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호

마동과 선화공주 사건은 백제와 신라의 미륵 쟁탈전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입력2006-12-06 11: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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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화하는 미륵보살 ]

    남조 송(宋) 효무제(孝武帝) 효건(孝建) 2년(455)에 북량(北凉) 시조 저거몽손(沮渠蒙遜, 386∼433년)의 사촌아우인 저거경성(沮渠京聲)이 번역한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 권1에서는 미륵이 열반에 든 후 도솔천으로 올라가 보살이 되어 그곳의 천수인 4000세, 즉 56억7000만년을 지내고 나서 지구에 다시 내려와 성불한 다음 미륵불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월지(月氏)보살 혹은 돈황(敦煌)보살로 일컬어지던 돈황 출신 월지족 계통의 축법호(竺法護, Dharmaraka, 曇摩羅察, 241∼313년)가 번역한 ‘불설미륵하생경(佛說彌勒下生經)’ 1권(303년 번역)이나, 구자(龜玆) 출신의 대역경사인 구마라습(鳩摩羅什, Kumrajiva, 343∼413년)이 번역한 ‘불설미륵하생성불경(佛說彌勒下生成佛經)’ 1권(402∼412년 번역) 및 ‘불설미륵대성불경(佛說彌勒大成佛經)’ 1권(402년 번역) 등에는 언제라는 기약 없이 미륵이 하생(下生; 내려와 태어남)하여 성불하는 내용을 소상하게 기술해 놓고 있다.

    그래서 난세를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미륵을 어서 만나 경전에서 말한 대로 살기 좋은 미륵불국토에서 걱정없이 살아가기를 간절하게 희망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신앙 형태는 중국의 5호16국 시대에 출현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민족의 침략과 상호쟁패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현실이 지옥으로 변하였던 탓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으로 상생하기를 희망하는 내세적 성향이 강하여 ‘미륵상생경’을 독송하고 이를 신앙한 듯, 상생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생미륵보살상을 주로 조성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돈황 막고굴 제268굴 본존 미륵불교각좌상’(제4회 도판 7)이나 ‘운강 17동 본존 미륵보살교각좌상’(제5회 도판 8) 등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여기서 돈황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 연구원인 단문걸(段文傑)이 미륵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돈황 제275굴을 조사 연구한 결과 교각좌상(交脚坐像)은 상생미륵보살이고 반가좌상은 하생미륵보살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얘기도 했다. 그래서 460년 경부터 496년 경까지 근 40여년에 걸쳐 조성된 북위 운강(雲岡) 석굴에서도 대부분의 미륵보살상은 상생미륵보살인 교각좌상으로 조성돼 있고 반가좌상은 그 협시보살로 표현되고 있다.(도판 1)

    그런데 이 미륵교각좌상이 시대가 내려올수록 여성화하는 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운강석굴 최후기에 조성되었다고 생각되는 프랑스 세르누시미술관 소장의 ‘미륵보살교각좌상’(도판 2)을 통해 구명해볼 필요가 있다.

    운강석굴 제15동과 제16동 사이에 작은 굴실이 경영돼 있는데, 이를 분류 편의상 15A동이라 부른다. 이 석굴의 조각 양식은 제5동과 제6동 양식이 진전된 것이어서 490년 경에 조영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석굴은 1910년대부터 1920년대에 걸치는 중국의 혼란기에 유럽과 미국인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었다. 주존(主尊)이라고 할 수 있는 북벽(北壁) 상층(上層) 중앙 감실(龕室)의 ‘미륵보살교각좌상(彌勒菩薩交脚坐像)’은 미국인에 의해 완전히 떼어내져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북벽 중층 동쪽 감실은 프랑스인에 의해 파리의 세르누시미술관으로 이전되었다.

    여기 들고 있는 ‘미륵보살교각좌상’은 운강석굴 제15동 북벽 중층 동쪽 감실에서 떼어내 세르누시미술관으로 옮겨놓은 보살상이다. 이 동쪽 감실은 문미(門楣; 문 위에 가로 댄 나무)가 촛불꽃 형태의 변형인 뾰족끝 받침 감실 속에 봉안된 중앙의 포복불좌상(袍服佛坐像) 좌우로 안배된 협시감실의 하나인데, 서쪽 감실에도 같은 형태의 보살상이 안치돼 있다.

    일본인 학자 장광민웅(長廣敏雄)과 수야청일(水野淸一)이 조사할 당시(1938∼1942년)에 이미 동쪽 감실은 비어 있었다 한다. 이 감실은 지붕의 단면을 연상시키는 눈썹받침 감실인데, 문미 아래로 삼각형 내리닫이 장식과 장막이 드리워져 있고 눈썹받침 표면에는 비천(飛天) 8구가 각 구간에 하나씩 부조(浮彫; 돋을새김)돼 중심을 향해 좌우에서 마주 날게 되어 있다. 감실과 감실을 나누고 있는 문설주 표면에는 머리 깎은 비구와 상투를 높게 틀어올린 천인(天人)이 2열 종대로 내리 부조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보살상은 큰 연꽃잎 네 개가 둥근 테 위에 전후좌우로 높이 세워진 연화관을 쓰고 있는데, 큰 연꽃잎 끝부분 사이에는 활짝 핀 둥근 연꽃을 끼워 넣어 장식하였다. 이런 연화 보관(寶冠)을 탐스러운 머리칼 위로 높이 쓴 것 이외에는, 촛불꽃을 거꾸로 매단 듯한 심엽형(心葉形; 심장 형태 즉 하트 모양)의 목걸이가 보일 뿐 별다른 장식이 없는 소박한 자태다.

    그러나 의복은 천의(天衣)가 여인의 상의(上衣)를 상징하는 듯 양어깨에서 팔꿈치까지 덮이면서 그 자락이 배꼽 근처에서 X자로 교차하는 독특한 북위식(北魏式)을 나타내, 조성연대가 490년 경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옷 입는 법과 층진 옷주름 같은 천의의 표현은 포복불(袍服佛) 양식과 동시에 출현하는 보살의 의복 표현법이기 때문이다. 입상(立像)의 경우는 치마의 옷주름이 바로 포복불의 옷주름과 같이 분명히 층진 표현을 보이는데, 이 경우는 옷주름선이 세워서 교차시킨 양무릎을 따라 깊이 파여 있을 뿐이다.

    목걸이의 불꽃머리 형태가 비교적 길게 표현되고 그 끝이 예리하게 빠지고 있는 것도 이 보살상의 조성 연대를 짐작케 하는 요소이고, 가늘어진 목과 조금씩 넓어지는 얼굴, 그리고 부드러워져 가는 어깨의 곡선 등도 시대양식을 대변하는 것이다.

    [ 보살을 여성화시킨 이유 ]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이 시기에 이르면 보살을 점차 여성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노골화하는 듯하다. 이 상에서도 얼핏 느낄 수 있는 것이 여성적인 아름다움이다. 이목구비(耳目口鼻)가 한껏 부드러워진 곱상한 얼굴, 입뿐만 아니라 눈까지 깊이 미소지어 자애가 가득한 표정, 부드러운 지체(肢體; 팔다리와 몸통)의 표현, 가는 허리 등이 모두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인체적 특징이다.

    다만 유방 표현이 없을 뿐인데, 수염이 짙던 간다라 조각의 남성보살상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있는 변화라 할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그리스 조각에서 인체미의 이상적 형태로 양성(兩性)의 특장(特長; 특징적인 장점)을 추출하여 만들어낸 헬마프로디테와 같이, 북위인(北魏人)들이 양성의 인체적 특장이라고 생각하는 인체미를 조합해 만들어낸 이상적인 인체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 양대(兩大) 조각을 비교해볼 때 이상적인 인체미도 동·서양인이 서로 상반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북위인들이 보살을 여성화시켜나가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는 중국천하가 대란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런 난세(亂世)에는 남정네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남성들은 쟁패(爭覇)의 과정에 끊임없이 소모되니 그나마 종족을 보존시켜 나가려면 자연히 여인들의 모성애에 의존할 도리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층천민(下層賤民)으로부터 왕후장상(王侯將相)에 이르기까지 다같이 겪어야 하는 사회문제였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다는 것이 곧 모성애(母性愛)의 상징으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이에 실제로 현세구원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보살을 자모상(慈母像)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나 한다.

