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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특집|시민 선거혁명은 폭발하는가

‘지리산 결의’에서 공천철회운동까지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지리산 결의’에서 공천철회운동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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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시민운동사에 새 장을 연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 그 뿌리는 99년 10월의 국정감사운동이었다. 99년 10월24일 ‘지리산 결의’에서 태동한 낙천·낙선운동은 개정 선거법에 대한 시민불복종과 공천철회운동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일요일인 지난 1월23일 오후 5시. 서울 정동에 자리잡은 성가수녀원. 낯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 중엔 지방에서 비행기 또는 기차 버스로 상경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총선시민연대 관계자가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그들은 이른바 ‘100인 유권자위원회’ 위원들이었다. 사람들이 모이자 수녀원 대문은 굳게 닫혔다.

유권자위원회가 토론을 시작한 것은 오후 8시. 그들은 총선연대 관계자의 설명을 통해 공천반대 명단에 오른 전·현직 의원 70여명의 ‘혐의’를 확인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간간이 웃음이 터져나오는 가운데 열정에 찬 목소리들이 회의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한 기자가 수녀원 담을 타넘어 들어왔다가 발각돼 쫓겨나기도 했다. 토론에서 마지막까지 문제가 된 사람은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 박상천 의원, 정몽준 의원이었다.

세 사람의 운명은 투표에 의해 결정됐다. 투표 결과 두 사람은 압도적인 표차로, 나머지 한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공천반대 명단에 남게 됐다.

토론이 끝난 후 상임대표단 집행위원장단 정책자문단의 연석회의가 열렸다. 그들은 유권자위원회의 토론 결과를 바탕으로 공천반대 명단을 최종 확정했다. 한국 시민운동사에 새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공장에서 불량품을 골라내는 작업과 같은 것이었다.



한국 정치사에 유례 없는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 ‘대세’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일부에선 법적 대응으로 또 다른 쪽에선 음모론으로 맞서고 있지만 시민혁명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운이 더욱 드세지는 양상이다.

1월24일 오전 10시. 서울 태평로 1가 한국언론회관 20층에 자리잡은 국제회의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회의장 안에선 막 기자회견이 시작됐지만 사람들은 회견장 밖에 더 많았다. 수백명의 내외신 취재진과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총선시민연대가 나눠주는 공천반대의원 명단을 서로 먼저 받기 위해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관계자들이 열심히 ‘질서’를 외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도덕과 질서를 근간으로 삼는 시민단체의 행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극심한 무질서의 추태는, 말 다르고 행동 다른 우리 사회 시민의식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새치기에 몸싸움에, 급기야 탁자가 무너지고 사람이 깔리는 사태마저 빚어졌다.

이날 행사의 사회는 총선시민연대 대변인인 장원 녹색연합 사무총장이 맡았다. 박원순(참여연대 사무처장) 상임집행위원장의 공천반대명단 선정기준과 선정과정에 대한 설명. 이어 환경연합 사무총장인 최열 상임공동대표가 명단을 발표했다. ‘영예’의 1위는 국창근 의원. 가나다 순에 의해서였다. 선거법 위반, 호화쇼핑 물의, 동료 의원에 대한 폭언…. 발표석 뒷열에 빙 둘러 앉은 ‘100인 유권자위원회’ 관계자들이 박수로 분위기를 돋웠다.

민주당의 황학수 의원을 마지막으로 총 67명의 명단 발표가 끝났다. 장원 대변인은 향후계획 발표에서 낙천운동을 낙선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다짐했다. 이어 ‘100인 유권자위원회’ 대표인 가정주부 김정자씨가 ‘정치권과 국민께 드리는 호소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한시간 여에 걸친 기자회견은 막을 내렸다. 이것으로 시민혁명의 제1막은 완결됐다. 지난해 10월24일 국감연대에 참여했던 단체들의 실무자들이 지리산 MT에서 낙천·낙선운동을 구상한 지 꼭 석 달 만의 일이었다.

명단발표의 파장은 컸다. 애초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정치권은 성난 파도와 같은 ‘민의’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여야 총재가 낙천 명단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총선 정국은 급류에 휘말렸다. 낙천·낙선운동의 불길은 법조계·학계·종교계·문화계로 번져갔다. 각계 인사들의 지지성명과 이를 뒷받침하는 시민들의 서명운동, 그리고 후원금이 줄을 이었다. 이어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의원들이 하나둘 나타나면서 정치권 개혁운동의 수레바퀴엔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가히 혁명이라 부를 만한 이 운동의 뿌리는 무엇인가. 외롭고 힘없는 ‘소수’로만 보이던 시민단체들이 이토록 급진적인 운동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법정에 설 것을 각오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그들의 열정은 어떤 과정을 거쳐 무르익었는가. 숨가쁘던 시민혁명 100일의 막전막후를 추적했다.

