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이회창과의 결별

  • 입력2006-11-30 14:2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우리 국회가 아직도 이런 꼴이어야 하나…. 국회 출입 기자 시절부터 40여년간 국회를 지켜왔지만, 아직도 달라진 게 없다니…, 조금만 양보하고 자기 주장이나 고집을 버리면 충분히 타협이 가능할 텐데, 그걸 못 하다니….’ 》
    80년으로 들어서자 마치 4·19 직후와 같이 각종 집회와 욕구 분출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는 현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서울의 봄’은 5·17비상조치로 인해 다시금 얼어붙고 말았다.

    격동의 80년을 보내고 나는 정치적으로 새출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공화당이 해체됐으니 새로운 정당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난 결심했다.

    ‘그래도 정치가는 지조가 있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고난의 가시밭길이라도 한 길로 나가야 한다. 옛 동지들과 함께 공화당 이념을 재건할 새로운 당을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난 공화당 시절 가깝게 지내던 의원들을 찾아가 상의했고 우리는 심각한 토론을 거쳐 당면을 ‘한국국민당’으로 정했다. 국민의 편에 서서 일하겠다는 각오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그해 12월3일,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공화당 출신 의원들로 창당발기준비위원회가 열렸다. 이때 ‘승계와 단절’을 기본정신으로 한 창당발기 선언문을 내가 기초하고 낭독했다.



    ‘승계와 단절’이란 과거 공화당 정권 당시 잘한 것은 승계하고 잘못한 것은 단절하자는 정신이었다. 승계할 일은 경제 발전을 이룩해 국민을 가난에서 구한 것과 ‘하면 된다’는 민족의 가능성을 개발한 것이고, 단절해야 할 것은 1인 장기집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의 길을 봉쇄하고 국민의 정치 참여를 막은 것 등을 들 수 있다. 경제는 승계, 정치는 단절인 셈이었다. 내가 ‘승계와 단절’의 논리를 편 것은, 잘못된 것은 변명하거나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에 대한 비판은 달게 받아야 한다는 의도였다.

    81년 5월4일에는 제106회 임시 국회가 열렸다. 그리고 김종철 총재가 원외였던 관계로 원내의 일은 다선 부총재인 내가 맡아야 했기에 3일 뒤 대표 연설에 나서게 됐다. 나는 서재에 앉아 대표 연설문 초안 작성에 들어갔다. 당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가를 곰곰이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가장 시급한 과제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과 군의 정치적 중립을 확립하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곧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고, 오직 나 혼자서 문안을 작성했을 뿐이었다. 인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분위기로는 만일 내 연설문 초안이 당국에 알려진다면 제동이 걸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일부러 인쇄하지 않고 나 혼자 원고를 꼭 간직한 채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6일 아침 당국에서는 내게 연설문을 사전에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나 난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미루었고 마침내 의사당에 올라 대표연설을 시작했다.

    ‘… 이 사람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전 대통령이 7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결코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국민의 진실된 의사가 얼마만큼 자유롭게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 반영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달려 있다고 본인은 믿고 있습니다. 때문에 민의를 가장 직선적이며 효율적으로 반영하는 길은 대통령을 직접 선거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5공화국 들어 국회에서 ‘대통령 직선’이란 단어가 처음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일순 전혀 예측하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온 때문인지 의사당 안에는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에서도 그리고 국민당 의원들조차 놀라는 얼굴이었다.

    의석이 크게 술렁거렸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체제 유지와 관련된 ‘대통령 직선제’ ‘국회의원선거제도’ ‘정치쇄신법’ 문제를 거론하니 여·야 모두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난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의석과 국무위원석, 그리고 방청석, 기자석까지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성역이라고 할 수 있는 ‘군의 정치적 중립’ 문제까지 꺼냈다.

    ‘국방 문제는 우리 조국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것으로, 우리가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국정의 최우선입니다…. 그러나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의 본연의 임무인 국토 방위에만 전념하고,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야 합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수위의 발언이었던 나의 대표연설은 그날 석간과 다음날 조간을 크게 장식했다.

    “군의 정치개입 막는 게 문민정치”

    84년 2월29일 121회 임시국회에서 다시 내가 대표연설을 하게 됐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문민정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군이 어떠한 경우든 총칼의 힘으로 정치에 개입하려 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나라를 지키는 사명을 저버리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군의 정치적 개입을 막는 것만이 이 사람이 오래 전부터 제창한 문민정치를 진정 이룩할 수 있는 길입니다….’

    85년 2·12총선이 끝나자 국민당은 바로 전당대회를 열어 전열을 정비했다. 나는 당내 최다선인 5선이었기에 총재 출마를 결심했고, 당선되었다.

    사실 이날의 총재 선출은 5공화국 수립 이래 처음으로 야당 총재를 직접 경선으로 뽑은 것이었다. 그만큼 우리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날 나는 총재로 취임한 후 그 자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헌특위 구성을 제의했다.

    ‘국민 여망에 따라 반드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해야 하며, 또한 이를 위해 국회 내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조속히 구성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개선 투쟁의 서곡이 된 ‘헌특위’ 구성을 5공 이후 내가 처음 제의한 것이었다. ‘헌특위’ 문제는 이후 거의 1년여간 여·야의 쟁점이 되어 논란을 빚다가, 결국 86년 6월 24일 마침내 국회 내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설치된다.

    그러나 헌법개정의 길은 험난하기만 했고 정국은 정치권의 농성, 직선제추진 서명운동 등으로 극도로 경색되어 갔다. 이런 가운데 86년 2월24일, 청와대에서는 대통령과 3당 대표 간에 영수회담이 열렸다. 먼저 전대통령은 정국을 대화로 풀 것을 당부했다.

    “남·북한간에도 대화를 하는 마당에 여·야간에 대화를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는 대선배시고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었으며, 국민당의 이만섭 총재도 정치를 잘 아시는 분이니 우리나라가 어느 방향으로 나가는 게 좋은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는 서명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했고 나는 헌특위 문제를 꺼냈다.

    “개헌 등 정치 문제를 비롯, 경제·민생 문제 등은 모두 국회에서 여·야가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국회를 조건없이 빨리 여는 게 중요합니다. 개헌 문제에 관해서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국민 절대 다수가 직선제 개헌을 원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내가 개헌 문제를 꺼내자 전대통령이 말을 받았다.

    “헌법도 사람이 만든 것이니만큼 완벽할 수는 없겠지요. 때로는 개정할 점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정권을 연장하려는 것도 아니니, 88올림픽 등 민족의 대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에 필요하다면 개헌을 논의하는 게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요. 민족적 대사를 앞둔 마당에 법 절차를 무시하고 힘을 바탕으로 서명을 강행한다면 정국이 불안해지는데, 그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

    개헌불가에서 개헌논의로

    전대통령은 이때 처음으로 ‘88올림픽 후 개헌 논의’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상당한 발전이었다. 이전까지는 ‘개헌 절대불가’였던 것이 한 발짝 후퇴해 ‘88올림픽 후 개헌 논의’로 바뀐 것이다.

    난 못을 박기 위해 다시 한 번 물었다.

    “올림픽 후 89년 개헌 논의라는 것은 그때 단순히 논의뿐만 아니라, 개헌까지도 할 수 있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전대통령은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민우 총재는 못 믿겠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대통령은 임기만 채우고 더 안하겠다고 하면서 임기가 끝난 후인 89년에 가서야 개선을 한다고 하면, 그것을 의심하는 국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민주화 일정을 밝혀 주십시오.”

