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벼랑끝 기사회생 ‘JP 정치’의 괴력

  • 이철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1-24 14: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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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권력자부터 핍박당하고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비상을 꿈꾸고 묘한 즐거움을 누리는 일종의 정치적 마조히스트다. 4·13총선을 향한 출발점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JP에게 시민단체의 낙천운동은 되레 포도당 주사같은 영양제 역할을 했다.》
    “시민단체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총선시민연대가 공천반대인사 리스트에 자민련 김종필(金鍾泌·JP) 명예총재를 포함시켜 ‘명예로운 정계은퇴’까지 권고한 것을 두고 당장 정치권에서 나온 말들이다. 물론 JP를 빼놓고 한국의 부패정치 척결을 얘기하고 낙천 낙선운동을 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는 시민단체의 충정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국정치는 누구도 예상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럭비공처럼 튀어가는 ‘불가측성’이 무시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특성인 것을….

    한때 정치적 생명이 거의 끝난 것처럼 보이던 JP였다. 국무총리 자리에 있는 동안 JP는 내각제개헌 유보, 합당론 갈팡질팡 등으로 정치적 위상이 더 내려갈 데가 없을 정도로 추락한 상태였다. 충청권에서마저 “이젠 JP도 한물 갔다”는 분위기라고 자민련 의원들이 한결같이 푸념하던 JP였다. 그런 JP가 시민단체의 ‘정계은퇴 권고’를 받은 것을 계기로 오히려 기사회생, 충청권과 보수층에서 무시하지 못할 정치적 기반을 재확인하게 될 줄 과연 누가 예측했겠는가.

    자민련이 전국적으로 번져가는 낙천 낙선운동에 대해 여권핵심과 시민단체의 ‘JP 죽이기 음모론’을 제기하고 급기야 ‘헌정질서 파괴책동 분쇄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어 기세를 올린 뒤 충청권 의원들은 금새 희색이 만연했다. “이런 기세라면 충청도 총선은 다 끝났다. 빨리 선거를 치렀으면 좋겠다”며 오히려 표정관리에 신경쓰는 기색이었다. 불과 며칠만에 충청권 민심이 거세게 요동친 것이었다. 만일 이런 정치적 파급효과를 JP가 사전에 충분히 예측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라면 JP는 과연 ‘정치 9단’임에 틀림없다.

    이같은 충청권 민심의 격동은 ‘3김(金)구도’라는 복잡 미묘한 함수관계 속에서 JP가 차지하는 위상이 낳은 한국정치의 그로테스크한 일면으로 볼 수 있다. 권력으로부터 참기 어려운 모욕을 당하고 그래서 텃밭 주민들의 동정을 사 정치적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는 한국정치의 해묵은 풍토에다 JP라는 인물이 가진 묘한 신비감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일종의 ‘JP 신드롬‘인 것이다.

    40년의 정치적 영욕을 지닌 JP는 그런 기묘한 한국정치의 생리에 누구보다 익숙해있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JP는 권력자로부터 핍박 당하고 모욕 당하면서 새로운 비상을 꿈꾸고 그러면서 묘한 즐거움을 누리는 일종의 ‘정치적 마조히스트’라고 얘기한다면 너무 심한 말일까.



    ‘5·16 군사쿠데타, 공화당 창당 때 4대 의혹사건, 80년 부정축재…’. 1월24일 시민연대측이 제시한 정계은퇴 권고 사유들은 JP에겐 죽을 때까지 따라붙을 ‘업보(業報)’나 다름없는 역사적인 사건들이다. JP도 늘상 자신에 대한 평가를 훗날의 역사가에 돌리려고 애를 써왔다. “어제의 공과(功過)에 대해선 역사가 판단해줄 문제”라는 게 JP의 지론.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뻔뻔함과 함께 과오에 대한 미안함도 다소나마 표시해온 JP였던 것이다.

    날아온 화살을 청와대로 돌리다

    95년 말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두 전직대통령을 감옥에 가둔 이른바 ‘5·18 특별법’에 대해 JP와 자민련은 “소급입법에 의한 헌정질서 파괴”라며 헌정질서 수호를 외쳤다. 그러니 당연히 JP의 ‘5.16 헌정파괴’ 전력(前歷)을 문제삼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JP의 반응은 이랬다.

