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정치 얘기요? 하품 나와요”

  • 김보선 자유기고가

    입력2006-12-06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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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크노 전사 이정현의 ‘바꿔’ 열풍이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다.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에 힘입어 인기 상한가인 이 노래는 4월 총선의 ‘주제곡’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정작 이정현 자신은 정치권의 ‘바꿔’ 움직임에 관심없다.》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바꿔 바꿔 세상을 다 바꿔…’.

    가수 이정현(20)이 부른 히트곡 ‘바꿔’(최준영작사·곡)의 파장이 엄청나다. 가사대로 ‘모든 걸 다 바꿔’버릴 것 같은 기세다. 누구나 ‘바꿔 바꿔‘를 외친다. 정치권도, 사회단체도, 기업도, 개인도, 더 나은 쪽으로 ‘바꿔‘를 외친다. 이런 현상은 새로운 것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열망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개인과 사회의 변화욕구를 이정현이 대신해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치권은 요즘 ‘바꿔’를 잡는 데 비상이 걸렸다. 4월 총선이 다가오면서 이정현의 노래 ‘바꿔‘는 인기가요가 아닌 세상을 바꾸자는‘혁명가’가 돼버린 느낌이다. 총선 출마 예정자들은 앞다퉈 이정현의 노래를 선거 로고송으로 사용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노래의 저작권자인 최준영씨는 한국가요작가연대측에 권한을 일임한 상태이고 작가연대는 총선시민연대가 낙선운동을 벌이는 인사들은 이 노래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바꿔‘ 노래 한번에 5000만원



    ‘바꿔‘를 자신의 로고송으로 쓰려는 노력과는 별도로 이정현에게 후원회와 출판기념회, 사인회 등의 참석과 ‘바꿔’ 열창을 조건으로 5000만원의 고액 출연료를 제시하는 정치인도 등장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소속사인 예당음향(대표 변대윤)은 이정현의 공식활동은 지난 2월13일까지라고 못박았다. 이정현을 정치행사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이정현은 이런 현상이 신기하고 재미있을 뿐이다.

    지난 8일 음악전문 케이블TV인 KMTV ‘쇼 뮤직탱크’ 대기실에서 이정현을 만났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앉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이정현의 모습은 뜻밖이었다. 그녀를 특징짓는 ‘테크노 전사’는 온데간데 없고 이제 스무살에 접어든 참한 처녀로 변해 있었다. 먼저 최근의 ‘바꿔’ 열풍에 대해 물어봤다.

    ─‘바꿔’가 현실 정치나 사회 상황과 묘하게 연관돼 인기 상한가를 달리고 있다. 정치권에서 선거 캠페인의 로고송으로 쓰겠다는 주문이 많은 걸로 아는데.

    “여러분이 제 노래를 사용한다는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요. 누구든 유용하게 쓴다고 하면 저에게는 좋은 일이죠. 그러나 한편으론 ‘우습다’는 생각도 들어요. 괜히 그런 정치적인 문제에는 끼고 싶지 않아요. 저는 할 말도 없고요. 그 문제는 기획사에서 이미 다른 곳에 일임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녹음할 때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고 불렀어요?

    “노래가 원래 의도보다 확대된 것은 아니죠. 가사를 쓰기 위해 작사·작곡자인 최준영씨와 논의할 때부터 바꾸고 싶은 게 많았어요. 그래서인지 모 방송사 심의에도 처음에는 통과하지 못했다가 나중에 통과됐죠. 웬 불만이 그리 많으냐는 소리도 들었어요. 하지만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를 확 바꾸자는 것은 아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뭘 바꾸자는 거죠?

    “많잖아요. 직접적으로는 우리나라 영화 환경도 바꾸면 좋겠고, 제 문제는 아니지만 대학입시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다고 그러고…. 특히 저는 이미 통과를 했지만 대학입시를 치러야 하는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을 보면 너무 불쌍해요. 특별한 방면에 소질이 있으면 그것으로 대학에 들어가게 해주고 재능을 키워줘야 하지 않나요. 21세기라고 떠들면서 20세기 방법으로 아직도 수험생들을 압박하고 있어요. 특별전형이라는 것도 형식적이고 실상은 시험 성적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잖아요.