    이 말은 노태우 대표가 받았다.

    “대통령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큰 정치로 88년의 국가 대사를 끝낼 때까지는 국론 분열을 막아야 합니다. 손님을 청해 놓고 집안싸움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개헌 문제는 2년 차이인데, 2년 뒤에 본격 논의하자는 것을 못 참는다는 것은 30~40년의 정치 경륜을 가진 사람들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자 전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나 보고 ‘89년 개헌을 보장’하라는 말 같은데, 나는 88년에 그만두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내가 보장한다는 것은 월권 행위입니다. 개헌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국민이 보장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방법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속한 민정당이 공당으로서 개헌을 국민 앞에 약속하고, 차기 대통령 후보가 개헌을 공약하는 방법입니다. 아무튼 국회 내에 헌법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데는 동감합니다. 명칭이 문제라면, 여·야가 상의해서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라면 회담은 성공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회담이 끝나갈 무렵, 몇 가지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헌법연구특별위원회’라는 명칭은 여·야간에 말이 많으니, ‘연구’란 단어를 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소된 신민당 의원 문제는 사법 차원이 아닌 정치적 차원에서 해결돼야 합니다. 또한 경찰이 신민당사를 봉쇄하여 회의조차 열지 못하도록 한 것은 야당 탄압이므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야당의 활동을 보장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전대통령의 견해는 뚜렷했다.

    “서명 운동에 대한 경찰의 제지는 다소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내가 그에 대해 조치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헌특위는 명칭이 문제라면 그냥 헌법특별위원회도 좋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이날의 회담은 대성공이었다. ‘개헌 절대 불가’에서 ‘88올림픽 후 개헌’을 이끌어낸데다, ‘헌법연구특위’도 ‘연구’를 빼고 ‘헌법특위’로 해 일시적으로 시국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던 것이다.

    전대통령, 86년 개헌 약속

    연이은 대표회담으로 정지 작업을 한 후 야당 총재와 대통령 간에 영수회담이 열렸다. 이민우 총재에 이어 6월4일 청와대에서 전대통령을 만나게 되었다.

    서로 부드럽게 인사를 나눈 뒤 본론에 들어간 나는 바로 헌특위 문제부터 꺼냈다.

    “모두 아집과 독선을 버려야 쉽게 이해가 되고, 또 합의점도 발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는 이번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구성돼야 하며, 이를 위해 정부·여당이 타협 분위기 조성에 계속 힘써 주셔야 하겠습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 훌륭한 헌법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나의 소신입니다. 여야가 국가적 차원에서 허심탄회하게 절충해 빨리 개헌 작업을 벌이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난 전대통령의 ‘빨리’라는 말을 바로 받았다.

    “평화적 정권 교체와 그 부수 작업을 위한 일정을 감안할 때, 금년 정기국회에서는 개헌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켜야 합니다만….”

    “여야가 합의한다면야 올 정기국회에서도 통과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대통령은 이때 처음으로 ‘정기국회내 개헌’을 언급했다. 비록 ‘여야가 합의를 한다면’이라는 사족을 달긴 했지만, 아무튼 커다란 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특히 학생들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구속된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이총재께서 특별히 관심을 표명한만큼, 법 절차 진행 과정에 뉘우치는 경우에는 단계적으로 석방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다음날 조간 신문에는 이 두 가지 사항이 합의된 사실을 1면 톱으로 보도했다. 그만큼 빅 뉴스였던 것이다.

    아무튼 얼어붙어 있던 정국은 2월24일, 4월30일, 6월4일 등 세 차례에 걸친 청와대 회담을 통해 ‘88올림픽 후 개헌 논의’ ‘88올림픽 후 개헌’ ‘임기 내 개헌’ ‘86년 정기국회내 개헌’까지 진전되는 성과를 거뒀다.

    이러한 성과는 우리 몇몇 정당 지도자들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직선제와 민주화를 바라던 ‘국민의 힘(people’s power)’, 그리고 도도한 시대정신 때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사족 같지만 당시 ‘86년 정기국회내 개헌’을 이끌어낸 청와대 회담을 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나의 인식도 약간은 달라지게 되었다.

    나는 군인 출신인 그에 대해 강경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때로는 자신의 결정이 잘못됐다는 것을 지적하고 사심없이 설득하면 그 자리에서 그 결정을 바로 고칠 수 있는 장점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87년 난국 속 ‘합동용퇴론’

    아무튼 헌법의 권력 구조에 대해 여야가 속셈은 달랐지만 어쨌든 개헌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져, 마침내 6월24일 국회 본회의에서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리고 7월30일에 ‘헌법특별위원회’가 정식으로 가동되었다.

    그러나 각당의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그 사이 야당의 장외투쟁, ‘건국대사태’ 등을 거치며 헌특위 무용론이 나오기도 했다. 11월29일 신민당의 ‘직선제 추진 서울대회’ 발표로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느닷없이 ‘김일성 사망설’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87년이 밝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사건이 터졌다. 전국이 추위로 꽁꽁 얼어붙어 있는 가운데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그날 당사에서 석간신문을 뒤적이던 나는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死’라는 제목의 기사에 충격을 받았다. 구체적인 얘기가 씌어져 있진 않았지만, 십중팔구 예사롭지 않은 죽음으로 판단됐다.

    다음날 경찰은 공식 발표를 통해 “취조중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며 혐의 사실을 추궁하자, 박군이 갑자기 억 하며 책상 위로 쓰러졌다”고 어처구니없는 발표를 했다. 말도 안 되는 발표는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 발표를 듣는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제 더이상 이 정권은 존립할 가치가 없어졌다. 이유도 명분도 없다…. 이런 일이 민주 법치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난 곧바로 의원총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정부·여당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토록 했다.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노도 분노지만, 정치인으로서 스물한 살의 어린 생명을 희생시킨 것이 못내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한 87년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사실 국민들에게 정치인은 면목이 없었다. 국민들이 원하는 개헌은커녕 국회조차 열지 못하는 판이니 할 말이 없었다.

    정국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열기로 합의한 국회는 여전히 열리지 않았기에 개헌은 물론이거니와, ‘인권문제’ 역시 다룰 수 없는 상태였고 당시 여당에는 ‘개헌에 관한 중대 결단’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것은 다름아닌 호헌(護憲)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4월13일 전두환 대통령은 호헌성명을 발표하고 말았다.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TV를 통해 대통령의 특별 담화를 들으며 예상했던 대로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데 대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4·13 호헌 조치’는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고 이러한 가운데 6월9일 6·10대회를 앞두고 연세대 정문에서 또다시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이다. 연세대 교내 시위중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세브란스병원으로 실려간 것이었다.

    6월10일, 나는 연세대를 졸업한 선배로서 이한열군이 입원해 있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다.

    연세대 정문 앞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6·10 대회 출정식’을 갖고 교외 진출을 시도하는 학생들이 던진 돌멩이와 이를 저지하려는 전경들이 쏘아대는 최루탄 냄새로 지나갈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중환자실로 가서 이군을 보았다. 이군은 산소호흡기를 단 채 누워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노대통령에 ‘필사즉생’ 결단 요구

    중환자실을 나서는 나는 우울했다. 갑자기 시끄러워져 고개를 드니 중환자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십명의 학생들이 내게 몰려왔다.