    거기에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 투철하여 세상만물에는 음양의 섭리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부처님이 남성신(男性神)이라면 그 좌우에 시립(侍立)하는 보살은 여성이어야 한다는 소박한 생각이 은근히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점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런 사회여건 아래에서 보살이 여성화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특히 5세기 말 북위에서 이와 같은 현상이 급진전한 것은 북위제실(北魏帝室)이 안고 있던 여권우위적(女權優位的)인 현실이 이를 더욱 부채질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북위의 탁발씨(拓跋氏)는 당시 북중국에서 발호하던 강호(强胡)의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이루었으므로 그 성장과정에 무진한 고초를 겪었다. 그러한 고초 속에서 제실의 혈맥을 보존하여 나라를 이룩한 것은 역대 황후(皇后)들의 결사적인 모성애에 힘입은 바가 컸다. ‘위서(魏書)’ 권13 황후열전(皇后列傳)에 의하면 전체 27후(后) 중 8후가 국난을 수습한 공로가 있다.

    자연 그중에서는 간정(干政)까지 하려 드는 여걸(女傑)들이 나오게 되었으니 문성제(文成帝)의 황후인 문명태후(文明太后) 풍씨(馮氏, 442∼490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문명태후는 헌문제(獻文帝, 465∼471년)와 효문제(孝文帝, 471∼499년) 양대(兩代)에 걸쳐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는데, 그 사이 헌문제를 시해(弑害)하는 대역(大逆)을 저지르기도 한다.

    따라서 효문제는 문명태후에게 철저하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문명태후는 황제의 권능을 행사하였다. 그래서 모든 신민(臣民)의 화복(禍福)이 그녀의 손에 좌우되니, 그녀의 눈에 들기만 하면 하룻밤 사이에 졸오(卒伍)에서 장상(將相)의 열(列)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런 여권(女權)의 전횡이 보살의 여성화를 재촉하는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 한국에서 꽃핀 미륵 하생 신앙 ]

    그러나 북위의 통일(439년)로 중국 대륙이 남북으로 나뉘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차차 미륵이 하생하여 현세를 이상적인 미륵 불국토로 만들어주기를 희망하는 현세적인 성향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축복받은 자연조건에서 농업문화를 일으켜 왔기 때문에 지극히 현세적인 사고(思考)를 하는 중국적인 전통이 되살아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이런 신앙이 섭정으로 대권을 장악한 문명태후의 출현과 맞물리며 미륵보살의 하생으로 연결되는데, 북위 후반기인 효명제 희평(熙平) 원년(516) 이후부터는 하생한 미륵보살상인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이라는 독특한 단독 보살상 양식이 유행하게 된다. ‘영청문고 소장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제8회 도판 13)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미륵신앙이 우리나라에도 곧바로 영향을 끼쳐왔는지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한결같이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 양식 발전이 절정에 이르러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의 상양식이 이때 우리나라에서 마무리지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삼국시대에 미륵하생신앙이 극대화한 이유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륵하생경’ 내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축법호가 번역한 ‘불설미륵하생경’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때 석가모니불이 기원정사에서 500 비구와 함께 계셨는데 아난이 장래 미륵이 출현하여 정각(正覺)을 얻은 다음 어떻게 세상을 교화해 가는지 알고 싶다고 하자 석가세존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먼 훗날 이 땅에 한 나라가 있고 그 수도 이름은 시두(翅頭)성이라 할 터인데 동서가 12유순(由旬, 1유순은 80리), 남북은 7유순이며 토지는 비옥하고 풍성하며 백성들은 넘쳐나 길을 가득 메울 것이다. 그 때 그 성중에는 수광(水光)이라는 용왕과 섭화(葉華)라는 나찰(羅刹)귀신이 있어 한밤중 사람이 잠든 틈에 도성의 쓰레기를 모두 치우고 향을 뿌리며 비를 내려 항상 성안을 깨끗하고 향기롭게 한다.

    그때 지구의 넓이는 동서남북이 1000만 유순에 이르고 사방 바다는 물깊이가 1만 유순이나 감소하며 산과 구릉이 모두 소멸하여 거울 같은 평지가 될 것이고 곡식이 풍성하여 천하게 되며 사람이 들끓고 진귀한 보배가 많으며 마을은 서로 가까워 닭 우는 소리가 이어진다. 시들어 말라죽었거나 냄새나는 과일나무는 모두 저절로 없어지고 그 나머지 감미롭거나 향기가 더욱 좋은 것들만 땅에서 자라며 4계절이 절기에 맞고 사람의 몸에는 병이 없으니 탐욕이나 노여움이나 어리석음이 없고 인심이 평균하여 서로 보면 기뻐하고 좋은 말만 하는데 말이 한 종류라 차별이 없다.

    대소 인민에 차등이 없고 남녀간에 대소변을 보고자 하면 땅이 저절로 열렸다가 보고 나면 문득 도로 합쳐지며 껍질 없는 찹쌀이 저절로 달리는데 지극히 향기롭고 아름다우며 먹으면 병이 없다. 금은 진보와 차거, 마뇌, 진주, 호박 등 각종 보배가 땅에 흩어져 있으나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고 가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집어들고 서로 이렇게 말한다. 예전 사람들은 이런 물건 때문에 서로 해치고 옥에 갇혀 무수한 고뇌를 받았다 하는데 지금은 기왓장이나 돌과 같아서 아무도 지키려 하지 않는다.

    이때 양거()라는 전륜성왕이 이 시두성에 출현하는데 7보(寶)가 따라나와 가난한 이들을 모두 구제한다. 그런데 양거왕에게는 수범마(修梵摩)라는 대신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며 무엇이나 같이 좋아하고 서로 몹시 사랑하며 존경했다. 수범마는 얼굴이 아름답고 몸매가 빼어났으며, 수범마의 아내 범마월(梵摩越)도 마치 천왕의 왕비처럼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입에서는 연꽃 향기가 나며 몸에서는 전단향기가 나고 질병이 없으며 어지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 일등 미인이었다.

    이에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이들을 관찰하고 있다가 이들을 부모로 택하기로 결정하고 범마월에게 입태하여 석가모니불처럼 오른쪽 옆구리로 출생한다. 수범마는 이 아들을 바로 미륵이라 이름짓는데 32상 80종호를 모두 갖춘 일등 미남으로 몸빛은 황금색이었다. 이때 사람의 수명은 8만4000세로 여인들은 500세가 되어야 비로소 출가(出嫁)하였다.

    미륵은 얼마 있지 않아 바로 출가(出家)하는데 시두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용화수(龍花樹)라는 성수(聖樹)가 있어 그 나무 아래에 앉아 정각(正覺)을 얻는다. 나무 크기는 높이가 1유순, 너비가 500보(步)였는데 출가한 그날 밤에 이곳에서 대각을 얻어 미륵불이 된다.

    석가모니불이 6년을 고행했던 것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쉬운 과정을 거친 것이다. 더구나 미륵이 성불하고 나자 제6천주(天主)인 대장(大將)마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해 7일 밤낮을 잠도 자지 않고 좋아하면서 욕계의 무수한 천인을 이끌고 와 미륵불에게 공경 예배한다 하니 석가모니불이 대각을 이룰 당시 제6천주인 마왕 파순(波旬)이 이를 방해하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공격하던 것과는 대조적인 일이다.

    여하튼 미륵은 성불하여 미륵불이 된 다음 대장마왕이 거느리고 온 8만4000 천자부터 교화하기 시작하여 시두성의 부호인 선재(善財)장자가 거느리고 온 8만4000인 및 양거왕이 거느리고 온 8만4000 범지와 그 부모인 수범마와 범마월이 각각 거느리고 온 16만8000인 등을 제도하여 모두 아라한과(阿羅漢果, arahan; 스승의 말을 듣고 깨닫는 聲聞乘의 최고 경지, 생사윤회에서는 벗어난다)를 증득하여 해탈케 한다.

    그리고 나서 석가모니불이 상수제자인 가섭(迦葉)으로 하여금 미륵에게 전해주도록 부탁한 금실로 짠 가사(袈裟)를 전해 받기 위해 마가다국 비제촌(毘提村)으로 대중을 이끌고 가 가섭으로부터 금루가사를 전해 받는다. 이 과정에 또한 무수한 중생이 깨달음을 얻게 되니 이것이 초회(初會)설법으로 96억인이 아라한과를 얻는데, 이들 모두가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받거나 석가모니불에게 공양을 바친 인연이 있는 제자들이었다.

    미륵불은 가섭으로부터 전해 받은 승가리(僧伽梨, 大衣 袈裟)를 입은 다음 가섭의 신체가 흩어지는 것을 보고 갖가지 꽃과 향으로 공양하고 나서 제2회, 제3회 설법을 행한다. 제2회에는 94억인을 제도하고 제3회에는 92억인을 제도한다. 이들은 모두 석가모니불의 교화시대에 그 제자가 되었던 사람들이다. 미륵불은 8만4000세의 천수를 누리고 열반에 드는데 남긴 법도 8만4000세 동안 이어진다.

