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옷사건 유탄을 맞고 구속됐던 박주선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 1월14일 보석으로 출감한 그에게 김대중 대통령이 위로전화를 했다. “나도 억울하게 옥살이한 적 있다. 그걸 생각해 달라.”》
박주선(51)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 지난해 12월 그가 구속될 당시 몰아쳤던 광풍은 이제 어느 정도 잠잠해졌고 법조계 주변에선 ‘억울하다’는 그의 호소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조금씩 늘고 있다. 보석으로 출감한 지 한 달여.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았다. 지난해 12월 검찰에 드나들 때와 비교하면 많이 안정돼 보였다. 가볍게 미소 띤 얼굴엔 여유마저 느껴졌다. 시간이 그의 상처를 아물게 한 것일까…. 아니었다. 그건 겉모습뿐이었다.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좁은 독방에서 쇠창살을 바라보며 ‘치욕감’에 떨던 그의 고통이 응축된 형태로 완곡하게, 때론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박주선씨의 출마설이 나돈 것은 2월초부터. 명예회복 차원에서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출마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총선 출마 결심은 굳혔습니까.
“고향에서 제 총선 출마를 위한 추대위원회를 만들 모양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저를 위하는 마음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절대 안한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저 ‘고맙다’고만 하고 있는데 대통령을 모셨던 비서관으로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명예회복은―현재 법률적 제재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사법부의 심판을 통해 이뤄야 한다고 봅니다. 하여간 심사숙고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위로
―지역 여론은 어떤 것 같습니까.
“들리는 얘기로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제가 억울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습니다. 구속됐을 때 고향 주민 1만5000명이 탄원서를 올렸습니다.”
사법부 심판을 통한 명예회복을 강조하면서도 총선에 출마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뭐랄까. 여론의 향배를 저울질한다고나 할까. 일종의 잽을 날리는 듯싶었다.
―출감 후 대통령과 통화한 적 있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통령께서 위로 전화를 주셨다”고 대답한다.
―뭐라 말씀하시던가요.
“대통령 말씀을 공개하긴 어렵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옷사건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습니까.
“전화통화에서 대통령께서는 ‘나도 과거에 억울한 옥살이를 한 적이 있지 않으냐. 그걸 생각하라’며 위로하시더군요.”
―대통령이 사건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보십니까.
“제가 허위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은 알고 계십니다. 지난해 12월에 TV 노정방담에서도 누가 그 문제에 대해 물어보니 대통령께서는 ‘박비서관이 허위보고한 적 없으며 중요한 보고는 다 받았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권력의 한가운데에 있던 그를 하루 아침에 끌어내린 옷사건. 일반사람들에게는 이제 재미있는 장면이 다 지나간 ‘한물 간 드라마’에 불과하겠지만 그 드라마로 자신의 삶을 망쳐버린 그에겐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악몽이다. 그 얘기를 하려면 김태정 전법무장관을 빼놓을 수 없다. 그와는 광주고 9년 선후배 사이. 장래 총장감으로 검찰 안팎의 기대를 모았던 그에게 청와대행 ‘외도’를 강권했던 당사자이기도 하다.
―김태정씨는 만났습니까.
“아직 안 만났어요. 공범으로 엮여 있는데 만나는 모습이 기자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또 무슨 협잡을 한다고 생각할 테니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전화통화는 했어요.”
―어떤 얘기를 했습니까.
“그 양반이 먼저 출감해 집사람에게 안부 겸 위로 전화를 했다기에 나도 나와서 전화를 드렸지요. ‘내 실수로 유능한 젊은 사람의 앞길을 막아 미안하다’고 말하더군요. ‘내 운명이지, 총장이 일부러 내 앞길을 막았겠느냐. 운명으로 당당히 받아들이고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려 반드시 명예회복을 하겠다’고 말해줬습니다.”
―청와대 들어간 일이 후회되지는 않습니까.
