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지리산 결의’에서 공천철회운동까지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1-24 1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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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시민운동사에 새 장을 연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 그 뿌리는 99년 10월의 국정감사운동이었다. 99년 10월24일 ‘지리산 결의’에서 태동한 낙천·낙선운동은 개정 선거법에 대한 시민불복종과 공천철회운동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일요일인 지난 1월23일 오후 5시. 서울 정동에 자리잡은 성가수녀원. 낯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 중엔 지방에서 비행기 또는 기차 버스로 상경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총선시민연대 관계자가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그들은 이른바 ‘100인 유권자위원회’ 위원들이었다. 사람들이 모이자 수녀원 대문은 굳게 닫혔다.

    유권자위원회가 토론을 시작한 것은 오후 8시. 그들은 총선연대 관계자의 설명을 통해 공천반대 명단에 오른 전·현직 의원 70여명의 ‘혐의’를 확인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간간이 웃음이 터져나오는 가운데 열정에 찬 목소리들이 회의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한 기자가 수녀원 담을 타넘어 들어왔다가 발각돼 쫓겨나기도 했다. 토론에서 마지막까지 문제가 된 사람은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 박상천 의원, 정몽준 의원이었다.

    세 사람의 운명은 투표에 의해 결정됐다. 투표 결과 두 사람은 압도적인 표차로, 나머지 한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공천반대 명단에 남게 됐다.

    토론이 끝난 후 상임대표단 집행위원장단 정책자문단의 연석회의가 열렸다. 그들은 유권자위원회의 토론 결과를 바탕으로 공천반대 명단을 최종 확정했다. 한국 시민운동사에 새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공장에서 불량품을 골라내는 작업과 같은 것이었다.



    한국 정치사에 유례 없는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 ‘대세’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일부에선 법적 대응으로 또 다른 쪽에선 음모론으로 맞서고 있지만 시민혁명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운이 더욱 드세지는 양상이다.

    1월24일 오전 10시. 서울 태평로 1가 한국언론회관 20층에 자리잡은 국제회의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회의장 안에선 막 기자회견이 시작됐지만 사람들은 회견장 밖에 더 많았다. 수백명의 내외신 취재진과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총선시민연대가 나눠주는 공천반대의원 명단을 서로 먼저 받기 위해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관계자들이 열심히 ‘질서’를 외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도덕과 질서를 근간으로 삼는 시민단체의 행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극심한 무질서의 추태는, 말 다르고 행동 다른 우리 사회 시민의식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새치기에 몸싸움에, 급기야 탁자가 무너지고 사람이 깔리는 사태마저 빚어졌다.

    이날 행사의 사회는 총선시민연대 대변인인 장원 녹색연합 사무총장이 맡았다. 박원순(참여연대 사무처장) 상임집행위원장의 공천반대명단 선정기준과 선정과정에 대한 설명. 이어 환경연합 사무총장인 최열 상임공동대표가 명단을 발표했다. ‘영예’의 1위는 국창근 의원. 가나다 순에 의해서였다. 선거법 위반, 호화쇼핑 물의, 동료 의원에 대한 폭언…. 발표석 뒷열에 빙 둘러 앉은 ‘100인 유권자위원회’ 관계자들이 박수로 분위기를 돋웠다.

    민주당의 황학수 의원을 마지막으로 총 67명의 명단 발표가 끝났다. 장원 대변인은 향후계획 발표에서 낙천운동을 낙선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다짐했다. 이어 ‘100인 유권자위원회’ 대표인 가정주부 김정자씨가 ‘정치권과 국민께 드리는 호소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한시간 여에 걸친 기자회견은 막을 내렸다. 이것으로 시민혁명의 제1막은 완결됐다. 지난해 10월24일 국감연대에 참여했던 단체들의 실무자들이 지리산 MT에서 낙천·낙선운동을 구상한 지 꼭 석 달 만의 일이었다.

    명단발표의 파장은 컸다. 애초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정치권은 성난 파도와 같은 ‘민의’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여야 총재가 낙천 명단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총선 정국은 급류에 휘말렸다. 낙천·낙선운동의 불길은 법조계·학계·종교계·문화계로 번져갔다. 각계 인사들의 지지성명과 이를 뒷받침하는 시민들의 서명운동, 그리고 후원금이 줄을 이었다. 이어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의원들이 하나둘 나타나면서 정치권 개혁운동의 수레바퀴엔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가히 혁명이라 부를 만한 이 운동의 뿌리는 무엇인가. 외롭고 힘없는 ‘소수’로만 보이던 시민단체들이 이토록 급진적인 운동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법정에 설 것을 각오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그들의 열정은 어떤 과정을 거쳐 무르익었는가. 숨가쁘던 시민혁명 100일의 막전막후를 추적했다.

    지리산 피아골의 결의

    시민혁명의 ‘음모’가 무르익은 것은 지난해 가을 국회 국정감사가 끝난 직후였다. 10월24일 국정감사 감시운동인 이른바 국감연대에 참여했던 10여개 시민단체 실무 대표자들이 지리산으로 MT를 갔다. 숙식장소는 멀리 넘실거리는 섬진강 푸른 물결이 보이는 피아골 부근의 한 식당이었다. 당시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간사였던 양세진씨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국감연대에 참여한 단체는 40여개지만 각각의 사정으로 이날 MT에 참가한 단체는 12개였다. 참여연대를 비롯해 환경연합 여성연합 녹색연합 한국교회여성연합 참교육연합회 민언련(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행개련(행정개혁시민연합) 등의 단체가 참가했다. 경실련은 내부 사정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참가 인원은 20여명.