    구마라습이 번역한 ‘미륵하생성불경’이나 ‘미륵대성불경’ 줄거리는 거의 같다. 다만 내용이 훨씬 풍부한데 그중에서도 ‘미륵대성불경’이 가장 상세하다. 미륵이 하생하여 출현하는 나라엔 곧 전쟁도 없고, 가난도 없으며, 미움도 욕심도 없고 화낼 일도 없으며, 곡식은 지천으로 널려 있고, 의복조차 나무에서 열리며, 사람은 병들지 않고, 감미로운 과실은 곳곳에서 자생하며, 사람마다 평등하여 서로 보면 반가워하고, 금은보화는 보배로 여기지 않을 만큼 사방에 널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담긴 경전들이 우리에게 전해질 당시 우리 사정은 이와 정반대였다. 고구려 장수왕(413∼491년)이 백제 수도 위례성을 함락한(475년) 다음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분쟁이 이어져 고구려나 백제의 백성들은 전란에 시달리지 않는 때가 하루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 틈에 신라 진흥왕(540∼575년)까지 끼어들어 백제와 고구려 영토를 잠식해 나가면서부터(550년)는 삼국 백성 모두가 하루하루 전쟁에 시달리는 불안한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삼국백성들은 모두 ‘미륵하생경’에서 말하는 미륵 하생이 현실로 이루어져서 평화와 안녕, 풍요와 안락이 깃들이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각기 자기가 사는 땅에 먼저 미륵이 하생하기를 바라게 되었고 그런 소망을 믿음으로 키워갔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이를 민심 결집 수단으로 적극 수용하여 국가의 주도이념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듯하다.

    이런 일은 백제 성왕(523∼553년)이 신라 진흥왕에게 배신당하여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나서 분김에 이를 응징하려고 나섰다가 도리어 국왕 이하 3만 군사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몰살하는 참변을 겪고 나서 거의 멸망 위기에까지 몰려있던 백제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던 듯하니, 이 위기를 극복해낸 위덕왕(554∼597년)이 바로 이런 미륵하생신앙으로 민심을 결속시켜 국력을 키워간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일찍이 무령왕(501∼522년) 이래 백제의 군사거점이자 해양전진기지로 일종의 문화특구를 형성하고 있던 태안반도에 무령왕의 초상조각이라 생각되는 ‘예산사면석불’(제7회 도판 7)이 조성됐는데, 이 4면에 조성된 불상이 동방 약사여래·서방 아미타여래·남방 석가여래·북방 미륵여래의 4방불이라 한다면 벌써 성왕 초기부터 미륵신앙이 백제에서 싹텄다고 볼 수 있다.

    위덕왕이 성왕의 초상조각으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큰 ‘태안마애삼존불’(제7회 도판 9)에서도 동향(東向)하여 쌍으로 서 있는 남쪽과 북쪽의 두 불상을 반드시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로 볼 수만도 없으니, 오히려 남쪽을 석가여래로 보고 보주(구슬 모양 지물을 반드시 약 항아리로 볼 수만은 없다. 보병으로 볼 수도 있다)를 들고 서 있는 북쪽 불상을 미륵여래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수도 있다.

    이는 비참하게 전몰한 성왕의 혼백을 위로하고 백성들의 원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현세의 여래인 석가여래로 출현한 성왕의 모습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기에 다시 한번 미래불인 미륵여래로 하생 성불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미륵불상을 병립시켰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왕(600∼640년) 초년 경에 위덕왕의 초상 조각으로 조성하였을 ‘서산마애삼존불’(제8회 도판 14)의 좌협시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과도 연계되면서, 백제의 마애불에는 하생한 미륵의 모습이 일관되게 표현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이 당시 백제의 미륵신앙 양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미륵상으로 보고자 한 것도 기왕의 다른 주장과 마찬가지로 불보살상 조각에 대한 일반 상식을 근거로 내세운 가설일 뿐이니, 이 가설의 당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방증을 찾아내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방증 자료가 될 만한 기록으로는 당나라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시조인 도선 율사(道宣, 596∼667년)가 지은 ‘속고승전(續高僧傳)’ 권28 독송편(讀誦篇)에 들어 있는 백제국 달나산 석혜현전(百濟國 達拏山 釋慧顯傳)을 들 수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혜현(慧顯, 570∼627년)이 어려서 출가하여 ‘법화경(法華經)’을 독송하는 것으로 업(業)을 삼았고 삼론(三論; 中論, 百論, 十二門論을 일컬음)도 전파하였는데 처음에는 백제국 북부 수덕사(修德寺)에 머물다가 남방 달나산으로 가서 수덕사에서처럼 수행하다 돌아갔다. 달나산은 산세가 지극히 험준하여 오르기 힘들었지만 혜현은 그 가운데서 정좌하여 수행했고, 돌아간 뒤에 함께 수도하던 사람들이 시신을 석굴 속에 놓아두었더니 호랑이가 모두 먹고 오직 해골과 혀만 남겨 두었다. 혀는 3년 동안 더욱 붉고 부드러운 상태로 있었는데 그 뒤에는 자색으로 변하면서 돌같이 굳어지므로 도속(道俗; 도인과 속인)이 모두 괴이하게 생각하고 석탑에 모셨다.

    혜현이 돌아가던 해가 정관(貞觀) 원년(627)인데 나이가 58세였다. 이 내용은 뒷날 고려 충렬왕 7년(1281)에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1206∼1289년)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으면서 권5 ‘혜현구정(慧顯求靜)’조에 거의 그대로 옮겨 싣고 있다.

    여기서 태안반도에 미륵신앙이 팽배해 있던 정황을 간취할 수 있으니, 혜현이 수덕사에 살면서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혜현이 살았다는 백제국 북부 수덕사는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숭산에 있는 수덕사가 분명하다.

    수덕사는 ‘예산사면석불’이나 ‘서산마애삼존불’과는 가야산 줄기로 한데 이어져 있는 곳이다. 다만 수덕사가 맨 남쪽 산기슭에 있고, ‘서산마애삼존불’이 맨 북쪽 산기슭에 있으며, ‘예산사면석불’이 동쪽 산기슭에 있을 뿐이다. ‘태안마애삼존불’은 그 산줄기가 서쪽 끝으로 뻗어나가 바다와 맞닿은 곳에 있어서 가장 멀지만 역시 한구역에 있다.

    그러니 혜현의 이념, 더 나아가서 혜현이 살던 수덕사 대중의 이념이 곧 이들 세 곳의 불보살상 조성에 바탕 이념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런데 혜현이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을 평생 업으로 삼고 이로써 사람들을 가르쳤다 하고 있다. 따라서 ‘법화경’에서 설하고 있는 불상관이 이들 불보살상 조성에 크게 작용하였으리라 생각되는데, ‘법화경’에는 그 첫머리 서품(序品)에서 벌써 미륵과 석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부각시키고 있다.

    석가 세존이 법화경을 설하기 위해 백호(白毫; 눈썹 사이에 난 흰 터럭. 잡아다니면 길이가 한 길이나 되는데 놓으면 오른쪽으로 도르르 말려 둥글게 되고 여기서 빛을 뿜어낸다고 함. 32상 중 하나)에서 광명(光明)을 놓아 동방팔천세계와 천상과 지옥 등을 두루 비추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을 보여주자, 미륵보살은 이런 신변(神變)을 보여주는 까닭이 궁금하여 과거무량제불을 가까이 모시며 공양해온 문수보살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문수보살은 자기 생각으로 헤아려보건대 아마 큰 법을 설하려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석가 세존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한다. 과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전에 일월등명여래(日月燈明如來)라는 부처님이 나서 정법으로 중생을 제도하였다. 성문(聲聞;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는 이)을 구하는 자를 위해서는 4제법(四諦法)을 설해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벗어나 열반에 이르게 하고, 벽지불(支佛; 獨覺 혹은 緣覺이라고도 번역하며 스승 없이 홀로 깨닫는 이)을 구하는 자를 위해서는 12인연법을 설해서 그렇게 하였으며, 여러 보살(菩薩; 이미 깨달았으나 중생을 모두 깨닫게 하기 위해 성불을 보류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6바라밀(婆羅密)을 설해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 즉 대각을 얻게 하였다. 그런 일월등명불이 2만 명이나 계속 나온 끝에 마지막 일월등명불 시대에 석가와 미륵이 만났다는 것이다.

    마지막 일월등명불은 출가 전에 8왕자를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묘광(妙光)보살에게 법화경을 배워서 성불하게 된다. 그중 막내인 법의(法意) 왕자가 연등불(然燈佛)이고 연등불의 800제자 중에 구명(求名)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그는 이해(利害)에만 집착해서 여러 경전을 읽어도 항상 꿰뚫지 못했으나 착한 마음으로 무수한 부처님을 만나 공양 공경하고 존중 찬탄하는 복덕을 짓게 된다. 그 결과 묘광보살은 금세의 석가가 되고 구명 비구는 미륵보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등불은 석가에게 장차 불타가 되리라는 사실을 수기(授記; 예언)하게 되고 석가는 미륵에게 다음 세상에 성불하게 된다고 수기한다는 내용이다.