    “한열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까?”

    “아직 살아 있어요.”

    난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브란스 병원을 나서는 내 마음은 한없이 슬펐다. 내게도 그만한 자식이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 능력이 부족함을 한탄하면서, 한편으로는 똑같이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모든 정치인은 각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6월10일 모두가 민주 투쟁에 나선 날이었지만, 민정당은 이를 외면한 채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바로 장충체육관에서 국민들의 뜻을 무시한 채 ‘전당대회 및 차기 대통령 후보 선출식’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노태우 당대표가 예상대로 대통령 후보가 됐다.

    지금 생각해도 참 우스운 시절이었다. 거리에서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함께 현 정권의 부도덕성을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외치면서 경찰에 잡혀 가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누가 뭐라든 자기들 나름대로 정치 일정을 강행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최루탄을 맞은 한 젊은 생명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데….

    6월10일의 태풍이 지나갔지만, 정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군은 여전히 깨어날 줄 몰랐고, ‘6·10대회’ 강경진압에 항의해 학생들은 경찰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시위를 계속했다. 시간이 흘러도 정부 여당과 국민 사이의 벽은 여전히 높기만 했다.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13일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난국수습을 위한 기자회견’이었다. 위기감이 감도는 가운데 열린 이날 기자회견 요지는 만일 난국을 수습지 못하면 나를 포함한 정치지도자들은 모두 물러나야 한다는, 이른바 ‘합동용퇴론’을 편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민심도 흉흉해졌다.

    워낙 전국이 혼란스럽자 곧 위수령이나 계엄령 같은 비상조치가 단행될 것이라느니, 서울 인근 지역의 공수부대가 이동하고 있는 게 목격됐다느니 하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일부 국민들은 ‘제2의 광주’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였다.

    흉흉한 판에 한 가지 서광이 비쳤다. 노태우 대표가 내가 제안한 4당 대표회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각 당대표들에게 개별 회담을 제의한 것이다. 나와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는 20일로 날짜가 잡혔다.

    그러나 기대했던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는 전대통령과 직접 면담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며, 노대표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태우 대표와 회담키로 한 6월 20일, 회담장인 2층 귀빈식당에 올라가서 잠시 기다리니 노대표가 올라왔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시위 학생들이 다치고 전경이 죽는 등 우리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맞붙어 싸우는 불행한 사태는 모두 우리 정치인들 책임입니다.”

    “그렇습니다.”

    노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이순신 장군이 ‘필사즉생(必死卽生)이요 필생즉사(必生卽死)’라고 했으니 옳은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영원히 삶을 얻는 것이며, 소아(小我)에 매달려 살려고 하면 영원히 죽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옳은 것이란 당연히 대통령 직선제이고, 소아란 호헌 조치를 부른 권력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또한 ‘必死卽生 必生卽死’는 내 좌우명이기도 했다.

    “물론 나도 자리에 연연치 않겠습니다. 내가 발벗고 수습에 나설 것입니다.”

    노대표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나는 왠지 회담이 잘 이뤄질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우리는 워낙 시국이 중대 국면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서로간에 격의없이 의견을 교환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은 뒤 내가 먼저 시국 수습을 위한 7개항을 내놓았다.

    ‘첫째, 4·13 호헌 조치의 즉각 철회. 둘째, 헌특위 또는 여야 중진 회담기구를 통한 개헌 논의 즉각 재개. 셋째, 6·10사태와 관련된 구속자의 즉각적인 석방. 넷째, 시위 학생에 대한 과잉 단속과 최루탄 남발 즉각 중지. 다섯째, 김대중씨의 가택연금 해제. 여섯째, 인권 보장과 언론자유 등 민주화 조치 단행. 일곱째, 국회의 조속한 정상화.’

    이 일곱 가지 사항은 불과 9일 뒤 나온 ‘6·29선언’과도 맥을 같이하는 내용들이었다.

    내가 일곱 가지 사항을 제안하자, 노대표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잘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도록 방안을 세우지요.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흔히 본인이 정권을 탐내고 정권욕에 사로잡혀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본인이 생각하기로는 본인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시켜준 민정당 160만 당원의 뜻은 본인이 몸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이 난국을 풀어 나가라는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현재 각계 각층의 여론과 민심을 낱낱이 수렴하고 있으니, 내일 의총을 통해 종합하여 내주 초쯤 민정당의 시국 수습 방안을 밝힐 것입니다.”

    이날 1시간10분에 걸쳐 진행된 회담에서 우리는 세 가지 원칙에 합의했다.

    “첫째, 오늘의 불행한 사태는 정치력에 의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극복해야 한다. 둘째,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폭력적인 방법이나 공권력에 의해 비상조치가 초래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셋째, 이를 위해 여야 정치 세력은 끝까지 인내와 자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난국을 수습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대외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정치 선배로서 노태우 대표에게 인간적인 충고를 하기도 했다.

    “처음에 이순신 장군의 말씀을 인용한 것처럼, 사람이 비굴하게 살면 영원히 죽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만일 장충체육관에서 선거인단의 박수로 어거지로 대통령이 되면 당신은 영원히 죽을 것이며, 자손만대로 오점을 남기는 게 됩니다. 그러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떳떳하게 국민의 심판을 직접 받는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당신은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내 충고에 노대표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였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여권 내부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불과 이틀 뒤인 22일, 노대표로부터 플라자호텔에서 점심을 함께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날 오전에는 전국의 30여개 대학 교수 70여명이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를 발족했으며, 저녁부터는 새문안교회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마친 뒤 성직자와 신도 1500여명이 철야 기도회를 갖기로 돼 있는 등 사회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 노대표는 자신이 최종 결심을 하기 전에 내게 재차 물어 왔다. 나는 솔직하게 다시 강조했다.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장충체육관에서 엉터리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묶여 있는 김대중씨도 풀고 민주화 조치도 취해서, 정정당당하게 직선제로 승부를 거는 것이 나라가 사는 길이오.”

    “직선제, 노대표부터 결심하시오”

    내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던 노대표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아무리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전대통령이 결심하지 않으면 안될 텐데요.”

    “전대통령은 내가 만나서 설득을 할 테니까 노대표부터 먼저 결심하시지오.”

    나는 재차 강조했다.

    그날 이후 정국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노대표는 각계의 여론을 듣느라 분주했고, 전두환 대통령도 각계 원로들을 청와대로 초치해 정국 타개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급기야 24일 야당 당수들과도 만나게 됐다.

    이날 회담은 오전 10시에는 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그리고 12시에는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와, 그리고 2시40분에는 나와 만나기로 돼 있었다.

    2시40분, 나는 청와대로 들어갔다. 마주 앉은 전두환 대통령은 다소 피곤해 보였다. 아침부터 야당 당수 2명을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날 회담은 예전과는 달리 노태우 대표가 배석하지 않은 채 대통령과 야당 당수의 단독 회담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딴 사람처럼 대통령 할 욕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니, 내가 하는 이야기는 믿고 진심으로 들어주십시오.”

    “이총재께서도 기탄없이 이야기해 주십시오.”

