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거일씨는 2년 전 우리 사회에서 ‘영어 공용화론’을 처음으로 제기한 인물이다. “관공서의 공문서 등 일상생활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공용하게 하자”는 그의 주장은 당시 엄청난 파장과 논란을 일으켰고, 그 후 여러 언론매체가 ‘영어 공용화론’을 다루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문제와 관련된 논쟁을 살펴보면, 논쟁 초기에 제기됐던 찬성과 반대의 논리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계속 반복돼 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로부터 2년 후, 그가 좀 더 강고한 논리로 무장하고 다시 한번 영어 공용화론을 들고 나왔다. <편집자>》
얼마 전 일본의 총리 자문기구가 일본 사람들의 부족한 영어 실력이 큰 문제임을 지적하면서 영어를 제2공용어로 삼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일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큰 반향을 낳았다. 김대중 대통령도 일본의 이런 정책에서 배울 점이 크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영어 공용에 관한 논의는 실은 두 해 전에 우리 사회에서 먼저 시작했다. 영어 공용을 주장한 필자의 졸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가 나오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논의에 참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 우리 정부는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이제 김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나타낸 터라,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일은 상당한 운동량을 얻은 셈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일은 우리의 언어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올 터이므로 더할 나위 없이 중대한 사업이다. 당연히 그것은 시민들 사이의 합의를 바탕으로 추진돼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 사이의 합의는 진지한 논의들을 통해서야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영어 공용에 관해서는 진지한 논의가 무척 어렵다. 무엇보다도 영어 공용은 민족주의와 부딪치는 주장이기 때문에, 그런 논의에는 어쩔 수 없이 민족주의적 감정이 끼어들게 된다. 우리 사회처럼 민족주의가 거센 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차분한 논의를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다행히 지난 두 해 동안 그런 감정적 태도는 많이 누그러져서 이제는 비교적 차분한 논의들이 나오고 있다.
또 하나 논의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영어 공용이 무척 크고 복잡한 사업이며 자연히 생산적 논의를 위해서는 참가자들이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지식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상식에 바탕을 둔 논의에선 상투적 주장들만 어지럽게 나오고 얘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따라서 영어 공용에 관한 논의를 위해서는 국제어가 등장하는 까닭과 과정, 국제어에서 영어의 위치, 민족어들의 앞날과 같은 주제들을 먼저 살피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정보전달 수단과 망(network)
국제어가 나타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언어가 다른 정보전달 수단들과 마찬가지로 망(network)을 이룬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사용자가 한 사람일 때 정보전달 수단들은 별로 쓸모가 없다. 전보든, 전화든, 팩스든, 사용자가 적어도 둘은 돼야 비로소 쓸모가 생긴다. 사용자가 늘어날수록 물론 정보전달 수단의 가치는 커진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게 되면 망이 구성돼 사회의 신경조직 노릇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어떤 정보전달 수단의 가치는 그것이 망을 이룰 때에 비로소 제대로 드러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정보전달 수단의 가치는 사용자의 수보다 훨씬 빠르게 커진다는 점이다. 전화나 텔레비전의 가치가 커진 것을 돌이켜 보면 이 점이 이내 드러난다. 전화나 텔레비전을 가진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들 없이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제 전화나 텔레비전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불편을 겪는 것이 아니라 삶에 필수적인 정보들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망을 이룬 정보전달 수단이 지닌 가치는 무척 빠르게 커진다. ‘메트카프의 법칙 (Metcalfe’s Law)’에 따르면, 사용자에 대한 효용으로 정의되는 망의 가치는 대체로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 법칙은 전산통신망에서 널리 쓰이는 ‘에더넷 표준(Ethernet Standard)’을 창안한 봅 메트카프(Bob Metcalfe)가 처음 주장했다. 과학평론가 조지 길더가 주장한 ‘정보우주의 법칙(Law of Telecosm)’에 따르면 전산기의 가격 대비 성능은 망에 연결된 전산기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 따라서 비록 망의 가치가 꼭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해서 늘어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용자 수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3. 국제어라는 표준
언어는 그런 사정을 특히 또렷이 보여준다. 아주 적은 사람들이 쓸 때, 한 언어의 가치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점점 많은 사람들이 쓰게 되면서 그것의 가치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 그것은 점점 정보전달에 좋은 상태로 진화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쓰는 언어는 큰 사회를 가능하게 하고, 문명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엔 여러 언어가 동시에 존재하므로 실제 상황은 좀 복잡하다. 단 하나의 언어가 표준인 국제어로 쓰이는 대신에 여러 언어들이 공존하므로, 이 세상에는 하나의 커다란 언어망 대신에 작은 언어망이 여러개 공존한다. 자연히 메트카프의 법칙이 가리키는 망의 이점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그렇게 국제어가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손실은 무척 크므로 여러 언어 대신에 하나의 국제어를 통용시키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나온다. 그러나 그런 표준화의 이익이 모든 사람에게 고루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국제어로 선택된 언어를 이미 써온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큰 이익을 본다. 자연히 언어들은 국제어라는 표준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러면 공존하는 여러 언어 가운데 어떤 언어가 표준으로 선택되는가? 이 문제를 살펴볼 때에도 ‘메트카프의 법칙’은 좋은 지침이 된다. 어떤 망의 가치는 그것을 쓰는 사람들 수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다른 언어보다 쓰는 사람이 많은 언어는 점점 더 우세해진다. 그리고 우세한 언어를 쓰는 것이 유리하므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그것을 쓰게 돼 호순환이 나온다.