    왕따 문화도 문제예요. 제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는 청취자 중에 ‘왕따’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이 많아요. 제가 학교 다닐 때와 불과 2∼3년밖에 차이나지 않는데 더 심각해진 것 같아요. TV도 그래요. 지금은 모든 것이 TV 입맛대로 포장되고 있어요. 일본만 하더라도 가수가 새 음반을 낸 후 콘서트에서 팬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팬들도 기꺼이 찾아가죠. 우리는 TV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잖아요. 저부터도 반성해야겠지만요.”

    ─그럼, 정치는 뭘 바꿔야 할까요?

    “그런 질문에는 대답 안 해요. 잘못 이야기했다가 큰일나요. 이번 ‘바꿔‘ 노래 때문에 정치에 대한 멘트를 해달라는 질문이 많은데 사실 아직 정치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이번 ‘바꿔‘ 노래말 때문에 괜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단지 나쁜 것은 나쁘고 좋은 것은 좋을 뿐이죠. 더 이상 정치적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을래요.”

    ─이번 총선에 처음으로 투표를 하게 되죠?

    “얼마 전(2월 7일) 생일이 지났으니까 성인이 됐어요. 신용카드도 만들 수 있고, 물론 투표도 할 수 있고…. 성인이 된다는 거,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해요. 물론 책임이 따르겠지만. 우리 동네(은평구) 국회의원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번 총선에는 내 의지대로 꼭 투표할 거예요.”

    이정현은 ‘바꿔‘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이나 정치권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별관심이 없었다.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질문이 재미없어서인지 대답 중간중간 하품이 끊이지 않는 등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매니저도 그 동안 많이 시달렸는지 인터뷰 전부터 정치 얘기는 되도록 피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사실 가수 이정현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골치 아프고 피곤한’ 정치권의 ‘혁명전사’가 아니라 ‘N세대 대표 주자’ ‘미래 전사’ ‘사이버 스타’다.

    그는 데뷔 반년도 안돼 벌써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다. 시원한 테크노댄스곡 ‘와’를 타이틀곡으로 한 첫 앨범으로 각종 가요순위 프로그램에서 정상을 차지한 지 이미 오래다. 앨범 판매량도 60만장을 넘어‘대박 가수’로 인정받았다.

    기분 나면 가슴 드러내고

    이정현이 테크노음악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광기에 가까운 그녀의 ‘끼’ 때문이다. 160㎝, 40㎏이 채 안 되는 작은 몸에서 뿜어 나오는 테크노의 열기가 마치 신들린 듯하다. 무대에서 이정현은 본능적 으로 자신의 끼를 뿜어낸다.

    이정현의 ‘신들린 끼’는 96년 연예계 데뷔작인 영화 ‘꽃잎’에서 이미 검증된 상태다. 영화 꽃잎에서 그녀는 상처받은 소녀였다. 그는 나이답지 않게 신비스러운 분위기까지 풍기며 광주의 상처를 연기해냈다. 광주항쟁으로 어머니를 잃고 떠돌이 남자에게 성적으로 학대받는 그 ‘소녀’의 눈빛은 섬뜩한 광기로 번득였다. 영화평론가들은 ‘무서운 연기’라고 극찬했다.

    그러다 갑자기 가수로 나타났다. 자기 말마따나 영웅, 전사 같은 차림으로. 일체 인간적 분위기를 거부한 채 차가운 기계음과 끊일 듯 이어지는 율동으로 스산하고 허무한 세기말의 예민한 급소를 건드린 노래에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선녀 같고 마녀 같기도 한 의상, 위험해 보이는 공격적 머리꽂이, 외양도 노래만큼이나 강렬했다. 그는 ‘예쁘고 귀엽고 가련하고 섹시한’ 여자 가수 이미지를 단번에 뒤집었다.

    ─무대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고 무당 같다, 신기 들린 거 아니냐고들 하는데.

    “기분 나쁘진 않아요.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가 봐요. 카메라 앞에만 서면 아무 잡념 없이 빠져들어요. 그냥 몸이 느끼는 대로 움직일 뿐이죠. 특별한 안무가 없이 기분나는 대로 부채 들고 춤추고 노래하죠. 특별히 믿는 종교는 없어요.”

    ─비녀나 부채, 태권브이 등 의상 아이디어가 독특한데.

    “어떻게 해야겠다는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지 않아요. 다만 주로 제가 좋아하는 것들에서 빌려와요. 만화영화와 인형을 무지무지 좋아하는데 그런 것에서 힌트를 얻어요. 이번 ‘바꿔‘는 만화 주인공이 지닌 캐릭터에서 따왔어요. 타이틀곡인 ‘와’에서는 서양적인 테크노 음악에 대한 반발로 동양적인 세계를 접목시켜 비녀나 커다란 눈이 그려진 부채를 등장시켰어요.”