    전대통령도 그날따라 유난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백척간두에 서 있는 오늘의 이 난국을 맞아 취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한 길밖에 없을 줄 압니다. 그것은 떳떳하게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하는 것이며, 강경파의 주장대로 계엄령과 같은 비상조치는 절대로 선포해서도 안 되고 선포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먼저 그것부터 분명히 밝혀주십시오.”

    “비상조치는 절대로 선포하지 않습니다.”

    “비상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길은 대통령 직선제밖에 없질 않습니까?”

    내 말에 대통령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오전의 김영삼 총재와 이민우 총재와의 회담에서는 어떤 말이 나왔는지 궁금했다. 내가 물었다.

    “오전에 김영삼 총재는 뭐라고 했습니까?”

    “예. 김총재는 우선 선택적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합디다. 이민우 총재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나는 다시 그를 설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굳이 선택적 국민투표로 국력을 낭비할 필요없이, 바로 깨끗하게 대통령 직선을 받아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이 밖에도 ‘6·10사태 및 시국 관련 구속자의 전원 석방’ ‘인권 보장 및 언론 자유 등 민주화 조치’ ‘김대중씨와 정치규제자들에 대한 사면복권 단행’ ‘정국 수습을 위한 비상수습 내각’ 등도 거론했다. 회담 말미에는 인간적인 설득도 병행했다.

    “저는 대구 사람으로 한 당의 총재까지 하고 있으니 개인적으로 더 바랄 게 없지요. 또 대통령께서도 대통령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니, 여한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주저하실 게 뭐 있겠습니까?”

    전대통령은 내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대통령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얘기를 노대표에게도 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노대표에게도 충분히 얘기했습니다. 대통령께서 결심만 하시면, 제가 노대표를 다시 만나 마음을 굳히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이때 전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의리를 앞세우는 그가 자신은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쉽게 대통령이 된 반면, 후임인 노대표에게는 위험한 도박인 어려운 직선제의 길을 가라고 하기가 인간적으로 미안한 생각에서 망설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날 회담 이후 나는 곧 정부·여당이 직선제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아니나다를까. 불과 5일 뒤인 29일에 역사적인 ‘6·29선언’이 나온 것이다.

    YS의 경선 출마선언, 노대통령 격노

    92년 3월24일 14대 총선에서 나는 다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민자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총선 3일 뒤인 3월27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는 회동을 갖고, 5월 전당대회를 통해 대통령 후보를 선출키로 합의했다.

    이젠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속에 빠져버렸다. 이종찬씨와 박태준씨도 대통령 후보에 대해 미련을 갖고 있고 노대통령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상태였다. 이러한 와중인 4월8일 노대통령은 극비리에 나를 청와대로 불렀다.

    노대통령이 나를 급히 부른 것은 대통령 후보 문제로 고민하던 끝에 나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당시 3·24총선에서 패배한 민자당 내부는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민정계는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한 책임을 김영삼 대표가 져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이번 기회에 김대표를 제거하려는 움직임까지 일고 있었다. 또한 김종필 최고위원도 선거 결과에 대한 불만으로 청구동 자택에서 칩거에 들어간 상태였다.

    아무튼 이런 상황을 눈치챈 김영삼 대표는 며칠 뒤인 28일 오전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할 것을 전격 선언, 국면 전환을 모색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이에 대로했다.

    “당신 마음대로 출마를 선언했으니 마음대로 해보시오. 나는 절대 경선에 개입지 않겠소.”

    바로 그날 오찬을 겸해 가진 노대통령과 김영삼 대표의 회동에서 노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의 심기를 간파한 박태준씨와 이종찬 의원도 김대표와 경선을 벌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여권의 핵심부 일각에서도 김대표를 제거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김영삼 대표로서는 극히 불리한 처지였다.

    이런 가운데 92년 4월8일과 9일 노대통령은 김영삼 대표와 김종필 최고위원, 그리고 나와 연쇄 접촉을 가졌다. 4월8일 청와대 집무실. 그날 노대통령은 의자에 앉자마자, 김영삼 대표에 대해 불편한 심기부터 드러냈다.

    “이거 읽어보셨습니까” 노대통령이 책상위에 내민 것은 모일간지에 실린 칼럼이었다. “아직 못 봤습니다” “이거 한번 읽어보시죠”

    나는 그냥 “나중에 가서 읽어보죠”라고 했다. 그날 칼럼은 ‘김영삼 대표의 자질이 회의적’이라는 내용이었다. 날보고 그 자리에서 일독을 권할 만큼 노대통령은 김영삼 후보를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 데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노 대통령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이 자신에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출마 선언을 한 점. 둘째, 언론 편집인 회견에서 전당대회 결과에 승복하겠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정확한 답변은 하지 않은 채, “나에게는 오직 승리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점. 셋째, 여당이 패배했던 14대 총선 결과에 대해서, “그 책임은 전적으로 행정부에 있다”라고 한 점.

    당시 노 대통령의 감정은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은 안 된다는 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대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약 두 시간의 만남 끝에 노대통령의 마음이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처럼 노심이 김영삼 대표 쪽으로 기울어진 뒤 우여곡절 끝에 92년 5월19일 전당대회가 열려 66%의 득표율로 김대표가 대통령후보로 확정됐다. 그리곤 그날부터 정국은 바야흐로 대선 정국으로 돌입했다. 결국 12월18일 14대 선거는 김영삼씨의 승리였다.

    의장 취임 일성 “날치기를 없애겠다”

    93년 4월1일 나는 새 국회의장으로 지명됐다. 의장 내정 소식은 청와대 주례 회동을 마친 김종필 당대표가 청와대를 나오면서 내게 전화를 해줘 알게 됐다.

    “대통령께서 의장으로 수고해 달라고 하셨고, 나는 지금 당에 가서 발표할 예정입니다.”

    “오랜 정치 생활을 하면서 우리 국회가 꼭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기자가 물어왔다.

    “여당도 해보고 야당도 해보았으니, 양쪽을 다 잘 안다. 솔직히 말해 꼭 없애야겠다고 생각해온 것은 바로 국회의 날치기 문제입니다.”

    내 입에서 ‘날치기를 없애겠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는 나로서는 뼈에 사무쳤기에 나온 말이었다. 31세부터 그때까지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날치기’는 바로 우리 국회와 정치의 어두운 표상이었다.

    아니 더 앞서 기자 시절부터 나는 도덕성 없는 정부가 국민을 무시하며 날치기 하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다. 그러니 ‘날치기’는, 40여년간 봐온 나로서는 반드시 고쳐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날치기 없는 국회, 대화를 통한 정치’는 비단 나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의 비원이기도 했다. ‘날치기를 없애겠다’는 내 결의 때문인지, 향후 14개월간의 국회의장 생활은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날치기를 없애는 것은 국회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진정한 입법부로 독립하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과거의 국회는 청와대에서 명령만 내리면 일사불란하게 악법도 만들고, 사람도 가두고, 야당 총재까지도 날치기로 제명시킨 바 있다. 그리고 그때 국회의장이란 ‘국민의 국회의장’이 아닌 ‘여당의 국회의장’으로서, 정부의 충실한 ‘통법부의 수장’일 뿐이었다.

    이렇듯 그간 굴절된 국회의장상을 공정하고 중립적인 국회의장으로 바꾼 첫 번째 사건은 93년 7월3일의 본회의 사회를 보던 때였다.