    [ 백제식 사방불 ]

    이로써 법화 이념을 기반으로 불상을 조성하게 되면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위로는 연등불, 아래로는 미륵불로 이어지는 삼세여래 조성이 가능하게 된다. 미륵하생을 희구하는 당시 백제 사회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하생한 미륵을 어느 불보살상 구도에서나 반드시 포함시키려 했을 듯하다. 그래서 중국의 음양오행사상의 영향을 받아 동서남북과 중앙을 상징하는 오방불(五方佛)의 개념으로 출현했을 사방불(四方佛) 개념도 백제에서는 대담하게 파괴하여 백제식 사방불을 설정했던 듯하다.

    북량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금광명경(金光明經)’(414∼426년 번역) 권1과 동진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불설관불삼매해경(佛說觀佛三昧海經)’(421년 번역) 권9 등에서는 사방 불국토의 주재불을 동방 아촉불(阿佛), 남방 보상불(寶相佛), 서방 무량수불(無量壽佛), 북방 미묘성불(微妙聲佛)이라 하고 있다. 중앙에 석가불이 있다는 전제 아래 설정된 이름이다. 그래서 사실 중국에서는 동위 효정제(孝靜帝) 천평(天平) 2년(535)에 조성한 하남성 등봉현 소림사(少林寺) 소장 4면 비상(碑像)에 다음과 같은 명문을 남기기도 한다.

    ‘남방 보상여래, 동방 아촉, 북방 미묘성불, 최진(崔進)이 집안을 합쳐 만들다. 서방 무량수(南方寶相如來, 東方阿, 北方微妙聲佛, 崔進合家 西方無量壽)’

    그러나 백제에서는 이런 중국풍의 사방불 설정을 무시하고 구마라습 번역의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402년 번역)에서 서방 아미타를 이끌어내고, 동진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 번역의 ‘불설관정발제과죄생사득도경(佛說灌頂拔除過罪生死得度經)’, 즉 ‘관정경(灌頂經)’ 권12(317∼322년 번역)에서 동방 약사유리광여래를 도출해낸 다음 석가여래는 남방 인도에서 출현하였으므로 남방에 위치시키고, 미륵의 하생은 백제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여 북방에 배치한 모양이다.

    그래서 ‘예산사면석불’에서부터 그런 배치를 한 듯하다. 백제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최초로 지어준 일본 대판(大阪)의 사천왕사(四天王寺; 593년 건립)와 내량(奈良) 원흥사(元興寺; 593년 건립)의 5중탑 안에 모신 사방불이 동방약사, 서방미타, 남방석가, 북방미륵으로 되어 있고 역시 백제 유민들이 지었을 내량 흥복사(興福寺) 5중탑(730년 건립) 안의 사방불 역시 그와 같은 배치를 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용화낭도(龍花郎徒)의 등장 ]

    이처럼 백제가 자기 국토에서 미륵의 출현을 확신하며 이런 신앙을 통해 민심을 결집하여 국난을 극복해가자, 승승장구로 국토를 확장해놓고 이를 지키느라 힘겨워하던 신라에서도 미륵하생신앙을 통해 소년 용사들을 길러 확장한 영토를 결사적으로 지키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진흥왕이 최대로 확장해 놓은 북쪽 영토의 국경 지대를 돌아보고 이원의 마운령과 함흥의 황초령 및 서울의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짓는 진흥왕 29년(568) 이후부터 이런 일이 진행된 듯하니, ‘삼국유사’ 권3 미륵선화(彌勒仙花) 미시랑(未尸郞) 진자사(眞慈師) 조의 내용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진흥왕은 법흥왕을 이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어 널리 절을 일으키고 사람을 출가시켜 승려로 만들었다. 그런데 진흥왕은 천성이 풍류를 좋아하고 신선도 숭상하여 처녀 중에 아름다운 이를 뽑아서 원화(原花)로 받들고 무리를 모으고, 선비를 가려뽑아 효제충신(孝悌忠信;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공손하며 나라에 충성하고 친구간에 믿음이 있음)을 가르치게 함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기틀로 삼으려 하였다.

    원화는 근원이 되는 용화수(龍花樹)라는 의미이니 곧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여 그곳에서 3회(會) 설법을 통해 96억과 94억, 92억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대중을 해탈시키는 능력을 가진 미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원화를 소년으로 하지 않고 미소녀로 한 것은 이미 중국에서 미륵보살이 여성화하여 우리나라에 전해졌기 때문인 듯하다.

    처음에 남모(南毛)와 교정(貞) 두 낭자를 원화로 뽑아 각각 300~400명의 소년 낭도(郎徒)를 거느리게 한 모양이다. 그런데 교정이 남모를 질투하여 취하도록 술을 먹인 다음 북천 가운데로 들어다 놓고 돌을 덮어 죽이니 남모의 낭도들이 이 사실을 알아내고 교정을 죽이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이에 진흥왕은 일시 원화제도를 폐지하나 결국 국토 방위를 위해 소년 군단의 창설이 절대 필요하게 되자 다시 양가집 아들로 덕이 있는 미소년을 뽑아 원화를 대신하게 하고 이를 화랑(花郞)이라 하게 되었는데, 최초의 국선(國仙)으로 받들어진 화랑이 설원랑(薛原郞)이었다. 이것이 화랑과 국선의 시초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조에도 대강 비슷하게 실려 있다. 다만 교정(貞)을 준정(俊貞)이라 하고 두 처녀가 서로 미모를 다투다가 준정이 남모를 집으로 끌어들여 억지로 술을 먹이고 취하자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 뒤에 다시 용모가 아름다운 남자를 데려다가 꾸며서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드니 무리가 구름 모이듯 하여 혹은 도의(道義)로 서로 갈고 닦으며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기며 산과 물을 찾아 노닐어 멀리 가지 않는 데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사람됨이 그르고 바른 것을 알게 되니 그 착한 이를 가려서 조정에 천거하였다”라고 한 내용은 ‘삼국유사’와 다를 바 없다.

    [ 원화제도와 진골 귀족 ]

    그런데 이런 내용으로 보면 진흥왕이 원화제도를 폐지한 다음 미소년으로 원화를 대신해 화랑을 세운 것으로 돼 있어, 원화제도가 사라진 듯하다. 그러나 제8회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진흥왕의 증손녀대에 가서 선덕여왕(632∼646년)과 진덕여왕(647∼653년)이 출현하는 것으로 보면 이 원화제도는 그대로 존속한 듯하다.

    말하자면 진평왕(579∼631년)대에 왕녀나 왕손녀 등 진흥왕 혈통을 이어받은 진골 귀족의 딸들이 원화를 맡은 듯하다. 특히 진흥왕이 백정반이라 이름지어 석가여래의 부친처럼 되어줄 것을 기원했던 진평왕과 그 왕비 마야부인 김씨 사이에 출생한 공주들 중에서 선출된 원화는 미륵보살의 화신 노릇을 하다가 왕위에 나가야만 했을 것이다.

    이렇게 원화로 뽑힌 왕녀나 왕손녀들은 평생 출가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을 것이다.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에게서 소생이나 부군 등 가정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이런 규정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선덕여왕의 둘째 여동생인 천명(天明) 부인은 진지왕의 아들인 당숙 용수(龍樹, 570년대∼645년경)에게 출가하여 태종 무열왕 김춘추(金春秋, 604∼661년)를 낳았다. 그러므로 만약 진평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어 여왕을 세울 지경이었으면 진지왕과 진평왕의 내외손으로서 혈통이 가장 순수한 김춘추가 바로 왕이 되거나 그 부친 용수 이찬이 진지왕의 왕자이며 진평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나갔어야 한다. 그런데도 선덕여왕에게 그 왕위가 물려진 것이다. 더구나 선덕여왕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선덕여왕에게는 친아우인 천명부인이나 제랑(弟郞)인 용수, 조카인 춘추를 제쳐놓고 사촌 아우인 진덕여왕에게 또다시 왕위가 넘어간다.

    이로 보아 미륵의 화신인 원화에게 왕위가 계승되는 제도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진덕여왕이 돌아가고 김춘추에게 왕위가 계승되는 것은 아마 미륵보살의 출현이 필요없게 된 사회 상황의 변화와 당나라와 자주 접촉해 가부장적인 유교 윤리 강령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결과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륵하생 신앙이 백제에서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뒤따라 모방하려 한 신라에서는 초기에 백제로부터 하생한 미륵을 모셔오는 형식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삼국유사’ 권3 미시랑 진자사조의 내용이다. 그 대강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진지왕(眞智王, 576∼578년)대에 흥륜사 승려인 진자(眞慈)가 매양 미륵당에 들어가 당주인 미륵상 앞에서 발원하여 맹세하기를 이렇게 하였다.