    “그래, 내가 그걸(헌정파괴를) 해봤으니까 (헌정파괴를) 해서는 안된다는 거야.”

    JP는 평소 국민들의 ‘정치불신’이 극에 달했다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국민이 정치를 모욕하면 결국 국민이 정치로부터 모욕당하고 만다”고 말해왔다. 40년 정치역정을 거친 노정치인다운, 어쩌면 마치 자신이 직면하게 될 처지를 미리 예견하기라도 한 듯한 발언이었다. 작용과 반작용, 혁명과 반혁명…, 역사는 그렇게 움직인다는 ‘풍운의 정치인’다운 역사인식인 셈이다.

    JP는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낙천자 명단이 발표되자마자 곧바로 ‘음모론’을 제기, 화살을 청와대와 민주당 쪽에 돌렸다. 물론 ‘음모론’의 시작은 JP와 자민련의 생존전략 성격이 강했다. 자신을 포함해 자민련 내 고위당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포함돼 “자민련 사람으로 명단에 못끼면 팔불출”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의 상황에서 더 이상 물러설 데도 없었다. 따라서 이건개(李健介) 의원 등이 제시했다는 시민단체와 여권핵심의 ‘커넥션’에 대한 정황증거만으로 공세를 시작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있다는 소식에 JP는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하긴 이보다 더한 일도 견뎌왔는데…”라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에게 창끝을 겨눈 세력이 여권핵심이라는 ‘의구심’이 들자 거침없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자민련이 곧바로 김성재(金聖在) 청와대정책기획수석과 이재정(李在禎) 민주당 정책위의장의 실명을 거론하며 ‘치밀한 각본극’이라고 단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민련은 또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빚어낸 작금의 정치상황을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비유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해 홍위병을 동원, 살벌한 숙청의 칼날을 휘둘렀던 세월에 현 상황을 빗대 ‘JP 죽이기’ 시나리오라고 치고 나간 것이다.

    사실 자민련도 어렴풋이나마 이같은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나름의 공격 수순을 밟고 있던 참이었다. 자민련 이양희(李良熙) 대변인은 공천반대명단 발표 전날인 23일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이 시민단체의 정치활동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을 두고 “초법적 인치(人治)”라고 공격했다. 그 이전부터 국민회의가 새천년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꿔달면서 새 정당의 정강정책에 DJP합의의 핵심인 내각제문제를 제외한 데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해온 자민련이었지만 이처럼 DJ를 직접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심상찮은 대목이었다.

    동상이몽으로 끝난 DJP 합당 협상

    내각제는 언제부턴가 JP와 자민련에게 ‘존재의 이유’처럼 돼버렸다. 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만들어낸 DJP 후보단일화의 최대 전제조건 역시 내각제였다. 그런 내각제가 철썩같이 믿어온 상대방에 의해 휴지조각처럼 인식되는 데 대해 자민련은 극도의 불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말로는 하겠다면서 문서로는 안된다니 말이 되느냐”는 JP의 격한 분노에는 이처럼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지난해 내각제개헌 추진은 상황적 한계 때문에 유보했지만 이로 인해 JP는 너무도 큰 상처를 감수해야 했다. 자신의 최측근인 김용환(金龍煥) 의원은 ‘반(反)JP’ 기치를 내걸고 충청권에 반역(叛逆)의 둥지를 트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렇지만 JP는 DJ로부터 ‘약속은 유효하다’는 다짐을 받아뒀기에 이를 토대로 내각제 재추진을 내걸고 총선에 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유효기간이 지났는데…’라는 비아냥을 사게 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JP로선 당연히 공동정부를 유지하는 것 자체에 깊은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2여(與)합당 무산이 있었다. 합당 무산은 이런 갈등의 ‘예고편’이었다. 지난해 7월17일 DJP의 워커힐호텔 회동 이후 합당이냐 아니냐를 놓고 JP는 거듭 고민해왔다. 지난해 말 남미 순방 이후 ‘합당 불가’로 최종 입장을 결정할 때까지 JP는 갈피를 못잡고 계속 흔들렸던 게 사실이다. 측근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JP는 내심 합당을 무척 기대했었다고 한다. 수개월 동안 계속된 합당논란 속에서도 분명한 입장 천명을 유보하면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던 이유는 합당 후 자신의 위상 문제 때문이었고 JP가 바랐던 자리는 통합신당의 ‘명실상부한 총재직’이었다.