어떤 이유로 한번 표준으로 선택된 것은 다른 것들에 비해서 대단히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경제학자들이 ‘망 경제(network economy)’라고 부르는 현상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미 표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가장 나은 것은 아니더라도 번창하게 마련이다.
고전적 예는 철도의 궤간(軌間)이다. 19세기 초엽 영국에서 증기기관차를 이용한 철도수송이 막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수립했던 표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궤간의 표준이었다. 당시 철도 발전을 주도한 조지 스티븐슨은 타인사이드의 탄전에서 말이 끄는 철도를 이용해서 실험을 했는데, 그는 그 철도의 궤간인 4피트 8과 1/2 인치를 그대로 답습했다. 당시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이 7피트의 광궤를 완성했고 그것이 더 효율적임을 증명했지만 이미 깔린 철도를 이용한 스티븐슨의 궤간이 표준으로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래서 영국 탄전의 말이 끄는 철도의 궤간 규격은 증기기관차를 이용하는 철도에서도 세계적 표준이 됐다.
또 하나 널리 알려진 예는 타자기의 자판이다. ‘QWERTY 체계’라고 불리는 현행 자판은 원래 19세기 중엽에 타자봉들이 서로 얽히는 현상을 줄이는 데에 무게를 두고 설계됐다. 그런데 그것은 배우기가 쉽지 않고 속도도 느리다. 그래서 개량된 자판이 속속 나왔지만 사람들이 이미 QWERTY 체계를 쓴다는 사정 때문에, 새로운 체계를 쓰려는 사람이 없어서, 개혁의 시도들은 번번이 실패했다.
기술이 점점 빠르게 발전하면서 근년에는 그런 예들이 훨씬 자주 나왔다. 잘 알려진 예는 전산기다. 소비자들은 모두 표준에 맞게 만들어진 기계와 운영체계를 찾았다. 그것에 맞는 프로그램이 많이 있을 터이고 다른 기계들과 잘 연결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 시장에 나와 표준의 자리를 차지한 것들은 기계든 운영체계든 호순환의 덕을 입었고 독점적 이익을 누렸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전산기 운영체계인 DOS와 윈도스(Windows)는 대표적 예들이다.
4. 지금의 국제어는 영어다
역사적으로 국제어들은 모두 제국의 출현에 힘입었다. 제국의 성립은 잠재적 망 경제의 크기를 단숨에 늘리며, 제국은 그런 잠재적 이익을 실현할 의욕과 능력을 갖춘 정치체제다. 아람어, 한문,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는 제국의 성립에 힘입어 국제어가 된 대표적 예들이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는 언어들은 그것이 나타나고 진화한 역사적 배경 덕분에 모두 나름의 특질을 지닌다. 자연히 그것들은 예외없이 국제어로는 바람직하지 못한 특질을 여럿 지니게 마련이다. 그래서 근대에는 국제어를 일부러 만들려는 시도가 여러 번 나왔다. 에스페란토어가 대표적 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인공어(artificial language)들은 널리 쓰이지 못했다. 망 경제의 이점을 누릴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제어에 필요한 장점을 아무리 많이 갖추었더라도 당장 배워서 쓸 데가 없으므로 인공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은 아주 적을 수밖에 없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이미 상당한 기반을 가진 언어 가운데 어떤 이유들로 인해서 임계 질량을 넘은 언어가 국제어의 자리를 차지하게 마련이다.
현대에는 19세기 영국 중심의 평화(Pax Britannica)와 20세기 미국 중심의 평화(Pax Americana) 덕분에 영어가 그런 임계 질량을 얻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영어는 국제어의 자리를 차지했고 이제는 망 경제의 이익을 제대로 누리고 있다. 물론 그런 이익은 앞으로 점점 커질 것이고, 영어는 국제어로서 자리를 더욱 굳힐 것이다.
특히 큰 뜻을 지닌 사실은, 지금 거의 모든 지적 산물이 영어로 쓰이거나 번역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영어로 번역되기 전에는 어떤 저작도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근년에 인터넷이 중요한 통신 경로로 자리잡으면서 이런 추세는 더욱 심해졌다. 현재 세계의 전산기들에 저장된 정보의 80%는 영어로 수록돼 있고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정보의 70% 내지 80%가 영어로 표현돼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정보들 가운데 과학적 주제들은 거의 모두 영어로 표현돼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이 사실은 영어의 앞날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영어의 득세로 다른 민족어들과 그것을 쓰는 사회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이것은 무척 중요하고 그만큼 논쟁적인 주제다. 분명한 것은 영어의 득세가 불러올 영향이 무척 크리라는 점이다.
