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감동의 정치로 신뢰의 씨앗 뿌려라

  • 글: 이명현 서울대 교수·철학

    입력2002-12-31 10: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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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동의 정치로 신뢰의 씨앗 뿌려라

    우리 사회에 신뢰 구조를 정착시킴으로써 살맛 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지난 20세기는 한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의미있는 도전과 시련의 시대였다. 동방의 농경문명에 안주하던 고요한 은둔의 나라가 서양 산업문명의 도전 앞에서 엄청난 충격과 변신을 거듭해야 했으며, 제국주의의 공격적인 칼날 앞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며 고통스러운 생존의 몸부림을 쳐야 했던 시대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인류 역사상 처음 보는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모순의 처절한 대결을 직접 몸으로 겪었을 뿐 아니라,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근대 문명의 핵심 과정이 너무나 짧은 시간에 동시적이고 압축적으로, 그리고 너무나 고통스럽게 진행된 시대였다.

    지난 100여 년과 같이 밀도 높은 역사는 우리의 오천년 역사는 물론이고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참으로 힘겹고 험난하고 복잡한 역사의 용광로였다. 그 용광로 속에서 다 녹아버리지 않고 남은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현존이 아닐까. 참으로 감격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앞에는 21세기 새로운 문명의 관문이 버티고 서 있다. 21세기와 20세기 사이에는 단순한 연대기적 차이와는 차원이 다른, ‘문명의 대전환’이라는 엄청난 변화가 가로놓여 있다. 지난 20세기에 한민족은 산업문명의 막차에 올라타느라 너무나 진한 땀을 흘렸다. 서양이 선도한 산업문명의 변두리에서 서성거리면서 온갖 좌절과 진통을 겪었다. 지금 우리 앞에 전개되는 역사는 20세기 산업문명과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문명이 되리라고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은 말한다. ‘지식 사회’ 혹은 ‘정보화 사회’ 혹은 ‘지식 정보화사회’는 그런 새로운 문명에 붙여진 별명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새로운 문명이 움트는 21세기 역사의 첫 무대 위에 곧 새 정부가 등장한다. 새 정부에 거는 우리의 기대가 예사로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이 새로운 문명의 판도에서 어디에 위치할 것인가는 새 문명의 첫 단추를 얼마나 잘 끼우느냐에 달려 있다. 그 첫 단추를 끼우는 중대한 책무가 21세기 벽두에 출현하는 새 정부에 맡겨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새 정부를 이끌어갈 대통령 당선자에게 각별한 축하를 드리지 않을 수 없으며, 지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난 20세기에 산업문명 역사의 변방에서 온갖 고뇌와 좌절을 겪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21세기 새로운 문명에서는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 살맛 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어찌 이것이 우리 모두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20세기 역사의 터널 속을 헤쳐나오면서 우리의 어두웠던 역사에 대한 책임을 때로는 우리들 자신에게 돌리고, 때로는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였다. 지금 우리에게 절박한 문제는 지나간 역사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당면한 역사적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이다. 그 문제를 풀어나갈 지혜와 백전불굴의 기백과 실천력이 과연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과거를 탓할 여유가 없다. 오늘 우리 앞에 놓인 과제 너무나 심대하기 때문이다.

    신뢰 구축 없이 일류사회 만들 수 없다.

    왜 신뢰가 그렇게도 중요한가? 신뢰는 사회 구성의 초석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은 자연법칙이다. 자연은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자연과 대비되는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은 규범이다. 규범은 자연법칙과 달리 인간이 만든 법칙이다. 모든 법과 제도, 규칙과 관습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규범적 질서들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약속’한다는 것이다. 민주국가에서 법은 국민 의사를 대표하는 국회에서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다. 합의란 다름아닌 약속이다. 합의에는 국회에서의 합의와 같은 명시적인 합의와 관습과 관행과 같은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 따라서 규범에는 명시적인 것과 암묵적인 것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토대는 약속이다. 약속은 상대방의 말을 믿는 데서 성립한다. 상대방의 말을 믿지 않으면 약속은 성립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생일 선물로 금송아지 한 마리를 주겠다”고 하고서도 생일날 아들에게 금송아지를 선물로 주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말 것이다. “생일선물로 금송아지를 주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약속의 파기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신뢰를 저버리게 한다. 약속이 성립하려면 상대방의 말에 대한 신뢰가 밑받침되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상대방이 어떤 말을 내뱉으면, 그 말을 일단 믿는다(신뢰한다). 그래서 의사 전달이 되고 약속이 성립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을 내뱉을 때 누구도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으면, 그의 말은 말로서의 기능을 잃는다. 의사 전달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약속은 더더구나 성립될 수 없다.

