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총선시민연대가 공천반대인사 리스트에 자민련 김종필(金鍾泌·JP) 명예총재를 포함시켜 ‘명예로운 정계은퇴’까지 권고한 것을 두고 당장 정치권에서 나온 말들이다. 물론 JP를 빼놓고 한국의 부패정치 척결을 얘기하고 낙천 낙선운동을 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는 시민단체의 충정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국정치는 누구도 예상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럭비공처럼 튀어가는 ‘불가측성’이 무시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특성인 것을….
한때 정치적 생명이 거의 끝난 것처럼 보이던 JP였다. 국무총리 자리에 있는 동안 JP는 내각제개헌 유보, 합당론 갈팡질팡 등으로 정치적 위상이 더 내려갈 데가 없을 정도로 추락한 상태였다. 충청권에서마저 “이젠 JP도 한물 갔다”는 분위기라고 자민련 의원들이 한결같이 푸념하던 JP였다. 그런 JP가 시민단체의 ‘정계은퇴 권고’를 받은 것을 계기로 오히려 기사회생, 충청권과 보수층에서 무시하지 못할 정치적 기반을 재확인하게 될 줄 과연 누가 예측했겠는가.
자민련이 전국적으로 번져가는 낙천 낙선운동에 대해 여권핵심과 시민단체의 ‘JP 죽이기 음모론’을 제기하고 급기야 ‘헌정질서 파괴책동 분쇄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어 기세를 올린 뒤 충청권 의원들은 금새 희색이 만연했다. “이런 기세라면 충청도 총선은 다 끝났다. 빨리 선거를 치렀으면 좋겠다”며 오히려 표정관리에 신경쓰는 기색이었다. 불과 며칠만에 충청권 민심이 거세게 요동친 것이었다. 만일 이런 정치적 파급효과를 JP가 사전에 충분히 예측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라면 JP는 과연 ‘정치 9단’임에 틀림없다.
이같은 충청권 민심의 격동은 ‘3김(金)구도’라는 복잡 미묘한 함수관계 속에서 JP가 차지하는 위상이 낳은 한국정치의 그로테스크한 일면으로 볼 수 있다. 권력으로부터 참기 어려운 모욕을 당하고 그래서 텃밭 주민들의 동정을 사 정치적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는 한국정치의 해묵은 풍토에다 JP라는 인물이 가진 묘한 신비감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일종의 ‘JP 신드롬‘인 것이다.
40년의 정치적 영욕을 지닌 JP는 그런 기묘한 한국정치의 생리에 누구보다 익숙해있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JP는 권력자로부터 핍박 당하고 모욕 당하면서 새로운 비상을 꿈꾸고 그러면서 묘한 즐거움을 누리는 일종의 ‘정치적 마조히스트’라고 얘기한다면 너무 심한 말일까.
‘5·16 군사쿠데타, 공화당 창당 때 4대 의혹사건, 80년 부정축재…’. 1월24일 시민연대측이 제시한 정계은퇴 권고 사유들은 JP에겐 죽을 때까지 따라붙을 ‘업보(業報)’나 다름없는 역사적인 사건들이다. JP도 늘상 자신에 대한 평가를 훗날의 역사가에 돌리려고 애를 써왔다. “어제의 공과(功過)에 대해선 역사가 판단해줄 문제”라는 게 JP의 지론. 자신의 공을 내세우는 뻔뻔함과 함께 과오에 대한 미안함도 다소나마 표시해온 JP였던 것이다.
날아온 화살을 청와대로 돌리다
95년 말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두 전직대통령을 감옥에 가둔 이른바 ‘5·18 특별법’에 대해 JP와 자민련은 “소급입법에 의한 헌정질서 파괴”라며 헌정질서 수호를 외쳤다. 그러니 당연히 JP의 ‘5.16 헌정파괴’ 전력(前歷)을 문제삼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JP의 반응은 이랬다.
“그래, 내가 그걸(헌정파괴를) 해봤으니까 (헌정파괴를) 해서는 안된다는 거야.”
JP는 평소 국민들의 ‘정치불신’이 극에 달했다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국민이 정치를 모욕하면 결국 국민이 정치로부터 모욕당하고 만다”고 말해왔다. 40년 정치역정을 거친 노정치인다운, 어쩌면 마치 자신이 직면하게 될 처지를 미리 예견하기라도 한 듯한 발언이었다. 작용과 반작용, 혁명과 반혁명…, 역사는 그렇게 움직인다는 ‘풍운의 정치인’다운 역사인식인 셈이다.