지리산 피아골의 결의

시민혁명의 ‘음모’가 무르익은 것은 지난해 가을 국회 국정감사가 끝난 직후였다. 10월24일 국정감사 감시운동인 이른바 국감연대에 참여했던 10여개 시민단체 실무 대표자들이 지리산으로 MT를 갔다. 숙식장소는 멀리 넘실거리는 섬진강 푸른 물결이 보이는 피아골 부근의 한 식당이었다. 당시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간사였던 양세진씨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국감연대에 참여한 단체는 40여개지만 각각의 사정으로 이날 MT에 참가한 단체는 12개였다. 참여연대를 비롯해 환경연합 여성연합 녹색연합 한국교회여성연합 참교육연합회 민언련(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행개련(행정개혁시민연합) 등의 단체가 참가했다. 경실련은 내부 사정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참가 인원은 20여명.

이날 모임의 주된 목적은 국감연대 활동에 대한 자체평가와 향후 운동 계획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참여연대 이태호 시민감시국장이 발제를 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국회가 국민 앞에 닫혀 있다는 사실이 이번 국감연대활동을 통해 확인됐다. 정치권의 이런 문제점은 평상시엔 해결할 수 없다. 선거 시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의정 감시의 핵심은 선거 감시이며 선거 감시는 곧 당락 감시다. 유권자인 국민을 무시하는 정치인들을 총선에서 심판해야 한다.”

토론에서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동의한고 했다. 저마다 정치권을 성토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지난번 국감을 통해 정치권 개혁이 얼마나 절실하고 또 요원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낀 터였다. 각 상임위는 국회 경비를 동원해 시민단체 관계자들을 강제로 쫓아내는가 하면 아예 방청을 불허하기 일쑤였다. 한마디로간섭이나 감시를 받기 싫다는 오만한 태도였다. 이태호 당시 국감연대 공동사무국장의 회고.

“국감연대를 하며 정치권이 얼마나 거대한 벽인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우리는 그때 절망했어요. 아, 이대론 도저히 안 되겠다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입니다.”

국정감사 감시운동에서 태동

시민단체들 사이에서 국감연대운동이 처음 거론된 것은 99년 6월. 기윤실의 첫 제의로 40여개 단체가 뜻을 합했다. 그들은 공동사무국을 설치하고 역할을 분담했다. 각 단체의 전문성을 살려 14개 상임위원회에 골고루 배치했다. 준비기간을 거쳐 9월20일 국정감사모니터시민연대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첫날 보건복지위 국감을 감시한 후 베스트·워스트 의원을 선정하자 정치권이 즉각 반발했다. 10월11일. 시민 모니터 요원의 국감방청을 허용하지 않는 상임위가 9개로 늘었다. 국감연대의 자체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95%가 베스트·워스트 의원 선정을 지지했다. 인터넷에서 확인된 네티즌들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돌이켜 보면 국감연대의 베스트·워스트 의원 선정이야말로 낙천·낙선운동의 뿌리였던 셈이다.

시민단체의 선거참여 방식에 큰 변화가 온 것은 95년. 4개의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거치면서 시민운동권에선 공선협(공명선거협의회)의 한계를 인식했다. 그에 따라 정책 캠페인 위주로 운동의 방향을 바꿨다. 후보자의 정책을 평가하고 시민단체의 정책을 지지하는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선거법이었다. 선거법에 따르면 시민단체는 선거 운동을 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선거법 개정으로 관심이 집중됐다. 시민단체의 발목을 잡는 선거법 87조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선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못하냐, 무슨 말을 들을 필요가 있냐, 의원들의 이런 의식에 위협을 주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뿌리 깊은 좌절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공선협이 제 기능을 못하고 정책 캠페인도 선거법에 걸려 안 되고 국감 감시도 의원들의 거부로 안 되고…. 정치권 개혁을 위해선 더 강력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낙천·낙선운동은 지리산 MT를 기점으로 점차 뼈대를 갖췄다. 2주 후 뜻을 함께하는 시민단체 실무자 7∼8명이 모여 제1차 실무자협의회를 열었다. 이들은 그후 4차례 더 모였다. MT도 갔다왔다. 그 결실은 12월17일 오후 2시 서울 종로의 걸스카우트회관 10층에서 열린 6개 시민단체의 대표자 간담회였다.

이날 모임은 총선시민연대 결성의 전주곡이었다. 박거용 교육관계법대책위 공동대표,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 최열 환경연합 사무총장, 장원 녹색연합 사무총장, 성유보 민언련 이사장, 이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등 내로라하는 시민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시민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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