“운명은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국가원수를 모시고 국정에 깊이 관여한 영광도 있기 때문에 후회는 안합니다. 다만 검찰에서 내 입지를 확실히 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어찌 그리 법해석이 다른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내가 억울하게 여기는 것은 구속이 아니라 공소사실 자체입니다. 증거도 없고 법률상 성립도 안 되고. 내가 국민들께 감사하면서도 괴로운 심정이 뭐냐 하면 언론이나 여론의 인식이 잘못돼 있어 다들 내가 저지른 것으로 단정하며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동정을 한다는 점입니다. ‘당연한 의리였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게 더 괴롭습니다.
난 (사직동팀 최초문건을 김태정씨에게) 주지 않았다는데,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이렇게 보는 겁니다. 또 하나 아쉬운 것은 처리 방법이 여러 가지 있을 텐데―이를테면 사표를 내고 공직을 그만두게 한다거나―그렇게 구속하는 게 과연 온당한 조치였나 하는 겁니다. 참 나…”
한마디 한마디에 탄식이 배 있다. 두달 전의 악몽이 되살아난 탓일까. 후배 검사 앞에서 자신의 부하였던 사직동팀 팀장과 대질신문을 하는 그 치욕스럽던 순간이.
“우스운 것은 법을 아는 검사들인데 어찌 그리 해석을 다르게 하냐는 겁니다. 피고인인 나를 비롯해 90여명의 변호인들이 다 말도 안 되는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수사검사에서부터 결재권자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4시간 반이라는 그 장시간 회의를 하며 수사라인에 있지도 않은 검사장들까지 불러들여 격론을 벌이는, 그런 전례 없는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이례적인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청와대에서 1년9개월 근무했는데요. 소회가 있다면.
“국가원수를 측근에서 보좌하는 것은 공무원으로서 상당히 영예로운 일 아닙니까. 국가원수를 한번도 접하지 못하고 공직생활을 끝내는 공직자도 많거든요. 대통령께서 각별한 신임을 주신다고 주변에서 평할 때 가장 보람을 느꼈습니다.”
박씨는 수석비서관은 아니었지만 수석의 대접을 받았다. 수석회의에도 참가하고 일반 비서관과는 달리 대통령과 이른바 독대를 자주 했다. 대통령은 그를 ‘박수석’이라고 불렀다.
“처음에 김태정 총장과 김중권 비서실장이 청와대 근무를 권했을 때 거절했지만 공직자로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일정 기간 근무를 마치는 대로 검찰로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법무비서관 자리는 검찰을 바로 서게 하고 검찰의 결정을 통치권자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교각 구실을 합니다. 청와대에 들어가면 무조건 정치검사가 돼 버리고,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다시 검찰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에요. 나야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지만.”
―옷사건을 계기로 법무비서관 자리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요.
“밖에선 대통령이 법무비서관을 통해 검찰총장을 지휘하는 줄 아는데 옛날엔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나는 한번도 검찰의 소신에 어긋나는 결정을 유도하거나 번복시킨 적이 없습니다. 진짜 없어요.”
―그렇지만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선 서로 협의하지 않습니까.
“물론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에 대해선 검찰에 수사 진행사항을 물어보기도 하고, 정보보고 형태로 위에 보고도 하지요. 그렇지만 제 개인의 의견을 개진하지는 않습니다.”
누가 사직동팀을 움직였나
―옷사건의 경우 사직동팀 최종보고서에 법무비서관의 건의 사항을 넣지 않았습니까.
“그건 달라요. 청와대에 탄원이 들어왔기 때문에 담당 비서관으로서 최순영 회장을 구속 조치하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해 내가 건의한 거죠.”
―탄원이라니요?
“대통령한테 최순영을 구속하지 말라는 탄원서가 들어왔다니까요. 그 탄원서도 처리해야 하고 옷사건 관련 첩보도 처리해야 하니 법무비서관으로서 대통령에게 당연히 건의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럼 탄원이 있는데 ‘이거 대통령이 알아서 판단하쇼’ 그렇게 해야 합니까.”
―목사들의 탄원서를 말하는 것이지요?
“목사 6, 7명이 청와대에 찾아와 각자 탄원서를 제출했어요.”