    이처럼 신뢰는 언어를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알맹이다. 약속이라는 언어 행위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약속은 신뢰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규범은 일종의 약속이요, 약속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신뢰이다. 따라서 규범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약속이 아닐 수 없다. 신뢰가 없는 곳에 규범은 살아 움직일 수 없다.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규범이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규범이 살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신뢰가 없는 곳에 규범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신뢰는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는 핵심적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신뢰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가 마련된들 무엇하겠는가? 정치와 경제는 법과 제도에 의해 움직인다. 그런데 정치와 경제를 움직이는 법과 제도에 생명을 불어넣는 신뢰가 없다면, 어떻게 정치와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겠는가? 정치와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나라가 어떻게 수준 높은 일류 국가가 될 수 있겠는가?

    신뢰가 상실된 사회에서는 모든 법과 제도가 헛바퀴 돌게 마련이다. 겉모양만 그럴듯할 뿐이다. 따라서 아무리 번드르르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도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는다. 신뢰가 부재한 곳에서 법과 제도는 일종의 공수표에 불과하다. 부도가 예정된 고액의 수표와 같다.

    신뢰가 상실된 사회는 반칙 사회가 되고 만다. 반칙이 상례화되어 있는 사회가 반칙 사회이다. 규칙을 어기는 것이 정상적 행위로 간주되는 사회가 반칙 사회다. 이러한 반칙 사회에서는 법을 지키는 것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괘씸죄’는 이런 반칙 사회의 부산물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반칙을 하는 사회에서 어떤 특정인을 골라내 반칙을 했다고 벌을 줄 때, 벌받는 사람은 ‘왜 하필 나인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괘씸죄’의 희생자로 여긴다. 신뢰가 상실된 사회에선 많은 사람들이 법을 지키면 손해본다고 생각한다. 법을 어기는 것이 정상이요 주류요, 법을 지키는 것이 비정상이요 비주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론조사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법을 지키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괘씸죄’라는 죄명으로 벌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는 우리 사회가 매우 심각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방치한 채 ‘일류 국가’ 타령을 한다면 공염불이요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불과하다.

    감동의 정치로 신뢰의 씨앗 뿌려라

    경찰과 대치하는 시위대. 새 시대에는 열린 사고를 지향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줄여나가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땅에 신뢰 구조를 정착시킬 수 있을까? 한마디로 정치권의 혁명적인 결단과 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지도자 중의 지도자라고 해서 큰 대자(大)로 표현되는 대통령을 필두로 정치 집단이 신뢰 정착을 위한 혁명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가를 국민의 지도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이 다른 어떤 사회 집단에 대해서보다 깊다. 이래가지고서는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법을 만드는 집단이 앞장서서 법을 지키지 않는다든가, 그 집단이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일반 국민이 생각하고 있는 한 신뢰 구조의 정착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러한 불신과 반칙의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대혁신을 통한 새로운 출발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홍제천(弘濟川) 의식을 통한 대탕평책이라고 부르련다.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나”라는 의식이 보편화한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심판하여 법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겠는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으로 피심판자가 심판자에게 대드는 꼴이 되어서는 법의 심판을 통한 신뢰 구조 정착이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 아래서 가능한 선택이 바로 홍제천 의식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너나할것없이 더럽혀진 몸이니 모두가 홍제천에 들어가 몸을 씻으면 과거의 모든 반칙 행위들이 깨끗이 씻긴다는 상징적 절차를 만들자는 것이다.