단기적으로는 민족어들이 영어에 점점 깊이 침윤될 것이다. 지금 영어의 침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민족어는 없다. 영어의 득세와 침윤에 가장 거세게 반발하고 국가적 대응책을 강구해온 프랑스조차 자신의 민족어를 지키는 데에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거의 포기한 상태다.
중기적으로는 거의 모든 사회들에서 영어와 민족어가 공존해서 시민들이 둘을 함께 쓰는 상태(bilingual)가 될 것이다. 인도, 필리핀, 싱가포르와 같은 나라들이 이미 그런 상태다.
궁극적으로는 영어가 단 하나의 국제어로서 거의 모든 부문에서 쓰일 것이다. 영어의 그런 융성은 당연히 민족어의 소멸을 뜻하니, 민족어들은 점점 활력을 잃고 일상생활에서 내몰릴 것이다. 그래서 많은 민족어가 사라질 것이다. 현존하는 3000 내지 6000개 가량의 언어 가운데 100년 안에 절반이 소멸하리라고 추산하는 이도 있다. 또 다른 추산에 따르면, 적어도 300년 동안 생존할 가능성이 있는 언어들은 스페인어, 중국어, 영어 뿐이다.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와 같은 중요한 언어들도 그 뒤로는 지역적 방언으로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이런 추산은 무척 대담한 예측 같아 보인다. 그러나 국제어를 불러오는 사정들과 역사적 증거들을 살펴보면, 그런 예측도 실은 너무 보수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다. 현 추세가 지속된다면 다섯 세대 안에 영어가 대부분의 사회에서 공용어가 될 가능성은 무척 높다.
여기서 지적할 것은 이런 상태가 민족어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쉽게 사라지기엔 민족어가 담고 있는 민족의 역사와 지적 자산이 너무 많다. 그래서 민족어들은 대중의 외면을 받지만 전문가들에 의해 쓰이고 보존되고 이어질 것이다. 그런 상태에선 민족어들은 거의 진화하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박물관 언어’로 남을 것이다.
6. 국제어를 모국어로 해야 하는 이유
너무 대담해 보이는 이런 예측은 물론 국제어가 지닌 엄청난 망 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런 예측은 동시에 언어의 습득과 사용에 관한 생물학적 사실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근년에 생물학과 심리학이 보인 빠른 발전은 언어에 관한 종래의 생각들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먼저 지적할 것은 사람들이 지닌 언어능력은 특정 언어에 매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난 몇만 년 동안 많은 언어가 나타났다 소멸했지만, 사람들의 유전자적 모습(genetic profile)은 그동안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종과 관계없이 어떤 언어나 배워서 쓸 수 있다. 프랑스 사람이 프랑스어를 쓰고, 한국 사람이 한국어를 쓰는 것은 생물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다만 프랑스어나 한국어를 쓰는 사회에서 태어나 그것을 모국어로 배웠기 때문에 그것을, 그리고 그것만을 잘 쓸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엔, 사람이 첫 언어를 배울 때 쓰는 뇌의 부분과 차후에 언어들을 배울 때 쓰는 뇌의 부분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첫 언어, 곧 모국어를 배우는 것과 차후의 언어들을 배우는 것 사이엔 생물학적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모국어는 아주 잘 하지만 커서 배운 외국어들을 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를 느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중학생과 초등학생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에 간 사람들이 흔히 겪는 ‘의도하지 않은 대조실험’의 결과도 잘 알려졌다. 중학생인 아이는 영어를 배우는 데 애를 먹지만 초등학생인 아이는 쉽게 영어를 배워서 익숙하게 쓴다.
근년에 미국에서 한국인 2세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그렇게 다른 영어 습득능력에서 열두 살이 경계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실험은 사람이 대개 열한 살까지는 첫 언어를 배우는 뇌의 부분으로 언어를 배우지만, 열두 살부터는 차후 언어를 배우는 뇌의 부분으로 언어를 배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사정을 설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뇌는 어떤 종합적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라, 사람이 진화하면서 필요한 기능들이 계속 덧붙여진 기관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자기 종족의 언어만 배우면 됐다. 그래서 사람의 뇌에서 언어를 관장하는 부분은 한 언어를 다루도록 진화했다. 그러나 고대 문명이 일어나고 다른 종족들과 교류가 활발해지자, 많은 사람이 둘 이상의 언어들을 배워야 했다. 그렇게 갑자기 닥친 상황에 맞춰 뇌가 빠르게 진화할 수는 없었으므로, 뇌는 첫 언어가 아닌 차후의 언어들을 관장하는 일을 원래 언어를 관장하던 부분이 아닌 다른 부분으로 돌렸다. 그래서 우리는 수학문제를 풀 듯 외국어를 쓰는 것이다.
이 사실은 국제어를 모국어로 갖지 않은 사람들이 겹으로 불리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들은 모국어말고도 국제어라는 언어를 하나 더 배워야 할 뿐 아니라 그 국제어나마 제대로 배워 쓸 수도 없다.