    이정현이 지난해 10월 MBC ‘음악캠프’로 첫 무대에 올랐을 때다. 이정현은 방송 전에 자신의 무대에 대해 무대장치·특수효과·조명·카메라 워킹까지 계산해 밑그림을 그려왔다. 담당PD는 물론이고 관계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두다 19살 이정현이 며칠 밤을 새우며 짠 것이었다. 연출자도 이런 이정현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했다.

    ─공연중에 가슴이 보이는 등 노출도 대담한데?

    “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요. 기분 나면 어깨 드러내고, 싫증나면 안하고 그래요. 느낌대로 해요”

    ─가수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언제부터죠?

    “4년 전 영국에 갔을 때 테크노음악에 빠져들면서부터요. 당시 공부하겠다고 영국 등 유럽에서 잠시 생활했는데 그때 테크노음악에 매료됐어요. 어렸을 때부터 마이클 잭슨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열광적인 팬이었죠. ‘꽃잎’에서 김추자씨 노래를 부른 것을 보고 잘한다며 앨범을 내자고 제의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러나 그땐 연기자가 음반을 내면 욕하는 분위기였죠. 대학에 가야 하기 때문에 성적 고민도 했었어요. 대학입시가 겹쳐서 몇 년 미루다가 지난 여름 결심을 굳혔죠. 4년만에 결심을 하고, 음반을 내기로 결정하는 데도 5개월이나 걸린 셈이에요.”

    흔히들 이정현을 두고 N세대 대표주자, 사이버 가수라 부른다. 그녀의 사이버틱한 의상과 테크노 음악, 그리고 모 이동통신 광고 모델로 활약하는 데서 파생되는 이미지일 것이다. 만들어지는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가 다른 연예인이 많아 이정현에게 컴퓨터나 인터넷에 대한 일가견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실제는 어떤지 물어봤다.

    ─이정현씨를 두고 N세대니 사이버 세대의 대표 주자라고 하던데 본인은 그런 말들을 인정하세요?

    “나쁘지 않은 이미지잖아요. 우선 그런 말들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해요. 더 열심히 하라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이미지에 맞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그녀의 사이버 감각을 알아보기 위해 N세대라면 빠질 수 없는 스타크래프트 게임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게임 잘해요? 스타크래프트는 연예인들 사이에도 인기라는데.

    “게임은 즐기는 편이지만 스타크래프트는 일부러 안 해요. 한 번 맛이 들면 깊숙이 빠져들 것 같아서요. 잠자기도 바쁜데 밤새워 게임을 할 수는 없잖아요. 대신 촬영 틈틈이 시간이 나면 오락실에 가서 즐기죠. DDR보다는 총 쏘기를 좋아해요. 신나게 쏴대고 시원한 총소리를 들으면 스트레스도 말끔히 사라져요.”

    ─컴퓨터는 가지고 있어요?

    “그럼요. 펜티엄II급 최고급 기종이죠. 지금은 바빠 자주 이용하지는 않지만 시나리오를 쓸 때 자주 이용해요.”

    외국 아이들과 인터넷 채팅

    ─비싼 노트북을 워드 프로세서용으로만 쓰는 거 아니에요? 인터넷 합니까? 젊은 연예인 중에는 컴퓨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E메일을 주고받을 정도는 해요. 사실 인터넷 채팅을 자주 해요. 국내 이용자들과는 아니고 주로 미국이나 일본아이들과 채팅을 해요.”

    ─외국 학생들이 이정현씨를 알아보지 않던가요?

    “당연히 모르죠. 국내 네티즌들과 채팅을 하면 금방 알려지고 곤해지니까 외국 애들과 하죠. 물론 내가 연예인이라는 사실은 감추면서요. 벌써 E메일 주고받는 외국 친구도 몇명 생겼어요. 그들은 내가 영화와 음악에 관심이 많은 학생으로만 알고 있죠. 물론 그 친구들도 주로 그쪽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고요.”

    ─ E메일 주고 받으려면 영어를 잘해야 할텐데?

    “쉬워요. 영어는 기본적인 것밖에 몰라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기본적인 문장 패턴에 단어만 조금씩 바꾸면 되니까요. 하지만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절실해요. 이번에 좀 쉬면서 공부 좀 하려구요.”

