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장애인은 있어도 장애인의 삶은 없는 나라

한국의 ‘오체불만족’ 윤봉근의 현장고발

  • 입력2006-12-06 10: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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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1992년 1월 마지막 날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의 꿈을 앗아가버린 최악의 날이었다.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흩날리더니 날이 저물면서 기온이 떨어져 길은 빙판으로 변해 있었다.

    퇴근길에 나는 구입한 지 한 달도 안된 트럭을 몰고 올림픽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일을 마치고 기분 좋게 한잔 한 상태였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차 한대가 추월을 하려고 튀어나왔다. 이 차를 피하려다 미끄러지면서 중앙분리대를 넘어가 운전석과 트럭 짐칸이 완전히 동강나는 대형사고가 벌어졌다. 나 역시 교통사고 피해자였지만 음주운전이었다는 이유로 아무런 보상도, 주위의 동정도 받지 못했다.

    그 날부터 꼭 40일이 지나 나는 정신을 차렸다. 어디선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아이 울음소리에 나는 ‘우리 애도 태어날 때가 됐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퍼뜩 눈을 뜨고 보니 온몸에 쇠꼬챙이를 꽂고 지독한 소독약 냄새를 풍기며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 내가 왜 여기에 있어요?”라는 질문에 대답하려는 듯 간호사가 얼른 주사를 놓았다.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정말 아무 기억도 없느냐”고 되물으시면서 사고가 난 직후 나는 동인천 길병원으로 실려와 40일 동안 수술실과 병실을 오갔고 하루에 15차례 주사를 맞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동안 상태가 호전됐을 때는 문병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는데 내게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러나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사고 직전 만삭이었던 아내와 아이 소식이었다. 그때 아내는 못난 남편 때문에 서울 어느 병원에서 혼자 외롭게 딸을 낳고 있었다. 지금도 당시 혼미했던 나를 깨운 것은 분명 딸 지현이의 울음소리였다고 확신한다. 서울과 인천이라는 시공간을 넘어 아이의 울음이 나를 깨워준 것이다.

    나는 서른 둘에 장가를 들었다. 부모님은 막내아들이 서른을 훌쩍 넘기고도 결혼할 생각은 안 하고 사업을 한답시고 일본 바닥을 헤매는 꼴이 못마땅하셨던지 불효를 내세워 귀국시켰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한 지 1년, 만삭의 아내를 두고 나는 뜻밖의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9개월의 병원생활 끝에 더 이상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퇴원을 하긴 했지만 대소변 처리도 할 수 없던 나는 그래도 의지할 곳이라고는 입원했던 병원밖에 없다는 생각에 병원 바로 앞에 전셋집을 얻었다. 그때부터 나의 생활은 사투였다. 꿈 에는 걷고 뛰었지만 현실은 기댈 곳이 없으면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그리고 아무 때고 고약한 대소변 냄새를 풍기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남의 도움만 기다려야 한다는 수치심이 견디기 어려웠다. 죽고만 싶었는데 방법을 몰랐다.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나에게 집은 감옥 아닌 감옥이었다. 길가로 난 내 방 창 너머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 발소리가 왜 그리 그리웠던지.

    그 와중에도 갓 백일이 되어 옹알이를 하는 딸을 안아보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가슴 아래가 마비되어 벽 모서리에 기대지 않고는 앉아 있기조차 어려운 내겐 딸을 품에 안는 것도 큰일이었다. 혹시라도 옆으로 쓰러지면서 아이를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불안해서 안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휠체어를 탈 수 있게 되기까지 수없이 엎어지고 자빠진 끝에 드디어 첫나들이를 하게 됐다. 문 밖까지 휠체어를 밀고나오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그만 다시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얼마나 손꼽아 기다린 첫 외출인데, 눈물 때문에 포기하다니! 그러나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아빠지만 방긋방긋 웃으며 안겨오는 딸이 더 크기 전에 반드시 이 방을 탈출하리라 생각하니 용기가 솟았다.

    겨우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자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혼자 힘으로 고향 남원에 가고 싶었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자 고향 외에는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대소변 처치를 위한 장비를 챙겨들고 택시를 타고 무작정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을 오가는 사람들은 마치 울타리 밖을 뛰쳐나온 원숭이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인정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버스표를 샀다. 하지만 매표원이 무심코 준 좌석번호는 맨끝자리였다. 도저히 거기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아 망설이자 측은했던지 앞좌석 손님이 선뜻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전주행 버스에 동승한 승객들과 운전기사의 배려로 나의 첫 고향 나들이는 순조롭게 시작됐다.