    이날 모임의 주된 목적은 국감연대 활동에 대한 자체평가와 향후 운동 계획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참여연대 이태호 시민감시국장이 발제를 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국회가 국민 앞에 닫혀 있다는 사실이 이번 국감연대활동을 통해 확인됐다. 정치권의 이런 문제점은 평상시엔 해결할 수 없다. 선거 시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의정 감시의 핵심은 선거 감시이며 선거 감시는 곧 당락 감시다. 유권자인 국민을 무시하는 정치인들을 총선에서 심판해야 한다.”

    토론에서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동의한고 했다. 저마다 정치권을 성토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지난번 국감을 통해 정치권 개혁이 얼마나 절실하고 또 요원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낀 터였다. 각 상임위는 국회 경비를 동원해 시민단체 관계자들을 강제로 쫓아내는가 하면 아예 방청을 불허하기 일쑤였다. 한마디로간섭이나 감시를 받기 싫다는 오만한 태도였다. 이태호 당시 국감연대 공동사무국장의 회고.

    “국감연대를 하며 정치권이 얼마나 거대한 벽인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우리는 그때 절망했어요. 아, 이대론 도저히 안 되겠다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입니다.”

    국정감사 감시운동에서 태동

    시민단체들 사이에서 국감연대운동이 처음 거론된 것은 99년 6월. 기윤실의 첫 제의로 40여개 단체가 뜻을 합했다. 그들은 공동사무국을 설치하고 역할을 분담했다. 각 단체의 전문성을 살려 14개 상임위원회에 골고루 배치했다. 준비기간을 거쳐 9월20일 국정감사모니터시민연대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첫날 보건복지위 국감을 감시한 후 베스트·워스트 의원을 선정하자 정치권이 즉각 반발했다. 10월11일. 시민 모니터 요원의 국감방청을 허용하지 않는 상임위가 9개로 늘었다. 국감연대의 자체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95%가 베스트·워스트 의원 선정을 지지했다. 인터넷에서 확인된 네티즌들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돌이켜 보면 국감연대의 베스트·워스트 의원 선정이야말로 낙천·낙선운동의 뿌리였던 셈이다.

    시민단체의 선거참여 방식에 큰 변화가 온 것은 95년. 4개의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거치면서 시민운동권에선 공선협(공명선거협의회)의 한계를 인식했다. 그에 따라 정책 캠페인 위주로 운동의 방향을 바꿨다. 후보자의 정책을 평가하고 시민단체의 정책을 지지하는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선거법이었다. 선거법에 따르면 시민단체는 선거 운동을 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선거법 개정으로 관심이 집중됐다. 시민단체의 발목을 잡는 선거법 87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선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못하냐, 무슨 말을 들을 필요가 있냐, 의원들의 이런 의식에 위협을 주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뿌리 깊은 좌절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공선협이 제 기능을 못하고 정책 캠페인도 선거법에 걸려 안 되고 국감 감시도 의원들의 거부로 안 되고…. 정치권 개혁을 위해선 더 강력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낙천·낙선운동은 지리산 MT를 기점으로 점차 뼈대를 갖췄다. 2주 후 뜻을 함께하는 시민단체 실무자 7∼8명이 모여 제1차 실무자협의회를 열었다. 이들은 그후 4차례 더 모였다. MT도 갔다왔다. 그 결실은 12월17일 오후 2시 서울 종로의 걸스카우트회관 10층에서 열린 6개 시민단체의 대표자 간담회였다.

    이날 모임은 총선시민연대 결성의 전주곡이었다. 박거용 교육관계법대책위 공동대표,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 최열 환경연합 사무총장, 장원 녹색연합 사무총장, 성유보 민언련 이사장, 이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등 내로라하는 시민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시민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뒷날 총선시민연대 대변인을 맡은 장원 사무총장의 기억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선 ‘강경 발언’이 주류를 이뤘다. “정치권이 굉장히 오염돼 있다” “아주 강력히 대처하지 않는 한 정치권 개혁은 요원하다” “(낙천·낙선운동) 명단을 발표해야 한다” 등 울분에 찬 얘기들이 쏟아졌다. 신중론은 거의 없었다.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행동을 같이 하자”고 결의했다. 회의가 끝난 후 이들은 국회의원들에 대한 평가를 통해 공천반대 및 낙선 대상자를 선정, 이들을 정치권에서 추방하기 위한 광고·홍보활동을 펼치는 한편 시민단체의 선거운동 참여를 가로막는 선거법 87조 철폐운동을 펼쳐나가겠다고 밝혔다.

    다음날인 12월18일엔 실무자들의 토론회가 마련됐다. 토론 주제는 ‘2000년 총선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총선시민연대 구성을 위한 실무적 토론이었다. 우선 전의(戰意)부터 다졌다. 불법을 감수하고라도 낙선운동을 강행하는 데 동의하는 단체들만 참여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반면 공천반대자와 낙선대상자를 정하는 방법에 대해선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논란 끝에 선정기준은 보통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데에 합의하고 기본자질 평가를 최우선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부패·선거법위반·반인권·반민주주의 전력 등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준들을 우선 적용하되 지역감정 유발, 여성비하 등 특정 행위에 대해선 별도의 평가를 덧붙이기로 했다.

    실무 대표자들은 각 단체 대표자 연명으로 제안서를 만들었다. 그후 열린 대표자 간담회에선 준비모임을 이끌 공동대표 3명을 뽑았다. 박상증 참여연대 공동대표, 지은희 여성연합 상임공동대표, 최열 환경연합 사무총장이 맡았다. 불법운동이라는 점을 감안,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제2, 제3의 대표단까지 내정해 두었다. 상당히 비장한 분위기였다. 참여연대가 공동사무국 사무실을 마련키로 했다. 초기 가입단체는 매월 30만원씩 분담금을, 뒤에 가입하는 단체는 10만원씩의 회비를 내기로 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그간 시민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경실련의 행적. 총선시민연대 관계자에 따르면 낙천·낙선 움직임에 소극적인 동조를 보이던 경실련은 12월18일을 분기점으로 대열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경실련은 이날 토론회에 불참했다. 총선시민연대측에 따르면 초청장을 보냈는데 공식 불참을 통보했다는 것.