이 불행한 소식에 합리적으로 대응하는 단 하나의 길은 국제어를 모국어로 갖는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서서히 국제어를 모국어로 삼을 것이다. 국제어를 첫 언어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안게 되는 불이익이 워낙 큰지라 국제어를 모국어로 갖지 못한 사람들은 비록 자신들은 너무 늦었지만, 자식들에겐 국제어를 모국어로 배울 기회를 주려고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언어를 아주 쉽게 바꾸는 이유를 잘 설명한다. 미국에 이민간 사람들이 영어를 배워 쓰는 데에는 한 세대면 족하고, 모국어를 잊는 데는 세 세대가 채 안 걸린다.
7. 유대인의 역사적 예
유대인의 역사는 이 점을 아주 또렷이 보여준다. 혹독한 여건 속에서 엄청난 값을 치르면서도 유대인들은 줄곧 자신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정체성을 지켜왔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언어를 소중하게 여기고 꿋꿋하게 지켜왔으리라고 여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으니,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여러 번 가볍게 바꾸었다.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로니아에 종속됐고 이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자연히 유대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바빌로니아 제국 상인들의 국제어였고,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였던 아람어에 점점 깊이 침윤했다.
마침내 기원전 2세기경엔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대신 아람어를 쓰기 시작했고, 히브리어는 지식계층만이 읽을 줄 아는 ‘박물관 언어’가 됐다. ‘성서’의 ‘느헤미야’는 기원전 3세기 전반에 편집됐는데, 그것이 바로 히브리어가 산 언어였을 때 쓴 마지막 책이다.
대부분의 유대인이 히브리어를 잊었으므로 그들을 위한 아람어 성서가 나왔다. ‘번역’ 또는 ‘통역’을 뜻하는 아람어 ‘targum’으로 불린 이 성서는 구전으로는 이미 기원전 6세기 말부터 나오기 시작했고, 기록된 것은 기원후 1세기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뒤 팔레스타인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집권한 이집트에 종속됐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이, 특히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이집트의 유대인들이 아람어를 버리고 그리스어를 쓰게 됐다. 자연히 히브리어도 아람어도 모르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에서 번역판을 냈는데, 그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뒤에 기독교도들의 성전이 된 ‘그리스어 성서(Sep-tuagint)’다.
로마제국이 득세했을 때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항했다가 참담하게 패하고 흩어졌다. 그 뒤로 유대인들은 아람어나 그리스어를 버리고 그들이 이민 가서 정착한 곳의 언어를 쓰거나 이디시어(중세에 독일어의 여러 방언들에 바탕을 두고 유럽의 여러 언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진화한 언어. 주로 중부 및 동부 유럽의 유대인들이 썼다)나 라디노어(발칸반도, 그리스, 소아시아의 유대인들이 쓴 로망스어)와 같은 혼성어를 공용어로 삼았다. 고유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유대교 학자들에 의해 명맥이 이어지는 ‘학자들의 언어’가 됐다.
그 동안에도 히브리어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꾸준히 이어졌다. 그런 노력은 근세에 특히 활발해서, 히브리어를 글로 쓸 뿐 아니라 말해지기도 하는 언어로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나왔다. 그리고 1948년에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히브리어가 공용어로 채택되면서 그런 노력은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언어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한 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쉽게 언어를 버리고 채택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세계 곳곳에서 모여 들어서 여러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에서 일부 지식층이 주도하는 움직임에 따라 2000년 넘게 ‘학자들의 언어’로 남아서 현대어로선 적절치 못한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할 수 있다면, 영어처럼 큰 활력을 지닌 언어를 지금 사람들이 공용어로 채택하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8. 영어 못해서 발생하는 손해들
그러면 우리 시민들이 국제어인 영어를 능숙하게 쓰지 못해서 우리 사회가 보는 손해는 얼마나 클까? 아쉽게도 아직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실제적인 연구를 수행해서 손해를 금액으로 환산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런 손해에 대한 추산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그런 손해가 언뜻 보기보다는 훨씬 크리라는 점이다.
그런 손해 가운데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개인적 차원의 손해다. 우리 시민들 대부분은 영어를 제대로 쓸 줄 몰라서 당혹스러운 처지에 놓이거나 물질적으로 손해를 본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일화는 미국에서 활약하는 야구선수 박찬호씨의 경험이다. 한번은 코치가 흥분한 그에게 “감정을 다스리게(control your emotion)”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씨는 그의 말을 “동작을 조절하게(control your motion)”라는 말로 알아듣고 투구 동작을 열심히 연습했다고 한다.