    전주에 도착해 다시 남원행 직행버스로 바꾸어 탔다. 아무 연락도 없이 불쑥 남원터미널에 나타난 나를 알아보는 이가 몇 명 있었다. 금세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장애인이 된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황당해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금방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때 비로소 나는 행운아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반신이 마비돼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불가능해졌지만 그 전에 얻은 소중한 딸이 있고, 언제라도 나를 반겨주는 고향과 친구들이 있지 않은가.

    휠체어와 가방

    사고를 당한 후 잠시도 나와 떨어질 수 없는 물건이 휠체어와 가방이다. 휠체어는 내 발이요, 가방은 내 몸이다. 하반신마비 이후 외출시 대소변 처리가 늘 골칫거리인 나는 큼직하고 멋진 서류가방을 가지고 다닌다. 거기에 화장실 대용 꿀통과 소변 빼는 기구(넬락톤 세트), 휴대폰과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 그밖에 잡다한 살림살이를 챙겨넣고 다녔다.

    무릎에 커다란 가방을 올려놓고 휠체어를 탄 나는 영락없는 잡상인이다. 그래서인지 큰 회사 빌딩에 들어갈 때마다 긴장된 표정으로 막아서는 경비와 승강이를 벌여야 했다.

    한번은 어느 대기업 과장인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경비가 다가서더니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냥 조용히 나가라’고 했다. 평소라면 약속이 되어있으니 전화로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니냐고 조용히 말했겠지만, 그날 따라 새벽부터 이리저리 휠체어를 끌고다녀 이미 파김치가 된 상태였다. 내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화가 치민 김에 평소 하고 싶은 말을 있는 대로 뱉어냈다.

    “당신 몇 살이오? 군대 다녀왔소? 난 군대도 다녀오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온 시민이오. 내가 내 친구 만나러 왔다는데 왜 못 들어가게 해? 이보시오, 이렇게 해야 대기업 위신이 선답디까?”

    한참 후 흥분을 가라앉힌 나는 ○○팀 과장을 만나러 왔다고 솔직히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내 가방을 힐끔힐끔 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의심이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아예 “이 자리에서 물건 좀 팔게 이리 와 보시오” 하면서 큰 가방을 열었다. 모두들 궁금했던지 내 휠체어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소변통과 휴대폰, 몇 가지 서류뿐인 가방 속을 들여다보고서야 그들은 커피 한 잔을 주면서 사과를 했다. 나는 또 속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홀짝거렸다.

    앞으로 장애인이 오면 이런 식으로 업신여기며 내좇지는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외에 할 말이 없었다. 장애인이 회사를 방문하면 ‘어디를 가시느냐’ 상냥하게 묻고 쉽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도록 잡아주는 배려는 나의 지나친 기대일까.

    사랑의 집에 날아온 천사 은철이

    ‘해처럼 달처럼 사회복지회’를 운영하면서 늘 안타까운 것은 전국 곳곳에서 도움요청이 쇄도하지만 버려진 장애인이나 병든 노숙자들이 몸이라도 편히 뉠 곳을 찾아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가 운영하는 시설은 늘 만원인 데다 민간시설이면서도 꽃동네처럼 중증장애인을 받아주는 곳은 1년 넘게 기다려야 입소할 수 있는 형편이다. 이처럼 장애인들이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우리 ‘해처럼 달처럼 사회복지회’ 가족이라도 모여살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황익상 목사 부부를 만나 드디어 그 소원을 이뤘다.

    황목사는 20년 넘게 소외된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목회활동을 하는 데다 교회 성금이나 독지가의 후원금에 의존하지 않고 장터에 나가 돈을 벌어 그것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훌륭한 분이다. 나는 황목사의 그런 정신을 높이 평가했고 지난해 9월 드디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쉼터 ‘해처럼 달처럼 사랑의 집’을 만들었다.

    사실 사랑의 집은 전적으로 황목사 부부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다. 안양시 석수동에 있는 황목사의 교회와 사택을 개조해 쉼터로 만들었던 것이다. 대신 목사님댁 4남매는 전세방을 얻어 나갔고, 대신 12명의 오갈 데 없는 노인과 장애인, 노숙자를 새가족으로 맞이했다. 황목사의 공식직함은 ‘해처럼 달처럼 사랑의 집’ 대표이고, 연명자 사모가 원장이다. 나는 쌀이며 부식을 조달하고 운영비를 마련하는 사무국장이 됐다.

    이렇게 사랑의 집을 개소한 지 한 달도 안돼 은철이를 맞이했다. K시 사회과에서 버려진 아이가 있다며 사랑의 집으로 데려왔다. 아이는 첫눈에도 상태가 나빴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운동기능이 전혀 없는 아이는 파랗게 질린 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도대체 어느 병원으로 데려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 와중에도 또렷한 코와 입매, 힘겹게나마 해맑게 웃는 모습이 첫눈에 우리 가족을 사로잡았다. 자세히 보니 희미하지만 형태를 알아볼 정도의 시력도 있는 것 같아 빨리 정밀진단을 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다음 문제는 호적. 아이는 호적이 있어야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받을 수 있고 병원진료도 자유롭다. 아이를 처음 데려온 K시에서는 우선 행려자로 처리해 카드를 만들고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법원에 가서 절차를 밟아 호적을 만들고 생활보호대상자로 선정되기까지는 두 달 이상 기다려야 했다.