    그러나 경실련측 주장은 조금 다르다. 이석연 사무총장은 “공식초청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경위야 어떻든 경실련은 그후 독자적으로 행동한다. 명분은 합법적인 선거운동을 펼치겠다는 것. 일부에선 이를 시민운동의 주도권 다툼으로 비판하지만 경실련측엔 그럴 만한 명분이 있었다. 경실련은 99년 초 문제의 선거법 87조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11월25일 합헌결정을 내렸다. 낙천·낙선운동에 뜻을 같이 하는 시민단체들이 준비모임으로 분주할 때였다. 이사무총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경실련은 10년 동안 합법운동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합법성을 강조해온 경실련이 헌재의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그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12월22일 마침내 공동사무국이 문을 열었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참여연대 옆 안국빌딩 2층이었다. 가장 시급한 일은 낙천·낙선 대상자 선정의 기준이 될 기초 자료 수집이었다. 뒤에 총선시민연대의 정책기획국장을 맡은 참여연대 이태호 시민감시국장을 팀장으로 한 자료조사팀이 만들어졌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의 이강준 간사가 부팀장을 맡았다. 12명의 상근자와 1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은 예비조사와 본조사를 합쳐 꼬박 한달 동안 자료조사에 매달렸다. 총선시민연대의 탄생은 이들의 눈물겨운 밤샘 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사팀은 먼저 15대 국회의원 속기록, 국회 출석기록, 법안발의 현황자료, 재산공개 자료, 공약사항 기록, 국감요구자료 등 국회 자료를 수집했다. 거기에 각 시민단체의 의정활동 모니터 자료들을 덧붙였다. 그밖에 모든 일간지와 주·월간지 기사, 그리고 국보위 백서 등 수백권의 단행본을 모았다. 15t 트럭 한 대 분량의 방대한 자료였다.

    2000년을 사흘 앞둔 12월28일. 총선시민연대 준비위원회는 서울 명동에서 가두집회를 가졌다. 20세기와 더불어 낡은 정치도 사라지기를 염원하는 송년집회였다. 최열 환경연합 사무총장이 사회를 맡은 이날 집회는 많은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날 이후 낙천·낙선운동이라는 말이 언론에 공공연히 등장했다.

    성공적인 여론화와는 별개로 각 참가단체 실무자들 사이에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간부회의가 열리면 대세는 ‘낙선’을 못박고 가자는 쪽이었다. 반면 소수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불법성과 고의성을 너무 강조하면 정치권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고 법적 시비에 휘말려 운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엉뚱한 데 힘을 뺄 수 있다는 신중론이 만만찮았다. 특히 지방 시민단체들이 부담스러워 했다.

    여론 업고 초반 대세 장악

    지역 단체 대표자 간담회에선 낙선운동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과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나왔다. 그에 따라 일단 ‘낙천’에만 주력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으나 실무진의 고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강경론자들은 내심 ‘초반에 어떤 모양을 취하든 결국은 낙선운동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참가단체들의 이런 내부 갈등을 해결(?)해준 것은 공교롭게도 독자노선을 걷던 경실련이다. 경실련이 합법성을 강조하며 은근히 시민연대측의 불법성을 비판하자 분위기가 바뀐 것. 1월7일 시민연대측 지도부는 강경으로 돌아섰다.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은 “원칙을 고수하는 소수만 가자”며 선명성 기치를 내걸었다. 정치권도 그쯤부터 낙천·낙선운동에 대해 불안감이 담긴 논평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은 시민연대측은 세불리기에 나섰다. 그간 참여를 희망하는 단체의 가입 여부를 엄격히 심사하던 편이었는데, 그때부터는 기본 취지에 동의하는 단체라면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다 받아들였다. 십 단위에 머물던 참여단체의 수가 순식간에 백 단위로 올라섰다. 총선시민연대 김기식 부대변인에 따르면 그것은 전쟁 선포였으며 그때부터 조직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100여 단체가 한꺼번에 가입한 날도 있었다. 가입 단체 수는 며칠 만에 400여개로 늘었다.

    그런데 돌발변수가 생겼다. 1월10일 경실련이 총선 부적격인사 164명의 명단을 전격 발표하는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 보기에 따라선 시민단체들의 분열로 비칠 만했다. 총선시민연대의 한 간부는 당시 경실련의 명단 발표에 대해 노골적인 비난을 감추지 않았다.

    “다들 격앙했어요. 경실련이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같이 가자는 제의를 끝내 거절하고선 다른 단체가 하는 일에 합법이니 불법이니 운운하는 것도 부당한 일이었는데, 이쪽이 먼저 위험을 감수하며 합법 공간을 만들어 놓은 후-당시 선관위가 모호한 해석을 내놓았거든요-그런 식으로 터뜨리니 우리로선 황당한 일이었지요. 리스트에도 문제가 많았지요. 경실련의 리스트는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을 줬습니다.”

    경실련이 ‘적전 분열’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선수’를 친 데는 어떤 속사정이 있는 걸까. 이석연 사무총장에 따르면 경실련은 ‘졸속’이라는 일부 주장과 달리 12월초부터 명단 공개를 위한 준비작업을 해왔다고 한다. 이총장은 경실련의 ‘독자 행동’을 이렇게 해명했다.