    “원컨대 우리 대성(미륵)께서 화랑(花郞)으로 변화를 지으시어 세상에 출현하소서. 저는 항상 거룩한 모습을 곁에서 가까이 모시며 정성껏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비는 마음이 날로 깊어지더니 어느날 밤 꿈에 어떤 승려가 나와 “네가 웅천(熊川, 현재 공주)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 선화(仙花)를 볼 수 있으리라”하고 말한다. 진자가 꿈에서 깨어나 몹시 기뻐하며 그 절에 도착하니 문밖에 한 소년이 있는데 흠 잡을 데 없이 잘생겼다. 그런데 그가 반가이 맞이하며 샛문으로 이끌어들여 객실로 맞아들인다. 진자가 방으로 올라와 읍하며 말하기를 “낭군을 예전에 알지 못했는데 어찌 이렇게 정답게 대접하시오”하자 소년은 “나도 또한 서울사람입니다. 대사가 먼길을 찾아오셨기에 오신 것을 위로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조금 있다 문으로 나갔는데 소재를 알 수 없었다.

    진자는 우연일 뿐이라 말하며 그것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 절 승려와 더불어 지난 날의 꿈과 오게 된 뜻을 말하고 잠시 아랫자리에서 지내며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떠냐고 물었다. 이 절 승려들은 그 정열이 솟구치는 모습에 탄복하고 그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이렇게 말해 주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이웃에 천산(千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옛날부터 어진이들이 머물러 살며 그윽하게 감응하는 바가 많다고 하니 어찌 저곳으로 가서 살지 않겠는가.” 진자가 이 말을 좇아 산 밑에 이르니 산신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며 “무엇하러 여기에 왔는가”하고 묻는다. “원컨대 미륵선화를 뵙고자 할 뿐입니다”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접때 수원사 문앞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을 터인데 다시 와서 무엇을 찾는가”라고 한다.

    진자가 듣고 놀라서 땀을 흘리다가 급히 본사(흥륜사)로 돌아와 한 달쯤 지났는데 진지왕이 이를 듣고 불러다 그 연유를 묻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소년이 이미 서울 사람이라 하였고 성인(聖人)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데 어찌 성안을 찾아보지 않았느냐.” 진자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골목마다 찾아다니니 한 작은 소년이 입술이 반듯하고 눈매가 빼어난데 영묘사의 동북쪽 길가 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며 놀고 있다.

    진자가 맞이하며 놀라 말하기를 “이 분이 미륵선화시다”하고 나아가 묻기를 “낭군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씨는 누구십니까”하니 소년이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미시(未尸)이고 어릴 때 부모가 돌아가서 성을 무엇이라 하는지 모른다”라고 한다.

    이에 견여(肩輿)에 태우고 왕에게 들어가 보이니 왕이 이를 공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그러자 그 자제들을 화목하게 하고 예의로 풍속을 가르치는 것이 보통사람과 달라 풍류로 세상에 빛내기를 거의 7년 동안 하더니 홀연히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 진자가 몹시 슬퍼하였으나 자비로운 혜택을 입고 맑은 교화를 직접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능히 스스로 회개할 수 있어 정성으로 도를 닦더니 만년에는 역시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위의 내용에서 신라가 백제로부터 미륵선화를 맞아오는 상황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신라 최초로 건립된 국찰로 법흥왕과 진흥왕이 출가하여 살았던 흥륜사의 승려인 진자가 백제의 구도인 공주에 있는 이름 없는 절에서 미륵선화를 찾아 모셔왔다는 사실은 신라의 미륵하생신앙이 백제보다 얼마나 더 절실하고 간절했는가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주는 확실한 증거라 하겠다. 미시랑이 본래 서울 사람이라 한 것은 미륵이 신라 서울 경주에서 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으니, 백제의 미륵하생은 일시적인 현상이고 종당에는 신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의미의 표출인 듯하다.

    진지왕에 의해 국선으로 세워진 미시랑이 7년 동안 국선의 자리에 있다가 종적없이 사라졌다는 것은 진평왕 초에 새로운 미륵이 출현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되는데, 진평왕 등극 직후인 580년 경에 선덕여왕이 탄생하였을 터이니 이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제 신라에서는 신라 왕손이 직접 미륵의 화신으로 출현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백제에서는 위덕왕(554∼597년)이 미륵하생 신앙으로 성왕의 전사와 그로 인한 막대한 영토 상실에 낙망한 민심을 추스르는 데 성공하여 점차 신라에 빼앗긴 땅을 되찾기 시작한다. 그래서 위덕왕 12년(565)에는 신라가 완산주(完山州, 지금 전주)를 폐지하고 대야주(大耶州, 지금 합천)를 신설하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백제의 공세에 당황한 신라는 국경을 단속하기 위해 진흥왕 29년(568, 위덕왕 15) 10월에 부랴부랴 국왕이 중신들을 이끌고 순수에 나서 각 처에 순수비를 세워 국토 수호의 경각심을 일깨웠던 것이다. 그리고 백제의 침공에 대비하는 데 주력을 기울이기 위해 고구려와 접경지역에서는 한 발 후퇴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현재 서울)를 폐지하고 남천주(南川州, 현재 이천)를 두고, 비열홀주(比列忽州, 현재 안변)를 폐지하고 달홀주(達忽州, 현재 고성)를 둔다.

    드디어 백제는 위덕왕 17년(570, 진흥왕 31)에 국력을 회복하여 제해권을 다시 장악하는 등 북제(北齊) 후주(後主)는 위덕왕에게 사지절시중차기대장군대방군공백제왕(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을 봉하고, 이어 다음 해에는 도독동청주제군사동청주자사(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를 추봉하여 발해만 일대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게 보장한다.

    이렇게 되자 백제는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해 북제 문화를 직수입하면서 문화강국으로 발돋움해 나간다. 그런데 당시 중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북위 말기인 숙종 효명제(516∼528년) 시기에 그 모후인 영태후(靈太后) 호(胡)씨가 섭정으로 대권을 농락하다가 권신(權臣) 이주영(爾朱榮)에게 살해된 뒤에 북위는 분열과 내란으로 도탄에 빠진다. 이로부터 미륵하생 신앙이 크게 일어나 민심을 사로잡게 되니, 그 결과 하생한 미륵보살상인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이 단독상으로 조성돼 예배받기 시작한다.

    ‘영청문고소장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제8회 도판 13)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하생미륵상의 대표적인 형태다. 정4각에 가까운 넓은 얼굴이나, 머리칼 위에 밑테 두른 연화관을 쓰고 촛불꽃을 목 아래 거꾸로 매단 듯한 테 넓은 목걸이를 걸고 있는 모습은 물론 옷주름에 층급을 만들어 계단처럼 표현한 것 등이 효명제 희평(熙平) 연간(516∼517년)에 완성되는 용문석굴 ‘빈양중동보살상’(제7회 도판 10)이나 ‘신구(神龜) 원년(518)명 금동미륵보살교각좌상’(도판 3) 양식과 너무 비슷하여 이 미륵반가좌상이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청문고소장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의 목걸이가 세로 줄로 구획을 나눈 것은 같으나 면적이 조금 좁아지면서 아래 중심 끝부분 구슬 장식이 사라지고 있어 적어도 몇년의 시차를 두고 뒤에 만들어진 듯하니, 효명제 정광(正光) 원년(520) 경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는 북제와 교역을 터 미륵하생사상과 초기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 양식을 거침없이 받아들인 뒤 이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시켜 결국 절정에 이르는 세련미를 창출해내게 된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도판 4)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국보 78호 금동미륵반가상의 신비 ]

    우선 이 보살상은 특이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마치 고사리를 다발로 펼쳐놓고 동판으로 이를 고정한 다음 끈으로 묶은 것 같은 형태의 보관인데 머리 앞면에만 씌워져 있다. 그리고 상투 셋을 정면에 세운 뒤 이를 사람의 상체와 비슷하게 생긴 동판 얼개 셋(좌우의 것은 중앙을 반으로 갈라놓은 형태임)으로 고정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동판 얼개 셋이 산(山)자 모양이 되게 하였다.

    또 산(山)자의 좌·우 봉우리에 해당하는 두 상투 끝에는 세 개의 연꽃잎 장식 위에 해와 반달 장식을 포개 놓고 그 위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모양이 마치 뿔처럼 솟구치게 해 놓았다.