    두 달 동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고, 목사님 부부는 아이에게 은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밤낮으로 아이를 돌봤다.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MRI촬영도 여러번 했다. 병명은 선천성 뇌졸중. 뇌에 물이 차서 계속 뽑아내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기 때문에 머리에 가는 호스를 박아 심장쪽으로 보내야 했다. 은철이 부모는 아이를 포기하기까지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머리에 가득한 수술자국이 그것을 말해주었다. 그런데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부모의 심정을 생각하면 더욱 이 아이를 살리고 싶었다.

    병원에서는 어차피 사춘기까지 살면 오래 사는 것이니 포기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이후 은철이는 목사님 부부의 사랑으로 확실히 달라졌다. 때때로 은철이가 숨이 막혀 새파래지면 따라죽고 싶다는 두 분이니 그 사랑이야 설명이 필요가 없다. 아예 은철이를 입양한 두 분은 하루에 세 차례 운동을 시키고 다섯 가지 과일과 곡식으로 만든 유동식으로 아이의 체력을 길러주었다.

    처음 사랑의 집에 올 때 허옇게 흰자위를 드러낸 채 풀려 있던 눈은 어느덧 제자리를 찾아 초롱초롱해졌고, 운동신경도 살아난 듯 손벽을 치고 혼자 앉을 정도가 됐다. 진짜 나이는 모르지만 은철이는 호적상으로 올해 네 살이 됐다.

    “우리 은철이 머리에 물이 마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연명자 원장님. 은철이가 완치하면 대학도 보내고 대학원 공부까지 시켜서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선교사로 만들겠다는 목사님.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지기를 바란다.

    장애인을 돕는다고 전국을 누비다 보니 나도 재활에 관한 한 돌팔이 수준을 넘어섰다. 그래서 가끔 장애 관련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받는 영광도 누린다. 연아와 그 어머니를 만난 것은 3년 전 인천 연세대 재활병원에서 주최한 세미나에서였다. 내 일은 세미나가 끝난 뒤 참석한 사람들(주로 장애아를 둔 부모)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연아 어머니는 누구보다 열심히 질문을 했고 꼼꼼히 받아적는 성의를 보였다.

    연아는 뇌성마비 장애에 재생 불량성 빈혈증세가 있는 열세 살 소녀였다. 게다가 청각과 시각이 모두 손상돼 잠시도 혼자 내버려둘 수 없는 중증이었다.

    연아네 집은 아버지가 IMF사태로 일자리를 잃은 데다 연아 치료비로 전세금까지 모두 써버려 월세방에 살고 있는 극빈자였다. 하지만 딸을 살리려는 연아 어머니의 의지는 강했다. 차비가 없을 때는 연아를 업고 서너시간씩 걸어 무료진료 병원을 오갈 정도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지극 정성도 부질없이 지난해 연아는 감기 합병증세 때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연아네가 좀더 빨리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되도록 도와주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연아가 죽은 후 연아 부모는 또 한번 우리를 놀라게 했다. 딸의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망가진 연아의 몸에서 기증할 수 있는 장기는 안구뿐이라는 말에 그들은 다시 절망했을 것이다.

    그후로도 연아 부모는 딸이 다니던 학교에서 모아준 성금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고 고스란히 내게 보내왔다. 나는 그중 절반은 길벗봉사회에 보내고, 나머지는 우리 ‘해처럼 달처럼 사랑의 집’ 운영비에 보탰다. 연아는 먼저 하늘나라로 갔지만 아직 이 세상에 남은 우리에게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떠났다.

    세상에 온 지 일주일만에 버려진 아이

    그 힘들다는 하사훈련을 함께 받고 같은 군대에서 동고동락한 유영준 하사가 안타까운 사연을 들고 나를 찾아온 것은 3년 전이다. 유하사는 군대에서도 나의 고마운 동료였지만, 사회에 나와서도 장애인이 된 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진정한 친구다.

    그가 전한 소식은 지방의 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지 일주일만에 버려진 기형아를 보았다는 것이다.