애초 박씨는 인터뷰 요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시기가 적절치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재판과 총선 출마 여부를 의식해서였다. 그래서 가급적 옷사건 얘기는 안 한다는 전제하에 만났다. 그러나 그를 만나 옷사건 얘기를 안 한다는 건 술꾼이 술집에 가 안주만 만지작거리는 꼴이다. 기자에겐 그것을 견딜 만한 참을성이 없었다. 이 점은 그도 마찬가지. 점차 울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 사건이 재조명되리라 믿습니다. 도대체 지금 생각해도 그 단순한 사건이 어찌 그렇게 큰 파장을 몰고 와 1년 내내 대통령과 국정의 발목을 잡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언론이 흥미 위주로 대서특필하는 바람에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거죠. 이 사건은 대한민국 최고 수사기관인 검찰, 그 검찰 총수의 부인이 관련된 사건입니다.
청와대에 들어온 첩보 중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은 꼭 대통령에게 보고합니다. 그런데 첩보를 보고하기 전 사실일 개연성이 있냐 없냐를 먼저 판단해야 해요. 나는 진짜 공명정대하고 철저한 수사를 하려는 의지로 내사를 지시한 겁니다. 그런데 이걸 축소·은폐 조작이라니…. 최초 내사 당시 제가 최종보고서에 이형자의 자작극으로 보인다고 쓰지 않았습니까. 지난번에 대검도 같은 결론으로 이씨를 구속까지 했잖아요.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뭘 축소하고 뭘 은폐했다는 건지, 연정희씨에게 무슨 도움을 줬다는 건지, 기가 막힌 일입니다.”
―옷사건으로 사직동팀 존폐 문제가 거론됐는데요.
“예전엔 사직동팀이 너무너무 나쁜 일을 많이 했어요. 우선 DJ비자금 사건만 보더라도 영장도 없이―그건 실명제의 근간을 무너뜨린 겁니다―1000여개의 계좌를 2년에 걸쳐 추적했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 전력이 있으니 전과자가 사회에 발붙이기 어려운 것처럼 지금도 똑같은 일을 자행하는 것으로 의심을 받는 거죠. 그래서 폐지 얘기가 나온 모양인데 제가 있을 때 불법 계좌추적이나 불법 감청은 전혀 없었어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우선 계좌추적을 하면 당사자들에게 통보를 해야 돼요. 게다가 불법이면 은행에서 절대로 협조를 안 하게 돼 있습니다. DJ비자금 사건으로 은행감독원장이 사표 쓴 이후론. 은행에 가 한번 해봐요. 절대 협조 안 합니다.”
―대검이 사직동팀을 압수수색했을 때 불법 계좌추적 사실을 적발했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불법 계좌추적을 할 수가 없다니까요. 다른 데서 추적한 내용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건(DJ비자금사건) 이후론 절대 할 수 없게 해놓았어요. 정권의 도덕성 차원에서나 공직자의 양심에서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때 자신이 지휘하던 팀에 대한 애정에선지, 아니면 정말 기자가 ‘말도 안 되는’ 의혹을 제기해선지 그는 정색을 하며 사직동팀을 변호했다.
―옷사건 내사 경위에 대해 말이 많은데요.
“1월14일(99년)에 그 내용을 처음 들었어요.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그런 소문이 퍼져 있다는 첩보였습니다. 다음날 최광식 조사과장이 청와대에 들어와 머리를 긁적거리며 ‘검찰총장 관련 소문이 좍 퍼져 있다’며 같은 내용을 보고하더라구요. 온누리교회와 횃불선교원 교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라면 진위 여부를 가려야 되지 않겠나’ 싶어 내사를 지시했어요. 그랬더니 최과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검찰총장 관련 부분을 제가 어떻게 조사하냐’고 하더군요.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고 하라’고 그랬지요.”
―배정숙 이형자씨는 국회 청문회와 특검 조사 때 그보다 일주일 전쯤인 1월7, 8일께 조사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특히 배씨의 증언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다른 라인에서 사직동팀을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는 겁니까.