그러나 개인의 손해가 모두 박씨의 일화처럼 웃어넘기거나 조금 손해보고 말지 하면서 체념해도 좋은 수준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남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재앙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은 항공기나 배를 부리는 사람들의 경우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불완전한 의사소통은 곧바로 엄청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서투른 영어로 인한 항공사고들은 끊임없이 나오고, 그런 사고들은 영어가 널리 쓰이지 않는 대륙들에서 훨씬 많다. 그래서 미국의 항공기 조종사들은 관제사들과의 의사소통이 시원스럽지 못한 아시아로 비행하는 일을 ‘암흑 속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한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우리 시민들이 보는 그런 크고 작은 손해들을 모두 모으면 엄청난 금액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손해는 영어로 된 정보들이 아예 우리 사회에 유입되지 않아서 우리가 보는 줄도 모르고 보는 ‘보이지 않는 손해’보다는 훨씬 작을 것이다. 정보의 유통에는 비용이 든다. 따라서 정보는 찾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쏠린다. 영어로 된 정보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들에만 공급된다. 중요한 정보들이 대부분 영어로 된 세상에서 우리 사회에 들어오지 않는 정보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로선 추산하기도 어렵다. 단편적 일화들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생산되고 유통되는 정보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지난 번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 정부는 미국에 대표단을 파견해 월스트리트의 금융 전문가들과 협상을 벌였다. 막상 회담이 시작되자 우리 대표들은 상대방의 얘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제도와 상품이 빠르게 진화하는 국제 금융계인지라, 우리 대표들은 들어본 적도 없는 개념들과 용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요 경제와 금융에 나름의 지식을 가졌고 물론 영어도 잘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실제로 협상에 들어가자 영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협상은 미국인 변호사가 주도했다. 나중에 협상이 그런대로 잘 끝나자 정부 대표들이 그 변호사에게 훈장을 주자고 했다는 얘기에서 우리는 회담장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중요한 최신 정보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아예 들어오지도 않고 있다. 물론 언어 장벽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런 정보의 부재 때문에 우리가 모르고서 보는 손해는 엄청날 것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그런 손해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으로 그냥 넘기기엔 사정이 너무 심각하다.
이런 사태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영어가 누리는 망 경제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우리 시민들이 영어를 능숙하게 쓰지 못해서 보는 손해도 따라서 커지므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는 일은 시급하다.
이제 대책을 찾아보기 전에, 흔히 대책으로 꼽히는 ‘대책 아닌 대책’에 대해서 먼저 살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번역 및 통역이 아쉬운 대로 대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번역이나 통역은 민족어를 쓰는 우리 사회에서는 필수적인 활동이며, 우리는 이미 적지 않은 자원을 그런 활동에 투자하고 있다. 따라서 번역 및 통역을 대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은 우리가 번역 및 통역에 더 많은 투자를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과연 번역과 통역에 대한 추가 투자가 그들의 주장대로 대책이 될 수 있는가?
번역과 통역의 근본적 문제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영어를 자유롭게 쓰는 능력이다. 그들은 영어로 된 글을 원문으로 읽어 제 맛을 즐기고, 영어로 된 글과 편지로 자신의 뜻을 또렷이 드러내고,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제대로 즐기고, 영어로 외국 사람들과 자유롭고 친밀하게 얘기해서 우정을 쌓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투른 번역가가 주물러 놓은 어색한 문장들을 읽고, 다른 사람이 번역한 편지를 보내고, 자막이나 더빙이 붙은 영화를 보고, 통역을 통해서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통역을 쓸 수 있는 정치 지도자들이나 기업가들도 유창한 영어를 쓸 수 있기를 열망한다. 따라서 번역이나 통역이 영어를 배우는 것에 대한 대안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제 발로 걷거나 뛰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에게 목발이 ‘아쉬운 대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번역과 통역은 큰 자원을 쓰는 활동이다. 그것도 뛰어난 인적 자원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오역에서 나오는 경제적 손실도 적지 않다. 우리 사회와 앞선 사회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식의 물매 (gradient of knowledge)’가 워낙 싸므로, 번역과 통역은 큰 가치를 더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우리 시민들이 모두 영어를 잘한다면 그것은 필요가 없는 활동일 터이고, 지금 그것에 쓰이는 자원들은 다른 활동에 쓸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번역과 통역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워낙 빠르게 발전하고 상업활동이 끊임없이 다양해지므로 새로운 낱말들이 점점 많이 나온다. 그런 신조어들은 번역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고 그것을 통일하는 작업은 그것을 주관하는 기구가 있어서 제대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더디고 힘들다. 문제를 한결 어렵게 하는 것은 약어들의 범람이니, 이 경우에 번역어를 고르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음역이 고작인 경우가 흔하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그 신조어들이 실제로 쓰이는 현장들에서는 번역어가 아예 쓰이지 않는 형편이다. 번역어를 배우는 것은 가외 투자인 데다가 설령 배웠다고 하더라도 쓸 데가 별로 없고, 어쩌다 쓰는 경우엔 확인을 위해 영어를 병기해야 한다. 그러니 누가 번역어를 즐겨 쓰겠는가? FOB를 ‘본선 인도’라고 하고, CIF를 ‘운임보험료포함조건’이라고 고집하는 사람은 드물 수밖에 없다.