    자기 일도 아닌데 내게 부탁하면 무슨 방법이 있을 거라 믿고 연락을 해준 그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원래 아이를 좋아하던 나는 장애인이 된 후 유달리 장애아들이 귀엽다. 아무리 얼굴이 일그러지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라도 어딘가 한 군데는 예쁜 구석이 있다. 내게는 항상 예쁜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유하사는 나만 믿고 저녁 9시가 다 되어 아이를 안고 왔다. 조산인 데다 한쪽 팔은 없고 그나마 남은 팔에는 손가락 3개가 꼬물거리며 달려 있었다. 또 합병증이 있는 듯 전반적으로 건강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이미 나 때문에 장애에 익숙하지만 아기가 너무 안타까워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마냥 눈물만 흘릴 수는 없었다. 제일 급한 것은 아기를 돌볼 용품들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유하사는 아이를 돌보는 데 써달라며 10만원을 맡기고 돌아갔다. 나는 아내를 데리고 부랴부랴 유아용품 가게로 가서 젖병, 속옷, 기저귀, 장난감, 분유 등을 챙겼다. 문득 내 딸이 태어났을 때는 40일 동안 사경을 헤매느라 이런 것 하나 챙겨주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그 아쉬움에 분풀이라도 하듯 나는 이것저것 사들고 돌아와 내 옆에 아기를 눕혔다. 그날밤 보채는 아이를 달래며 뜬 눈으로 지샜다. 그리고 이 아이를 낳고 아기엄마는 얼마나 놀라고 고통 받았을지 생각했다.

    아이는 시설로 보내는 것보다 가정을 찾아줘야 한다는 확신이 섰다. 그때 선뜻 입양 의사를 밝힌 것이 오상식씨다. 내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오씨는 한때 미8군에서 하니보이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던 가수였다. 하지만 버거씨병으로 핏줄이 졸아붙어 팔다리가 썩어들어가자 손가락 열 개를 모두 자르고, 다리는 무릎 위까지 잘라내는 대수술을 했다. 아내와는 이혼을 하고 대학입시를 앞둔 딸과 어렵게 살고 있는 상식이 형님이 입양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 뜻밖이었지만 아이는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대로 추진했다. 아이는 오믿음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세 살이 된 믿음이는 이제 아버지 집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잘 자라고 있다. 팔이 없어 중심이 잡히지 않아 자주 넘어지다보니 머리에는 항상 상처자국이 남아있지만 얼마나 씩씩하고 사랑스러운지 그 동네에서 인기 스타가 됐다.

    이제 믿음이는 남은 손가락 3개의 기능을 강화하는 수술을 할 것이다. 또 일곱 살이 되면 요도장애를 제거하는 수술도 할 예정이다. 이 모두 믿음이를 아끼고 도와주는 분들의 후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남은 것은 교육이다. 씩씩한 믿음이를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키울까 생각하는 것도 나의 행복한 고민이다.

    차라리 법대신 주먹을

    복지에 관련된 일을 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부딪히는 것이 ‘법’이다. 적용되는 법은 하나인데 적용하는 사람의 양심과 복지에 대한 관심 정도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그러면서 늘 느끼는 것은 무슨 법이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가라는 점이다.

    사회복지법은 국민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면 담당자들은 마치 동냥 주듯 고자세를 취하며 가뜩이나 주눅든 장애인들에게 법을 들이민다. 게다가 복지법이 개정되어 시행되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직이 자주 바뀌어 미처 업무파악이 안됐기 때문이라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두번 세번 관공서를 드나들며 통사정을 해야 하는 장애인들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이다.

    그날은 급한 장애인들을 돌보느라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오던 상수형님을 돕기 위해 D군 사회과를 찾아갔다. 먼저 형의 어려운 생활을 설명하고 생활보호대상자로 선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담당자의 대답을 듣기 위해 눈치를 보며 한참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한껏 미소를 지으며 선처를 부탁한다고 몸을 조아렸지만 움직이는 병원인 내 몸은 점점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좀 빨리 처리해달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을 들은 직원이 다가와 “안된다면 안되는 줄 알지, 당신이 뭔데 안되는 것을 해달라고 하느냐”며 깔보는 듯한 자세로 시비를 걸었다. 순간 대답할 말을 찾아 머뭇거리자 그의 표정은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나는 곧 “당신 아버지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고 합시다. 지나가던 사람이 팔만 내밀면 구할 수 있는 상황인데 법 절차대로 한답시고 구조대에 신고한 후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느냐”고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이내 사무실 안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소란 속에서 상수형님 가족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더욱 몸을 움츠린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더 속이 상해 결국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라고 당신에게 월급을 주는 것이야.”

    그제서야 쳐다보지도 않던 과장이 나서며 부하직원을 나무랐다. 그것도 내게는 못마땅했다. 처음부터 제대로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법보다 주먹을 앞세우면 일처리가 조금은 빨라질까?

    신문가판대만 당첨됐어도…

    오상식씨는 장애인이 된 뒤 과천에 ‘빛과 사랑 선교회’를 만들어서 거의 매일 기도회를 열었다. 오씨는 여기서 자신의 장기인 노래와 간증으로 장애인들을 위로했다. 마침 기도회에 참석한 30대 중반의 김기석씨를 만났다.