“둘의 주장은 특검에서도 인정이 안 됐잖아요. 그렇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사직동팀만으로 할 수 없어요. 내가 지시했거나 아니면 또다른 어떤 큰 세력이 나 모르게 사직동팀에 한번 알아보라 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 않고선 불가능해요. 왜? 아무리 경찰 조사과 직원이라도 일개 경위·경감이 현직 장관 부인을 멋대로 조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김중권 당시 비서실장에게는 언제 보고한 겁니까.
“1월15일 오전에 최광식 과장에게 지시하고 난 뒤 오후에 보고했지요. 자기도 그 소문을 들었다고 그러더라구요. 내가 ‘이게 사실이면 연정희를 구속해야 한다’고 그랬더니, ‘김총장과 사이가 돈독한 걸로 아는데 구속 얘기가 그렇게 쉽게 나오느냐’며 놀라더군요.”
박씨는 정말 억울해 했다. 한마디로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패장’으로 여기고 있었다.
“제가 보고한 문서가 밖으로 새나가 큰 문제를 야기해 결과적으로 대통령께 누를 끼쳐서 그렇지, 법률적으로 도덕적으로 저는 책임을 질 일이 없습니다. 다만 아무리 최선을 다한 장수라도 패전하면 책임을 지는 것 아닙니까. 그런 책임이라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당시 연정희씨의 쇼핑 내용은 정확히 파악했습니까.
“나, 그 점에 대해 얘기 좀 할게요. 내가 내사를 지시한 사항은 연정희씨의 호화사치 생활이 아니었어요. 첩보에 나온 대로 연씨가 최순영 회장에 대한 선처를 부탁 받고 앙드레김과 라스포사에서 그런 거래를 하고 옷값 대납요구를 했는지, 또 이형자씨가 대납요구에 응하지 않아 연씨가 옷값으로 현금 3500만원을 지불했는지, 그런 사실을 조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앙드레김과 라스포사에 가서 그 사실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만 하면 끝나는 겁니다. 앙드레김에선 옷 2벌을 120만원에 산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대금도 연씨가 수표로 결제했고. 라스포사에선 그런 일이 없다고 했는데, 고객 보호 차원에서 정일순씨가 거짓말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 점을 조사해 보고하면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무슨 나나부티크니 페라가모니 다른 가게까지 돌아다니며 조사를 했더란 말이지. 그건 내가 지시한 사항이 아니란 말이에요. 연씨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그건 조사 대상이 아니었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연씨의 옷 구입 내용을 전부 조사한 저의가 의심스러워요. 이는 경찰과 검찰의 보이지 않는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연씨가 뇌물을 받아먹었다면 또 몰라요. 개인적인 옷구입 내용을 왜 조사합니까. 내가 당시 이런 얘기는 했어요. 무슨 놈의 여자가―난 그때 연씨가 딸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기 때문에―옷을 이렇게 많이 샀다가 또 반납했다가 이 여자가 왜 이러고 다니냐고. 장관 부인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이게 무슨 짓거리냐고 말입니다.
대통령께도 그렇게 보고했습니다. 경고를 줘야겠다고. 그런데 그건 기본적으로 개인의 옷 거래 내용인데다 실제 옷값을 보면 꼭 호화사치라고 단정하기도 어렵고, 샀다가 반납했고, 반납 명목도 공직자 부인으로서 부담이 돼 돌려줬다는데 그걸 뭐라 그럽니까. 내가 문제삼은 건 공직자 부인들이 고급 의상실에 떼거지로 몰려다닌 일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게 더 보기가 싫더라구요. 그리고 돌려주긴 했지만 한달 간 거래 내용이 1500만원 가량 된다는 건 문제였지요. 그 이야기도 최종보고서 올릴 때 대통령께 다 말씀드렸습니다.”
연씨의 옷값이 커진 것은 나나부티크에서 산 400만∼500만원짜리 니트코트와 라스포사의 400만원짜리 호피무늬반코트 때문이다. 나나부티크 옷은 산 지 일주일쯤 뒤에, 라스포사 옷은 20일쯤 뒤에 반납했다. 이 두 벌을 뺀 연씨의 옷값 총액은 앙드레김과 라스포사 것을 합쳐 300만원이 조금 넘는다. 그중 200만원 어치는 상품권(라스포사)으로 구입한 것이다.