    집권당 총재 자리는 JP로선 비록 위험부담이 없지 않지만 내각제 실현과 초대 내각제총리 등 JP의 정치적 야심을 매우 수월하게 실현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물론 ‘JP 신당총재’ 얘기는 DJ쪽에서 먼저 나왔다. 하지만 동상이몽이었다. JP는 DJ의 2선후퇴를 전제로 한 ‘실질적 총재’를 원했고 DJ는 생각이 달랐다. 다음은 당시 DJP간 물밑협상 라인에 있던 한 JP 측근의 증언.

    “새로운 당에 JP가 총재로 착근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DJ는 ‘나는 통치만 하지 정치는 않는다. JP가 모든 것을 책임져달라’는 선언을 해야 하고 JP도 ‘나는 대권에는 욕심이 없다. 후진 양성에만 노력하겠다’고 호응하는 절차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DJ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는 모습 자체도 국민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JP에 대해서는 공천을 앞두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태도도 보였다고 한다. 동교동 핵심인사가 어느날 청와대에 들어가 DJ에게 ‘DJ명예총재, JP총재’안을 은근히 떠봤더니 DJ는 그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JP는 이 얘기를 전해듣고 ‘DJ 생각은 다른 데 있다’고 최종 판단을 내린 것이다.”

    정치판 만큼이나 관성(慣性)의 법칙이 크게 작용하는 곳도 드물다고 한다. 70대의 노정객들인 3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들 사이에 한번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이를 ‘봉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DJ나 YS 양김이 내지른 발길은 영남 호남에선 거센 소용돌이를 몰고 태풍이 되어 서울로 올라오기 일쑤였다. 물론 JP의 경우도 다소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다.

    분연히 일어선 굴신의 정객

    한번 벌어진 틈새는 JP가 합당불가 방침을 밝히고 총리직을 떠나면서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JP는 총리직을 떠나기 전부터 “당으로 돌아가면 할 소리 제대로 할 것”이라고 예고해왔다. 또 “우리 사회가 너무 왼쪽으로 기울어간다”며 전주곡을 울려댔다. JP는 총리라는 자리에 있기에 내지 못했던 보수의 목소리를 토대로 4월 총선에서 ‘진검 승부’를 펴겠다는 의지를 굳혀갔던 것이다. 더욱이 JP는 ‘보수(保守)의 전사’ 이한동(李漢東) 의원을 자민련 총재로 영입, 자신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렴청정 구상’에 매료돼 있었다.

    이런 와중에 전개된 민주당의 내각제 강령 배제, 그리고 서서히 구체화되는 여권의 ‘개혁 드라이브’와 시민단체의 심상찮은 움직임…. JP로선 당연히 의심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특히 DJ가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고 설마 설마하던 낙천대상에 자신을 비롯한 자민련 인사가 대거 포함되면서 JP는 더 이상 민주당과 함께 가기 어렵다는 판단을 굳힌 것이다. 공동정권 내의 ‘곁방신세’를 한탄해온 자민련 입장에서 이같은 상황 전개는 고사(枯死) 직전의 위기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JP는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2월8일 일본 외유를 마치고 귀국하면서도 “일본의 베스트셀러 ‘마오쩌둥 비록’을 읽어보라”고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그러나 이 한마디는 백마디 욕설보다 무서운 말이었다. 중국 문화혁명의 최대 정치적 희생자였던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에 자신의 정치적 처지를 투영시킨 것이다. 류사오치는 마오쩌둥과 함께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혁명동지였으나 그후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實權派)’로 낙인찍혀 마오쩌둥이 조종하는 홍위병에 의해 조롱당한 뒤 숙청된 인물. 홍위병들에게 몰매를 맞고 온갖 수모를 당한 뒤 2년여만에 비명횡사했던 류사오치의 가련한 운명을 자신에게 오버랩시킨 것이라면 JP의 진로는 분명해진 것이었다.