JP는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낙천자 명단이 발표되자마자 곧바로 ‘음모론’을 제기, 화살을 청와대와 민주당 쪽에 돌렸다. 물론 ‘음모론’의 시작은 JP와 자민련의 생존전략 성격이 강했다. 자신을 포함해 자민련 내 고위당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포함돼 “자민련 사람으로 명단에 못끼면 팔불출”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의 상황에서 더 이상 물러설 데도 없었다. 따라서 이건개(李健介) 의원 등이 제시했다는 시민단체와 여권핵심의 ‘커넥션’에 대한 정황증거만으로 공세를 시작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있다는 소식에 JP는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하긴 이보다 더한 일도 견뎌왔는데…”라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에게 창끝을 겨눈 세력이 여권핵심이라는 ‘의구심’이 들자 거침없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자민련이 곧바로 김성재(金聖在) 청와대정책기획수석과 이재정(李在禎) 민주당 정책위의장의 실명을 거론하며 ‘치밀한 각본극’이라고 단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민련은 또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빚어낸 작금의 정치상황을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비유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해 홍위병을 동원, 살벌한 숙청의 칼날을 휘둘렀던 세월에 현 상황을 빗대 ‘JP 죽이기’ 시나리오라고 치고 나간 것이다.
사실 자민련도 어렴풋이나마 이같은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나름의 공격 수순을 밟고 있던 참이었다. 자민련 이양희(李良熙) 대변인은 공천반대명단 발표 전날인 23일 김대중(金大中·DJ) 대통령이 시민단체의 정치활동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을 두고 “초법적 인치(人治)”라고 공격했다. 그 이전부터 국민회의가 새천년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꿔달면서 새 정당의 정강정책에 DJP합의의 핵심인 내각제문제를 제외한 데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해온 자민련이었지만 이처럼 DJ를 직접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심상찮은 대목이었다.
동상이몽으로 끝난 DJP 합당 협상
내각제는 언제부턴가 JP와 자민련에게 ‘존재의 이유’처럼 돼버렸다. 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만들어낸 DJP 후보단일화의 최대 전제조건 역시 내각제였다. 그런 내각제가 철썩같이 믿어온 상대방에 의해 휴지조각처럼 인식되는 데 대해 자민련은 극도의 불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말로는 하겠다면서 문서로는 안된다니 말이 되느냐”는 JP의 격한 분노에는 이처럼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지난해 내각제개헌 추진은 상황적 한계 때문에 유보했지만 이로 인해 JP는 너무도 큰 상처를 감수해야 했다. 자신의 최측근인 김용환(金龍煥) 의원은 ‘반(反)JP’ 기치를 내걸고 충청권에 반역(叛逆)의 둥지를 트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렇지만 JP는 DJ로부터 ‘약속은 유효하다’는 다짐을 받아뒀기에 이를 토대로 내각제 재추진을 내걸고 총선에 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유효기간이 지났는데…’라는 비아냥을 사게 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JP로선 당연히 공동정부를 유지하는 것 자체에 깊은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2여(與)합당 무산이 있었다. 합당 무산은 이런 갈등의 ‘예고편’이었다. 지난해 7월17일 DJP의 워커힐호텔 회동 이후 합당이냐 아니냐를 놓고 JP는 거듭 고민해왔다. 지난해 말 남미 순방 이후 ‘합당 불가’로 최종 입장을 결정할 때까지 JP는 갈피를 못잡고 계속 흔들렸던 게 사실이다. 측근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JP는 내심 합당을 무척 기대했었다고 한다. 수개월 동안 계속된 합당논란 속에서도 분명한 입장 천명을 유보하면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던 이유는 합당 후 자신의 위상 문제 때문이었고 JP가 바랐던 자리는 통합신당의 ‘명실상부한 총재직’이었다.
집권당 총재 자리는 JP로선 비록 위험부담이 없지 않지만 내각제 실현과 초대 내각제총리 등 JP의 정치적 야심을 매우 수월하게 실현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물론 ‘JP 신당총재’ 얘기는 DJ쪽에서 먼저 나왔다. 하지만 동상이몽이었다. JP는 DJ의 2선후퇴를 전제로 한 ‘실질적 총재’를 원했고 DJ는 생각이 달랐다. 다음은 당시 DJP간 물밑협상 라인에 있던 한 JP 측근의 증언.