    얼핏보면 밀짚모자를 쓴 사람처럼 보이는 부분이다. 앞머리로 틀어올린 세 개의 상투를 그루터기로 하여 산자 모양의 동판 얼개 셋과 다섯다발의 고사리 묶음을 세우고 이를 관자(貫子)처럼 생긴 두 개의 고리를 이용하여 이중의 넓은 끈으로 앞면에서만 고정했는데, 복잡한 듯하면서 단순한 보관에서 우선 극도의 세련미를 느낄 수 있다.

    이마 바로 위에 넓은 끈처럼 표현된 부분은 사실 머리칼이다. 그런데 그 위에 팽팽하게 덧대어 묶은 끈이, 그 안에서 상투 밑을 묶어내린 속끈과 머리칼이 마치 연결된 듯이 보이게 함으로써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뒷머리는 머리칼을 높은 데서 두 가닥으로 갈라 비튼 듯 성글게 땋아 좌우 어깨 위로 묶어 내리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그 끝은 세 가닥으로 갈라 세 겹으로 포개진 세 개의 연꽃잎처럼 마무리지어 시원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세련된 면모를 보여준다.

    얼굴은 백제 특유의 둥글넓적한 판형으로 천진하고 온유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눈과 눈썹 사이가 넓어 슬기롭고 맺힌 데 없는 심성을 엿볼 수 있다. 적당히 솟아난 콧대와 광대뼈는 주관이 분명하고 경쾌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드러내고, 넉넉한 콧방울과 탄력을 갖춘 아래위 입술은 분명하게 드러난 인중(人中; 코 밑의 파인 부분) 및 승장(承漿; 입술 아래 보조개)과 함께 살갑고 정 깊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가만히 실눈을 뜨고 콧방울을 벌리며 입술을 펴서 반가운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을 지었으니 그 얼굴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오른팔을 반가한 오른쪽 무릎 위에 굽혀 대고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펴서 오른쪽 뺨을 살짝 받치고 있어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만족한 결론을 얻은 듯 지그시 반가운 미소를 머금었음에랴!

    얼굴은 활짝 핀 아리따운 처녀의 모습인데 가슴은 갓 성년이 된 소년의 그것처럼 아직 여린 티가 남아 있다. 또 뱃가죽이 휘어들어 날렵한 소년의 몸매를 연상시키나 하체는 건장하여 반가한 다리가 묵직하게 무게 중심을 잡아준다. 가냘픈 몸매에 비해 손과 발이 크게 표현된 것은 이제 막 성년이 됐으나 아직 미성숙한 청년의 몸매가 가지는 특징일 것이다.

    등 뒤로 흘러내렸던 천의(天衣)는 양쪽 어깨에 걸려 앞으로 넘어가면서 그 옷자락 끝을 지붕 처마 끝처럼 살짝 펴 두 어깨를 덮고 있는데 위 팔찌가 보일 정도로 날렵하다. 앞가슴으로 흘러내린 두 가닥의 천의 자락은 벌거벗은 웃통을 조금이나마 가려주며 각기 두 무릎을 휘돌아 두 팔뚝을 휘감는 등 갖은 변화를 보이다가 앉은 자리 밑으로 숨어 들어간다.

    웃통은 벗었지만 허리 아래로 치마는 온전하게 입고 있어 두 가닥 허리띠가 배꼽 위에서 나비 매듭으로 매어져 있다. 주름을 많이 접은 폭넓은 치마인 듯 등 뒤 엉덩이 부분과 옆구리 쪽에는 세로 옷주름 표현이 많고, 반가형태로 올려놓은 오른쪽 무릎에서는 치맛자락이 무릎을 감싸며 딸려 올라와 무릎 밑에 깔렸다가 다시 비어져 나오면서 반가한 무릎의 무게를 이중으로 받쳐주고 있는데 윗자락은 마치 파도가 쳐올라오듯 처리하고 아랫자락은 새가 깃을 펼친 듯 처리하였다.

    그리고 왼쪽 무릎을 덮고 나서 깊숙이 여며진 왼쪽 치맛자락은 연화대를 밟고 있는 왼쪽 무릎을 따라 물결무늬의 음각 옷주름선을 켜켜로 만들고 나서 다시 오른쪽으로 진행해가며 정면에서 두 번 크게 세로로 접힌다. 세로로 접힌 사이로 펼쳐져 내린 두 폭의 넓은 치마폭 역시 무릎선에서 생긴 옷주름과 같은 물결무늬 옷주름을 만들어 내는데, 그 간격과 크기는 일정치 않아 매우 자연스럽다.

    의복 표현이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좌우 옆구리 부분 허리띠에서 각기 장식띠 한 줄이 걸려 내려오면서 두 가닥 끈이 돼 엽전 형태의 고리에서 서로 꼰 다음 역시 자리 밑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것들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나갔는지 그 밑으로는 매듭과 엮음 및 술로 화려하게 꾸며진 두 가닥 끈이 자리 밑으로부터 나와서 늘어진다.

    의자는 인도 이래로 반가사유상이 항상 깔고 앉던 장구통 모양의 둥근 등의자(藤倚子)가 변형된 것으로 돈(墩; 항아리 모양 의자) 위에 둥근 방석을 얹어 놓은 것과 같은 형태다. 이것이 등의자인 것을 보여주려는 등나무 골조가 밑부분에서는 보이나 전체를 천으로 덮어내려 옷주름이 물결이나 연꽃잎 모양으로 표현되고 있다.

    장신구는 다만 촛불꽃을 거꾸로 매단 모양, 즉 심엽형의 테 넓은 목걸이와 둥근 테의 아래 위 팔찌를 갖추고 있을 뿐인데, 모두 4각으로 파고 그 안에 구슬 모양을 돋을새김해 넓은 방변원심형(方邊圓心形) 문양으로 표면을 장식함으로써 극도의 세련미를 과시하고 있다.

    [ 인공미보다 천연미를 좋아하는 심성 ]

    위에서 든 여러 가지 양식적 특색은 이 ‘국보 78호 금동미륵반가상’만이 가지는 독자적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요소들은 북위에서 운강석굴을 거쳐 용문석굴로 이어지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치는 시기의 모든 보살상 양식과 정광연간(520∼524년)경에 시작하여 북제 무평(武平, 570∼575년) 연간까지 유행했던 독존 미륵반가좌상 양식의 장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이를 백제의 미감으로 융합시켜 재창조해낸 것들이다.

    우선 보관에 있는 해와 달 장식은 460년경 운강석굴 초기 조상에서부터 보인 보살상, 그중에서 미륵보살상 보관 장식의 정면에 보이던 것으로 ‘운강 18동 주불 좌협시 미륵보살상’(도판 5) 보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국보 78호 상에서처럼 해와 달이 포개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해 위에 달이 올라가 있다. 이런 의장(意匠)에서 우리는 백제인이 사고(思考)의 파괴를 단행하여 하나를 좌우 둘로 늘려가며 해 위에 달을 포개놓는 파격적인 변형을 시도했음을 엿볼 수 있다.

    또 소위 심엽형이라고 불리는, 거꾸로 매달린 촛불꽃 모양의 목걸이는 본디 5세기 중반부터 이미 돈황석굴이나 운강석굴에서 보살의 목걸이로 표현되던 것이다. 초기에는 청록(靑綠)색 계통의 사다리꼴 색판을 이어붙여 만들고 아래에 방울 같은 둥근 구슬을 가지런히 매달아 장식하였다. 그러던 것이 5세기 말 운강석굴에서부터 색판의 경계만 표현되고 구슬은 중심 끝에 하나만 매달리다가 그것마저 차차 사라지는 현상을 보인다. 그래서 6세기 중반에 이르면 목걸이의 폭이 좁아지면서 점점 둥근 테에 가까워지는데 백제인들은 이를 방변원심형 무늬로 환골탈태시킨 것이다.

    그동안 중국에서 진행되던 목걸이 변화의 전 과정을 모두 파악하고 난 다음 전통 형식을 계승하면서 여기에 참신한 현대적 의장을 가미하는 개성을 발휘함으로써 중국 보살상 양식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양식의 장신구를 창안해낸 모양이다.

    천의가 어깨를 덮으며 팔찌를 드러내게끔 경쾌하게 표현되는 것도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원한 기법이다. 원래 어깨를 날개깃처럼 덮어내리는 표현은 480년경 포복식 불의가 나타나면서 이미 운강석굴에서부터 널리 유행하던 기법이었는데, 중국에서는 항상 이런 날개깃 모양의 천의가 어깨를 덮을 때면 아래로 너무 깊이 덮어내려 위 팔찌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게 표현되었었다.

    천의가 팔뚝과 무릎을 휘감는 기법과 반가한 무릎을 받쳐주는 표현 역시 이 상에서 완성된 독창성으로 이후 우리나라 미륵반가좌상 양식의 한 특징을 이루어간다.