연정희를 형수로 부른 적 없다
―대통령도 연씨의 옷구입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까.
“그럼요. 대통령께도 그대로 다 보고했습니다.”
―김태정 연정희씨 부부를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지 않았습니까.
“잘 알지요. 여섯 번이나 같이 근무했는데.”
―사석에선 형님, 형수님이라고 부른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제대로 확인해 보세요. 나는 한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 양반이 술을 먹으면―특수부에 같이 근무한 검사들은 1년에 한두 번씩 만나거든요―후배들에게 ‘야 임마, 형님이라고 불러’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다 형님이라고 불렀어요. 참 나, 형님 형수님이 뭐야. 모시던 상사한테. 난 절대 그렇게 부른 적이 없어요.”
―평소 왕래가 잦지 않았습니까.
“김태정씨 집에 두 번밖에 안 가봤어요. 그러니 부인에 대해선 잘 몰라요. 검찰에 있을 때 나는 그 양반에 대해 야당 구실을 했지요. 그 양반이 술 드시면 말을 막하는 편이거든요. 그러지 말라고 충고했어요. 내가 뭐 생명 바쳐 그 양반 모실 처지는 아니었어요. 좋아하는 선배긴 했지만 존경하는 선배는 아니었습니다.”
―야당 구실이라 하면?
“그 양반이 설화를 많이 입잖아요, 설화. 말을 과격하게 하는 탓에. 내가 그 점에 대해 솔직담백하게 직언을 해댔지요.”
박씨에 대한 사법처리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몇 차례 반전을 거듭하고도 검찰 수뇌부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법처리를 망설였다. 반면 수사팀은 사직동팀의 진술을 앞세워 구속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 과정에 수사팀을 이끌던 이종왕 대검 수사기획관이 사표를 냈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대검 청사를 에워쌌다. 이수사기획관의 사표는 박씨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
―사법처리를 둘러싸고 검찰 수뇌부와 수사팀의 갈등이 심했는데요.
“수사팀 안에서도 의견이 갈렸다고 들었어요. 내가 지금 얘기를 다 못해서 그렇지 할 말이 많아요.”
―인간적으로 김태정씨에게 (내사 사실을) 귀띔해줄 만도 한데요.
“내사에 착수하면서 피내사자에게 귀띔해준다면 내사에 의미가 없습니다. 연씨가 조사를 받던 1월18일(99년) 밤 김총장이 내게 격렬하게 항의했어요. 그후론 연씨를 조사한 적이 없어요. 그날로 중요한 조사가 다 끝났거든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검찰총장이 다치는 건 정권에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총장에게 사전에 알려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것도 미리 막을 수 있거나 적당히 덮을 수 있는 사건인 경우에 한해서지, 도저히 그렇게 안 되는 사건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첩보에 적힌 내용이 이미 세간에 상당히 퍼져 있어 적당히 끝낼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최종보고서를 통해 최순영 회장 구속을 건의했습니다. 이 사실을 당시 김태정 총장에게 알려줬습니까.
“연초부터 검찰쪽에서 최회장을 구속한다는 얘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그래서 ‘대통령 연두순시도 안 끝났는데 좀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해줬어요. 그러다 연정희씨 관련 첩보가 들어왔어요. 첩보 내용을 조사한 후 조치하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김총장이 최종보고서에 최회장에 대한 ‘구속 건의’가 들어간 사실을 알고 최회장을 구속한 것입니까.
“김총장에게 ‘구속 건의’ 부분을 공식적으로 알려준 건 나중에 최종보고서를 건넬 때였어요. 그 전에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최종보고서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한 직후 김총장에게 ‘최회장을 구속한다는데 빨리 처리하는 게 좋겠다’고는 했습니다. 구속하는 게 좋겠다고 말입니다.”