    당시 제161회 임시국회 대정부 질문에 앞서 의사 진행발언을 신청한 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은 황인성 당시 총리에게 12·12사태의 역사적 해석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황총리는 그해 5월13일 국회 행정위에서 야당 의원들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은 바 있었다. 그리고 그때 황총리의 답변은 이러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빚어진 군사 행위였지만, 위법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황총리의 답변이 있은 며칠 후 김대통령이 다소 다른 해석을 내린 것이다.

    “12·12는 쿠데타적인 사건이었다.”

    따라서 박계동 의원으로서는 황총리와 김대통령의 정의가 다르니, 황총리의 생각이 아직도 당시와 같은가 하는 의미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이때 나는 의장으로서 원만한 의사 진행을 위해서는 황총리의 답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그건 대통령이 이미 정의를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총리 역시 간단하게 ‘대통령의 생각과 같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사안이었다. 때문에 나는 총리에게 말했다.

    “어차피 대정부 질문에서도 나올 테니 총리는 박의원의 의사진행 발언에 대해 답변을 하시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황총리 역시 내 말에 따라 답변을 하기 위해 발언대로 나서려고 하는데, 갑자기 여당 쪽에서 거세게 항의하는 게 하닌가.

    “총리는 의사진행 발언에 답변할 필요가 없으니 하지 마시오.”

    국회의 장(長)은 어디까지나 의장이다. 때문에 외국의 국가 원수도, 심지어 우리나라 대통령도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면 사회자인 국회의장 자리보다 아래에서 연설을 한다. 또한 사회자의 말에 따라 움직인다.

    국가 원수도 국회 내에서는 국회의장의 말을 듣는 게 순리인데, 아무리 여당 의원들이 지지(?)하고 있다 해도 총리가 의장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분명히 정부·여당이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던 옛날 국회의 폐습에 젖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황총리에게 다시 재촉했다.

    “총리는 의장의 말을 들으시오. 나와서 답변을 하시오.”

    그러나 황총리는 여당 의원들과 내 말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앉았다 섰다 하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었다.

    본회의장은 갑자기 소란해졌다. 여당은 여당대로 소리를 지르고, 야당은 야당대로 맞고함을 지르는 등 혼란해졌다. 황총리의 엉거주춤한 자세를 보다 못한 야당의 김종완 의원은 황총리 자리 앞까지 와서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의장 말은 안 듣고 여당 눈치만 보는 거요?”

    황총리의 어정쩡한 자세 탓에 나는 본회의 정회를 선포했다.

    그리고 단상에서 내려와 안타까운 심정으로 총리에게 한마디 던졌다.

    “거…, 간단히 한마디만 하면 될 텐데 뭘 그러시오.”

    아무튼 정회 후 30분 만에 속개된 본회의에서 우선 여·야의 총무단에 의사진행발언을 하게 했다. 이때 여당 총무는 총리는 의사진행 발언에 반드시 답변할 이유가 없다고 강변했다. 물론 그것은 과거 잘못된 국회의 관례를 기준으로 했을 때였다. 그러나 이제는 ‘여당의 국회의장’은 사라진 판이다. 예전에 그런 예가 없더라도 원활한 회의 진행을 위한 사회는 의장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므로 의사진행발언에 대해서도 의장의 판단에 따라 행정부는 답변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날 본회의의 소란은 내가 기어코 황총리에게 답변을 하도록 해, 황총리가 답변을 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황총리의 답변은 뻔한 내용이었다.

    “대통령께서도 말씀하셨듯이 12·12사태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적인 사건이며, 다시는 이 나라에 되풀이돼선 안 될 불행한 과거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총리의 답변이 끝난 후 나는 의원석과 국무위원석을 향해 한마디했다.

    “총리뿐 아니라 장관들도 앞으로 국회에 나오면 국회의장이 답변을 하라고 할 때에는 반드시 나와서 답변을 하세요. 국회의장은 개인이 아니라, 이 나라 국회의 의장입니다.”

    그러나 여당으로선 그 일이 무척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월24일 헌법재판소에서 국회 본회의장을 현장 조사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야당이 낸 90년 날치기 법안 통과에 대한 헌법소원과 관련, 당시 날치기가 벌어졌던 현장인 본회의장을 검사해야겠다는 것이었다. 90년 7월 국회에서는 ‘군조직법 개정안’ 등 26개의 법안이 날치기 처리된 바 있었다.

    헌재로부터 통보를 받은 나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위상이 이 지경이 됐나 슬프기 짝이 없었다. 물론 모든 책임은 우리 정치인에게 있었다. 그리고 우리 정치인들이 대화와 타협보다 손쉬운 날치기를 택했기에 이런 부끄러운 일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헌재의 현장 조사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본회의장이 어떤 곳인가.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국정을 논의하는 가장 신성한 곳 아닌가. 그런 신성한 곳을 헌재에서 현장검증한다는 것은 국회의장인 나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이것이 국회를 경시하는 모독행위로 비쳤다.

    “누구든 의장 허가 없이 못들어간다”

    물론 지난 시대의 부끄러운 일이 이런 사태를 야기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가장 신성한 곳인 본회의장을 현장검증하는 선례를 남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또한 당시 국회를 책임지고 있는 나의 책임이자 의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야당의 반발도 만만찮았다. ‘죄 앞에는 성역이 없다’며 강력하게 내 의견에 반대했다. 특히 율사 출신들이 법을 앞세웠다.

    “피청구인 처지에 있는 의장이 정당한 검증을 피하면 법률상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결코 굽히지 않았다.

    “국회법상 누구든 국회의장의 허가 없이는 본회의장에 들어갈 수 없다.”

    결국 본회의장 대신 의장접견실에서 자료 검증을 대신한다는 데 야당과 절충함으로써, 오욕이 될 뻔한 본회의장 검증을 막을 수 있었다.

    나는 그날 의장 접견실로 찾아온 조규광 헌법재판소장 등 헌법재판관들과 기자들 앞에서 내 심경을 밝혔다.

    “정치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이렇게 여러분을 고생시켜서 미안합니다. 비록 13대 때의 일이고 그때 나는 국회의원이 아니었지만,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이러한 불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내 임기중에는 절대 날치기는 안 된다는 소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취임 초 ‘날치기는 안 된다’는 내 소신은 헌재의 본회의장 검증요청건으로 다시 한 번 강조된 셈이다.

    ‘새로운 국회상’을 만들려는 나의 신념은 이뿐만 아니라 국회의 사회를 보면서 의사봉을 칠 때도 항상 되새겼다. 모두 세 번 치는데 첫번째는 여당을 보고 치고 두 번째는 야당을 보고 쳤으며, 마지막은 국민을 보며 ‘국민에게 부끄러움이 없는가’ 내 스스로 확인한 후 사회봉을 쳤던 것이다. 또한 본회의장에 나갈 때도 항상 눈을 감고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기도를 드린 후 의장석에 자리를 잡았다. 일종의 ‘국민에 대한 다짐’인 셈이다. 그러나 얼마 뒤 결국 ‘날치기파동’을 맞게 된다.

    원칙과 중립으로 국회의장직을 수행하던 내게 커다란 벽이 다가온 것은 11월25일 94년도 예산안의 법정 통과 시한인 12월2일을 겨우 1주일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그날은 마침 ‘APEC 지도자 회의’에 참석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9일간의 방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던 날이었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께서 의장님과 점심을 하자고 하시니, 외부에는 알리지 말고 29일 12시까지 들어오시랍니다.”