    “지난해 11월 사무총장에 취임한 후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과 낙천·낙선운동의 방법에 대해 몇차례 협의했어요. 그런데 10년 동안 합법운동을 해온 경실련에는 건전한 진보를 지향하는 세력의 뿌리가 매우 깊어요. 정치개혁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선거에 참여한다는 뜻은 같았지만 방법 면에서 시민연대측과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경실련의 명단 발표는 낙천운동이 아닌 정보공개 차원이었던 것입니다.”

    최초의 ‘살생부’ 작성되다

    경위야 어쨌든 경실련의 명단 발표는 시민단체와 정치권의 전쟁을 앞당기는 촉매제 구실을 했다. 각종 여론조사에 나타난 민심은 시민단체의 선거운동을 지지하고 있었다. 1월12일 마침내 총선시민연대가 공식 출범했다. 1월9일 실시했던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부패·선거법위반·민주질서파괴·반인권전력 등을 공천반대의 주요 기준으로 발표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박원순 상임공동집행위원장은 “법이란 내용이 정당해야 법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악법’에 대한 불복종을 선언했다. 주요 참여단체들은 공동사무처 파견자 수를 늘렸다. 각 단체는 또 각자의 고유사업을 전면 보류하고 올 상반기엔 낙천·낙선운동을 통한 정치권 개혁에 집중하기로 뜻을 모았다. 상근자 수는 30여명으로 늘어났다.

    조사팀은 전·현직 의원 329명에게 공문을 보냈다. 1월14일부터 의원들의 소명자료가 쏟아져 들어왔다. 14일 하루 동안 70여건의 답변서가 들어왔다. 1월15일 총선연대사무실에서 상임집행위원회 1차 회의가 열렸다. 공천반대 검토대상자로 95명이 선정됐다. 최초의 ‘살생부’였다.

    다음날인 1월16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오후 3시 ‘100인 유권자위원회’가 서울 마포동에 있는 민언련 강당에서 첫 회의를 열고 공천반대 대상자 선정기준과 1차 선정대상자 중 논란이 되는 10여명을 심의했다. 참가 인원은 61명. 이들은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제시한 지역별·성별·연령별 기준에 따라 500여개 참가단체 소속 회원과 일반 시민 중에서 선정된 사람들이다.

    1월17일 여권은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시민단체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선거법 87조 폐지를 비롯한 선거법 개정 재협상에 나섰다. 야당 또한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재협상에 반대하지 않았다. 한편 중앙선관위는 이날 전체회의를 열고 선거법 87조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한 시민이 박원순 집행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낙선운동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며 3000만원을 기부했다.

    1월18일 오후 2시. 상임대표단 및 상임집행위원장단 회의가 열렸다. 상임공동대표단은 김정헌(문화연대 대표) 김중배(언개련 공동대표) 박상증(참여연대 공동대표) 성유보(민언련 이사장) 송기숙(광주·전남정치개혁포럼) 지은희(여성연합 공동대표) 최열(환경연합 사무총장) 오충일(기사협 공동대표) 이남주(YMCA연맹 사무총장)씨 등 10명으로 구성됐다. 대표단회의에서 명단에 변동이 생겼다. 공천반대 대상자 중 그 사유가 명확히 입증되지 않는 18명이 탈락, 77명으로 줄어든 것. 77명은 ‘가확정자’와 ‘판단 유보자’로 분류됐다.

    1월19일엔 정책자문단이 출범했다.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147명의 교수들로 구성된 정책자문단은 기자회견을 통해 낙천·낙선운동을 ‘한국판 시민혁명’으로 규정하며 적극적인 지지활동을 다짐했다. 정책자문단은 이날 오후 ‘100인 유권자위원회’의 자문을 거친 명단선정 기준을 심의했다.

    예정대로라면 명단은 1월20일에 발표했을 것이다. 그러나 총선시민연대는 1월17일쯤 일정 연기를 검토했고 다음날 이를 공식 발표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정치적 의혹을 제기했다. 여권 신당인 새천년민주당 창당일이 1월20일이었기 때문. 그러나 총선시민연대측에 따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첫째 요인은 정치권의 태도였다. 낙천·낙선운동이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자 공천 연기가 불가피했던 것. 실제로 이때쯤 여야 지도부는 모두 시민단체의 공천반대명단을 적극 반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청와대의 적극적인 지지 표명도 분위기 조성에 한몫했다. 어차피 공천 일정이 늦춰진다면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게 총선시민연대 지도부의 판단이었다. ‘부실’이라는 비판을 받은 경실련 발표의 전철을 밟을까 염려해서였다.

    또 다른 변수는 의원들의 소명자료였다. 예상외로 엄청난 양의 답변서가 밀려들었다. 1월19일이 마감일이었는데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소명자료는 1월22일까지 들어왔다. 모두 131명의 의원들이 170여건의 소명서를 보내왔다. 그 방대한 소명자료에 대한 완벽한 검토를 끝내지 않은 채 섣불리 명단을 발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시민들의 제보도 지속적인 검토 대상이었다. 자체 자료와 소명 자료 그리고 제보 자료, 이 세 가지에 대한 교차 검증이 필요했다.

    서울대 총학생회가 낙천·낙선운동 지지선언을 한 1월20일. 총선시민연대의 ‘극비작전’이 개시됐다. 오후 7시 서울 시내 P호텔. 총선시민연대 실무자 4명이 15층에 방 2개를 빌렸다. 남자 둘, 여자 둘이었다. 김기식 공동사무처장과 이태호 정책기획국장, 이경숙 여성연합 정책부장과 참여연대 정책부장 문혜진씨가 그 주인공. 그들은 이날부터 그곳에서 합숙하며 명단 선정 및 보고서 작성을 위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데스크톱 컴퓨터 한 대와 노트북 2대, 프린터 등을 들여놓았다. 이들의 P호텔 합숙 사실을 아는 사람은 총선시민연대의 고위 관계자 한두 명뿐이었다.