    홍제천은, 말하자면 반칙자들에게 지난날 저지른 모든 반칙의 멍에로부터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새로운 출발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새로운 출발점을 마련한 후에야 비로소 법과 현실의 괴리를 없애는 엄정한 법 집행을 통하여 신뢰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지적해야 할 것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지킬 수 없는 법과 제도들은 모두 철폐해야 한다는 것이다. 겉치레 모양 갖추기로 만들어 놓은 법과 제도는 위선을 조장하고 신뢰 구조를 파괴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낡은 법과 제도를 재정비하고 지난날 반칙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진정한 새 출발점에 서게 하자. 이렇게 되면 제대로 된 나라, 더 나아가 일류 국가로 향하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대탕평은 진정한 사회 통합의 계기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법과 제도의 재정비안에는 정치관계 개혁법안이 포함되어야 한다. 부정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제도적으로 철저히 봉쇄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 다음 남은 문제는 엄격한 법 집행이다. 법과 제도라는 언어와 준법이라는 실천 사이의 괴리를 없애야 비로소 신뢰 사회를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대권을 휘두르며 국민에게 불호령하는 제왕의 자리로부터 내려와 국민에게 진정으로 봉사하는 대봉사자의 낮은 자리에 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감동 정치의 시작이다. 이러한 감동의 정치야말로 이 땅에 신뢰의 씨를 뿌리는 대변혁의 기관차에 시동을 걸어줄 것이다.

    그와 함께 보통 사람들, 즉 일반 시민들도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데 진지하게 노력해야 한다. 신뢰 형성의 첫 실마리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은 아무리 보잘것없더라도 남을 위한 봉사에서 키워나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은 자원봉사를 통해 우리는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낯모르는 이웃을 배려할 줄 알게 된다. 낯 모르는 이웃에 대한 배려 행위야말로 타인과의 신뢰를 형성하는 촉매가 아닐 수 없다.

    다른 것이 아름답다

    획일적 사고는 전통적 삶을 지배해온 전형적 사고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삶은 일정한 지세와 지형이라는 공간적 차단벽 안에서 영위되는 삶이다. 그 차단벽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우선 혈연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동일한 삶의 방식을 공유한다. 이것이 바로 획일적 사고의 모태이다. 지세와 지형의 차단벽 안에 형성된 의사소통 공동체가 바로 같음의 철학의 고향이다. 이러한 같음의 철학의 소유자들은 자신의 것과 다른 것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갖게 마련이다. 다른 것을 배격하고 거부하려 든다. 더 나아가 다른 것은 곧 나의 적이라고 간주하여 그것을 부정하고 없애버리려 한다.