그나마 번역이 아예 비현실적인 경우도 많다. 현대는 정보의 생산이 가파르게 증가해온 시대다. 1960년대에 나온 추산에 따르면, 인류가 지닌 정보의 총량은 10년마다 갑절로 늘어났다. 최근에 나온 추산에 따르면, 정보의 총량은 매년 갑절로 늘어난다고 한다. 이 사실은 정보의 노후화가 무척 빠르게 진행된다는 것을 뜻한다. 자연히 많은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처리돼야 제 값을 할 수 있다. 주가의 영향을 끼치는 정보들을 생각하면 이 점이 이내 드러난다. 다른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받아서 분석하는 정보를 다른 사람의 번역이나 통역을 통해서 얻는 사람이 증권시장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이렇게 번역이나 통역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정보들의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번역과 통역은 영어를 배우는 것에 대한 대안이 아니다. 국제어의 득세에 대한 대책도 물론 아니다. 앞으로 번역과 통역에 대한 투자는 계속돼야 하겠지만, 번역과 통역이 영어를 배우는 것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는 점은 또렷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10. 결론은 하나, 영어를 우리말로
그러면 무엇이 진정한 대책이 될 수 있을까? 앞으로 몇 세기 안에 하나의 국제어가 등장하고 다른 민족어들은 모두 소멸하리라는 전망, 실질적으로 국제어가 된 영어가 지금 누리는 거대한 망 경제, 영어를 잘 쓰지 못해서 우리 시민과 사회가 보는 엄청난 손해, 사람의 뇌에서 첫 언어를 배우는 부분과 차후 언어를 배우는 부분이 다르므로 국제어를 모국어로 갖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국제어를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쓸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한 사람의 모국어는 그가 태어날 때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결정된다는 사정 따위를 고려하면, 우리가 고를 수 있는 단 하나의 대책은 우리의 모국어인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를 우리말로 삼는 것이다. 다른 조치들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충분한 대책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인 결론이다. 아무리 영어가 중요하더라도 모국어를 버리다니!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사실들과 엄격한 논리는 한국어를 쓰는 한 우리는 국제어를 제대로 쓸 수 없고, 그래서 큰 핸디캡을 안고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과 경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국제어인 영어를 우리말로 삼는 일은 큰 투자와 긴 시간이 소요되는 사업이다. 언어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서 우리 삶을 규정한다. 따라서 그것을 바꾸는 것은 우리 삶을 뿌리부터 바꾸는 혁명이 될 것이고, 자연히 큰 비용과 혼란이 따를 것이다. 그리고 당장 영어를 우리말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시민은 모두 한국어를 모국어로 가졌으므로, 실제로 영어를 모국어로 가진 우리 후손들이 나타나는 데에는 적어도 세 세대는 걸릴 것이다. 게다가 영어를 우리말로 삼는 것에 거세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따라서 영어의 채택은 힘들고 더딘 사업이 될 수밖에 없다.
11. 영어공용의 이점 Ⅰ
이런 상황에 우리가 고를 수 있는 가장 현실적 방안은 영어를 우리말과 함께 공용어로 삼는 것이다. 이 방안은 국제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삼는 일의 첫단계이면서도, 한국어 습득에 큰 투자를 했고 한국어에 큰 애착을 지닌 우리 시민의 심리적 저항을 크게 받지 않을 것이다. 지금 ‘영어 공용화’라는 이름 아래 논의되는 방안은 바로 이것을 뜻한다.
물론 이 방안은 우리 시민들이 영어에 들이는 투자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 것이다. 지금 우리 시민들은 영어를 배우는 데에 엄청난 자원을 쓰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투자의 효율은 아주 낮다.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시민들에겐 영어를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익힐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일상적인 활동들을 통해 언어를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으면, 우리 시민들은 영어가 일상적으로 쓰이는 환경에서 영어를 쉽고 자연스럽게 배우게 될 것이다.
또 하나 이 방안이 지닌 중요한 장점은, 그것이 기회의 평등에 이바지한다는 점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영어학원에 자식을 보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식들을 해외로 유학 보낸다. 물론 그들은 재산이 넉넉한 계층이다. 영어가 이미 생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술이 된 터라, 그런 사정은 부의 세습을 뜻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으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우는 기회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정부도 영어교육에 투자를 더 많이 하게 되어, 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12. 영어공용의 이점 Ⅱ
영어를 공용어로 삼으면 물론 부정적 효과들이 여럿 나올 것이다. 그러나 어떤 변혁에 혼란과 비용이 따르지 않는가? 따라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데는 우리가 볼 손해와 이익을 비교하는 것이 긴요하다. 우리가 영어 공용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으로 우리가 볼 이익이 손해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래도 공용어를 새로 도입하는 일은 워낙 큰 변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할 것이다. 그런 불안을 특히 크게 만드는 것은, 만일 우리가 영어를 공용어로 삼으면 우리 전통과 문화가 해를 입으리라는 주장 때문이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그럴 듯하고 많은 동조자를 얻을 수 있는 주장이지만, 그 근거는 아주 부실하다.
전통과 문화는 그것들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한도 안에서 뜻을 지닌다. 만일 우리 전통과 문화가 우리 후손들에 의해서 국제어로 구체화된다면, 그것들은 지금 조선어로 구체화된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향유될 것이고, 자연히 훨씬 큰 활력을 지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민족은 하나로 통합된 인류 문명을 다듬어 나가는 데에서 정당한 우리 몫을 할 것이다. 과학이든 예술이든 지금 우리 문화가 과연 인류 문명에 얼마나 큰 공헌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공헌을 가로막는 것들 가운데 언어의 장벽이 가장 견고하지 않은가?