“새로운 당에 JP가 총재로 착근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DJ는 ‘나는 통치만 하지 정치는 않는다. JP가 모든 것을 책임져달라’는 선언을 해야 하고 JP도 ‘나는 대권에는 욕심이 없다. 후진 양성에만 노력하겠다’고 호응하는 절차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DJ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는 모습 자체도 국민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JP에 대해서는 공천을 앞두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태도도 보였다고 한다. 동교동 핵심인사가 어느날 청와대에 들어가 DJ에게 ‘DJ명예총재, JP총재’안을 은근히 떠봤더니 DJ는 그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JP는 이 얘기를 전해듣고 ‘DJ 생각은 다른 데 있다’고 최종 판단을 내린 것이다.”
정치판 만큼이나 관성(慣性)의 법칙이 크게 작용하는 곳도 드물다고 한다. 70대의 노정객들인 3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들 사이에 한번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이를 ‘봉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DJ나 YS 양김이 내지른 발길은 영남 호남에선 거센 소용돌이를 몰고 태풍이 되어 서울로 올라오기 일쑤였다. 물론 JP의 경우도 다소 강약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다.
분연히 일어선 굴신의 정객
한번 벌어진 틈새는 JP가 합당불가 방침을 밝히고 총리직을 떠나면서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JP는 총리직을 떠나기 전부터 “당으로 돌아가면 할 소리 제대로 할 것”이라고 예고해왔다. 또 “우리 사회가 너무 왼쪽으로 기울어간다”며 전주곡을 울려댔다. JP는 총리라는 자리에 있기에 내지 못했던 보수의 목소리를 토대로 4월 총선에서 ‘진검 승부’를 펴겠다는 의지를 굳혀갔던 것이다. 더욱이 JP는 ‘보수(保守)의 전사’ 이한동(李漢東) 의원을 자민련 총재로 영입, 자신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렴청정 구상’에 매료돼 있었다.
이런 와중에 전개된 민주당의 내각제 강령 배제, 그리고 서서히 구체화되는 여권의 ‘개혁 드라이브’와 시민단체의 심상찮은 움직임…. JP로선 당연히 의심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특히 DJ가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고 설마 설마하던 낙천대상에 자신을 비롯한 자민련 인사가 대거 포함되면서 JP는 더 이상 민주당과 함께 가기 어렵다는 판단을 굳힌 것이다. 공동정권 내의 ‘곁방신세’를 한탄해온 자민련 입장에서 이같은 상황 전개는 고사(枯死) 직전의 위기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JP는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2월8일 일본 외유를 마치고 귀국하면서도 “일본의 베스트셀러 ‘마오쩌둥 비록’을 읽어보라”고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그러나 이 한마디는 백마디 욕설보다 무서운 말이었다. 중국 문화혁명의 최대 정치적 희생자였던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에 자신의 정치적 처지를 투영시킨 것이다. 류사오치는 마오쩌둥과 함께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혁명동지였으나 그후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實權派)’로 낙인찍혀 마오쩌둥이 조종하는 홍위병에 의해 조롱당한 뒤 숙청된 인물. 홍위병들에게 몰매를 맞고 온갖 수모를 당한 뒤 2년여만에 비명횡사했던 류사오치의 가련한 운명을 자신에게 오버랩시킨 것이라면 JP의 진로는 분명해진 것이었다.
JP는 일본 도착 직후 후쿠오카 총영사로부터 이 책을 선물받아 외유 내내 이 책을 끼고 있었고 외유 마지막날에는 오사카의 호텔 방에서 밤 늦게 수행원들과 술을 한 잔 마신 뒤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JP를 수행했던 한 의원은 “JP가 문혁 당시 ‘혼란스러울수록 더욱 좋다’던 마오쩌둥의 말을 인용하며 지금의 혼란스런 정치현실을 개탄했다”고 전했다. JP는 또 “마오쩌둥이 빨리 죽었기에 망정이지 오래 살았다면 큰 일이 났을 것”이라고 듣기에 따라선 퍼런 독기(毒氣)가 서린 듯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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