    큰 키에 당당한 체격을 지닌 청년이었지만 7년 전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목발에 의지해도 중심이 잡히지 않아 걸을 때마다 심하게 뒤뚱거리는 편마비 증세가 있었다. 덩치가 커서인지 흔들리는 걸음걸이가 더욱 불안해 보였다. 그 광경을 보노라면 사고 전 건실한 대기업 사원이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더욱이 돌봐줄 가족도 없이 외롭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차에 김기석씨가 집으로 찾아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항상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고마운 이들 속에 있는 행운아이기도 했다. 아버님이 화재로 불행하게 돌아가시기 전 거동이 불편한 아들을 위해 자동차 한대를 사주셨고 300만원에 선뜻 집을 빌려준 고마운 집주인도 있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소박한 꿈이 있다면 적게나마 고정적인 수입을 마련해 결혼을 하는 것이다. 이미 같은 연립주택 위층에 살고 있는 천사표 아가씨가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밥을 지어주고 청소며 빨래도 도와주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건은 딱 하나. 그가 적은 돈이라도 고정적으로 벌게 되면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얼마 전 지하철공사에서 모집한 신문가판대 추첨에 당첨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나를 찾아온 것도 어떻게 하면 추첨에 붙을 수 있느냐고 묻기 위해서였다.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는 나는 다음 기회에 응모해 꼭 붙으라는 격려밖에 할 수 없었다. 아쉬움만 더한 채 삐뚤빼뚤 걸어 차에 올라타는 그를 바라보면서 그의 소원이 참 소박하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거리에서 불안정한 걸음걸이에 어눌한 말투로 물건을 파는 장애인들을 만난다. 그런 행위가 동정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강동수씨는 서울 근교 상가를 돌며 공업용 본드를 판다. 그는 한때 직업군인으로 남다른 체력을 자신하던 사람이다. 그날도 위병소를 나서다 뺑소니차에 치여 심한 편마비에 언어장애를 갖게 됐다. 실제로 그가 하는 말은 거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어눌해서 본드를 팔 때는 자신의 처지를 종이에 써서 말을 대신하곤 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돈을 버는 강동수씨가 못마땅했지만 그렇다고 비난할 처지도 못 됐다. 직업군인으로 당당하게 살던 그가 본드 하나만 사달라고 쓴 종이를 사람들에게 돌릴 때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그의 장애가 조금만 경미했다면 좀더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강동수씨가 사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자살로 한 많은 생을 마친 김영배씨의 유언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고 실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인지 아는가’라는 대목이 늘 머리 속을 맴돈다.

    조금이라도 운동능력이 있는 장애인이라면 결코 빵을 입에 넣어달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한된 능력이나마 활용하면서 이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일자리’인 것이다. 요즘 자녀를 키우면서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탈무드’의 말씀을 실천하는 분이 많은 것 같은데, 왜 장애인 정책은 항상 물고기 주는 수준(그것도 충분치 않지만)에 머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법이 무서운 건지, 아니면 사람들의 준법정신이 향상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장애인 주차장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특히 지방으로 출장비 없는 출장을 자주 가는 나는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들러 장애인 편의시설을 점검하는 게 일이 됐다.

    그날도 모처럼 아내와 딸을 데리고 방학숙제도 하고 바람도 쐴 겸 여행을 떠났다. 사고를 당한 뒤 우리 가족이 이렇게 여행을 떠난 것은 처음이었다.

    자동차 연료도 넣고 편의시설도 점검하기 위해 휴게소마다 들러보았다. 외형상으로는 참으로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많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부분들이 남아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장애인 주차 표시가 있는 곳은 항상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불편한 몸으로 장시간 운전을 한 장애인들이 쉽게 주차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러나 요즘은 장애인 차량이 크게 증가했는지 주차장 사정이 여의치 않다.

    그 날도 장애인 주차장에 빈 자리가 없어 앞차가 빠지기를 기다려 겨우 일반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아내가 딸을 데리고 먹을 것을 사러 간 사이에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장애인 주차장을 이용하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주차장 한편에는 불법주차시 과태료를 낸다는 경고가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는 언제쯤 돼야 저런 경고 없이도 지킬 것은 지키는 사회가 될까 생각했다. 그 자리에 세워진 차는 분명히 장애인 스티커가 붙어있는 고가의 차량이었다. 차량만 보고 우리 장애인도 이렇게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에 흐뭇해지기도 했다.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도 생겨 계속 지켜보았다.