    이정현의 첫 앨범 제목은 ‘내 별로 가자’. 별은 인기 스타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하늘의 별을 가리킨다. 자세히 보면 수록 곡에도 별 이름이 등장한다.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이정현. 우주 속의 별을 사랑하다 지상의 스타가 된 게 아닐까? 이정현은 요즘도 외롭고 힘들 땐 별을 본다. 자신이 외계소녀가 되는 꿈을 꾸면서.

    ─이정현씨 하면 떠오르는 사이버 이미지에는 별에 대한 유별난 애착도 한몫 하는 것 같더군요. 1집에서도 별에 관한 노래를 직접 작사·작곡했죠. 제목이 암호 같던데. 무슨 뜻이 있나요.

    “GX339─4’의 가사와 제목은 제가 직접 붙였어요. 블랙홀일 가능성이 큰 백조자리 근처 별의 번호예요. 제가 가장 아끼는 곡이기도 해요. 블랙홀에 빠지면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이 열리잖아요. 이 험악한 세상의 탈출구라고나 할까요. 좀더 깨끗한 세상을 찾아 떠나고 싶어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탈출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험해요?

    “그럼, 험하지 않아요?”

    ─뭐가 그리 험하죠?

    “너무 많잖아요. 대학입시도 그렇고, 공해문제도 그렇고. 하다못해 내가 일하고 있는 연예계도 그렇고….”

    ─별을 그렇게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뭘 좋아하는데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어야 하나요. 내가 엄마나 아빠를 그냥 좋아하는 것과 같은 거죠. 해외여행을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하늘의 별을 보고 그 별에 가까이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아프리카 밤하늘의 별은 예술이라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돼요. 진짜 예뻐요.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으면 내가 그 별에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요.”

    ─집에 전체 망원경도 있다면서요?

    “썩 좋은 것은 아니에요. 이번에 바꿀 거예요. 제가 좀 내성적인 성격이라 어릴 때부터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어요. 외롭거나 그러면 혼자 옥상에 올라가 별자리를 감상했어요.”

    ─얼마 전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미팅을 했던데 상대 남자가 별에 대한 조예가 깊더군요. 별자리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이야기하던데 왜 퇴짜(?)를 놨죠?

    (이정현은 그 프로그램에서 네 명의 대학생 중 별자리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던 일류대생 대신 시청자들의 예상을 깨고 다른 남자를 데이트 파트너로 선택했다.)

    “준비된 멘트였어요. 내가 별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해 왔던 거죠. 인간적으로야 그분도 좋지만 준비된 멘트는 싫어요.”

    자신은 가식이 너무나 싫고 성격 또한 솔직한 편이라고 덧붙인다. 실제로 그는 사진기자가 이런 저런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하자 “이건 꾸미는 거잖아요”라며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촬영할 것을 요구했다.

    ‘니키타’ 또는 ‘메트릭스’의 여성판

    ─해외여행을 자주 다녔네요?

    “고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기회만 나면 다녔어요. 지금까지 10여개 국은 다녔을 거예요. 너무 너무 좋아요. 많이 배우고, 느끼고… 기분전환엔 너무 좋아요. 인도 아프리카 유럽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 진짜 많이 다녔어요. 여행은 정신적인 안정을 찾는데 최고예요.

    그렇다고 제가 돈이 많아 다닌 것은 아니에요. 돈이 없어도 여기저기서 돈을 긁어모아 다녔어요. 전 하고 싶은 것은 기어코 하는 성격이거든요. 저번에 유럽여행을 갔을 때는 저녁 먹을 돈은 없어도 마음껏 거리를 돌아다니며 제가 좋아하는 인형을 사고 그랬어요. 때로는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런 만큼 좋은 추억거리도 많이 만들었어요. 그게 음악 하는데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이정현은 현재 중앙대 연극영화학부 연출 전공 3학년에 재학중이다. 작년에는 가수활동으로 학교생활에 충실하지 못했지만 2학년까지는 학점도 3.0이 넘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물론 같은 과 친구들과 어울리며 나름대로 즐거운 대학생활을 했다. 이정현은 영화연출을 전공한데다 영화 ‘꽃잎’으로 화려하게 데뷔를 해서 그런지 영화, 특히 우리나라 영화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한국영화의 제작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준비된 멘트’인 것처럼 정색을 한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들었는데 무슨 내용이죠?

    “예측 불허의 상상 이야기요. 굳이 따지자면 공상과학 영화라고 할까? 생각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요. 영화로 제작하기는 어렵겠죠. 하지만 제가 연예계에서 제대로 자리잡으면 영화 감독으로 변신해 나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영화 출연제의도 쏟아지고 있지요?