    이러한 획일적인 사고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획일적 사고를 부양해 준 차단벽이 낮아지거나 없어짐으로써 다른 것과의 거래가 가능해지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소백산맥이라는 공간적 차단벽에 의해서 영남지역과 호남지역이 따로 떨어져 독자적인 삶의 공간을 형성하여 살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소백산맥이 그러한 차단벽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됨으로써 두 지역 사이에 거래가 시작되었을 때, 획일적 사고는 두 의사소통 공동체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주범이 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우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국경이라는 차단벽은 본질적으로 커다란 차이(다름)를 형성하는 원인이 되어왔다. 국가 간의 갈등은 바로 민족공동체라는 보다 큰 의사소통 공동체 사이에 나타나는 다름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 한국은 이른바 영호남 간의 지역 갈등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다. 정치의 핵심적 기능의 하나가 바로 사회 통합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는 지역 갈등이라는 중병에서 헤어나지 못함으로써 불구의 몸으로 허우적거리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 동안 한국 정치는 지역 갈등이라는 정치의 역기능을 자양분으로 삼아 연명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가 새 문명의 중심에 자리잡은 일류 국가가 되기 위해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정치적 장애물이 바로 지역 갈등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뿐만 아니라 전인류가 지구를 하나의 공동 생활권으로 삼는 지구촌 시대에 우리나라가 새 문명의 중심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문화 사이의 차이(다름)를 갈등이 아니라 상호 보완과 상생(相生)이라는 맞물림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고의 대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동양의 음양사상에서 이러한 맞물림의 사고의 씨앗을 찾을 수 있다. 음(陰)과 양(陽)은 서로 다르다. 그런데 음은 양을 전제해서만 존재한다. 양이 없으면 음도 없다. 따라서 양은 음을 존재하게 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양은 음의 존재를 전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음은 양을 존재하게 하는 근거다. 이렇게 음과 양은 서로 존재하게 하는, 즉 서로 살려주는(相生) 관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음과 양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음과 양은 서로 자신이 못 가진 것, 즉 부족한 것을 서로 보태줌[相補]으로써 차원 높은 한 살림을 꾸려나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다름’인가? 여기서 ‘다름’은 반대와 갈등, 더 나아가 모순과 투쟁과 공멸의 씨앗이 아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다름을 반대와 모순의 씨앗으로 투쟁과 공멸로 치닫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리가 새로운 문명의 중심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획일적인 닫힌 사고로부터 맞물림의 관계에 있는 다름의 열린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획일적 닫힌 사고는 자기와 다른 것을 배격하여 없애버리고자 한다. 그러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열린 사고는 자기와 다른 것이 나를 살리고 나를 보태줌으로써 더불어 잘사는 나의 분신이라고 파악한다. 우리가 획일적인 일차원적 사고로부터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다차원적 사고로 전환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모두가 더불어 잘사는 살맛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나는 너에게 신세를 지고 살고 있으며 너는 나에게 신세를 지고 살고 있다는 평범한 일상의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동양의 불교는 그런 깨달음을 인연(因緣)이라고 표현한다. 21세기를 살아갈 큰 지혜를 우리는 동양의 지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한국 땅에서는 한편에서는 “일렬종대 앞으로 나란히”라는 획일적 ‘자유경쟁 만능주의’가 기승을 부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일렬횡대 옆으로 나란히”라는 획일적 ‘평등 만능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획일주의는 그것이 자유의 편이든 평등의 편이든 모두 닫힌 사고의 포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다양성에 대해 눈감아 버린다. 삶의 다양성을 외면하는 사고는 인간의 삶을 옥죄고 구부러지게 만듦으로써 결국 인간을 병들게 할 것이다.

    자유의 이름으로 불리한 여건에 놓인 이웃을 못 본 체하는 것은 엘리트 획일적 사고이며, 평등의 이름으로 잘 뛰는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은 포퓰리스트 획일적 사고이다. 이러한 획일적 사고는 자유와 평등을 배타적인 관계에 놓이게 한다. 자유와 평등의 원리가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는 사고로는 모두가 더불어 잘사는 신나는 세상을 만들기 어렵다. 한 쪽에서는 불우한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다른 쪽에서는 잘 뛰는 사람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잘사는 살맛 나는 세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자유와 평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그것은 다른 것을 상보와 상생이라는 맞물림의 관계에서 보는 새로운 사고의 지평에서 자유와 평등을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유를 양으로, 평등을 음으로 파악함으로써 자유와 평등을 상보와 상생의 관계로 재정립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새로운 문명의 중심에 선 일류 국가를 만들려면 우리나라 내부의 다름(차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의 다름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고로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사고가 현실화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한 사회 안에서의 정의인 사회 정의(social justice)와 지구촌 안에서의 정의인 지구촌 정의(global justice)가 동시에 실현되는 살맛 나는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경직된 변방 의식으로부터 창조적인 중심 의식으로

    21세기 새로운 문명은 사고의 대전환을 요청한다. 21세기 새 문명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는 지난 세기의 발상법과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지난 세기 우리는 산업문명의 변방에서 서성거리며 중심부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신경을 곤두세워가며, 그것을 암송하고 베끼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 우리가 새 문명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는 지난 세기의 변방 의식을 떨쳐버리고 중심 의식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중심 의식을 가진 자는 남의 눈치나 보며 뒤꽁무니를 쫓아다니지 않는다. 역사의 대세를 읽고 거기에 알맞은 처방을 마련하여 그것을 실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때의 과녁을 맞추는 시중(時中)의 통찰력과 강인한 기백과 끈질긴 집행력을 가질 수 있을 때, 우리는 새 문명의 중심에 선 살맛 나는 세상의 시민이 될 수 있다. 살맛 나는 세상에 대한 꿈을 그리며, 새 정부의 대봉사자와 그의 동지들에게 큰 박수와 함께 조심스러운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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