    식당에서 나온 네 명의 남자가 차에 타는 것을 보았는데, 웬걸 눈 씻고 보아도 장애인은 없었다. 장애는커녕 누구보다 건강한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저 차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는데, 오늘은 건강한 사람들이 그 차를 끌고나온 것이라고 애써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장애인 스티커를 붙였다고 해서 장애인 동승자도 없는데 장애인 주차장을 차지해버리는 것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좋은 자리에 쉽게 주차했다고 희희낙락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 진짜 장애인이 차를 대지 못하고 주차장을 빙빙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했을까.

    치매 할머니의 지독한 딸 사랑

    평소 알고 지내던 한국신체장애인협회 인천시지부의 장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이 단체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처음 장애인을 위한 정보책자를 만들면서 여러 곳의 도움을 받았지만 특히 이 단체의 노국장이 많이 도와주셨다. 그 뒤로도 답답한 일이 있으면 그분을 찾아가 하소연도 하고 머리도 식히곤 했다. 그분도 몇 년 전 위암으로 저 세상분이 되고 말았다.

    그런 인연 때문에 전화가 오자마자 곧바로 찾아가 사정을 들어보니 전라북도 군산시에 사는 딱한 모녀를 도울 방법이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팔순이 넘은 노모가 쉰을 넘긴 정신지체와 뇌성마비 중복장애인 딸을 돌보며 살았는데 최근 어머니마저 치매가 생기고 관절염도 심해 거동조차 어려운 상태라고 했다. 이미 시 사회과에서 나와 모녀를 받아줄 곳을 찾아보았지만 시설마다 만원이라고 모두 거절했다는 사정도 전해주었다.

    나는 곧 군산시로 내려갔다. 방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마치 건드리면 동그랗게 말리는 애벌레처럼 누워 있는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어렸을 때는 불편하나마 걷기도 했다는데 재활치료는커녕 먹고 사는 일조차 어려운 살림을 핑계로 방치했기 때문에 이제는 휘어진 뼈마디가 완전히 굳어버린 것이다. 방을 굴러다니는 일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를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모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차에서 “그동안 흘린 눈물이 너무 많아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던 음성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 말씀을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이런 분을 또 얼마나 만나야 눈물이 마를 수 있을까.

    내가 할머니의 딸을 위해 찾아낸 곳은 전북 소양의 예수재활원(현재 안양 한국장애인선교협의회 소속)이다. 마음씨 고운 이곳 여전도사님만 믿고 떼를 써서 거처를 마련했다.

    예수재활원은 장애 정도가 심해서 다른 곳에서는 받아주지 않는 중증장애인들, 그리고 미혼모와 그들이 낳은 아이가 함께 살고 있었다. 이런 임의시설은 국가 지원 없이 후원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돌봐야 할 식구 한 명 느는 것이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밥 먹이랴 기저귀 채우랴, 중증장애인에게는 보호자 한 명이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야 하기 때문에 받아주는 시설이 많지 않다.

    어쨌든 쉰 살이 넘은 딸을 맡기고 돌아오는 노모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심한 관절염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몇 번이고 돌아서서 딸의 온몸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셨다. 그 뒤로 할머니 소식이 끊어진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장애인 딸을 돌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티셨을 텐데 그 딸과 떨어진 후 치매가 도지지는 않았을지. 할머니 거처가 확인되는 대로 ‘사랑의 집’으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쁘다.

    동료를 구하고 앉은뱅이가 된 춘실씨

    장애인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 지 벌써 8년째. 장애인복지와 관련해 두 권의 책을 냈고 장애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돌보고 수많은 전문가를 만나 상담을 했다.

    그 와중에 내가 힘이 떨어질 때마다 찾아가는 곳이 연세대 재활병원이다. 장애인에게는 천국으로 느껴질 정도로 친절한 직원들과 시설도 좋지만, 남들은 미친놈 취급할 때도 항상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는 전세일 원장을 뵙고 용기를 얻는다.

    처음 병실을 찾았을 때는 휠체어 장사꾼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동병상련의 장애인들을 만나 어설픈 나의 재활지식이라도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든 줄 모르고 찾아다닌다.

    96년 우리 가족(해처럼 달처럼 사회복지회)이 된 심춘실씨는 이곳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름처럼 차분하고 말수가 적은, 깨끗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가 하반신마비장애를 갖게 된 경위를 듣고보니 그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서울 마포의 한 회사에 다니던 춘실씨는 퇴근길에 동료들과 길을 건너다 사고를 당했다. 차가 한 동료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는데 그 동료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건너고 있었고 그것을 본 춘실씨가 동료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는데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차에 받혔던 것이다.