    “그것 때문에 정말 머리가 아파요. 아직 구체적으로 정한 작품은 없어요. 이 영화다 하고 끌리는 영화가 없어요. 영화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 신중히 결정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분위기에 휩싸여 쉽게 결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어떤 영화를 하고 싶은데요?

    “왜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이 영웅이 되는 영화는 만들지 않죠. 항상 남자가 영웅이잖아요. 여자가 영웅이 되는 영화라면 단번에 결정하겠는데.”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영화를 말하는 건가요?

    “그런 어려운 말 저는 잘 몰라요. 굳이 찾자면 여성 킬러가 주인공인 ‘니키타’나 ‘매트릭스’의 여성판 같은 거요.”

    ─우리나라에서는 쉽지 않을 텐데요.

    “우리 영화계를 보면 화가 날 정도예요. 항상 사회 전체의 흐름에 따른 흥행만 생각하잖아요. 사실 제가 생각하는 괜찮은 신인감독도 많은데 제작자들은 그들을 쓰지 않아요. 흥행성이 없다고요. 신인 감독들도 나중에는 제작자들의 요구에 맞춰 타협을 하고 말고요. 자기 의지를 버리죠. 시나리오도 처음에는 괜찮다가도 제작자나 흥행성에 맞춰 처음 의도를 잃어버리고, 주인공들도 인기 있는 사람들만 캐스팅하려고 하잖아요. 한쪽이 붐이라고 하니까 그쪽으로만 몰리잖아요. 언젠가는 내가 제작비 대고 신인을 키워 내 방식의 영화를 만들고 말 거예요.”

    “영화진흥기금, 3억원이 뭐예요”

    제작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싫어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이정현은 멈칫했다. 그러나 곧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화에서는 흥행도 중요한 요소 아닙니까.

    “물론 그래요. 하지만 내가 영화를 만들 때는 관객이 나와 우리가족뿐이라도 개의치 않을 거예요.”

    영화연출전공이라는 그에게 어느 정도 영화에 대한 관심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넌지시 영화 진흥기금 문제를 물어봤다.

    ─정부에서 영화 진흥기금으로 제작을 지원하는데?

    “그게 얼마나 된다고 그래요. 경우 3억원 가지고. 그것도 없애느니 마느니 말이 많잖아요.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요즘 영화 제작비가 30억∼40억원이 넘는데 그 정도는 대학생들이 단편영화를 제작할 정도밖에 안돼요. 영화 발전에 투자를 한다면 편당 20억∼30억원 정도는 지원을 해야죠. 문화에 대한 정부의 지원 수준이 그 나라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하잖아요. 김대중 대통령 아저씨는 문화에 관심도 많고 영화도 자주 보신다는데, 문화발전을 위해 그 정도는 투자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대통령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이정현씨가 직접 말을 한 번 해보죠?

    “그럴 기회가 있겠어요? 예전에 대통령 아저씨가 ‘꽃잎’을 보셨다는데 저는 그때 필리핀에 가 있어서 만나지 못했어요. 설령 제가 만난다고 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그 정도는 문화를 담당하는 분들이 알아서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가수 데뷔 전 이정현이 댄스그룹 구피와 ‘게임의 법칙’ 뮤직비디오를 찍고 있을 때다. 그녀의 노래실력을 알아본 현재의 소속사(예당음향)가 그녀에게 1억원이 든 돈 가방을 덥석 안겨 줬다. 음반녹음 계약금이라며. 뿐만 아니라 1집 녹음이 끝나자마자 또 다시 1억원을 추가로 지불했다고 한다. 총 2억원. 아무리 ‘꽃잎’의 이정현이라고 하지만 가수로는 신인에 불과한 그에게 그런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은 분명 모험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신인에게는 많아야 계약금으로 500만원 정도 지불하는 음반업계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파격도 이만저만한 파격이 아니다.

    데뷔 4개월만에 32억원

    도대체 그 기획사는 이정현의 자산가치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그런 모험을 한 것일까?

