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29일 오후 5시 그동안 내가 선거를 준비해온 강서구 화곡동 국민정치연구회 강서지부 사무실에는 긴장을 넘어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주말 오후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달려온 50여명의 사람들. 나와 더불어 삶의 무게를 나누던 분들, 선후배들, 선거 준비를 돕던 분들이 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과 중대한 결정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 기로에 서 있습니다. 제가 한평생 살아온 민주주의자의 길을 갈 것인가, 현실에 순응할 것인가. 정치개혁을 하겠다고 나선 후 활동하면서 저는 경선없는 공천제도는 민주주의를 부정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설령 제게 불이익이 올지라도 이런 문제를 알고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날 모임은 정치권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킨 ‘국민주권 회복을 위한 어느 민주주의자의 선택’을 발표할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최종 판단을 내리기 위한 자리였다. 눈시울을 적시며 뜻을 밝히는 내 비장함 속에는 이미 결론이 담겨 있었는지 모른다. 공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일부 우려도 있었지만, ‘민주주의자의 길을 가는 것은 의로운 일’이라는 격려 속에 ‘경선을 통한 상향식 공천운동’을 추진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비장한 각오
청와대 민정비서실 국장직의 사표가 1999년 12월 29일자로 수리되고 본격적인 선거전에 뛰어든 지 꼭 한 달만의 일이었다.
예상한 일이지만 함께 일하던 비서실 동료들로부터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 공천이 안될 것 같으니까 무모한 행동을 한다고 비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 담긴 충고를 들었고, 나를 아끼던 어느 분에게는 매서운 질책을 받기도 했다. 모두가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표현일 것이다.
“제 양심의 선택입니다. 전면적인 경선이 어렵다면 수도권이나 호남 등 일부 지역에서라도 경선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당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비록 공감을 얻지는 못했지만 내 주장을 견지했다. 지지와 격려도 적지 않았다. ‘함께 하는 시민행동’이라는 한 시민단체는 곧바로 성명을 내기도 했다.
“16대 총선과 관련하여 공천신청 과정의 민주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임삼진씨의 고백을 보고 한편으로는 우리 정치의 현실에 대해, 또 한편으로는 정치신인들의 현실에 대해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으며 기본적으로 임삼진씨의 주장에 지지를 보낸다.
진정한 정치개혁 없이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은 정말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치권에도 훌륭하고 역량을 지닌 많은 분들이 있고 또 그러한 분들이 정치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정치를 유지하는 시스템의 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정말 올바른 변화와 희망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천이라는 벽
군부독재의 폭압에 저항하여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의 외길을 고집해온 나는 지금도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눈물 없이는 부를 수 없을 만큼 대학시절의 민주화운동에 강한 감동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전태일 열사의 막내 여동생과 결혼한 사람이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대통령 비서실 근무까지 한 내가 ‘돌출행동’이라는 비난을 각오하면서까지 파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국회의원 출마 문제를 아내와 상의하는 것을 듣고 있던 초등학교 3학년짜리 장남이 “아빠, 그 지저분한 것을 꼭 해야 돼?”라고 물었을 때 나는 출마를 결심했다. 이 지경까지 돼버린 정치를 개혁하여 국민들에게 신선함과 감동을 주는 정치를 해보자, 국민들에게 희망의 샘물 역할을 하는 정치를 해보자는 결심이 확고히 섰다. 이런 소박한 신념을 주위 분들과 상의한 뒤 사표를 냈다.
먼저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2년반 가까이 살아온 터라 그래도 나를 아껴주는 분들의 격려로 기분 좋게 시작했다.
많은 주민을 만나면서 내가 시민운동이나 청와대 민정국장 시절에 알 수 없던 ‘현실’을 접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정치인으로서 사람을 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대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과 분노가 어디에 있고, 왜 있는지도 배웠다.
“4년간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선거 때 되니까 표 달라고 와서 굽실대고… 제발 그런 식의 정치는 마쇼.”
“IMF 한파로 국민은 어려울 때도 세비 한푼 깎지 않고 버티더니, IMF 극복하기도 전에 세비부터 올려? 정치가 서민들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어야지, 그렇게 서민을 배신해도 되는가.”
“다 바꿔야 돼. 참신한 사람들로 바꿔야지 원…”
극도로 심화된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은 정치신인인 나에게는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이 돼야죠’라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어느 놈이나 똑같지 뭐’ 하는 한통속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그 불신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주민들을 만나면서 정치를 설계하고 비전도 그릴 때 힘이 났다. 정치를 시작한 것이 잘한 일이고, ‘생활정치’가 얼마든지 가능하겠다는 확신도 들었다. 지역에서 주민들과 만나는 시간은 지역사회의 비전과 정치의 미래를 설계하는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특히 “젊고 개혁적인 사람이 돼야 한다”며 개혁을 강조하는 분들에게서는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공천’이라는 말이 가끔씩 김빠지게 했다.
“청와대 출신이니까 공천은 받아 왔겠죠? 일단 공천을 받아와야지. 공천 안 받으면 모든 게 허사일지도 몰라요…”
이런 말들 속에서 이 나라의 정치가 어디서부터 왜곡됐는지를 깨닫게 됐다. 어이없게도 강서갑에서 뛰는 내가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강서을 공천내정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장성민 전 청와대 상황실장도, 박홍엽 당 부대변인도, 박항용 변호사도, 늦게 뛰어든 이성재 의원도 하나같이 공천을 보장받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가 내정자입니까?”
그 사람의 정치적 비전이나 공약, 신뢰성 같은 것은 들어볼 것도 없다. 공천을 받아야 한다. 호남지역에서 활동하는 지지자들은 지역을 돌려는 후보들의 등을 떠밀며 ‘왜 시간 낭비하느냐, 중앙에 가서 공천 따와야지’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에게 공천은 정치의 모든 것인 셈이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정치 현실이다. 열심히 뛸수록 현실의 벽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움트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것인데, 주민들의 뜻과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공천이 결정되는 모순을 직접 겪게 된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지적돼온 하향식 밀실공천의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국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 기본원리에 역행하는 제도라는 점이다.
솔직히 나 자신도 ‘내가 공천 받으면 잘된 공천이고, 남이 공천받으면 문제가 있는 공천’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당내 민주주의니, 민주주의 원리니 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내 공천’이 중요할 뿐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현실 정치’에 관한 조언을 들었기에 ‘공천’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대통령 비서실 근무경험과 인간관계, 민주화운동 어른들의 신뢰, 이소선 어머니의 후원 등은 공천에 긍정적 요소들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현 정부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민주화운동의 어른들께도 “잘 말씀 드려달라”고 공천을 부탁드리기도 했다. 장모님을 모시고 핵심 실세라는 분들을 만나러 다니기도 했다. 그분들 가운데 일부가 시민단체들의 낙천후보로 발표된 후 정말 괴로웠다. 평생 민주화운동이라는 대의를 지키면서 곧게 살아오신 어머니를, 내 정치적 욕심으로 어머니께 허물을 드린 것은 아닌지, ‘욕심에 눈먼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정치가 뭐기에, 못난 사위가 어머니까지 이용하려 들다니’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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