    춘실씨 곁에서 간병을 하시는 부모님의 성품도 나를 감동시켰다. 춘실씨가 몸을 던져 구한 동료는 몇 차례 병문안을 오다가 지금은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부모님 입에서 그 사람을 원망하는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춘실씨가 보여준 희생과 사랑의 결과가 너무 불공평하다고 불평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군이나 일터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보상이 따른다. 그리고 비록 장애가 생겨도 최소한 살아갈 방편을 마련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춘실씨처럼 아름다운 희생을 한 경우 우리 사회는 외면한다. 교통사고 보상금이래야 장기를 요하는 치료비 정도에 그친다.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나이에 하반신마비라는 장애를 입으면서 치른 희생의 대가치고는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뿐이다.

    모정은 부정보다 강하다

    장애아를 둔 가정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불안하다. 그러다 결국 정신적·경제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부부가 갈라서게 되면 장애아를 누가 맡을 것이냐로 또다시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 경험으로 보면 모정이 부정보다 강하다. 자녀가 여러 명 있을 경우, 대개 정상아는 아버지가 데려가고 장애아는 어머니가 기르는 것으로 합의를 본다.

    하지만 2급 정신지체인 대한이는 어머니마저 재혼을 하게 되면서 오갈 데가 없어졌다. 내가 대한이 소식을 접한 것은 ‘해처럼 달처럼’의 봉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광명 종로머리방의 이양숙 원장님으로부터였다. 미용실로 급히 와달라는 연락을 받고 도착해 보니 대한이와 어머니, 그리고 재혼 상대인 남자가 와 있었다.

    대한이 부모는 이혼하면서 정상아인 딸은 아버지가 데려갔고, 정신지체의 경계선에 있어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해나가기 어려운 대한이는 어머니가 맡았다.

    나는 대한이가 버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재혼 상대자인 남자에게 온갖 비위를 맞추면서 새아빠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절대로 키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얼마 남지 않은 초등학교 졸업식이 끝나는 대로 대한이를 ‘사랑의 집’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혼자서 장애 아들을 키우면서 어머니가 겪었을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광명으로 달려가면서 몇 번씩 되뇌었던 “대한이를 위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없겠느냐”는 말은 꺼내지도 못한 채 “대한이를 보내면 내 아들처럼 잘 돌보겠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장애자라는 호칭을 장애인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야단법석을 떨던 6년 전 장애인의 날(4월20일)이었다.

    내가 처음 사고를 당하고 치료를 받은 동인천 길병원 이훈정 간호과장님으로부터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나와 똑같은 하반신마비 장애인이 있는데 아직도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좌절에 빠져 있으니, 그가 제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병실에 들어섰을 때는 마침 TV에서 장애인의 날 특집방송을 하고 있었다. 경추장애로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여성 구족(口足)화가의 눈물 겨운 재활기였다. 환자들 모두 열심히 보고 있었다. 단 한 사람, TV를 외면한 채 돌아누운 그만 빼놓고. 직감적으로 오늘 내가 만날 사람이 바로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동욱씨(가명)는 사고로 하반신마비가 된 삼십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그 옆에는 젊은 부인이 간병을 하고 있었다.

    돌아누운 동욱씨의 뒷모습은 사고를 당하고 절망에 빠져있던 3년 전 나와 다르지 않았다.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그의 괴로움을 누가 위로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얼떨결에 “어디가 많이 아프세요?”라고 물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환자는 물론 보호자까지도 나를 외면했고,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간호과장이 소개를 하니까 비로소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앉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같은 하반신마비 장애인인데 혼자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는 내가 그럴 듯하게 보였는지, 또 이과장님의 과장이 섞인 소개가 먹혀들어갔는지 일단 질문이 시작되자 봇물이 터지듯 쏟아졌다.

    나 역시 장애인이 됐을 때 대소변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부터 나의 미래에 대해 얼마나 걱정이 되고 알고 싶은 것이 많았던가. 도대체 어디 가서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 나는 그의 질문보다 더 많은 대답을 해주려고 했고 우리는 대화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병실 분위기가 이상해졌음을 느꼈다. 다른 환자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TV에 나온 전신마비 구족화가와 비교해 그나마 팔이라도 쓸 수 있는 게 다행 아니냐는 위안 아닌 위안을 하는 소리도 들렸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장애는 그런 식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장애인도 성격에 따라서 자신의 장애를 빨리 인정하고 살아갈 방법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해가 지나도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좌절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남보기에는 경미한 장애라 할지라도 피아니스트가 손가락 하나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전신마비나 같은 고통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그 장애를 겪어보지 않고서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반신이 마비된 남편과 젊은 아내의 고통을 도대체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방법이 없어 괜히 TV방송에 화풀이를 했다. 저 구족화가처럼 때 되면 밥 먹이고 대소변 받아내며 알뜰히 돌봐주는 가족이 있고, 그림을 가르쳐주는 분이 있다면 누군들 장애를 이겨내지 못하겠느냐고 열변을 토하면서, 장애인의 날만 되면 장애를 가진 어떤 사람들을 ‘스타’로 부각시키는 언론이 잘못 됐다고 성토를 하고나니 조금 후련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 구족화가에게 참 미안하다. 전신마비인 그가 입으로 그림을 그리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연습을 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절망 속에 초라해질 대로 초라해진 젊은 부부가 작은 위안을 얻기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생각해낸 기막힌 돈벌이

    정신지체 장애인은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졌다. 그들은 잔꾀를 부릴 줄 모르고, 승리하기 위해 남을 짓밟지도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이야기를 해보고 같이 생활해 보면 그들의 순수함에 푹 빠져든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순수함을 내버려두지 않고 오히려 비웃고 이용하려고 든다.