    자료조사팀은 이날부터 2개 팀으로 운용됐다. P호텔로 들어간 ‘모처팀’과 바깥에서 자료 제공을 하는 ‘현장팀’이 그것. ‘모처팀’이 호텔로 싸들고 들어간 자료는 두꺼운 파일 15개 분량에 디스켓 수십개. 이 자료들은 어느 정도 요약된 것들이었다. 반면 ‘현장팀’은 새로 들어오는 소명자료와 시민 제보 등을 검토해서 ‘모처팀’에 제공하는 한편 ‘모처팀’이 작업 중 특정 사안 확인을 요청하면 국회나 검찰 또는 법원에 가서 자료를 구해왔다. ‘현장팀’ 책임자는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의 이강준 간사다. 소명자료는 김타균 공보국장(녹색연합 정책부장)이, 추가자료 수집 및 조사는 이지현 간사, 홍욱철씨(녹색연합간사) 등이 맡았다.

    P호텔에서 4박5일 비밀작업

    ‘모처팀’은 보안유지를 위해 식사할 때만 빼놓고는 호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첫날 아무 생각 없이 초밥을 시켰다가 1인분에 6만원이라는 사실에 놀라 그뒤로는 밖에 나가 사먹었다. 아침은 토스트로 해결했다. 한번은 식당에서 삼겹살을 시켜 먹는데 누가 대신 식비를 냈다. 한참 먹고 있는데 주인이 다가와 말하길 “옆자리에 앉았던 손님이 나가면서 ‘저 사람들 고생한다’며 밥값을 내주고 나갔다”는 것이다. 새벽 3시에 배가 고파 포장마차에 들렀다가 주인이 얼굴을 알아봐 당황한 적도 있었다. 그때쯤 언론에는 ‘경기도 모처설’이 보도되고 있었다.

    ‘모처팀’이 호텔에 머무른 기간은 4박5일. 1월20일 오후에 들어갔다가 명단 발표 당일인 1월24일 아침에야 나왔다. 1월18일 상임대표단 회의에서 결정된 77명의 ‘후보’들이 주된 검토대상이었지만, 1차 명단에서 탈락한 18명의 ‘예비후보군’에 대한 자료도 여전히 검토대상이었다.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는 대로 ‘명단 대열’에 합류시키기 위해서였다. 김기식 사무처장이 대상 의원 및 보좌관들을 상대로 사실확인 작업을 벌였고, 이태호 정책기획국장은 보고서 및 기자회견 발표문을 작성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자료 정리 및 입력 작업을 했다.

    “하루 평균 3∼4시간밖에 자지 못했어요. 작업량이 많기도 했지만 한 사람의 정치생명이 왔다갔다 한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돼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굉장한 스트레스였습니다.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작업이었어요. (명단에) 넣어야 할 사람이 빠진 건 아닌지, 빠져야 할 사람이 들어간 건 아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확인된 사안에 대해서도 몇 번씩 다시 확인했어요. 99%가 확인됐지만 1%가 확인되지 않아 뺄 때는 그렇게 허탈할 수가 없었습니다.”

    호텔 작업과정에 ‘혐의점’이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5명이 명단에서 탈락, 낙천대상에 오른 전·현직의원의 수는 72명으로 줄었다. 의원들의 해명은 제각각이었다. 고스톱으로 물의를 빚은 한 의원은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눈병이 나서 하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호화외유 파동에 휘말렸던 또다른 의원은 “다른 의원들이 고급 양주를 산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안 샀다”고 결백을 호소했다.

    조사팀이 확인 전화를 걸면 의원들과 보좌관들은 안절부절못했다. 비교적 경미한 사안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다. 서울역에서 지방행 기차를 기다리던 모 의원은 보좌관으로부터 총선시민연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크게 문제가 될 사안은 아니었지만 그 의원은 일정을 취소하고 황급히 의원회관으로 돌아가 자료를 검토하고 직접 답변에 응했다.

    자료팀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의원은 자민련 이건개 의원. 이 의원은 비슷한 내용의 소명자료를 30회 가까이 보냈다. 그는 슬롯머신 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데 대해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자료팀이 확인한 결과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그는 2심에서 일부 사항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문제는 그가 사면복권됐다는 점. 무죄판결을 받았다면 굳이 사면복권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마지막날까지 자료팀과 전화로 입씨름을 했다. “난 무죄예요.” 자료팀이 “사면복권은 형이 확정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 아니냐”고 되묻자 이의원은 말을 더듬었다. “아, 그게 말이죠. 무죄예요, 무죄.” 그는 통화 내내 한숨을 내쉬며 “난 무죄예요, 무죄”를 되풀이했다.

    한편 평소 거친 입담으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던 한나라당의 이사철 의원은 1월24일 발표된 1차 낙천대상 명단에 자기 이름이 없자 총선시민연대 관계자에게 전화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혁명 전야(前夜)

    D-2일인 1월22일 오후 2시. 참여연대 1층 강당. 상임대표단 집행위원장단·정책자문단·자문변호인단의 연석회의가 열렸다. P호텔에서 빠져 나온 김기식 사무처장이 그간의 작업결과를 보고했다. 연석회의 참석자들은 김사무처장이 가져온 기초자료보고서를 토대로 명단 선정기준을 확정지었다. 회의가 끝난 후 김사무처장은 P호텔로 되돌아갔다. 이제 기자회견 때 내놓을 자료집 마무리 작업만 남았다.

