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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 시론

감동의 정치로 신뢰의 씨앗 뿌려라

  • 글: 이명현 서울대 교수·철학

감동의 정치로 신뢰의 씨앗 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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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정치로 신뢰의 씨앗 뿌려라

경찰과 대치하는 시위대. 새 시대에는 열린 사고를 지향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줄여나가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땅에 신뢰 구조를 정착시킬 수 있을까? 한마디로 정치권의 혁명적인 결단과 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지도자 중의 지도자라고 해서 큰 대자(大)로 표현되는 대통령을 필두로 정치 집단이 신뢰 정착을 위한 혁명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가를 국민의 지도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이 다른 어떤 사회 집단에 대해서보다 깊다. 이래가지고서는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법을 만드는 집단이 앞장서서 법을 지키지 않는다든가, 그 집단이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일반 국민이 생각하고 있는 한 신뢰 구조의 정착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러한 불신과 반칙의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대혁신을 통한 새로운 출발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홍제천(弘濟川) 의식을 통한 대탕평책이라고 부르련다.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나”라는 의식이 보편화한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심판하여 법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겠는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으로 피심판자가 심판자에게 대드는 꼴이 되어서는 법의 심판을 통한 신뢰 구조 정착이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 아래서 가능한 선택이 바로 홍제천 의식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너나할것없이 더럽혀진 몸이니 모두가 홍제천에 들어가 몸을 씻으면 과거의 모든 반칙 행위들이 깨끗이 씻긴다는 상징적 절차를 만들자는 것이다.

홍제천은, 말하자면 반칙자들에게 지난날 저지른 모든 반칙의 멍에로부터 벗어나게 해줌으로써 새로운 출발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새로운 출발점을 마련한 후에야 비로소 법과 현실의 괴리를 없애는 엄정한 법 집행을 통하여 신뢰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지적해야 할 것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지킬 수 없는 법과 제도들은 모두 철폐해야 한다는 것이다. 겉치레 모양 갖추기로 만들어 놓은 법과 제도는 위선을 조장하고 신뢰 구조를 파괴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낡은 법과 제도를 재정비하고 지난날 반칙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진정한 새 출발점에 서게 하자. 이렇게 되면 제대로 된 나라, 더 나아가 일류 국가로 향하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대탕평은 진정한 사회 통합의 계기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법과 제도의 재정비안에는 정치관계 개혁법안이 포함되어야 한다. 부정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제도적으로 철저히 봉쇄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 다음 남은 문제는 엄격한 법 집행이다. 법과 제도라는 언어와 준법이라는 실천 사이의 괴리를 없애야 비로소 신뢰 사회를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대권을 휘두르며 국민에게 불호령하는 제왕의 자리로부터 내려와 국민에게 진정으로 봉사하는 대봉사자의 낮은 자리에 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감동 정치의 시작이다. 이러한 감동의 정치야말로 이 땅에 신뢰의 씨를 뿌리는 대변혁의 기관차에 시동을 걸어줄 것이다.

그와 함께 보통 사람들, 즉 일반 시민들도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데 진지하게 노력해야 한다. 신뢰 형성의 첫 실마리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은 아무리 보잘것없더라도 남을 위한 봉사에서 키워나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은 자원봉사를 통해 우리는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낯모르는 이웃을 배려할 줄 알게 된다. 낯 모르는 이웃에 대한 배려 행위야말로 타인과의 신뢰를 형성하는 촉매가 아닐 수 없다.

다른 것이 아름답다

획일적 사고는 전통적 삶을 지배해온 전형적 사고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삶은 일정한 지세와 지형이라는 공간적 차단벽 안에서 영위되는 삶이다. 그 차단벽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우선 혈연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동일한 삶의 방식을 공유한다. 이것이 바로 획일적 사고의 모태이다. 지세와 지형의 차단벽 안에 형성된 의사소통 공동체가 바로 같음의 철학의 고향이다. 이러한 같음의 철학의 소유자들은 자신의 것과 다른 것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갖게 마련이다. 다른 것을 배격하고 거부하려 든다. 더 나아가 다른 것은 곧 나의 적이라고 간주하여 그것을 부정하고 없애버리려 한다.

이러한 획일적인 사고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획일적 사고를 부양해 준 차단벽이 낮아지거나 없어짐으로써 다른 것과의 거래가 가능해지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소백산맥이라는 공간적 차단벽에 의해서 영남지역과 호남지역이 따로 떨어져 독자적인 삶의 공간을 형성하여 살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소백산맥이 그러한 차단벽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됨으로써 두 지역 사이에 거래가 시작되었을 때, 획일적 사고는 두 의사소통 공동체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주범이 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우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국경이라는 차단벽은 본질적으로 커다란 차이(다름)를 형성하는 원인이 되어왔다. 국가 간의 갈등은 바로 민족공동체라는 보다 큰 의사소통 공동체 사이에 나타나는 다름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 한국은 이른바 영호남 간의 지역 갈등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다. 정치의 핵심적 기능의 하나가 바로 사회 통합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는 지역 갈등이라는 중병에서 헤어나지 못함으로써 불구의 몸으로 허우적거리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 동안 한국 정치는 지역 갈등이라는 정치의 역기능을 자양분으로 삼아 연명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가 새 문명의 중심에 자리잡은 일류 국가가 되기 위해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정치적 장애물이 바로 지역 갈등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뿐만 아니라 전인류가 지구를 하나의 공동 생활권으로 삼는 지구촌 시대에 우리나라가 새 문명의 중심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문화 사이의 차이(다름)를 갈등이 아니라 상호 보완과 상생(相生)이라는 맞물림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고의 대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동양의 음양사상에서 이러한 맞물림의 사고의 씨앗을 찾을 수 있다. 음(陰)과 양(陽)은 서로 다르다. 그런데 음은 양을 전제해서만 존재한다. 양이 없으면 음도 없다. 따라서 양은 음을 존재하게 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양은 음의 존재를 전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음은 양을 존재하게 하는 근거다. 이렇게 음과 양은 서로 존재하게 하는, 즉 서로 살려주는(相生) 관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음과 양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음과 양은 서로 자신이 못 가진 것, 즉 부족한 것을 서로 보태줌[相補]으로써 차원 높은 한 살림을 꾸려나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다름’인가? 여기서 ‘다름’은 반대와 갈등, 더 나아가 모순과 투쟁과 공멸의 씨앗이 아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다름을 반대와 모순의 씨앗으로 투쟁과 공멸로 치닫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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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명현 서울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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