    JP는 일본 도착 직후 후쿠오카 총영사로부터 이 책을 선물받아 외유 내내 이 책을 끼고 있었고 외유 마지막날에는 오사카의 호텔 방에서 밤 늦게 수행원들과 술을 한 잔 마신 뒤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JP를 수행했던 한 의원은 “JP가 문혁 당시 ‘혼란스러울수록 더욱 좋다’던 마오쩌둥의 말을 인용하며 지금의 혼란스런 정치현실을 개탄했다”고 전했다. JP는 또 “마오쩌둥이 빨리 죽었기에 망정이지 오래 살았다면 큰 일이 났을 것”이라고 듣기에 따라선 퍼런 독기(毒氣)가 서린 듯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이같은 JP의 상황인식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JP 측근들은 한결같이 94년 말부터 95년 초까지, 즉 JP가 민자당 대표직에서 사실상 ‘용도폐기’돼 탈당하고 자민련을 창당하던 시절을 연상시킨다. 요즘의 수상한 나날은 최형우(崔炯佑) 의원을 중심으로 한 민주계 인사들이 ‘당의 세계화’라는 명목 아래 JP를 축출하려던 당시 상황과 공교롭게도 맞아떨어지는 대목이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의 JP는 마치 시나리오에 의해 움직이는 듯한 민주계의 집요한 ‘목죄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무려 2개월여 동안 ‘분노’와 ‘침묵’을 번갈아 연출하다 결국 신당 창당을 결행했다. 평소 “어찌 연작(燕雀·제비와 참새)이 홍곡(鴻鵠·큰 기러기와 고니)의 큰 뜻을 알겠느냐”며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을 깎듯이 모셨던 JP지만 일단 자신의 정치적 생존 문제가 걸리자 과감하게 ‘저항’으로 살 길을 찾아냈다.

    ‘순응의 정치인’ ‘굴신의 정객’이었던 JP가 분연히 YS를 맹공격하면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민련을 만들어낸 것이다. 불과 5명의 현역의원으로 자민련을 창당한 JP는 95년 6·27 지방선거에서 충청권 3곳과 강원 등 모두 4곳의 광역자치단체장을 얻어냈고 96년 4·11총선에서는 충청권 석권에다 영남권 교두보 확보로 당당히 50석을 확보한 명실공히 ‘JP당’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지의 상황만을 보면 JP는 5년 전에 걸었던 길 그대로 답습하는 듯한 느낌이다. JP는 요즘 사석에서 측근들에게 “거기(청와대) 들어가서 몇 년 되면 다 그러는 모양이다”며 DJ를 YS와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고 한다.

    그러나 JP는 2여관계의 본질적인 변화, 즉 공조 파기 여부에 대해선 애써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2여공조는 끝났다’는 선언 없이 “두 당 사이에 상당한 괴리(乖離)가 생겼다”는 식의 어정쩡한 어법일 뿐이고, 시종 한걸음 뒤에 물러서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여차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태도로 이한동 총재와 김현욱(金顯煜) 사무총장 등 당의 전사(戰士)들에게 싸움을 맡기고 있다.

    절대 앞에 나서지 않고 ‘2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JP. 막후에서 전투를 독려하면서도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으려는 JP의 태도. 이 때문에 민주당이나 청와대측은 2여공조가 사실상 붕괴됐음에도 “자민련의 ‘음모론’ 등 일련의 대응은 JP의 철저한 ‘총선전략’이며 JP는 절대 DJ와 갈라서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여권 관계자의 시각은 이렇다. “JP 입에서 무슨 음모니 커넥션이니 하는 얘기가 있었느냐면 그건 아니다. 또 JP가 공조 파기를 선언했느냐 하면 이것도 아니다. JP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U턴’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며 절대 그 가능성을 봉쇄할 사람도 아니다. JP의 U턴은 빠르면 총선 과정에서, 늦어진다면 총선 이후에 반드시 있을 것이다.”

    DJP와 ‘이인제 딜레마’

    이같은 분석은 꽤 설득력을 지닌다. DJP의 관계나 JP가 품고 있을 향후 정치적 계산을 냉정하게 고려해보면 더욱 그렇다. JP는 3김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다. 정치적 야심을 아직 실현해보지 못한…. 그러나 대통령은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충청도라는, 인구가 적은 지역 태생이라는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내각제다. 그러나 내각제는 절대 다수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되지 않는다. 여러 정파들 간의 합의 또는 최소한의 묵인이 이뤄져야 한다.