긴 세월이 흐른 뒤 마침내 우리말이 ‘박물관 언어’가 되더라도, 우리 민족어를 배우고 연구하는 학자들은 늘 나올 터이므로 조선어로 구체화된 우리 전통과 문화에 후손들이 접근하지 못할 위험은 거의 없다. 지금 우리 시민들 가운데 한문을 제대로 배운 이들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리고 사실상 젊은 세대들에선 한자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지만, 한문으로 구체화된 우리 문화 유산을 우리가 어렵지 않게 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언어는 도구다. 언어가 사람에게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그리고 모국어가 우리에게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언어가 도구라는 사실과 사람들의 언어구사 능력은 특정 언어에 매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특정 언어를 우상으로 떠받드는 것은 어떤 명분과 이름으로 치장되더라도 비합리적이다.
우리가 영어를 공용어로 삼기로 결정한다면 당연히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언어가 사람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도구이므로 그것에 관한 정책과 조치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영향이 크다. 공용어를 새로 도입하는 것처럼 큰 변화는 당연히 오랫동안 준비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적극적으로 추진하더라도 영어의 도입을 위한 준비기간은 한 세대는 돼야 할 터이다. 따라서 우리에겐 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세력이 없다. 공용어를 새로 도입하는 일처럼 크고 중요한 사업에는 정부가 나서는 것이 옳다. 그러나 집권세력으로서는 그 일이 반가울 리 없다. 반대하는 시민들이 워낙 많으므로 정치적 계산상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중히 검토해야 할 일이라는 식으로 미룰 것이 뻔하다.
비록 사정이 그렇게 어렵지만 정부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론의 분열이 없이 어차피 하게 될 일들을 먼저 하는 것이다. 그런 일들 가운데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를 영어에 호의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이다. 외국인들의 투자와 관광이 우리 경제에 긴요하므로 지금 우리는 그들이 쉽게 우리 사회에 들어와 활동할 수 있도록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런 일들 가운데 먼저 해야 하고 비교적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정부의 법령, 문서, 양식과 같은 것들을 우리말과 영어로 병기해서 외국인들이 이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어를 공용어로 삼기 위한 첫 준비작업이기도 하다. 아울러 여행안내서에서 식당의 식단에 이르기까지 외국인들이 찾을 만한 정보들을 우리말과 영어를 병기해서 외국인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4. 후손들이 선택하게 하라
여기서 강조돼야 할 것은 영어 공용은 비용과 혜택이 여러 세대에 걸쳐 나오는 초장기적인 투자라는 사실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아서 나올 혜택은 단기적으로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모국어를 바꾸지 못한다. 위에서 거듭 강조한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어릴 적에 자신이 중대한 결정을 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한 언어를 모국어로 삼았고, 그 결정은 평생 취소할 수 없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아서 나올 혜택은 거의 모두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 후손의 몫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후손들 처지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방식으로 결정되어야 옳다.
말을 바꾸면, 영어 공용은 우리에겐 주어지지 않았던 모국어 선택권을 우리 후손들에게 주는 것이다. 국제어인 영어와 민족어인 한국어 가운데 자신의 삶에 더 나은 것을 모국어로 고를 수 있는 기회를 그들에게 주자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어에 이미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많은 투자를 한 세대들에겐 무척 어려운 결단이다. 그러나 그것만큼 우리 후손을 위해서 실질적으로 큰 뜻을 지닌 투자도 드물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설득력이 작지 않은 논거들에도 불구하고 영어 공용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우리 후손들에게 모국어를 고를 권리를 주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필자는 간단한 사고 실험 하나를 해볼 것을 요청한다.
“만일 막 태어난 당신의 자식에게 영어와 한국어 가운데 하나를 모국어로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자식에게 어느 것을 권하겠는가? 한 쪽엔 영어를 자연스럽게 써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고, 일상과 직장에서 아무런 불이익을 보지 않고, 영어로 구체화된 많은 문화적 유산들과 첨단 정보들을 쉽게 얻는 삶이 있다.
다른 쪽엔 조상들이 써온 조선어를 계속 쓰는 즐거움을 누리지만, 영어를 쓰는 것이 힘들고 괴로워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기피하고, 평생 갖가지 불이익을 보고, 영어로 구체화된 문화적 유산들을 거의 향유하지 못하고, 분초를 다투는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얻지 못하고 뒤늦게 오류가 많은 번역으로 얻어서, 그것도 이용가능한 정보들 가운데 몇십만분의 일이나 몇백만분의 일만 얻어서, 세상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 삶이 있다.
당신은 과연 어떤 삶을 자식에게 권하겠는가? 아예 그에게서 선택권을 앗아가겠는가? 당신의 자식은 아직 조선어를 배우고 쓰지 않아서 한국어에 대한 물질적, 심리적 투자가 없고, 자연히 한국어에 별다른 애착을 지니지 않은 터에?”