    비서실의 연락을 받은 나는 오찬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국회는 추곡수매가와 정당법 등 이른바 정치개혁입법들에 대한 여야의 협상이 난항을 보여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한 나는 애당초 예산안의 강행 통과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당시 국회는 문민정부 출범 후 최초의 정기국회란 점에서 여야 모두 한 발씩 양보해 격돌없이 통과시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 시한이 다가오는 가운데 김대통령이 나를 부른 것이다.

    청와대로 들어간 나는 대통령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물론 대통령이 무엇을 원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즉 기한 내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예산안을 통과시키라는 얘기일 것이었다. 또한 그 ‘무슨 일’에는 ‘날치기’도 포함돼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 대통령이 본론을 꺼냈다.

    “이번 예산안은 법정 기일 내에 통과시켜야 합니다.”

    “가능하면 기일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계속 법정기본준수를 주장했다.

    “지금은 문민정부니만큼 법은 꼭 지켜져야지요.”

    “물론 법정 기일내 통과가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렇지만 무리하게 강행 통과를 하려다 국회가 파행이 되어선 곤란합니다. 차라리 며칠 늦더라도 야당을 설득하여 협상을 통해 원만하게 통과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평행선이었다. 나는 기일을 넘기더라도 되도록이면 ‘원만한 통과’를 원하고 있었고, 대통령은 ‘법정 기일’을 강조할 뿐이었다. 그날 대통령과 나는 점심식사 내내 예산안 통과를 두고 이렇게 의견이 엇갈렸다.

    “의장님! 강행처리가 당의 방침입니다”

    청와대를 나오는 내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왜냐하면 그래도 대통령에게 무리하게 통과시키지 않는 게 좋겠다는 소신을 분명히 말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소신을 굽히지 않자 예산안의 법정기한 내 통과가 어려울 듯한 느낌이 들었는지, 대통령은 다음날 국무회의에서도 법정기일 내 통과를 강조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국회 통과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장관들에게도 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예산안은 반드시 법정기일을 지켜야 합니다.”

    나는 대통령이 이렇게 법정기일 내 통과에 집착하는 것을 보고 몹시 걱정이 되었다. 나는 그날 오후 정시채 농수산위원장과 김중위 예결위원장을 각각 의장실로 불러 내 방침을 설명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날치기만은 하지 마시오. 당도 욕먹게 되지만, 당신들 개인의 정치 생명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오.”

    그러나 내 말은 소용없었다. 다음날인 12월1일 소집된 민자당 의원총회에서 김종필대표는 ‘예산안 법정기일내 강행 처리’ 방침을 결정해 상황은 급속도로 진행돼버렸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마음으로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결국 다음날인 12월2일 사건은 터지고야 말았다. 이날 오전 농수산위원회에서는 여야 의원들이 몸싸움을 하는 가운데 정부의 추곡수매안이 날치기로 처리됐고, 재무위에서는 노인환 위원장이 세법개정안을 기습적으로 통과시킨 후 따라오는 야당 의원들을 피해 도망다니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로써 국회는 완전히 여야 대치 국면으로 돌입했다. 그러나 ‘대화 없는 법정기일 준수’는 저녁에도 마찬가지였다. 예결위원회에서는 김중위 예결위원장 대신 간사가 양동작전을 펼친 끝에 결국 날치기로 예산안을 통과시켜버렸던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본회의 처리만 남겨 놓게 됐다. 흥분한 야당 의원들은 본회의 날치기를 막기 위해 의원 및 보좌관 총동원령을 내리고 전면전 태세에 돌입했다.

    그러나 사실 민자당에서는 내게 기대하지 않았다. 농수산위원회의 날치기가 끝난 후 김영구 총무가 날 찾아왔다.

    “의장님! 당의 확고한 방침입니다. 강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장님은 원래 날치기를 않겠다고 국민들과 약속하셨으니, 사회권을 황부의장에게 넘겨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난 이미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이르렀음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사회권을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침통한 나는 그냥 “생각해 보겠소”라고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사태가 급변하면서 잠시 후 야당 의원이 들이닥쳤다. ‘의장 보호’를 명목으로 의장실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동아일보사 후배인 김원기 손세일 임채정 의원과 허경만 김영배 김명규 의원 등 모두 나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의원들이었다. 의장실에 들어온 이들은 아예 진을 쳤다.

    의장실에서 보호 아닌 보호를 받게 된 나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날치기만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우리 국회가 아직도 이런 꼴이어야 하나…. 국회 출입 기자 시절부터 40여년간 이 국회를 지켜 왔지만, 아직도 달라진 게 없다니…, 조금만 양보하고 자기 주장이나 고집을 버리면 충분히 타협이 가능할 텐데, 그걸 못 하다니….’

    마음이 무거웠다. 특히 그동안 국민들에게 우리 국회가 달라진 것을 보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분노가 치밀었다. 시간이 흐르자 나는 결정을 해야만 했다.

    ‘날치기로 인해 국회를 다시 20~30년 후퇴시킬 수는 없지만, 민자당의 한 조직인으로서 사회봉을 부의장에게 넘겨 달라는 여당의 요청마저 거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국회 공백을 막기 위해 사회권은 넘기자. 대신 야당에도 이 사실을 알리고, 모든 책임은 내가 지자.’

    이렇게 결심 한 나는 바로 여야 총무를 불러, 사회권을 황낙주 부의장에게 이양한다고 정식으로 통보했다.

    사회권을 넘기자, 그간 열리지 못하고 있던 본회의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황부의장을 앞세운 여당의 날치기 시도는 실패에 그치고 말았고, 국회는 다시 대치 상태로 들어가는 등 국민 앞에 심히 부끄러운 추태만을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착잡한 심정으로 의장실에 앉아 있는 내게 김영구 총무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저…, 의장님께서 사회권을 넘긴다는 이양서를 하나 써주십시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한동안 나는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심하다는 생각에 나는 화를 벌컥 냈다.

    “아니 내가 사회권을 넘긴다고 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서류는 또 무슨 서류요!”

    말을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나는 곧 강성재 비서실장과 김지용 보좌관(현 총재대행 비서실차장)을 불러, 사회권 이양서를 쓰는 동시에 의장 사퇴서도 함께 작성토록 지시했다. 돌연한 지시에 놀란 강실장이 극구 말렸다.

    “의장님이 지금 사임하시면, 오히려 국회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니 정 뜻이 그러시다면 날치기 처리가 된 후에 사퇴를 하는 것이 국회의 공백을 막기 위해서도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다만 언제라도 사퇴할 수 있도록 김지용 보좌관에게 사퇴서를 맡겨놓고, 날치기가 되면 바로 이종률 사무총장에게 제출토록 단단히 지시했다.

    ‘사임서: 본인은 1993년 12월쭛일 정상적인 국회 운영을 하지 못한 데 대하여 국민 앞에 그 책임을 통감하고 이에 의장직을 사임코자 합니다.’

    날짜가 언제가 될지 몰라 날짜란만 공란으로 남긴 채 김보좌관이 준비해온 사임서 초안에 직접 국회의장 이만섭을 쓰고, 그 이름 위에 인감을 찍고 나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리고 나는 다시 김지용 보좌관과 함께 기자회견시 발표할 사퇴성명서까지 작성해 놓았다.

