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들 말한다. 그 논리대로라면 패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건 어리석은 짓인지 모른다. 자칫 패자의 변명에 놀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영원하지만 승자는 영원하지 않다. 때로 역사는 뒤늦게 승자를 패자로, 패자를 승자로 바꾼다. 그러므로 패자의 얘기를 기록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된다.
박주선(51)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 지난해 12월 그가 구속될 당시 몰아쳤던 광풍은 이제 어느 정도 잠잠해졌고 법조계 주변에선 ‘억울하다’는 그의 호소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조금씩 늘고 있다. 보석으로 출감한 지 한 달여.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았다. 지난해 12월 검찰에 드나들 때와 비교하면 많이 안정돼 보였다. 가볍게 미소 띤 얼굴엔 여유마저 느껴졌다. 시간이 그의 상처를 아물게 한 것일까…. 아니었다. 그건 겉모습뿐이었다.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좁은 독방에서 쇠창살을 바라보며 ‘치욕감’에 떨던 그의 고통이 응축된 형태로 완곡하게, 때론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박주선씨의 출마설이 나돈 것은 2월초부터. 명예회복 차원에서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출마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총선 출마 결심은 굳혔습니까.
“고향에서 제 총선 출마를 위한 추대위원회를 만들 모양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저를 위하는 마음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절대 안한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저 ‘고맙다’고만 하고 있는데 대통령을 모셨던 비서관으로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명예회복은―현재 법률적 제재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사법부의 심판을 통해 이뤄야 한다고 봅니다. 하여간 심사숙고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위로
―지역 여론은 어떤 것 같습니까.
“들리는 얘기로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제가 억울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습니다. 구속됐을 때 고향 주민 1만5000명이 탄원서를 올렸습니다.”
사법부 심판을 통한 명예회복을 강조하면서도 총선에 출마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뭐랄까. 여론의 향배를 저울질한다고나 할까. 일종의 잽을 날리는 듯싶었다.
―출감 후 대통령과 통화한 적 있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더니 “대통령께서 위로 전화를 주셨다”고 대답한다.
―뭐라 말씀하시던가요.
“대통령 말씀을 공개하긴 어렵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옷사건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습니까.
“전화통화에서 대통령께서는 ‘나도 과거에 억울한 옥살이를 한 적이 있지 않으냐. 그걸 생각하라’며 위로하시더군요.”
―대통령이 사건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보십니까.
“제가 허위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은 알고 계십니다. 지난해 12월에 TV 노정방담에서도 누가 그 문제에 대해 물어보니 대통령께서는 ‘박비서관이 허위보고한 적 없으며 중요한 보고는 다 받았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권력의 한가운데에 있던 그를 하루 아침에 끌어내린 옷사건. 일반사람들에게는 이제 재미있는 장면이 다 지나간 ‘한물 간 드라마’에 불과하겠지만 그 드라마로 자신의 삶을 망쳐버린 그에겐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악몽이다. 그 얘기를 하려면 김태정 전법무장관을 빼놓을 수 없다. 그와는 광주고 9년 선후배 사이. 장래 총장감으로 검찰 안팎의 기대를 모았던 그에게 청와대행 ‘외도’를 강권했던 당사자이기도 하다.
―김태정씨는 만났습니까.
“아직 안 만났어요. 공범으로 엮여 있는데 만나는 모습이 기자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또 무슨 협잡을 한다고 생각할 테니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전화통화는 했어요.”
―어떤 얘기를 했습니까.
“그 양반이 먼저 출감해 집사람에게 안부 겸 위로 전화를 했다기에 나도 나와서 전화를 드렸지요. ‘내 실수로 유능한 젊은 사람의 앞길을 막아 미안하다’고 말하더군요. ‘내 운명이지, 총장이 일부러 내 앞길을 막았겠느냐. 운명으로 당당히 받아들이고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려 반드시 명예회복을 하겠다’고 말해줬습니다.”
―청와대 들어간 일이 후회되지는 않습니까.
“운명은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국가원수를 모시고 국정에 깊이 관여한 영광도 있기 때문에 후회는 안합니다. 다만 검찰에서 내 입지를 확실히 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어찌 그리 법해석이 다른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내가 억울하게 여기는 것은 구속이 아니라 공소사실 자체입니다. 증거도 없고 법률상 성립도 안 되고. 내가 국민들께 감사하면서도 괴로운 심정이 뭐냐 하면 언론이나 여론의 인식이 잘못돼 있어 다들 내가 저지른 것으로 단정하며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동정을 한다는 점입니다. ‘당연한 의리였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게 더 괴롭습니다.