    이렇듯 중국 미륵반가상 양식을 수용해 들이고 나서 미구에 이와는 전혀 다른 독창적인 미륵반가상 양식을 완성할 수 있던 것은 백제 문화의 독자적 역량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인공미를 싫어하고 천연미(天然美)를 좋아하여 아무리 고도로 세련된 인공미라 할지라도 반드시 천연미로 환원시켜 놓으려는 성향을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다는 점도 이를 더욱 부채질했을 것이다.

    [ 삼국의 해상 진출 ]

    달이 차면 기울듯이 진흥왕(534~576)의 영토 확장은 그 29년(568)을 고비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백제와 고구려가 국력을 추슬러 역공에 나서며 신라를 견제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백제의 위덕왕은, 한강 일대를 차지하고 강화만을 통해 해상 활동을 전개해온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태안반도와 아산만을 거점으로 하는 백제의 수군 세력을 더욱 강화하여 그 17년(570)에는 남양만을 거점으로 삼고 있던 신라 수군을 완전 제압한 듯하다.

    그동안 승승장구하며 한강을 따라 강화만까지 진출하였던 신라는 고구려가 임진강을 장악하여 조강(祖江) 입구를 봉쇄하자 부득이 남양만으로 해상기지를 옮긴 모양이나, 백제가 아산만의 수군으로 이를 제압하여 발을 묶은 것이다. 그래서 위덕왕 17년에 백제는 북제에 사신을 보내고 고구려는 남조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낼 수 있었다.

    일시 강화만을 차지하고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신라가 이제는 백제와 고구려 수군의 눈을 피해 중국과 내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진흥왕 33년(572, 위덕왕 19) 3월에는 태자 동륜(銅輪, 550년경∼572년)이 불과 20여 세의 어린 나이로 돌아가니 진흥왕의 영화는 차츰 빛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2년 뒤인 진흥왕 35년(574) 3월에 800여 년 전 아쇼카왕이 빈 배에 실어보낸 황금과 구리가 울산 앞바다로 들어와 이것으로 황룡사 장륙상을 만들었다는 신비한 내용의 얘기가 어째서 만들어졌는지 짐작할 만하다. 진흥왕이 곧 석가족의 혈통을 타고난 진골(眞骨)이라 믿어온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신비한 불사(佛事)를 일으켜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도 그 2년 뒤인 진흥왕 37년(576, 위덕왕 23) 8월에 불과 43세의 한창 나이로 돌아가고 20여세밖에 안 된 둘째 왕자 금륜(金輪)이 등극하니 이가 진지왕(眞智王, 554년경∼579년)이다.

    신라가 이처럼 왕권이 흔들리게 되자 백제의 영토회복 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위덕왕 24년(577, 진지왕 2) 10월에는 신라의 서북쪽 낙동강 상류지역인 일선군(一善郡, 지금 선산)까지 진격해 들어가고 이후부터는 해마다 신라에 빼앗긴 옛 땅을 되찾는다.

    그런데 진지왕은 금륜성왕(金輪聖王)이 되기를 바라 금륜이라고 이름지어준 진흥왕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용렬한 인물이었다. ‘삼국유사’ 권1 도화녀(桃花女) 비형랑(鼻荊郞) 조에 의하면 진지왕은 황음무도(荒淫無道)하여 백성의 처를 강탈하고 정사를 어지럽혀 재위 4년 만에 사람들이 폐위하니 그 해에 돌아갔다 한다.

    진골 혈통에 대한 위기감 때문에 김씨 왕족들이 나서서 제거한 모양이다. 이때 진지왕의 모후인 사도(思道)부인 박씨(534년경∼614년)가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주석하고 있었으므로 대비의 특명으로 이와 같은 일이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왕세손이던 동륜태자의 장자 백정반(白淨飯, 565년경∼632년)이 불과 15세 전후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니 이가 진평왕(眞平王, 579∼632년)이다. 진평왕은 그 어머니 만호(萬呼)부인이 진흥왕의 여동생이었으므로 진흥왕의 혈통을 가장 순수하게 받고 태어난 진골 중의 진골이었기에 진흥왕은 일찍이 이름을 백정반이라 지어 석가모니불의 부친처럼 되기를 기원하였다. 그래서 진평왕에게 짝지어줄 인물도 지증왕계의 순수 김씨 혈통을 가려 미리 점찍어 두었다가 결혼하고 나자 석가의 모후 이름인 마야(摩耶)부인으로 불렀던 모양이다.

    이 사이에서 선덕(善德)여왕이 되는 덕만(德曼, 580년경∼647년)과 태종 무열왕 김춘추(金春秋, 604∼661년)의 모친이 되는 천명 부인(天明, 582경∼?), 백제 무왕(武王, 580년경∼641년)의 왕비가 되는 선화 공주(善花, 584년경∼?) 등 세 딸이 탄생한다. 진평왕은 이 세 자매 중 맏이인 덕만을 우선 원화로 지목하여 장차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던 듯하나, 이 얘기는 앞에서 잠시 언급했으므로 생략하자.

    어떻든 이렇게 왕권이 쇠약해지고 제해권이 백제로 넘어간 상황에 신라는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엄두도 내지 못해 왕이 몇 번 바뀌었어도 중국으로부터 책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에 반해 백제는 위덕왕 28년(581, 진평왕 3) 2월에 수(隋)나라가 개국하자 바로 사신을 파견하여 수로부터 상개부의동삼사대방군공백제왕(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百濟王)을 책봉받아 국제적인 지위를 인정받는다. 이즈음 백제의 해상활동은 절정에 이르러 위덕왕 31년(584) 9월에는 일본에 미륵석상 1구와 불상 1구를 보내 불교를 처음 전해준다. 이때 보낸 미륵석상은 아마 ‘국보 78호 금동미륵반가상’과 같은 양식이었을 것이다.

    이에 진평왕은 5년(583) 1월에 선부서(船府署)를 처음으로 설치하여 해양력을 배양한다. 이렇게 신라가 선부서를 설치하고 해양력을 배양한 덕택에 진평왕 7년(585, 위덕왕 32) 7월에는 지명(知明)대사가 남조 진(陳)으로 유학을 떠나고, 진평왕 9년(587) 7월에는 내물왕 7세손인 김대세(金大世)와 그의 벗 구칠(仇柒)이 대양(大洋)을 정복하려는 웅지(雄志)를 품고 남해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

    진평왕 10년 3월에는 원광(圓光)법사가 또 배를 타고 진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원광법사는 다음해 1월에 진나라가 수나라에 멸망하는 와중에 수나라 군사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려는 순간 절이 불타는 것처럼 보여 달려온 장교의 눈에 띄어 살아나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다.

    한편 수나라가 진을 평정하는 과정에 수나라 전선(戰船) 한 척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제주도로 표류해 오는 일이 발생하는데, 백제의 위덕왕은 이를 잘 구호한 다음 사신으로 하여금 호송해 가게 한다. 수문제는 백제의 호의에 감사하여 먼 바닷길이 위험하니 자주 사신을 보내지 않아도 좋다고까지 하였다 한다.

    이때 백제에서는 많은 유학승들이 진나라에 가서 유학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웅주(熊州) 출신의 현광(玄光)대사 같은 이가 천태종(天台宗)의 초조(初祖)인 남악(南岳) 혜사(慧思)대사의 28제자 중 하나가 되어 남악 영당과 천태산 국청사(國淸寺) 조당(祖堂)에 영정이 걸릴 정도였다. 현광대사는 뒷날 귀국하여 웅주 옹산(翁山)에 주석하면서 우리나라 천태종의 문호를 개설한다.

    신라는 진평왕 16년(594)에 가서야 겨우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 상개부낙랑군공신라왕(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의 책봉을 받는다. 이로부터 신라도 수나라에 사신을 자주 보내게 되는데, 진평왕 18년(596) 3월에도 사신을 보내면서 그 편에 담육(曇育)대사를 유학보낸다.

    한편 백제는 위덕왕 45년(598) 6월에 수문제가 30만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해오자 산동성 동래(東萊)를 떠나 서해를 건너 진격해오는 수군대장 주라후(周羅)의 향도가 될 것을 자청한다. 고구려는 이를 알고 백제 국경을 침략하였으나 수나라 침공의 부담 때문에 적극 공세를 취할 수가 없었다.

    이 해 위덕왕이 돌아가고 후사가 없어 아우인 혜왕(惠王)이 뒤를 잇지만, 혜왕도 그 다음 해인 599년에 돌아가고 장자 법왕(法王)이 등극하나 역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600년 5월에 돌아가, 무왕(武王, 580년경∼641년)이 등극한다.