    아무리 DJ에 대해 배신의 감정을 느낀다 할지라도 DJ가 약속 파기선언을 하지 않는 이상 JP로선 DJ를 계속 ‘과거의 약속’에 묶어둬야 한다. 계속 DJ쪽에 압력을 행사하면서도 절대 파경에는 이르지 않도록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내각제 실현을 위해 중요한 것은 문서상의 약속이 아니라 정치지도자의 결단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JP다. 이미 DJ는 내각제 개헌을 약속했고 지금껏 유효하다고 말해왔다. 또한 DJ 역시 임기말엔 내각제로 개헌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게 아직까지 JP쪽의 판단이다.

    DJ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 DJ가 내각제를 신당의 강령에서 배제했지만 이는 선거를 앞두고 표를 의식한 것일 뿐이며 약속은 분명하게 승계된다는 사실을 JP쪽에 확실히 전달하고 있다. 그동안 ‘거짓말쟁이’라는 평가에 시달려온 DJ다. 그는 “약속은 분명히 지킨다. 또 거짓말했다는 소리를 듣고 정치를 끝내고 싶지 않다”고 얘기해왔다. 더욱이 JP 없이는 버텨내기 힘든 ‘마이너리티 정권’이라는 점도 DJ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정치적 현실이다.

    이처럼 내각제 문제를 둘러싼 DJP 사이의 이해관계는 이번 총선을 계기로 충돌했다 총선 이후엔 다시 접점을 찾아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장 총선이다. 총선에서 DJP가 충돌하는 지점에는 이른바 ‘이인제(李仁濟) 딜레마’ 등 수많은 문제들이 놓여 있다. 우선 민주당 이인제 선대위원장은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500만표를 얻은 위력 이외에도 당내 차세대주자라는 상징성 자체가 보유한 득표력이 DJ에겐 포기하기 힘든 카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JP에겐 충청권 출신인데다 내각제를 극력 반대하면서 대권만을 노리는 ‘아기호랑이’인 이위원장이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다.

    이위원장에겐 DJ나 JP나 넘어서야 할 존재이고 먼저 상대해야 할 인물은 물론 JP라는 인식이다. 따라서 당장 이인제로 인한 양당의 파열음은 그치지 않을 것이고 이미 그 전조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위원장의 논산 금산 출마선언은 당장 자민련에겐 전면전 선포로 들려 거센 반격에 나서고 있는 게 양당에 놓인 피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행동보다 말로, 말보다 침묵으로

    이번 총선은 DJ나 JP 모두에게 ‘마지막 도박’이다. 두 사람 모두 너무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고 서로의 처지를 이심전심으로 잘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총선 과정에서는 이런 상황을 내심 즐기면서 갈라서지도, 그렇다고 다시 가까워지지도 않는 적정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물론 상황전개에 따라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총선은 JP에겐 매우 중요한 ‘연기력의 시험대’일지 모른다. DJ의 집요한 구애를 때론 미소로, 때론 냉소로 적절하게 이끌어가면서 충청권에선 “JP가 변심했다”는 소리가 안나오게, 또다른 일각에선 “그래도 다시 한번…”이라는 소리가 나오도록 적절히 밀고당기는 정교한 ‘줄타기’ 수완을 발휘할 때인 것이다.

    JP는 40년 정치역정에서 누구보다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5·16의 ‘기획자’로서 화려하게 정치에 입문한 이래 JP는 잇딴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半) 외유’부터 두 차례의 정계은퇴, 87년 신민주공화당 창당, 3당 합당과 탈당,그리고 자민련 창당에 이르기까지 넘어지고 꼬꾸라진 뒤엔 반드시 더욱 강력한 기세로 재기하는 ‘부도옹(不倒翁)’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왔다.

    이 과정에서 그의 탁월한 연기력은 큰 역할을 했다. 외부에 비치는 JP는 항상 운치있고 상황에 맞는 절묘한 말을 가려서 하는 ‘정치언어의 마술사’다. 직설법이라곤 절대 없다. 항상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비난인지 비아냥인지 칭찬인지 알듯 모를 듯한 말을 하곤 입을 닫아버린다. 그러나 그의 몇마디에 함축된 의미를 찾기 위해 기자들과 정치권 호사가들은 이리저리 온갖 소설들을 다 만들어내곤 했다.