    ‘여야 공통의 승리’ 만들어내

    그러나 그날의 날치기 시도는 야당의 격렬한 저항으로 결국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날치기 미수’ 이것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로써 사퇴하려던 나의 결심도 역시 미수(?)에 그치고 만 셈이다. 다음날 국민들과 언론은 크게 분노했다. 간밤에 국회에서 벌어진 한심한 모습을 일제히 보도하면서 여야를 꾸짖었다. 이렇게 되자 여당은 더 이상 날치기 시도는 하지 못한 채 야당과 계속 협상을 벌여 나가기로 방침을 정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협상 방침을 정하기 전에 내 귀에 한심한 소리도 들려 왔다.

    “국회의장이 부의장과 짜고 사회권을 넘기지 않은 것처럼 양동작전을 폈어야 했는데, 의장이 사회권을 이양한다는 사실을 야당에 알려주는 바람에 작전이 실패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국사(國事)가 무슨 운동 경기나 군 작전도 아닌데, 양동 작전이라니…. 아직도 여당이 그런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없이 안타까웠다.

    국민의 여론에 밀려 그렇게 되기는 했지만, 여야가 협상을 하기로 방침을 정했기에 나는 그날부터 양당의 중재에 최선을 다했다. 우선 김종필·이기택 양당 대표를 각각 방문해 여야의 원만한 타협을 설득했다. 또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정치특위 회의실에도 찾아가 여야 협상 대표들을 격려하고 유종의 미를 당부했다.

    나는 특히 야당에도 타협을 강조했다. 박상천 민주당 간사와 강수림 의원을 각각 의장 공관으로 불러, 특별히 합의 성사를 당부했다.

    결국 나를 비롯한 양당의 노력에 의해 5일 뒤인 12월7일 밤 늦게 말 많던 예산안을 격돌 없이 표결로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43조2500억원의 새해 예산안과 ‘수매량 1000만섬, 수매가 5% 인상’의 추곡수매안을 표결로 처리했으며, 구시대의 상징이던 안기부법·통신비밀보호법·정당법은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나로서는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었다. 대타협은 여야가 조금씩 양보하고 존중하면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으며, 이를 계기로 국회는 국민에게 ‘여야 공동의 승리’를 보였던 것이다.

    국회가 원만히 풀리자, 연말 청와대에서 있은 대통령 기자간담회에서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국회가 잘됐어요.”

    내 방법이 옳았다는 얘기 같아서,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나는 그제야 마음이 풀렸다. 타협으로 개혁 입법을 완성한 국회는 다음해인 3월4일 제166회 임시국회에서는 1년을 넘게 여야간에 절충해온 통합선거법·정치자금법·지방자치법 등 국민의 여망이었던, 이른바 정치개혁법도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킬 수 있었다.

    국회가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또한 내가 정치인으로 그간 누누이 강조해온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결국 민주정치의 근본이라는 걸 증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날치기 거부했다고 의장 바꾼 겁니까”

    그러나 중립을 지향하던 나의 ‘공정한 의장’은 결국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6월25일 밤 나는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경질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집권 후반기에 의장이 말을 안 들으면 곤란합니다. 그러니 바꾸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민주계 강경파에서 대통령에게 이런 식으로 날 견제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의장직에서 물러난 지 열흘 후인 7월8일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김대통령이 조찬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이의장, 너무 서운해하지 마십시오.”

    자리에 앉자 김대통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김대통령의 그 말로 나는 의장직에서 물러난 나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제가 지난번에 날치기 사회를 거부했다고 바꾼 것입니까?”

    나는 기탄없이 대통령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대통령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띠며 “아, 그게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제가 민주계가 아니어서 바꾼 겁니까?”

    “뭐, 그런 것도 아닙니다.”

    대통령은 계속 손을 내저었다.

    “아직까지도 민주계니 비민주계니 하는 것을 따져서야 되겠습니까.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을 밀었다면 모두가 YS계지 민주계, 비민주계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는 그런 계보를 따지는 정치는 없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그래야지요. 이의장,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대통령이 어색한 표정으로 화제를 돌렸고 나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청와대를 나왔다. 의장을 한 번 더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3권분립하의 입법부 수장이 대통령의 기분에 좌우돼 경질되는 이 나라의 풍토가 안타까웠던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중반을 넘은 94년 말부터 문민정부의 위상 역시 하향곡선을 긋고 있었다. 문민정부라는 정통성과 취임 초기의 개혁 드라이브는 점차 색이 바래갔고 권력의 독선 속에 특정 계파와 가신에 의한 정치의 폐단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94년 10월21일 한강의 성수대교가 붕괴돼 어린 중학생들을 비롯한 무고한 시민 32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잇따른 대형 참사로 사회분위기도 어수선했고 정치적으로도 격동을 면치 못했다.

    96년 4월 15대 총선이 끝나자 정국은 바로 다음해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로 치달았다. 그리고 96년 이후부터 김영삼 정부와 여당이 때이른 ‘레임덕’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여당의 대권경쟁이 너무 빨리 불붙었기 때문이었다.

    여당의 조기 대권경쟁의 원인은 15대 총선을 전후해 김영삼 대통령이 자초했다는 측면도 있다.

    여러 개혁정책의 반작용으로 인한 민심이반에다가 95년 6·27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여당이 갑작스러운 인기 하락에 직면하자 김대통령은 96년 총선을 앞두고 부랴부랴 외부인사 영입을 서둘렀다.

    이회창·이홍구 전 국무총리를 입당시켰고, 국무총리에는 이수성 서울대 총장을 앉혔으며, 대중적 인기를 지니고 있던 박찬종씨까지 대거 신한국당의 울타리 안으로 불러들였다.

    이회창 전 총리를 중앙선대위 의장에, 그리고 박찬종씨를 수도권 선거대책위원장으로 내세워 그들의 참신한 이미지를 십분 선거에 활용함으로써 총선에서 참패는 모면했을지 몰라도 그대신 후계구도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이회창, 이홍구, 그리고 박찬종씨를 당에 영입할 때 그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똑같은 함량의 ‘장밋빛 꿈’을 심어주며 차기 대권에 대한 욕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아무튼 총선이 끝나고 우여곡절 끝에 15대 국회가 열렸으나 ‘7룡’이니 ‘9룡’이니 연일 언론이 부추기는 가운데 여당 안에서는 바야흐로 때이른 대권경쟁에 불이 붙었던 것이다.

    김윤환 대표의 후임인 이홍구 대표와 함께 당내 ‘7룡’, ‘9룡’들이 전국을 누비며 연설 경쟁을 벌였고, 비단 정당 행사뿐만 아니라 강연과 각종 모임 등을 통해 정치의 모든 초점은 여당 내의 이들 대권 경쟁자들에게 모아졌다. 그 가운데서 영입파와 비영입파, 민주계와 비민주계, 그리고 영남권과 비영남권 등으로 나뉘어 날만 새면 야단 법석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호의 위기’는 96년 12월26일, 자정을 몇 시간 넘긴 추운 겨울 새벽에 시작되었다.

    정부 여당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전격 날치기 통과시킨 것이다.

