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주변의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만남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그중에서 자신의 숨은 능력을 알아주는 스승은 한 인간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는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일수록 작은 격려에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현재 하버드대에서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과정에 있는 서진규씨(‘나는 희망의 증거이고 싶다’의 저자)는 20대 초반 미국으로 식모살이 취업이민을 떠났다. 꿈의 땅 미국이었지만 미국 군대에서 중령이 되기까지 소수민족 여성이 겪어야 할 애환은 말할 수 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충북 제천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담임선생님의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버텼다고 한다. 그 선생님은 어린 진규의 손금을 보면서 “너는 앞으로 성공할 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손금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술집딸로 멸시받던 어린 진규에게 큰 격려가 됐고 ‘성공’이라는 말에 매달렸다. 그는 항상 “지금의 고통은 하나의 과정이고 나중에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신경숙씨도 영등포여상 부설 산업체 야간고등학교 시절 만난 최홍이 선생님을 잊지 못한다. 정읍 출신인 이 문학소녀는 서울 구로공단에 자리한 학교를 다니면서 문학을 향한 자신의 꿈이 실현될 거라고 믿었으나 현실에 좌절했고 무단결석을 했다. 최교사는 벌로 반성문을 쓰게 했다. 대학노트 몇 장에 깨알같이 써낸 반성문을 읽고 최교사는 신경숙의 문학적 자질을 간파해,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로 안내했다.
일반적으로 진로 상담학자들은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진로를 빨리 파악하여 그것에 필요한 준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신경숙씨는 가장 적절한 시점에 잠재력을 읽어내고 키워준 교사를 만난 것이 행운이다. 이후 그의 안내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준비할 수 있다.
관념을 깨는 닉스청바지 광고로 유명해진 크리에이터 백종열씨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기존 교육제도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교사라는 사람들이 내게 강요한다. 내가 할 줄 모르는 것을 시키면서 내가 그걸 잘하지 못한다고 야단치는 것은 불합리하다. 한번도 내가 잘 하는 것을 시켜보지도 않고, 그것을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편협한 잣대만으로 왜 이렇게 못 하느냐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럭저럭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렵게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뉴욕시에 있는 패션 인스티튜트 테크놀로지(Fashion Ins titute Technology) 만화과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거기서는 토플점수 550점을 요구했다. 당장 담당교수를 찾아 포트폴리오를 보여주면서 청강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교수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재학중 토플 550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입학허가를 내주었다. 백종렬씨는 지금까지도 그 교수의 유연한 사고방식과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이화여대 장상 총장은 고3때 담임인 김정호 선생님을 좋아했다.
“그 시절 우수한 여학생은 남녀공학으로 가야 한다는 분위기여서 저도 서울대 화공과와 이화여대 수학과를 두고 갈등을 했어요. 그런 제게 선생님은 ‘입학할 때의 기분보다는 졸업할 때를 생각해 대학을 정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이화여대를 선택했고 선생님 덕분에 저는 교수도 되고 총장도 될 수 있었던 거죠”
이혜성 한국청소년상담원 원장은 어릴 때부터 똑똑한 언니 밑에서 주눅이 들어 있었고, 스스로 매력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미국 유학중 만난 힙스 교수를 통해 건강한 자아상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 할아버지 교수는 나만 보면 사랑스럽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너처럼 사랑스러운 성격이 어디 있느냐, 너는 너 자신이면 된다, 너 같은 딸이 있는 부모님은 얼마나 행복하시겠느냐고 칭찬을 해주셨지요. 그 칭찬 덕분에 스물 아홉 살이 되어서야 ‘정말 내가 괜찮은 사람이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됐지요.”
큰 나무 밑에서 자라는 나무는 죽지만 큰 사람 밑에서 자라는 사람은 더욱 성장한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도 결정되는 것이다.
[ 목표를 향해 미친 듯이 살다 ]
꿈과 목표는 인생의 돛이다. 창의적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어린시절부터 자신이 이루고 싶어하는 꿈과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다. 꿈과 목표는 인간의 무한한 에너지를 한곳으로 모으고, 결집된 에너지는 가위 폭발적인 힘을 발휘한다.
시인 곽재구씨는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작가가 되고 싶었다.
“저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글쓰기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시에 완전히 미쳤지요. 시인이 되겠다 이런 게 아니라 시 자체가 본질이었어요. 당시에는 대학에 가야 한다는 개념도 없고 24시간 시만 생각했어요. 하여튼 고등학교 때에는 아침에 해가 뜨는 이유는 내가 시를 써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저녁에 별이 반짝이는 것을 봐도 저렇게 많은 별들보다도 내가 써야 할 시는 더 많다, 이런 상징으로 생각했죠.”
