크들을 미국에서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언론 다음으로 제5부라고 부르며 이들 두뇌 집단들이 미국의 국가정책과 공공정책수립과정에 끼치는 영향은 가위 절대적이다.

    두뇌집단 양성해야

    이들은 국가정책 수립과 집행과정에 대하여 두 가지 기여를 한다. 하나의 기여는 학자 교수 등 이론가와 공무원 정치인 등 실무자 간 정보교류와 의견교환의 기회를 만들고 이들의 공동연구, 공동토론을 통하여 구체적이고 현실성 있는 정책대안을 개발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의 기여는 이렇게 개발한 정책안을 언론 시민단체 등과 토론모임을 통하여 사회적 공론에 부치는 일을 한다. 그리하여 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 국민적 이해와 지지를 만들어 내는 구실을 한다.

    그런데 이들 미국의 민간 연구소 내지 민간 싱크탱크의 설립은 모두 대기업가 대재산가들이 공익을 위하여 자신의 재산을 기부한 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미국에는 대기업가나 대자산가들이 이렇게 공익을 위한 활동에 쓰도록 기부한 공익기금의 수가 4만 개가 넘는다. 여기서 돈을 받아 각종 민간 싱크탱크들이 국가발전과제에 대한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연구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 나라는 어떠한가? 우리 나라에도 나름대로 대기업가도 있고 대자산가도 많다. 그러나 아직은 유감스럽게도 국가과제와 공공정책을 연구하고 국가장기발전전략을 세우라며 큰 자금을 쾌척한 경우가 없다. 대기업 연구소도 있고 전경련(全經聯) 연구소도 있으나 이는 대기업의 이익옹호와 확장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정부의 출연연구소도 있으나 매년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기 때문에 나름의 연구활동에 한계가 있다. 필자는 우리 나라의 대기업가들과 대자산가들이 앞장서서 그리고 전경련이 앞장서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민간 싱크탱크를 만들기 위한 모금사업을 해줄 것을 간절히 호소한다.

    우리 나라 경제계의 지도자들이 머지 않은 장래에 국가를 살리는 이 일을 반드시 해줄 것이라 믿는다. 그리하여 미국의 브루킹스 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와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을 합친 정도의 민간 싱크탱크를 만들어내야 우리 나라도 21세기에 제대로 된 국가경영, 그리고 세계경영을 할 수 있다.

    그들이 이 일을 외면한다면 불가피하게 정부가 이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방법은, 예컨대 한국개발연구원(KDI) 등과 같은 기존 사회과학관련 정부출연연구소들을 모두 모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정부부처 내 연구소(연구원의 공무원화)로 만들어 각 부처의 단기 연구수요에 응하도록 하고, 다른 하나는 독립기금을 만들어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시켜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국립 싱크탱크(두뇌집단)를 만드는 일이다. 매년 예산을 지원받지 않고 독립된 연구기금을 만들어 이 기금에 기초하여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되어야, 즉 경제계가 하든지 아니면 정부가 하든지 어느 쪽이라도 해야 우리 나라에 희망과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같은 지식전쟁, 정보전쟁의 시대에 자기 나라의 국가과제 장기발전전략을 연구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는 나라가 우리말고 또 있을까?

    세계화의 엄청난 폭풍이 밀려오는데 개인이나 개별기업이 살아 남을 연구는 하면서 국가 전체가, 공동체 전체가 살아 남고 번영할 연구를 이렇게 소홀히 하는 나라가 과연 있을까?

    자주적 세계화에 성공하기 위한 위의 마지막 두 가지 조건 중에서 전자는 미래 한국 건설을 위한 개혁주체를 만들어 내는 문제고 후자는 미래의 청사진, 개혁과 전략의 청사진을 그리는 문제다. 후자가 한국의 미래를 그리고 세계화의 5대 도전에 대한 개혁정책의 방향과 전략을 세우면 전자는 이 미래개혁청사진에 대한 광범위한 국민적 이해와 지지를 정치적으로 조직해 내야 한다. 그리하여 광범위한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새로운 역사창조를 위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실천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비로소 우리는 희망의 21세기를 가질 수 있고 세계화 정보화시대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세계화의 도전을 민족의 재도약을 위한 호기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는 냉엄한 인과의 법칙이 있을 뿐 결코 요행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지금부터 약 100년 전, 구한말에도 우리는 지금과 유사한 역사적 도전을 맞이했다. 소위 근대화 산업화의 도전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 우리에게 요구되는 변화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도 부족했고 새 역사를 창조할 지도층의 결단도, 국민적 지지와 합의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나라를 잃는 수치와 오욕의 역사를 경험했다. 이제 우리는 불행했던 과거의 역사를 두 번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21세기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는 반드시 우리가 승리하는 민족웅비의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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