난 (사직동팀 최초문건을 김태정씨에게) 주지 않았다는데,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이렇게 보는 겁니다. 또 하나 아쉬운 것은 처리 방법이 여러 가지 있을 텐데―이를테면 사표를 내고 공직을 그만두게 한다거나―그렇게 구속하는 게 과연 온당한 조치였나 하는 겁니다. 참 나…”
한마디 한마디에 탄식이 배 있다. 두달 전의 악몽이 되살아난 탓일까. 후배 검사 앞에서 자신의 부하였던 사직동팀 팀장과 대질신문을 하는 그 치욕스럽던 순간이.
“우스운 것은 법을 아는 검사들인데 어찌 그리 해석을 다르게 하냐는 겁니다. 피고인인 나를 비롯해 90여명의 변호인들이 다 말도 안 되는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수사검사에서부터 결재권자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4시간 반이라는 그 장시간 회의를 하며 수사라인에 있지도 않은 검사장들까지 불러들여 격론을 벌이는, 그런 전례 없는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이례적인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청와대에서 1년9개월 근무했는데요. 소회가 있다면.
“국가원수를 측근에서 보좌하는 것은 공무원으로서 상당히 영예로운 일 아닙니까. 국가원수를 한번도 접하지 못하고 공직생활을 끝내는 공직자도 많거든요. 대통령께서 각별한 신임을 주신다고 주변에서 평할 때 가장 보람을 느꼈습니다.”
박씨는 수석비서관은 아니었지만 수석의 대접을 받았다. 수석회의에도 참가하고 일반 비서관과는 달리 대통령과 이른바 독대를 자주 했다. 대통령은 그를 ‘박수석’이라고 불렀다.
“처음에 김태정 총장과 김중권 비서실장이 청와대 근무를 권했을 때 거절했지만 공직자로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일정 기간 근무를 마치는 대로 검찰로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법무비서관 자리는 검찰을 바로 서게 하고 검찰의 결정을 통치권자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교각 구실을 합니다. 청와대에 들어가면 무조건 정치검사가 돼 버리고,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다시 검찰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에요. 나야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지만.”
―옷사건을 계기로 법무비서관 자리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요.
“밖에선 대통령이 법무비서관을 통해 검찰총장을 지휘하는 줄 아는데 옛날엔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나는 한번도 검찰의 소신에 어긋나는 결정을 유도하거나 번복시킨 적이 없습니다. 진짜 없어요.”
―그렇지만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선 서로 협의하지 않습니까.
“물론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에 대해선 검찰에 수사 진행사항을 물어보기도 하고, 정보보고 형태로 위에 보고도 하지요. 그렇지만 제 개인의 의견을 개진하지는 않습니다.”
누가 사직동팀을 움직였나
―옷사건의 경우 사직동팀 최종보고서에 법무비서관의 건의 사항을 넣지 않았습니까.
“그건 달라요. 청와대에 탄원이 들어왔기 때문에 담당 비서관으로서 최순영 회장을 구속 조치하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해 내가 건의한 거죠.”
―탄원이라니요?
“대통령한테 최순영을 구속하지 말라는 탄원서가 들어왔다니까요. 그 탄원서도 처리해야 하고 옷사건 관련 첩보도 처리해야 하니 법무비서관으로서 대통령에게 당연히 건의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럼 탄원이 있는데 ‘이거 대통령이 알아서 판단하쇼’ 그렇게 해야 합니까.”
―목사들의 탄원서를 말하는 것이지요?
“목사 6, 7명이 청와대에 찾아와 각자 탄원서를 제출했어요.”
애초 박씨는 인터뷰 요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시기가 적절치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재판과 총선 출마 여부를 의식해서였다. 그래서 가급적 옷사건 얘기는 안 한다는 전제하에 만났다. 그러나 그를 만나 옷사건 얘기를 안 한다는 건 술꾼이 술집에 가 안주만 만지작거리는 꼴이다. 기자에겐 그것을 견딜 만한 참을성이 없었다. 이 점은 그도 마찬가지. 점차 울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 사건이 재조명되리라 믿습니다. 도대체 지금 생각해도 그 단순한 사건이 어찌 그렇게 큰 파장을 몰고 와 1년 내내 대통령과 국정의 발목을 잡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언론이 흥미 위주로 대서특필하는 바람에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거죠. 이 사건은 대한민국 최고 수사기관인 검찰, 그 검찰 총수의 부인이 관련된 사건입니다.