    [ 무왕과 선화공주의 만남 ]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무왕조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무왕은 이름이 장(璋)이고 법왕의 아들이다. 생김새가 빼어나고 컸으며 뜻과 기개가 호걸다웠다. 법왕이 즉위한 다음 해에 돌아가니 아들로 왕위를 이었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제 30대 무왕은 이름이 장(璋)이다. 모친이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의 용과 사귀어 관계하더니 출생하였다. 어릴 때 이름이 마동(薯童)이었고 타고난 그릇의 크기를 헤아릴 수 없었다. 항상 마를 캐어 파는 것으로 생활 수단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이름을 삼았던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제3공주 선화(善花)가 아름답고 곱기가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와서 마를 가지고 골목의 뭇아이들에게 먹이니 뭇아이들이 친해서 따라다녔다. 이에 동요를 짓고 뭇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하니 이런 노래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 가지고, 마동방을 밤마다 안고 있다네.’

    동요가 서울에 가득 차서 궁중 안까지 도달하니, 백관(百官)이 극성스럽게 간언(諫言)을 올리므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되었다. 장차 떠나려 하자 왕후는 순금 1말을 가는 데 쓰라고 주었다. 공주가 막 귀양갈 곳에 거의 다 와가는데 마동이 길 가운데로 나와서 절하며 장차 시위(侍衛)해 가겠다고 한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으나 만나니 미덥고 기뻤다.

    이로 말미암아 따라가며 몰래 관계를 맺었다. 그런 뒤에 마동의 이름을 알고는 이에 동요의 영험을 믿고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가 준 황금을 꺼내 살아갈 계획을 꾀하려 하니 마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공주가 이것은 황금이며 가히 백년 동안은 부자로 살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하자 마동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땅에는 이것이 진흙처럼 쌓여 있다.’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배인데 낭군이 이제 금이 있는 곳을 안다 하니 이 보배를 부모의 궁전으로 실어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마동이 ‘좋다’하고 금을 모으니 언덕처럼 쌓였다.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知命)법사를 찾아가서 금을 실어 보낼 계책을 물으니 내가 신통력(神通力)으로 실어 보낼 수 있으니 금만 가지고 오라 한다. 공주가 편지를 쓰고 금을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실어다 놓았다. 진평왕은 그 신통한 변화에 놀라서 지명법사를 더욱 심하게 존경하니,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고 마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서 왕위에 나아갔다.

    하루는 왕과 부인이 사자사로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속에서 나타난다. 어가를 멈추고 예배를 드리고 나자 부인이 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 반드시 큰 절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정말 소원입니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 못 메우는 일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새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서 평지를 만들어 놓는다. 이에 미륵 삼회(三會)를 본떠 이를 상징하기 위해 전각과 탑 및 회랑을 각각 세 곳에 짓고 이름을 미륵사라 지었다. 진평왕은 백공(百工)을 보내 이를 도왔다. 지금까지 그 절이 남아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얼핏 소설 같은 느낌이 앞선다. 우선 줄거리 자체가 어디에다 비교할 수 없이 극적이고 낭만적이다. 또 당시에 백제와 신라는 극심한 적대 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무왕이 등극하고 나서는 더욱 신라 공격에 치중하여 신라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던 상황이다.

    그래서 그동안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이 내용을 그대로 믿으려 하지 않고, 혹은 동성왕이 마동이라거나 원효대사가 마동이라는 등 각양 각색의 논지를 펼쳐 왔다. 그러나 미술사 쪽에서는 고유섭(高裕燮), 황수영(黃壽永)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도판 6) 양식이 바로 7세기 전반 무왕대에 해당한다 하여 이 내용을 추호도 의심 없이 사실로 인정해 오고 있다.

    필자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내용이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1980년부터 지금까지 발굴을 진행해오면서 1988년과 1996년 양차에 걸쳐 발굴보고서를 출간함으로써 이미 천하에 널리 알려졌으니 더 말할 필요는 없다.(도판 7)

    그동안 갖가지 억설(臆說)이 난무한 것은 일반 사학자 중 일부가 서구 과학 정신에 잘못 중독되어 진정한 실증사학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지 못한 가운데서 폭 좁은 지식으로 서구적인 합리성만 좇으려 한 결과 성급한 단견을 거르지 않고 마구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미술사는 이런 오류를 근원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최후의 실증사학 분야다. 최고의 사학자가 되려면 미술사 연구를 겸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떻든 미륵사 발굴 결과 그 가람배치가 ‘삼국유사’에서 말한 대로 미륵 삼회 설법을 상징하는 3원(院) 구조로 되어 있었음을 ‘미륵사유구배치도’(도판 8)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당시 미륵하생 신앙의 확산과 더불어 백제와 신라가 서로 자기 땅에 미륵이 하생한다는 믿음을 놓고 승강이를 벌이던 상황을 감안하여 합리적인 해석을 가해 보아야 하겠다.

    [ 미륵삼회 설법 상징하는 미륵사 ]

    앞서 ‘삼국유사’ 권3 미시랑 진자사조에서 진자대사가 진지왕(576∼578경) 때 백제 웅주로 가서 하생한 미륵보살인 미시랑을 모셔왔다고 했으니 백제는 미륵을 신라에 도둑맞은 꼴이었다. 이에 백제에서는 신라로부터 이를 되찾아올 필요성이 절실하였을 것이다.

    그런 때에 진평왕의 3공주가 차례로 태어나 그중에서 미륵 선화를 선발하게 되었고 첫째인 덕만과 셋째인 선화가 물망에 올랐을 듯하다. 둘째인 천명부인은 당숙인 용수에게 출가하여 김춘추를 낳았기 때문에 제외했을 것이다. 결국 선화공주(584년경∼?)가 그 이름대로 미륵선화가 될 자격을 모두 갖추고 있었기에, 16세 정도의 묘령에 이르자 미륵선화로 선발하여 국중의 화랑을 총괄하게 하고 장차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을 듯하다. 즉 태자로 책봉한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모험심 많고 잘생긴 백제왕자 마동이 신라의 미륵화신을 꾀어 백제로 데려옴으로써 빼앗긴 미륵을 되찾아오는 일을 해내려 했던 것 같다.

    위 얘기에서 밝힌 것처럼 마동은 정비 소생이 아닐 뿐 아니라 후궁 소생도 아니며 사비 남쪽 큰 못가에 살던 과부의 소생이었다. 그래서 궁중에서 자라지도 못하고 과부인 모친과 함께 여염에서 살면서 스스로 마를 캐어 내다 팔아 생활하였다.

    아무리 국왕이 과부와 사통해 낳은 왕자라 하지만 마를 캐다 팔아서 먹고 살 만큼 곤궁했다면 이는 정비의 질투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과부나 왕자의 지나친 자존심 때문에 왕의 도움이 직접 미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니 무왕의 용기나 모험심이 어디에 연유했을지 대강 짐작이 가능하다.

    하기야 무왕이 탄생하던 위덕왕 27년(580) 경이라면 법왕은 한낱 왕의 조카에 불과했을 터이니, 왕의 조카가 민간의 과부와 사통해 낳은 아들이 그리 큰 주목을 받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민가에서 마음대로 자라면서 타고난 용모와 용기, 모험심을 바탕으로 훌륭한 청년 왕손으로 성장하게 되고,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멀리 벗어나 있던 그는 선화를 빼앗아 오는 모험으로 왕위에 도전해보려 했던 듯하다.

    그런데 그것이 뜻대로 성공하고 조부왕과 부왕이 모두 등극하여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자 그에게 기회가 온다. 신라공주 미륵선화를 빼앗아온 백제의 미륵화신으로 국민적인 영웅이 된 그는 가장 불리한 출생 배경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양서(梁書)’ 권54 백제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다스리는 곳의 성을 일컬어 고마(固麻)라 하고 읍을 일컬어 담로(擔魯)라 하니 중국말로 군현(郡縣)이라 하는 것과 같다. 그 나라에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자제나 종족으로 나누어 차지하고 있게 하였다.”

    따라서 법왕이 왕손 시절 22담로 중의 하나로 봉토를 하사받은 곳이 익산 근처였다면 마동이 이곳에서 자라며 마를 캐러 다니다가 현재까지도 사금이 많이 나는 김제 일대에서 사금광을 발견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미륵선화를 차지한 국민적 영웅이 젊고 잘생긴 왕자인 데다가 대량의 황금까지 가지고 왕위를 도모해 나갔다면 그 성공은 불을 보듯 환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왕은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 다음 익산 용화산 아래에 미륵삼회 설법을 상징하는 미륵사를 대규모로 지어 자기 부부가 백제에 미륵세계를 이룩해 놓았음을 현실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후 무왕이 신라를 계속 침공하여 실지를 회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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