    정부 여당의 노동법개정안은 ‘복수노조 허용’과 ‘정리해고’를 골자로 한 것이었는데 노·사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정치권과 노사 양측이 조금만 더 인내를 갖고 계속 노력한다면 적어도 1월 중에는 타협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 여당이 그 며칠을 기다리지 못해 스스로 화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안기부법 개정안 역시 문민정부 들어 없앴던 수사권을 다시 부활한다는 비판을 받는 무리한 법개정이었다.

    날치기 사회를 거부함으로써 국회의장직에서 일찍 물러났던 나로서는, 노동법문제를 절대 무리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당 고문회의 등을 통해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26일 새벽, 야당이 모르는 가운데 여당만이 본회의에서 노동법 등을 전격적으로 날치기 통과시켰던 것이다.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되자 나라 안이 소용돌이쳤다.

    97년을 온통 뒤흔들었던 한보사태는 문민정부의 신산업정책이 최종실패한 대표적 사례였으며, 정·재계의 곪은 상처를 한꺼번에 터뜨린 뇌관이었다.

    이런 가운데 노동법, 한보사태 등의 책임을 지고 이홍구 대표가 물러나고 3월 13일 이회창씨가 후임을 맡음으로써 여당내 대권경쟁이 재연되기 시작했다.

    “후계문제, 저한테는 말해주시죠”

    특히 당은 이홍구 대표 후임으로 김대통령이 지명한 이회창 대표에 대한 자격시비로 심한 내홍을 거듭했다.

    대권후보 당사자인 이회창씨가 경선을 눈앞에 두고 대표를 맡는다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타 대권후보들은 이회창 대표 본인이 대표 취임 전에 ‘경선에 나설 사람이 대표가 되면 불공정 경선’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며 이대표에게 대표에서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따라서 당은 이대표가 취임한 3월13일부터 6월까지 연일 이대표와 반이대표 진영으로 나뉘어 집안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이회창 대표는 ‘대표 프리미엄’을 문제삼아 끈질기게 사퇴를 주장하는 당내 경쟁자들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나는 그때부터 이회창대표의 정치력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이란 자신의 주위부터, 그리고 당 내에서부터 신망과 인정을 받아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처음부터 포용력도 없이 많은 사람을 적으로 돌려놓고 어쩌자는 것인지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경선일을 20일 앞둔 7월1일, 대통령으로부터 대표를 맡아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의장이 대표를 맡아 경선을 이끌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한동안 망설였다.

    대통령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회창 대표 지명 때부터 갈팡질팡하더니 결국 몇 달 동안 당내 불화만 불렀던 게 아닌가.

    “웬만하면 다른 사람을 시키시죠.”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계속 사양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추천하기까지 했다.

    “민주계의 원로이신 김명윤 의원을 시키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그러자 김대통령은 한동안 말 한마디없이 숨쉬는 소리조차 전화기에서 들리지 않았다.

    한참 뒤 대통령이 다시 말을 이었다.

    “… 모든 후보들이 이의장이 대표를 맡아야만 공정하게 경선을 치를 수 있다고 하니 그러지 말고, 내일 국회 대표 연설부터 준비해주시죠.”

    나는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다.

    이미 당은 당대로, 후보들은 후보들대로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가운데 그 혼탁하고 골치아픈 경선을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 자리에서 끝까지 거절하고 싶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여당 사상 최초의 대선 후보 경선을 성공시키기 위해 모두가 노심초사하는데 더 이상 이를 뿌리치는 것도 당인의 자세가 아닌 것 같아 결국 대표를 맡기로 했다.

    당시 나는 대표로서 일 주일에 한 번씩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과 주례회동을 가졌다. 나는 갈 때마다 후계 구도에 대한 김대통령의 분명한 의중을 알고 싶어 여러 차례 그와 솔직한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저한테는 터놓고 이야기를 해주셔야지요. 저는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오늘의 정치혼란에 책임을 지고…”

    그러나 그때마다 김대통령은 과거와는 달리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내 느낌에 그때 김대통령은 거의 정신적 진공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은 취임 초부터 한푼의 돈도 받지 않겠다고 해왔었는데 한보사태를 계기로 측근들의 온갖 비리가 드러나 문민정부의 자부심이 땅에 떨어진데다, 아들마저 비리 혐의로 구속되어 전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던 때였다. 그 당시 김대통령은 막바지 경선과정이나 대권 구도에 있어서도 누구를 밀고 말고 할 정신적 여력도 없이, 누가 되든지 그저 모든 게 귀찮은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신한국당의 대통령후보로 이회창씨가 선출되었으나, 그것은 갈등의 종식이 아니라 새로운 파국의 시작이었다. 이회창 후보가 선출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후보 두 아들의 병역의혹 문제가 터져 나왔다. 이때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도 급격히 떨어졌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10%대에서 움직이지 않고 날이 갈수록 여론이 나빠지자 여당인 신한국당은 일종의 ‘패닉현상’, 공황 속에 빠졌다. 다시 심각한 내분이 재연되었고 본격적으로 ‘후보 교체론’이 대두되었다. 이후보가 3월 대표직을 맡아 불공정 시비에 휘말린 때부터 시작된 이회창·반이회창 진영 간의 반목이 또다시 불붙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여당이 겪는 사상 초유의 혼돈 상태에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여당이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두고 이런 꼴을 보이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박대통령을 따라 대통령 선거를 했던 63년 이래 그런 여당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고문회의를 통해 누차 “모두가 사심을 버리라”고 촉구했다. 개인보다는 당, 당보다는 나라와 국민의 미래가 더 중요하지 않으냐고 소리를 높였지만 당의 내분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다다라 있었다.

    10월22일 이회창 총재가 전격적으로 김영삼 명예총재의 탈당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급기야 11월6일 포항에서 열린 대선 필승 경북 지역 결의대회 도중 ‘YS’라고 적힌 인형을 당원들이 몽둥이로 때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김대통령은 다음날 스스로 신한국당을 탈당해버렸다.

    나날이 위기로 치닫는 경제 상황 속에 나라의 근간을 지켜야 할 집권 여당의 이전투구가 1년 이상을 끌어오다 마침내 파국을 맞은 것이었다.

    한평생 정치를 해오며 나라의 온갖 풍상을 직접 겪어왔던 나지만, 그때 느꼈던 허탈과 배신감은 그 어느 때보다 큰 것이었다.

    “지금 여당 안에서 빚어지고 있는 불행한 사태는 나라의 장래를 위해 지극히 우려되는 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당의 명예총재와 총재가 노골적인 반목과 대립을 보이고 있는 오늘의 사태는 정당사상 일찍이 없는 일로 국민앞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오늘의 정치혼란에 책임을 지고 국민에게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당 상임고문직과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바입니다.”

    나는 이런 말을 남기고 3년이나 남은 의원직을 버리고 말았다. 그해 10월28일 아침이었다. 그날 오후에 나는 신한국당도 탈당했다. 최근 이때의 탈당을 두고 일부 시민단체는 나를 당적을 변경한 정치인 명단에 넣기도 했으나 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내가 신한국당을 탈당한 것은 ‘당적 변경’이 아니라 탈당해서 새로운 당을 만든 것이고, 또 야당에서 힘있는 여당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힘없는 야당이라는 가시밭길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대선 후에는 IMF 사태로 경제 위기에 직면한 나라부터 살려야 겠다는 심경으로 국민회의와 떳떳하게 당대당 통합을 하게 된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