15. ‘아시아 영어‘는 식민 잔재가 아니다
위에서 필자가 펼친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 것이고 이단적으로 들릴 것이다. 나아가 적지 않은 이들에게 신성모독적인 발언으로 들릴 것이다. 생각해보면 민족을 민족으로 만드는 요소들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중요한 것이 민족어다. 우리 나라처럼 민족주의의 물결이 거센 사회에서 민족어에 대한 비관적 전망과 국제어에 대한 호의적 태도가 거친 비판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인도, 필리핀, 그리고 싱가포르처럼 이미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사회들의 경험은 국제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 사회들에서 영어에 대한 호감은 뚜렷하고 영어를 일상적으로 씀으로써 누리는 혜택은 언뜻 생각하기보다 훨씬 크다.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비록 그런 사회들에서 영어가 자리잡게 된 것은 그들이 영국이나 미국의 식민지들이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지만, 그들은 영어를 ‘식민 잔재’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번 영어를 공용어로 삼으면, 영어에 대한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사정도 큰 무게를 지닌다. 영어를 모국어로 갖지 않은 사람들은 영어를 모국어 식으로 쓰는 버릇을 갖게 마련이다. 비록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것은 어디서나 조롱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선 오래 전부터 ‘Konglish’라는 말이 있었고, 중국과 홍콩에선 ‘Chinglish’가, 그리고 싱가포르에선 ‘Singlish’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엔 그런 영어도 분명히 영어라는 생각이 점점 널리 퍼지고 있다. 우리가 국제어로서 영어를 새롭게 바라보아야 함을 일깨워주는 현상이다. 실제로 지금 아시아에선 3억5000만명이 영어를 쓰고 있으며, 이는 미국과 영국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다. 그들이 쓰는 영어를 ‘비영어적 영어’라고 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바뀐 태도를 반영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출판사가 아시아 영어(Asian English) 사전을 마련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가장 심했던 나라인 호주에서 그런 움직임이 나왔다는 사실은 그 일에 상징적 빛깔을 입힌다.
16. 민족주의의 함정
이 세상의 여러 문명들이 하나의 ‘지구제국’으로 통합돼 점점 촘촘한 유기체로 짜이는 지금, 영어를 앵글로색슨 족의 민족어로만 여기는 것은 너무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영어는 이제 실질적으로 인류의 표준 언어가 됐다. 그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은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이기주의가 그 뿌리다. 자연히 그것은 늘 ‘나’를 앞세우고 ‘나’를 되도록 좁게 규정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남들’의 존재를 상정하고 망 경제에 바탕을 둔 언어와는 잘 어울리지 않으며, 언어 정책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그런 해독은 이미 우리의 한문 정책에서 잘 드러났다. 우리 선조들이 동아시아의 국제어였던 한문을 향유하고 나름으로 다듬어놓은 자신들의 언어로 여겼다는 사실을 놓치고서, 한문을 중국인들의 독점적 유산으로 치부해버린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조선의 문학적 유산을 취합한 ‘동문선’의 서문에서 서거정이 자랑스럽게 말한 “그러므로 우리 동방의 글은 송·원의 글도 아니고 한·당의 글도 아니며 바로 우리 나라의 글인 것입니다(是則我東方之文 非宋元之文 亦非漢唐之文 而乃我國之文也)”라는 진술은 500년 뒤의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주는가?
국제어는 그것을 쓰는 모든 사람의 자산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 의해 다듬어진다. 이제 우리는 영어라는 국제어를 우리의 자산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선언해야 한다. 우리도 그 국제어를 다듬어 발전시키는 일에 우리 몫을 하겠노라고.
17. 실질적·주체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두 해 전 나의 졸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에 실린 영어 공용 주장이 알려지자 거센 비난이 일었다. 그런 비난은 물론 예상했던 것이었다. 내가 예상치 못했던 것은 영어 공용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을 통한 찬반 토론에서 영어 공용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약 45%였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약 55%였다. 요즈음 여론조사를 보면 찬성하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많다고 한다.
그런 역전은 그동안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바뀌고 있었음을 - 영어는 점점 융성해서 국제어의 지위를 더욱 다졌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였고, 경제위기를 통해 우리 시민들이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깨달았고, 인터넷의 갑작스러운 보급은 영어를 능숙하게 쓰는 기술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음을 -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세상이 바뀌는 것을 우리가 거부해도,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바뀌는 것에 따라 우리 사회를 바꿔 나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필요한 변화의 폭과 크기를 늘려서 변화에 드는 비용과 고통의 총량을 늘릴 따름이다.
이제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영어가 실질적인 국제어로 등장했다는 역사적 변화에 대응하는 실질적이고 주체적인 조치들이다. 위에서 살핀 바처럼 영어 공용에 관해서 시민들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우리가 해야 하고, 또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 그 사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영어 공용은 신중히 다뤄야 할 일’이라는 식으로 미루기만 하는 것은 환경의 변화를 외면한 최악의 선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