    우연히 알게 된 그 처녀가 그랬다. 나보다 열두 살 위였지만(나는 59년생이다) 정신지체가 있어 정신연령은 유치원생 수준밖에 안되는 그런 사람과 대화를 나누려면 기분을 잘 달래야 했다. 나는 먹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었다.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유도 질문을 하자 아무런 의심 없이 대답했다.

    “아버지에게 자주 매를 맞는다면서요?”

    “돈을 벌려고 해서요.”

    “왜 돈을 벌려고 하죠?”

    “늙은 아버지를 잘 모시고 싶어서요.”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벌어요?”

    “아저씨들이 그냥 줘요.”

    남자들이 그냥 돈을 줄 리 없고 어떤 식으로 돈을 받았는지 짐작이 갔다. 내가 재차 캐물으니 잠을 자면 돈을 준단다. 어디에서 잠을 자느냐고 하니까 아무도 없는 외진 나무 밑이나 자신들 집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나는 기가 막히고 분노가 치밀었지만 참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얼마나 벌어요?”

    “100원이요. 아저씨들이 1000원을 줘도 난 100원만 받아요.”

    그는 100원만 받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속이 상한 아버지가 매를 들만도 했다. 나 역시 너무 화가 나서 다음부터는 꼭 주는 대로 다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그렇게 행동하면 아버지가 더 아프시게 되니 하지 말라는 당부도 했다.

    요즘 들어 장애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례를 자주 접한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어느 가정에서는 오빠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하고 옥상에서 뛰어내린 여고생이 하반신마비가 됐는데, 이 여성을 또다시 성폭행해 정신질환까지 일으키게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너무 천진난만해서 남자들이 시키는 대로 하거나 아예 성행위가 뭔지도 모르는 정신지체 여성들이 성폭행 대상이 되고 있다. 약자인 그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사람도 나쁘지만 그것을 방치하는 우리사회도 죄를 짓고 있는 셈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소

    옛말에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는 둘 다 놓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멍청하게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쫓고 있다. 한 마리는 당장 우리 가족이 먹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토끼고, 다른 한 마리는 남의 집 토끼 중 내가 잡아주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장애이웃의 토끼다. 내 토끼만 잡자니 장애이웃이 마음에 걸리고, 남의 토끼만 쫓자니 내 생활이 말이 아니다. 수년째 이런 갈등 속에서 여전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쫓고 있다.

    이런 나를 보고 사람들은 “당신 토끼만 잡으며 살거나, 아니면 당신 것을 확실히 잡은 뒤에 이웃토끼를 잡으러 가라”고 충고한다. 제것도 못 지키면서 남의 토끼를 쫓다보니 미친놈 소리도 듣지만, 자꾸 이웃집 토끼에 마음이 쓰이는 것을 보면 이것도 천성이라 생각된다.

    그러는 동안 괴로운 일도 많았다. 전국의 어려운 장애인을 돕는다고 미친 듯이 다니는 동안 아내는 한때 가출을 했고, 김이며 미역 행상을 해서 생활비를 벌고 어린 딸을 키워주시던 노모는 두 무릎관절이 다 닳아버렸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나의 진심을 이해해 주시고 혹시라도 아들에게 부담이 될까봐 양로원으로 가겠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죽고 싶었다. 차라리 내가 죽어서 부담을 덜어드리는 게 낫겠다고 한밤중에 160km로 국도를 달린 적도 있다.

    얼마전 모처럼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수없이 많은 장애인 가족에게 무료진료와 수술을 주선해왔지만 어머니를 모신 것은 처음이었다. 다행히 인천 한국정형외과 장영훈 원장이 무릎 인공관절수술을 해주셔서 현재는 입원치료중이지만 병실을 지키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다. 위염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가 아들 대신 어머니 간병을 도맡으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딸 지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병실에서 자겠다고 고집하시는 아버지를 억지로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차안 거울을 통해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철없는 지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가에 맺히는 눈물. “장애인 자식이 걱정돼서 먼저 눈을 감을 수도 없다”는 어느 어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부모님께 너무 많은 아픔만 안겨드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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