    정확한 계산은 힘들겠지만 이정현은 데뷔 4개월 남짓 만에 무려 32억원을 벌었다고 한다. 지난해 9월말 데뷔한 이래 최근까지 음반판매량만 60만장을 기록, 24억원을 챙겼다. 데뷔앨범에서 60만장을 기록한 가수는 이소라가 유일한데 지금의 상승세라면 한달 안에 이 기록마저 깰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4개 제품의 CF계약으로 8억원을 벌었다. 연예인 중 유례가 없는 기록적인 매출(?)이다. 최근에도 4∼5개 기업에서 CF출연 요청을 받고 있어 당분간 신기록 행진은 계속될 전망이다. 웬만한 벤처기업의 대박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어떤 보도에 따르면 단 몇 개월 사이에 30억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고 하던데요?

    “정확히 얼마를 벌었는지는 몰라요. 중요한 일도 아니고요. 사실 한번도 계산해 본 적 없어요. 용돈도 안 써요. 쓸 일도 없고 시간도 없어요. 밥값은 매니저가 내고 돈을 만져보지도 못해요. 번 돈은 통장 안에 있을 거예요. 남들처럼 쓰고 즐기는 재미는 없어요.”

    ─젊은 나이에 많은 돈을 벌었는데 가장 먼저 돈을 쓰고 싶은 곳은 어디죠?

    “앞서도 말했지만 먼저 천체 망원경을 성능 좋은 것으로 살 거예요. 컴퓨터로 조종되는 망원경이 있다고 해서 벼르고 있어요. 그렇다고 전문가나 쓰는 망원경을 사겠다는 건 아니에요. 일반 천체 망원경만 해도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데요. 왜 그리 비싼지 모르겠어요.”

    이정현의 로드매니저는 이정현의 부탁으로 용산전자상가에 다녀왔다. 컴퓨터와 연결된 최첨단 천체 망원경을 주문했다고 한다. 요즘 이정현이 별이 잘 보이는 산 속으로 이사가겠다고 우기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인형 모으기가 취미니까 새 인형도 사야죠. 바비 인형 세트를 봐뒀어요.”

    기자가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긴 머리 인형이냐고 아는 체를 하자 그건 바비가 아니라 미미라고 핀잔을 준다.

    “지금도 바비 인형에게 옷을 갈아 입히며 노는 게 낙이에요. 바비 인형 값도 만만치 않아요.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인형은 조금 싸지만 외국에서 만든 것과 달리 손목이나 발목이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않아요. 인형이나 천체 망원경은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예요. 이번에 2주 정도 쉬니까 외국 여행도 갈 거예요. 이번 여행은 전처럼 여행만 하려고 가는 것은 아니에요. 다른 음반작업을 위해 이것 저것 알아보려고 해요.”

    바비인형과 함께

    사생활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도 했다.

    ─학교 생활은 어떤가요?

    “가수활동을 하기 전에는 누구 못지 않게 대학생활을 즐겼어요. 공부도 열심히 했구요. 그런데 당분간은 할 일이 많아 휴학을 할까 해요. 작년에 학교를 너무 많이 빠졌어요. 학교 친구들한테 제대로 연락을 못해 친구들이 난리예요.”

    ─남자 친구는 많습니까?

    “우리 과에 여자가 2명밖에 없어 남자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아요. 하지만 남자 복은 없는 편이에요. 아직 미팅도 한 번 못해 봤어요.”

    ─또래 젊은이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맘껏 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요?

    “아주 가끔은 외롭고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외로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혼자 지내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방송활동을 하면서는 혼자 있을 시간이 없어 외롭지 않아요. 항상 막내 언니가 옆에 있고 고등학교 때부터 아주 친했던 친구도 늘 함께 다녀요(이정현의 언니와 친구는 그녀의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언니는 곧 유럽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지만 친구는 앞으로도 계속 곁에 있을 거예요.”

    이정현은 지난 13일 SBS ‘인기가요 20’을 마지막으로 TV 화면에서 사라졌다. 2집 앨범은 오는 9월께 발표할 예정이다. 중앙대 영화과도 휴학한다. 데뷔 앨범 ‘내별로 가자’에서 한껏 자랑했던 ‘끼’와 솜씨를 더 닦아 내놓겠다는 계획이다. 작사·작곡은 물론 프로듀싱까지 직접 해보겠다고 벼른다. 마음 맞는 뮤지션들로 벌써 팀도 다 짜놨다.

    “나도 스무살이에요! 이제 어른이에요! 어른은 혼자 일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거잖아요. 2집은 제가 다 할 거예요. 대중을 외면하면 안된다기에 1집은 음악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많았어요. ‘GX 3394’ 같은 곡은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하지만요. 아직 장르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벌써 한 곡을 만들어 놓았어요. 기대하셔도 괜찮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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