    이런 절제된 언어미학은 JP의 천부적 재주인 듯하다. JP는 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핫바지’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핫바지라는 게 앞뒤가 없는 그런 바지를 말하는데 누군가 충청도를 두고 핫바지라고 했답디다. 충청도가 핫바지입니까? 그런 얘길 듣고 참을 수 있습니까.” 이처럼 JP는 당시 민자당 김윤환(金潤煥) 의원의 말이 왜곡돼서 지방지에 보도된 ‘핫바지’ 발언을 그대로 선거에 이용하는 탁월한 재주를 발휘했고 그 선거를 대단한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가까이서 JP를 모시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JP만큼 직설적이고 감정의 기복이 많은 사람도 없다고 한다. 70대 노인네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JP만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도 드물다는 게 측근들의 얘기다. 워낙 즉흥적인 구석이 많아서 아침 기상과 저녁 기상이 수시로 바뀐다고도 한다. 하지만 대외적으론 항상 필요한 말 이외엔 나가선 안된다는 게 JP를 보필하는 측근들의 철칙이다. JP의 공보담당이 항상 아침마다 면박을 당하는 이유도 간혹 측근들이 흘린 자신의 말이 신문에 보도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면 ‘행동보다는 말로, 말보다는 침묵으로 정치하는 JP 스타일’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모호하고 불투명한 ‘여백의 정치’

    얼마전 JP는 충청권 의원들과 만찬을 함께 한 자리에서 DJ의 ‘진사(陳謝) 사절’로 청구동 자택을 찾은 한광옥(韓光玉)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해줬다는 말을 그대로 전달한 적이 있다. 당시 참석자들은 JP가 “공동정부라면 6대4 정도는 돼야 하는데 8을 갖고 2도 안주려고 한다. 그러고도 공동정부라 할 수 있는가”라고 했다는 것. 이 말은 당시 현안이 되고 있던 2여 간의 수도권 연합공천 얘기로 들렸고 이 자리에서 강창희(姜昌熙) 의원은 JP가 못미더워 “2여공조는 끝났다고 아예 선언을 하십시오”라고 건의까지 했다고 한다.

    이같은 대화 내용이 이튿날 일부 언론보도에 ‘JP, 연합공천 지분보장 40% 요구’라는 타이틀로 나갔다. 이에 대한 JP의 반응은 “그런 소린 나오지도 않았는데 어떤 놈이 그런 걸 썼어”라는 역정이었다. 아예 딱 잡아 떼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구상한 정치행보에서 벗어나는, 즉 ‘연기 이외의 숨기고 싶은 진면모’를 JP는 쉽게 가려버린다. JP는 기자간담회를 해도 항상 “절대 해석같은 것 붙이지 말라. 말 한대로만 써달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해석을 증폭시키고 그걸 즐기는 인상이다.

    JP의 진면모야 어떻든 외부로 드러나는 JP의 언사엔 항상 어떤 ‘마력’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JP의 침묵과 여유는 ‘여백의 정치’ ‘기다림의 정치’로 미화되기도 한다. JP는 이처럼 모호하고 불투명한 정치에 익숙해 있다. 이는 물론 평생을 권력 주변에서 ‘만년 2인자’로서 살아온 JP의 길들여진 처신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60년대 말 정도의 일인 듯하다. 한때 JP와 가까웠던 한 언론계 출신 정치인이 전하는 일화의 한 대목이다. 당시 JP는 이른바 ‘반(反)김 라인’ 사람들의 견제를 받았고 청구동에 처박혀 그림만 그리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어느날 청구동엘 들러 JP와 한참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손님이 온 기색을 보이자 JP는 갑자기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옷을 꺼내 입고 손에도 물감을 묻히더니 응접실에 나가더라는 것이다. 그런 JP의 태도가 어찌나 자연스러우면서 천연덕스러운지 JP를 잘 안다는 그 사람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JP는 4·13 총선을 향해 힘찬 진군을 시작했다. 출발점을 몰라 방황하던 JP에게 시민단체가 그 출발점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격이 됐고 JP 주변과 자민련은 정계은퇴 권고라는 사망선고를 받고도 오히려 포도당 주사라도 맞은 것처럼 활기에 차있는 느낌이다.

    물론 JP는 분노와 우울을 가장한 ‘순교자’같은 표정을 풀지 않고 있지만…. 총선을 코앞에 두고 JP의 또다른 도약의 몸짓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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