그의 간절한 소망은 대학 4학년 때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이루어진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시 ‘사평역에서’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후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의 시집을 냈다.
이화여대 장상 총장에게는 어린시절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월남한 후 시골에서 살 때 동네 친구 중에 영자라는 아이와 곧잘 놀았는데 하루는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될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나는 ‘선생님이 될 거야’라고 했고, 영자는 ‘커다란 가게 주인이 될 거야’라고 했죠. 동네 구멍가게는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니 영자가 그런 꿈을 꾼 건 당연했던 거죠. 30년이 지나 그 일을 까마득하게 잊었는데 내가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우연히 큰 가게에 들어가게 됐어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주인 아주머니가 웬지 아는 사람처럼 여겨져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지요. 그런데 정작 인사를 하고 난 뒤 누구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혹시 만난 적이 없는지 더듬어 보았지요. 어느 곳을 대봐도 신통치 않아서 참 이상하게 생각을 하다가, 내 이름이 좀 특이한데 혹시 ‘장상’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아주머니가 ‘네가 상이구나, 나 영자야’ 하고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영자는 가게 주인이 됐고, 저는 선생이 됐어요.”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고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 아니던가. 장상 총장은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항상 큰 꿈을 꾸어라. 그러면 성취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성주인터내셔널 김성주 사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대성산업 김수근 회장의 막내딸이다. 배경이 말해주듯 그는 스스로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가진 자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누군가, 왜 이 세상에 왔는가, 왜 존재하는가. 틈틈이 이런 실존적인 물음을 하면서 삶의 좌표를 확인해 봅니다. 위로 오라버니가 네 분 계시는데 저와 가장 가까운 오라버니가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제 삶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제 존재의 가치를 확실히 할 필요를 느꼈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게 미국의 작은 하버드라 불리는 암허스트 칼리지로 유학을 가게 됐어요. 공부가 정말 어려웠는데 살아남느냐 도태되느냐의 기로에서 이왕 칼을 뺐으니까 여기에 뼈를 묻겠다는 결심으로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지요”
오지 여행가 한비야씨는 어린시절 세계지도를 펴놓고 지명찾기 놀이를 즐겼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반드시 세계일주여행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저는 인간이 어떤 꿈을 가지고 있으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목숨걸고 한발짝 한발짝 나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여행을 통해 자기만의 목표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목표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킬리만자로에서 끝까지 올라간 사람들은 튼튼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오히려 나이 든 사람들이 잘 올라가요. 젊은 사람들은 자기 힘만 믿고 누가 앞으로 나서면 따라잡으려고 막 뛰어요. 그러다 고산증이 생기지요. 그러나 목표가 확실하면 남이 앞에서 뛰어가는 걸어가든 상관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 속도로 가는 거예요. 목표는 사실 정상에 도착하는 거지 1등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니까요. 정상이라는 목표가 확실하면 남들이 뛰어가든, 날아가든 상관하지 않을 여유가 생기는 거죠. 저도 상당히 속전속결형이었는데 킬리만자로를 오르면서 강박관념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졌어요.”
사람에게는 각자의 속도가 있다. 그러나 자꾸 남과 비교하다 보면 자신의 속도를 잊어버리고 무리하게 속도를 내다가 주저앉거나 게으름을 피워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한비야씨는 오지를 여행하면서, 분쟁지역을 육로로 돌아다니며 죽을 고비도 많았지만 그 순간마다 내가 그토록 하고 싶던 일이 지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고 한다.
육종학자인 경북대 김순권 교수는 옥수수 박사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17년간, 아프리카에 세계최초의 교잡종 옥수수를 보급하여 기아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내가 옥수수에 미쳤어요. 미쳤으니까 전세계에서 제일 가는 옥수수를 만들 자신이 있는 거죠. 미국 농장에 있을 때 너무 열심히 일하니까 인간괴물이라고 했어요. 옥수수 만들려고 태어난 괴물이라고.”
아이디어는 현장에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김교수는 100여명의 연구원이 있는 나이지리아 국제 옥수수 연구소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세배 정도 일을 했다. 인터뷰 약속을 하고 찾아간 날도 새벽부터 칠곡 옥수수농장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며 장화에 모자를 쓴 평범한 촌부 차림이었다.
숙명여대에 큰 변화를 몰고 온 이경숙 총장도 꿈에 관한 것이라면 자신이 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꿈 속에서도 그것만 생각하죠. 그러면 분명히 방법이 떠오릅니다. 나한테 어떤 일이 주어지면 24시간 그 일에 매달리는데 그러면 꼭 실현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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