청와대에 들어온 첩보 중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은 꼭 대통령에게 보고합니다. 그런데 첩보를 보고하기 전 사실일 개연성이 있냐 없냐를 먼저 판단해야 해요. 나는 진짜 공명정대하고 철저한 수사를 하려는 의지로 내사를 지시한 겁니다. 그런데 이걸 축소·은폐 조작이라니…. 최초 내사 당시 제가 최종보고서에 이형자의 자작극으로 보인다고 쓰지 않았습니까. 지난번에 대검도 같은 결론으로 이씨를 구속까지 했잖아요.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뭘 축소하고 뭘 은폐했다는 건지, 연정희씨에게 무슨 도움을 줬다는 건지, 기가 막힌 일입니다.”
―옷사건으로 사직동팀 존폐 문제가 거론됐는데요.
“예전엔 사직동팀이 너무너무 나쁜 일을 많이 했어요. 우선 DJ비자금 사건만 보더라도 영장도 없이―그건 실명제의 근간을 무너뜨린 겁니다―1000여개의 계좌를 2년에 걸쳐 추적했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 전력이 있으니 전과자가 사회에 발붙이기 어려운 것처럼 지금도 똑같은 일을 자행하는 것으로 의심을 받는 거죠. 그래서 폐지 얘기가 나온 모양인데 제가 있을 때 불법 계좌추적이나 불법 감청은 전혀 없었어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우선 계좌추적을 하면 당사자들에게 통보를 해야 돼요. 게다가 불법이면 은행에서 절대로 협조를 안 하게 돼 있습니다. DJ비자금 사건으로 은행감독원장이 사표 쓴 이후론. 은행에 가 한번 해봐요. 절대 협조 안 합니다.”
―대검이 사직동팀을 압수수색했을 때 불법 계좌추적 사실을 적발했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불법 계좌추적을 할 수가 없다니까요. 다른 데서 추적한 내용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건(DJ비자금사건) 이후론 절대 할 수 없게 해놓았어요. 정권의 도덕성 차원에서나 공직자의 양심에서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때 자신이 지휘하던 팀에 대한 애정에선지, 아니면 정말 기자가 ‘말도 안 되는’ 의혹을 제기해선지 그는 정색을 하며 사직동팀을 변호했다.
―옷사건 내사 경위에 대해 말이 많은데요.
“1월14일(99년)에 그 내용을 처음 들었어요.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그런 소문이 퍼져 있다는 첩보였습니다. 다음날 최광식 조사과장이 청와대에 들어와 머리를 긁적거리며 ‘검찰총장 관련 소문이 좍 퍼져 있다’며 같은 내용을 보고하더라구요. 온누리교회와 횃불선교원 교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라면 진위 여부를 가려야 되지 않겠나’ 싶어 내사를 지시했어요. 그랬더니 최과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검찰총장 관련 부분을 제가 어떻게 조사하냐’고 하더군요.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고 하라’고 그랬지요.”
―배정숙 이형자씨는 국회 청문회와 특검 조사 때 그보다 일주일 전쯤인 1월7, 8일께 조사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특히 배씨의 증언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다른 라인에서 사직동팀을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는 겁니까.
“둘의 주장은 특검에서도 인정이 안 됐잖아요. 그렇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사직동팀만으로 할 수 없어요. 내가 지시했거나 아니면 또다른 어떤 큰 세력이 나 모르게 사직동팀에 한번 알아보라 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 않고선 불가능해요. 왜? 아무리 경찰 조사과 직원이라도 일개 경위·경감이 현직 장관 부인을 멋대로 조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김중권 당시 비서실장에게는 언제 보고한 겁니까.
“1월15일 오전에 최광식 과장에게 지시하고 난 뒤 오후에 보고했지요. 자기도 그 소문을 들었다고 그러더라구요. 내가 ‘이게 사실이면 연정희를 구속해야 한다’고 그랬더니, ‘김총장과 사이가 돈독한 걸로 아는데 구속 얘기가 그렇게 쉽게 나오느냐’며 놀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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