박씨의 말대로라면 청와대와 검찰이 최회장 구속 시기를 조율한 셈이다. 또한 검찰은 청와대의 OK 사인이 날 때까지 기다린 것으로 보인다.
―대질신문 때 최광식 경찰청 조사과장(사직동팀 팀장)이 검사의 협박으로 허위자백했다고 말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정경감(사직동팀 직원)이 검찰에 약점을 잡힌 탓에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소송기술상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최과장이 ‘검사가 협박해 허위자백했다’고 진술했다는 점입니다.”
―검사도 그 얘기를 들었습니까.
“그럼요. 검사와 최과장이 책상을 두고 마주 앉았고, 나는 한쪽 소파에 앉아 있었어요.”
검사가 협박사실 시인
―검사와 마주앉은 자리에서 최과장이 그 얘기를 했다는 겁니까.
“그렇지요. 조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어요. 마주앉은 검사 앞에서.”
―검사의 반응은요?
“아, 시인합디다. 수사기술상 그렇게 했다고.”
―그건 참 중요한 문제인데요.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때 나는 정말 점잖게 대응한 겁니다. 구속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음모’가 있었다고 봅니까.
“몇 가지 짚이는 데가 있지만 소송기술상 문제니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직동팀의 문건이 외부로 도저히 유출될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왜 불가능합니까. 누군가 작성해 바깥사람에게 갖다주면 그만인데.”
―검찰 주변에선 사직동팀과 검찰의 모 부서가 평소 정보교류를 한다는 얘기가 들리던데요.
“잘은 모르지만 정보 장사를 많이 한답디다. 사직동팀의 조사내용이 나를 통해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논리적으로 그게 인정된다면 당연히 내가 책임져야지요. 그걸 부인하면 나는 나쁜 놈이지, 이렇게 부인만 하고 있으니. 그러나 나를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빠져나갈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최과장이 나한테 보고했다는 주장은 정황에 비춰 너무 안 맞아요. 검사에게 이런 문제를 조사해달라고 요구하면 조사를 안 해요. 진술 자체를 받으려 하지도 않고. 내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아요.”
―검사들이 혐의사실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았습니까.
“제가 구속 전에 말했잖아요. ‘편견과 선입견의 늪이 이렇게 깊은 줄 몰랐다’고요.”
―고의성이 있었다는 겁니까. 아니면 잘못 알고 그랬다는 겁니까.
“두 가지 다예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처음 출두하는 날 바로 피의자 진술서를 받자고 하더라구요. 무슨 근거로 나한테 피의자 진술을 받습니까. 처음 조사 받으러 간 날인데.”
―놀랐겠습니다.
“놀랐지요. 피의자 조서는 못 받겠다고 거부했지요.”
박씨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 놈의 소설이 어디 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옷사건 내사 당시 터졌던 대전법조비리 사건을 들먹이며 방향을 그쪽으로 몰고 가더라구요. 그 사건으로 김총장의 검찰 내 입지가 약화됐는데 부인이 관련된 사건까지 터지면 곤란해질까봐 미리 대비하라는 뜻에서 내가 최초문건을 건네줬다는 겁니다. 그걸 대전 사건에 연관시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데 공소장엔 그렇게 돼 있어요. 내가 김총장에게 언제 어떻게 줬는지에 대해선 전혀 설명도 없으면서.”
―그 말대로라면 비애를 느꼈을 법한데요.
“검사가 정말 무섭다는 걸 느꼈습니다. 취사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나중에 진실이 어떻게 밝혀지든….”
박씨에 대한 검찰 안팎의 평은 비교적 좋은 편이다. 검찰에 있을 때 그는 특수수사통으로 이름을 날렸다. 호남 출신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출세 코스를 달렸다. 청렴과 강직의 이미지로 선후배 검사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그런데 그 모든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에게 ‘권력의 옷‘은 생래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신이 내게 가혹한 운명을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의 속성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검찰이 제대로 판단했다면, 그런 일이 없었겠지요. 재벌의 거대한 음모가 있었는데 검찰이 제대로 밝히지도 못하고 여론에 휘둘려 검찰권을 바르게 행사하지도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