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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한미동맹 50주년, 흔들리는 한미 관계

‘혈맹’에서 촛불시위 ‘타깃’으로

주한미군의 어제와 오늘

  • 글: 동아일보 hoon@donga.com

‘혈맹’에서 촛불시위 ‘타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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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없었다면 8군은 한국으로 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북한군의 공격은 한반도를 극동군 관할 구역으로 여겼던 철저한 ‘반공주의자’ 맥아더를 흥분시켰다. 당시 극동군은 육해공군 세력으로 8군·7함대·5공군을 갖고 있었는데, 맥아더는 기동성이 좋은 7함대와 5공군에 대해 6월26일 북한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한국전 상황을 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수원을 방문하고 돌아온 6월29일 미 합참에게 지상군 참전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음날 미 합참이 이를 승인하자 그는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24사단의 한 개 대대를 차출해 항공편으로 한국전장에 투입했다. 스미스 특수임무대로 불린 이 부대는 오산 전투에서 인민군 4사단에게 참패했다. 이어 24사단을 한국에 보냈는데, 24사단도 7월21일 대전 전투에서 참패하고 얼마 후 사단장인 딘 소장이 인민군에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이렇게 미군이 연패하자 맥아더는 8군사령관인 월턴 워커 중장을 주한미군사령관에 임명하고 7사단을 제외한 모든 지상군 부대에게 한국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7월7일 미국의 영향권에 있던 UN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군 설치를 의결하며 그 임무를 미국 합참에 위임했다. 미 합참은 이를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다시 위임함으로써, 맥아더는 미국 극동군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을 겸하게 되었다. 유엔군 설치를 의결한 7월7일 주한미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대구에 8군 임시본부를 만들어 추가로 한국에 올 미 지상군 부대를 총괄 지휘하게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한국 육군은 8개 사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개전 3일 만에 3개 사단이 형체도 없이 무너졌다. 한국군의 지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인민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8군사령부가 대구로 옮겨온 다음날인 7월14일 맥아더에게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UN군에게 이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로써 맥아더는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차후에 유엔군이란 이름으로 한국에 온 15개국(미군 제외) 군대를 통합 지휘하게 되었다.

7월14일 이대통령이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는, 1978년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될 때까지 효력을 발휘해, 한국의 육해공군은 미 8군의 작전통제를 받게 되었다.



7사단을 제외한 모든 지상군 부대를 한국으로 이동시킨 맥아더는 소련군의 일본 침략을 염려했다. 그런데 7사단마저도 9월15일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한국으로 이동시킬 수밖에 없게 되자, 맥아더는 구 일본군 세력으로 하여금 자위대를 만들어 일본 방어를 담당케 했다. 평화헌법에 따라 군대 보유를 금지 당한 일본은 갑자기 터진 한국전쟁 덕분에 재무장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참담한 패주로 발목 잡힌 미군

이승만 대통령의 작전권 이양에 대해서는 ‘자주권을 포기한 작태’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세계사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나라가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강국에 작전권을 넘겨 대신 싸우게 한 경우가 많다.

1999년 유고가 알바니아계인 코소보에 대해 공격을 강화하자, 위기감을 느낀 알바니아는 NATO에 작전권을 넘기는 방법으로 생존을 모색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공격을 막아낼 방법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던 영국은, 1941년 8월14일 대서양에 있던 영국 구축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함에서 미-영 정상회담을 갖고, 미군이 연합군 최고사령관을 맡는 조건으로 미군 참전을 끌어낸 바 있다.

1950년 12월 압록-두만강까지 진격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일패도지(一敗塗地)해 평양-서울을 내주고 한 순간에 안성-장호원 전선까지 후퇴했다(1·4후퇴). 두만강 부근부터 따진다면 직선 거리로 1000여㎞를 패주한 셈이다. 신생 한국군에게는 이러한 패배가 별것 아닐 수 있어도, 세계 최강을 자부해 온 미군에게는 엄청난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미 육군은 17세기에는 인디언과의 전쟁을 통해, 18세기에는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통해, 19세기에는 남북전쟁을 통해 발전해 왔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모두 이긴 기록을 갖고 있다. 미 육군 역사상 1000여㎞를 패주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은 3만6914명인데, 이중 상당수가 1·4후퇴 때 발생했다. 1·4후퇴로 인해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은 워커 8군사령관과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이었다. 패주 와중인 1950년 12월28일, 워커 8군사령관은 의정부에서 지프 전복사고로 사망했다. 중공군의 참전에 흥분해 만주 핵폭격을 주장하던 맥아더 원수는 1951년 4월11일 극동군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맥아더는 미국 의회가 종신(終身)토록 원수 계급장을 달 수 있도록 승인한 장성인데 목이 날아간 것이다.

이 패주로 인해 미국은 ‘명분론’과 ‘모성론’이 정면으로 대립하는 위기를 맞았다. 명분론자들은 “미군은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군대니 이길 때까지 한반도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미국은 전쟁 불똥이 일본으로 튀는 것을 막기 위해 ‘예방적 차원’에서 가볍게 6·25전쟁에 개입했다. 그런데 1·4후퇴로 세계 최강의 체면을 구기게 됐으니 끝까지 싸우자는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명분론이 득세하면 일본을 지키기 위한 방패 정도로 인식됐던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크게 올라간다.

러시아는 현재 러시아연방에서 독립하려는 체첸의 의지를 꺾기 위해 체첸에 대규모 부대를 보내 놓고 있다. 그런데 체첸 전선에서 희생되는 젊은이가 늘어나자, 체첸 전선에 아들을 보낸 러시아의 어머니들이 ‘반전 데모’를 벌이고 있다. 자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전쟁인데도, 한쪽에서는 인간애에 근거해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1951년 1·4후퇴 이후의 미국에서도 “전쟁을 끝내라”는 모성론이 점점 커졌다.

아들을 희생하더라도 체면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론’과 체면은 포기해도 아들은 포기할 수 없다는 ‘모성론’의 대립으로 미국은 시끄러워졌다.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1952년 치러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는 ‘한국전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운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외견상으로는 모성론이 승리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내치(內治)에는 등신이고 외치에는 귀신’이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국제정세를 보는 데는 그만큼 뛰어난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전쟁 종식이 공식화되자 ‘외치의 귀신’은 기막힌 벼랑끝 전술을 들고 나왔다. “한국군 20개 사단을 현대화해주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야만 전쟁을 끝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유엔군에게 넘겨준 한국군 작전권을 환수해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함으로써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전회담을 무력화하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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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동아일보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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