    D-1일. 1월23일 오후 7시. 김사무처장은 최종보고서를 들고 성가수녀원으로 달려갔다. 수녀원은 총선시민연대 관계자들과 전국 각지에서 모인 ‘100인 유권자위원회’에 속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 수녀원은 평소 녹색연합이 회의장소로 애용하던 곳이었다. 김사무처장은 유권자위원회에 명단선정작업 전 과정을 보고했다. 이어 명단에 오른 전·현직 의원 72명의 공천반대사유를 설명했다. 유권자위원회는 배심원이어서 심의는 하되 결정권은 없었다. 70여명의 유권자위원회 위원들은 선정 기준 및 공천반대자 명단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상자 기사 참조).

    이어 밤 9시40분부터 12시40분까지 세시간 동안 상임대표단·집행위원장단·정책자문단의 연석회의가 열렸다.

    장원 대변인에 따르면 그때까지 명단에 대한 보안은 거의 완벽했다.

    “특정인의 의견이 선정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어요. 대부분의 간부가 수녀원 연석회의에서 처음 명단을 봤습니다. 누구를 봐주자고 얘기하면 왕따 당하는 분위기였습니다.”

    ‘100인 유권자위원회’의 심의 결과를 반영해 최종 명단을 선정했다. 5명이 다시 빠져나가 67명이 됐다.

    연석회의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을 일으킨 정치인은 민주당의 김상현 의원이었다. 김의원은 한보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점이 문제가 됐다. 법정에선 정치자금으로 인정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유권자위원회를 통과한 김의원이 구제 대상으로 검토된 것은 그의 민주화운동 경력과 환경운동에 대한 지지와 후원활동 때문이었다. (명단에) 넣자는 쪽과 빼자는 쪽의 논쟁이 불붙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김의원은 명단에 그대로 남게 됐다. 박원순 집행위원장은 이를 “논리에 진 안타까운 경우”라고 설명했다. 박집행위원장에 따르면 “민주화운동을 하다 고문까지 당한 인사를 보호하지 못한 채 무슨 개혁을 할 수 있느냐”는 격렬한 반론까지 나왔다는 것.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와 무소속 정몽준 의원도 논란의 대상이 됐으나 구제되지는 못했다. 역시 유권자위원회의 투표를 거쳤던 민주당 박상천 의원은 법무장관 시절 대전지검장에게 특정 사건과 관련해 압력성 전화를 건 일이 문제가 됐다. 이인제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명단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으나 선정기준에 딱히 맞아떨어지는 사유가 없어 논의 대상에서 빠졌다.

    77명에서 72명으로, 다시 67명으로 줄어드는 과정에 구제된 전·현직 의원들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 이강두·서정화 의원, 민주당의 김옥두 사무총장과 정한용·홍문종 의원, 자민련의 변웅전 의원 등이 있다. 그밖에 이한동 자민련 총재권한대행과 한나라당 서훈 의원도 최종 검토단계에서 빠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찬·정대철 전의원 등 민주당 중진들은 15대 국회에서 활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검토 대상에서 아예 빠졌다.

    성가수녀원에서 최종 ‘살생부’가 만들어지던 그 시각 이태호 기획조정국장은 P호텔에서 기자회견문을 다듬고 있었다. 그가 김기식 집행위원의 전화를 받은 것은 밤 1시가 넘어서였다.

    “XXX 의원, XXX… 빼래.”

    “왜 빼요. 그 사람들 다 확인했는데.”

    “하여간 그렇게 결정됐어. 2차 발표가 또 있잖아. 그때 들어갈 수도 있겠지.”

    김기식 사무처장이 P호텔로 돌아간 것은 밤 1시가 넘어서였다. 정책자문단에 속한 교수 몇 명과 함께였다. 자료팀의 최종작업이 끝난 것은 새벽 4시반. 기자회견은 오전 10시에 열릴 예정이었다. 두 사람이 디스켓을 들고 을지로에 있는 인쇄소로 날아갔다. 책자 제본 작업이 진행될 무렵 한국 정치사에 길이 기록될 운명의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1월24일 낙천대상 명단이 발표되자 정치권은 경악과 충격에 휩싸였다. 대상에 오른 일부 정치인이 강력히 반발하는 가운데 여야 지도부는 낙천대상 명단을 공천에 어느 정도 반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여론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당일 문화방송이 갤럽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4월 총선에서 낙천명단에 오른 정치인을 ‘지지하지 않겠다’(73.7%)는 의견이 ‘지지하겠다’(16%)는 의견보다 훨씬 많았다. 인터넷 한겨레가 네티즌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에서도 78%의 응답자가 ‘지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지지하겠다’는 의견은 11%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날인 1월25일. 명단에 오른 민주당 총무 박상천 의원이 13쪽에 이르는 장문의 반박문을 발표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한나라당 김중위 의원은 법적 대응에 나섰다. 허위사실유포 혐의로 총선시민연대 대표자들을 고소한 것.

    그날 이른바 음모론이 제기돼 낙천대상명단 파동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명예총재인 JP를 비롯해 상당수 간부가 명단에 포함된 자민련의 반격이었다. 자민련 김현욱 사무총장은 이날 청와대와 시민단체의 커넥션 의혹을 제기하며 낙천·낙선운동의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고 주장했다. 청와대와 총선시민연대측은 음모론 주장에 즉각 반박하며 자민련측에 증거를 댈 것을 요구했다. 음모론 공방은 여권의 분열을 불렀다. 민주당과 자민련은 마침내 결별을 선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민혁명의 포격이 겉으로만 단단해 보일 뿐 실은 허술하기 짝이 없던 여권 공조의 성벽을 무너뜨린 셈이다.

    총선시민연대는 음모론에 대해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기식 공동사무처장의 말.

    “음모론이 말이 안 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준 설정이 사람 선정에 앞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낙천대상의 요건을 먼저 정한 뒤 그에 해당하는 정치인을 찾은 겁니다. 기준과 기준 적용방법에 대한 논의가 끝나는 순간 사람을 넣고 빼는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돼버렸습니다. 그 과정엔 누구도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음모론 공방에 아랑곳없이 혁명의 불길은 전국으로 번졌다. 부산을 비롯한 5개 대도시와 각 도의 시민단체들은 독자적인 낙천·낙선운동을 위한 연대기구 결성에 나섰다. 20여개 단체가 연합한 인천행동연대는 따로 인천 지역의 공천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하기도 했다. 수도권에선 경기 지역 70개 시민단체가 경기총선시민연대를 결성했다. 충북에선 37개 단체가, 대전·충남에선 40개 단체가 낙천·낙선운동을 위한 연대를 위한 준비모임을 가졌다. 영남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구에선 48개, 경남에선 26개, 부산에선 60여개의 시민단체들이 1월말 또는 2월초 연대기구 결성을 목표로 준비에 들어갔다.

    김상현의 단식

    낙천대상 명단에 오른 김상현 의원이 총선시민연대에 공개토론을 제의한 1월26일. 김창국 이세중씨 등 대한변호사협회의 전·현직 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총선시민연대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이들은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법적 시비가 벌어질 경우 무료변론을 하겠다고 밝혔다. 법질서 수호의 상징 격인 변협의 지지선언은 불법 운동 시비에 부담을 갖고 있던 총선시민연대측에 커다란 힘이 됐다.

    시민들의 격려 전화와 지지방문 횟수가 늘고, 후원금 액수가 날로 커지는 가운데 음모론에 대한 각계의 비판이 줄을 이었다. 그중 언개련(언론개혁시민연대)과 언론노련(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은 음모론의 증거를 내놓지 못하는 자민련을 규탄하는 것은 물론 언론의 태도를 문제삼았다. 주요 언론이 사실 관계에 대한 확인 없이 음모론을 중계해 의혹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한편 총선시민연대의 인터넷 홈페이지(www.ngokorea.org)에 설치된 자유게시판에도 변화가 생겼다. 명단 발표 전 올라온 글들은 대체로 낙천·낙선운동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발표 후엔 총선시민연대를 비난하는 글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총선시민연대에 따르면 비난 일색의 글들이 무더기로 올라오는 때는 주로 새벽. 낙천대상 명단에 오른 정치인의 지지자들이 항의 표시로 올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1월30일. 총선시민연대는 서울역에서 낙천·낙선운동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장외집회를 열었다. 183개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4000여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총선시민연대는 이날을 ‘국민주권 선언의 날’로 선포했다. 한편 이날 김기식 사무처장과 이태호 정책기획국장을 주축으로 한 자료조사팀은 2차 명단 선정을 위한 마지막 확인 및 정리 작업에 들어갔다.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시내 모 호텔에 합숙했다. 1월31일 오후 7시. 조사팀은 정리한 자료를 상임공동대표단·집행위원장단 연석회의로 넘겼다. 심의 결과 원외 60명과 15대 의원 8명이 낙천 대상자로 선정됐다. 조사팀은 추려진 대상자들에 대해 정밀조사를 벌이고 자료를 정리했다.

    이 자료를 토대로 2월1일 오후 7시부터 ‘100인 유권자위원회’의 토의가 시작됐다. 1차 때와 달리 서울 합정동에 있는 수도원 복지시설 ‘밀알의 집’에서였다. 1차 때 음모론의 파편을 맞은 ‘성가수녀원’이 이번엔 장소 제공을 거절한 탓이다. 유권자위원회에 이어 법률자문단의 검토를 거친 명단은 상임공동대표단·집행위원장단 연석회의로 넘어갔다. 2월2일 새벽 명단이 확정됐다. 원외 41명, 현직 의원 6명이었다. 6명 중 3명은 1차 때 후보에 올랐다가 막판에 ‘구제된’ 사람들이다. 2차명단은 이날 오전 10시에 발표됐다.

    2월1일 총선시민연대는 새로운 원군을 맞았다. 그간 ‘따로 놀던’ 경실련이 기자회견을 통해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을 지지한 것. 경실련은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이 선거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며 힘을 합칠 것을 다짐했다.

    한편 명단에 오른 정치인들의 저항도 거셌다. 한나라당 김중위 의원을 비롯해 모두 8명이 총선시민연대 대표자들을 선거법 위반 및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반면 발표 직후 줄곧 억울함을 호소하던 김상현 의원은 2월1일 공개토론회를 요구하며 총선시민연대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평소 친분이 있던 최열 상임공동대표, 박원순 집행위원장, 장원 대변인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2월3일. 총선시민연대는 고민 끝에 김의원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김의원은 3일간에 걸친 철야단식농성을 풀었다.

    낙천대상자들 격렬한 저항

    김의원이 물러간 직후인 2월3일 오후. 총선시민연대 간부들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번엔 2차 낙천명단에 오른 이철용 전의원 때문이었다. 발표 당일인 2월2일 총선시민연대에 찾아와 한바탕 소동을 피운 이전의원의 항의는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자신은 97년에 한보로부터 돈 받은 사실이 없으므로 명단에서 이름을 빼달라는 요구였다. 실무자들에게 욕설을 퍼붓던 그는 박원순 집행위원장에게도 거친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섬뜩한 말들이 사무실 주변을 에워쌌다. 총선시민연대 관계자들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뚜렷했다. 양측의 절충으로 2월7일 이전의원과 총선시민연대 관계자가 함께 대검을 찾았다. 이전의원에 대한 수사기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총선시민연대는 2월10일 결국 이전의원을 ‘잠정적으로’ 명단에서 뺐다. 사실확인이 불충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까지 대검은 관련기록을 내놓지 않았다.

    2월8일 밤. 낙천·낙선운동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랜 협상 끝에 이날 본회의를 통과한 선거법 개정안이 정치권 개혁에 대한 국민의 염원을 저버렸던 것. 개정 선거법은 겉으로는 시민단체의 선거참여를 허용했다. 그러나 유인물 현수막 집회 등을 금지하는 규정은 사실상 시민단체의 발목을 묶는 것이었다. 결국 이전 선거법과 비교해 달라진 게 없었다.

    선거법 개정안에 대한 분노는 낙천·낙선운동의 열기와 합쳐졌다. 2월9일. 총선시민연대는 개정 선거법에 대한 ‘시민불복종 운동’을 선언했다. 그동안 침묵하던 종교계도 꿈틀거렸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를 비롯한 21개 단체가 연합한 ‘2000년 총선 불교연대’는 이날 선거법 재개정을 요구하는 한편 총선시민연대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22개 기독교 단체들도 ‘새로운 정치와 바른 선거를 위한 기독교 총선연대’를 구성했다. 정치권 개혁의 열풍은 영화계에도 불어닥쳤다. 몇몇 영화단체와 명계남 문성근씨 등 유명 배우들이 낙천·낙선운동에 동참하자고 호소했다. ‘대중음악 작가연대’는 총선 정국과 맞물려 최대의 화제곡으로 떠오른 이정현씨의 노래 ‘바꿔’를 총선시민연대측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 단체는 또 낙천대상 정치인들에겐 저작권을 내세워 이 노래를 사용치 못하게 했다.

    공천철회운동

    2월11일. 전국 시도에선 낙천·낙선운동에 동참하는 지역 시민단체들이 동시다발로 집회를 갖거나 서명운동 또는 시한부 농성에 들어갔다. 2월15일. 낙천·낙선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검찰이 이날부터 선거법위반으로 고소·고발된 시민단체의 대표자들을 소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출범 당시 ‘감옥에 가더라도 낙선운동을 한다’며 전의를 다지던 총선시민연대 관계자들. 그들은 과연 혁명 완수의 첫 고비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 김기식 공동사무처장의 답변은 명쾌하다.

    “당당하게 대응할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혹시 돌발상황이 생기더라도 우리의 운동 기조는 그대로 유지될 겁니다. 우리는 이미 명단발표라는 가장 어려운 일을 해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총선 때까지 대중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검찰에) 한두 번 가봤습니까.”

    최열 상임공동대표와 박원순 상임공동집행위원장이 검찰에 소환된 2월16일. 총선시민연대는 “낙천인사를 공천할 경우 공천철회운동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바아흐로 혁명의 제2막이 열린 것이다.

    한 시민의 ‘100인 유권자위원회’ 체험기

    고려대 독문학 강사인 안철택씨(40)는 1월 중순 총선시민연대로부터 ‘100인 유권자위원회’위원으로 위촉됐다. 안씨가 성가수녀원에 도착한 것은 1월23일 오후 4시. 고향인 경북 포항에 내려가 있다가 비행기로 상경, 공항에서 막 달려오는 길이었다. 양세진 총선시민연대 공동사무국장이 그를 맞았다. 5시쯤 되자 유권자위원회에 속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다. 외부 차단을 위해 휴대폰들을 반납했다.

    총선시민연대 공동사무처장인 조영숙씨(여성단체연합 정책실장)가 그간의 경과를 설명했다. 이어 수녀원 지하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오후 8시. 1층 강당에서 토론이 시작됐다. 먼저 연령대 별로 대표자가 일어나 간단한 자기 소개와 함께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안씨는 40대 대표로 일어나 시민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언론이 제대로 서야 시민운동도 성공한다”며 평소의 언론관을 밝혔다. 이 순서가 끝난 후 김기식 공동사무처장이 낙천대상 선정 기준을 밝혔다. 아울러 낙천대상 후보에 오른 72명의 명단을 공개하며 그 사유를 일일이 설명했다.

    김사무처장이 설명하는 동안 유권자위원회 위원들은 자유롭게 질문을 던졌으며 때론 논쟁이 붙기도 했다. 인천에서 온 사람들은 “왜 인천에선 한 명도 (명단에) 없냐”고 항의했다. 가장 먼저 논란이 된 대상자는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 “운동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선 JP를 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공천권자를 (명단에) 넣는다는 건 현실성이 없을 뿐더러 지역감정을 자극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곧 엄청난 반론이 쏟아졌다. 논란 끝에 거수로 표결에 부쳤다. JP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데에 서너 명을 빼곤 다 찬성이었다.

    정몽준 의원의 경우는 불꽃튀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정의원의 이미지에 호감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월드컵 유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애정이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표결에 부친 결과 6:4 정도로 명단에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이런 특수한 경우를 빼곤 토론장엔 대체로 강성 기류가 흘렀다. 유권자위원회 위원들은 대체로 낙천대상자가 너무 적다는 데 공감했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이한동 자민련 총재권한대행, 그밖에 이만섭·이사철·한영애 의원 등의 이름이 거론됐으나 적용할 기준이 마땅치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모두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공식 토론이 끝난 후 사람들은 수녀원 2, 3층에 마련된 숙소에 모여 얘기를 계속했다. 피곤한 사람들은 먼저 잤지만 밤늦게까지 열띤 토론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부분의 유권자위원회 위원들은 다음날 10시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총선시민연대의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그들이 휴대폰을 돌려 받은 것은 기자회견이 끝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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