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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 스타 열전 ⑤

“남자는 내 음악의 중요한 화두”

시들지 않는 ‘트로트 아티스트’ 심수봉

  • 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www.izm.co.kr

“남자는 내 음악의 중요한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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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내 음악의 중요한 화두”

1979년 12월 10·26사건 관련 군사재판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하고 있는 심수봉(왼쪽 모자쓴 이)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무슨 이유로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는지 궁금합니다. 록과 포크 같은 젊은 음악 일색이었으니, 그 사이에 끼어 예선이나 본선 무대에 오를 때 창피하거나 멋쩍지는 않던가요.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 그 시절 오로지 트로트만이 가요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가요’라는 말은 ‘트로트’와 동의어였어요. 다른 장르는 다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트로트는 원래부터 있던 것이다, 그런 의미였죠. 당시 다른 출전자들도 절 이상하게 대하거나 특이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저에게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이미 오랫동안 노래를 해왔고 음반취입과정도 거쳤다는, 다른 친구들이 아마추어라면 나는 프로라는 자신감이었습니다. 그때 TV를 보셨다면 제 얼굴에서 그런 걸 느꼈을 텐데요(웃음).”

-대학가요제 전에 이미 음반작업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럼요. 한참 전인 1970년대 중반부터 명동에 있던 도쿄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아르바이트로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 ‘물레방아 도는데’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나훈아씨가 손님으로 온 적이 있었어요. 제 노래를 귀담아 들은 나훈아씨가 레코드사에 ‘가수 할 사람 놔두고 뭐하냐?’며 절 음반사 사장들에게 소개해 주었지요. 피아노 한 대 값을 계약금으로 받았습니다. 나훈아씨와 듀엣으로 부른 ‘여자이니까’를 그 때 녹음한 거예요. 그렇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음반이 흐지부지돼버렸죠.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음반을 내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싶더군요.

그래서 대학가요제에 나가기로 마음 먹었어요. 본선에만 가면 대학가요제 음반이 나오니까요. 그 음반에 낄 욕심으로 출전을 감행했던 겁니다. 비록 상을 타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나중에 지구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게 됐어요. ‘건질 것은 심수봉밖에 없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계약금으로 200만원을 받았는데, 당시로는 꽤 큰 액수였어요.”



1979년 정식 음반을 낸 심수봉은 그해 6월 ‘그때 그 사람’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 그토록 고대했던 스타덤 행진에 들어선다. 그러나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그날 궁정동 회식에 참석했던 심수봉의 앞길 또한 흔들렸다. 수 차례에 걸친 보안사에서의 취조와 군사재판을 거치면서 막 점화된 가수활동은 이내 불길이 꺼져버렸다.

1981년 새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10·26사태와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방송출연 금지조치라는 수난을 당했다. 1983년에 쓴 드라마 주제곡 ‘순자의 가을’은 하필 영부인과 이름이 같은 탓에 제목이 바뀌기도 했다. 한참 후에 방미가 다시 불러 히트한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가 바로 그 곡이다. 당시 한 남자 가수는 ‘순자야, 문 열어라’라는 제목의 곡을 내놓았다가 자취 없이 사라진 일도 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10·26? 훌훌 털어버렸다”

심수봉에게는 당시 정치상황의 ‘피해자’, 혹은 ‘희생자’라는 이미지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10·26사건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했다지만, 막상 대놓고 물어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심수봉은 한치의 부담이나 괴로운 표정 없이 담담하게 웃으며 그때를 회상했다. 공연히 걱정한 필자가 오히려 겸연쩍을 정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것은 궁정동에서 처음이었습니까? 노래에 대해서 뭔가 말을 건넸을 법도 한데 어떤 얘기를 들으셨나요?

“아닙니다. 세 번째였어요. 첫 번째는 한남동 고급 비밀요정에서였죠. 연주를 하게 된 한 클라리넷 주자가 ‘높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인데, 피아노 반주가 꼭 있어야 한다’고 사정사정하길래 따라갔어요. 거기서 우연히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보게 됐습니다. 두 번째는 국무총리 관저 증축 기념 연회였을 거예요. 저말고도 연예인 여러 명이 버스를 빌려 타고 갔지요. 박대통령이 저에게 직접 건넨 말은 ‘자네 노래를 들으니 눈물이 나더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상 외로 자상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짓궂은 질문입니다만 당시 궁정동 사건을 두고 세간에 퍼져 있던 소문을 혹시 알고 있습니까?

당시 사람들 사이에는 ‘심수봉이 촌스럽고 못나서 회식 때 병풍 뒤에서 얼굴을 가린 채 노래만 했다’는 내용의 소문이 돌았다. 그게 사실이었는지 궁금해 이야기를 꺼냈더니 채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답이 나왔다.

“병풍 얘기요? 어떻게 그런 소문이 날 수 있는 건가요? (여유 있게 미소지으며) 그런 못된 루머를 만든 사람은 벌받아야 합니다. 어쨌든 그때야 정말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이야 뭐….”

10·26사건은 심수봉 본인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그에게 신비로운 이미지를 심어주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정치적 사건과 관련되면서 평범한 가수 이상의 중량감이 그에게 쌓인 것이다. 과연 그는 이 점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당시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홀가분해 보입니다. 전혀 후유증이나 부담이 없는 듯한데, 지금은 그 사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몇 년 전 책에서 그와 관련된 부분을 털어놓았더니 방송계 한 어른이 저더러 ‘그런 얘기를 다하면 신비감이 없어진다’면서 무게를 잃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렇지만 솔직히 빨리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 사건은 저를 짓누른 무시무시한 짐이었습니다. 훌훌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여기저기 털어놓아야 했어요. 대중이 그 일 때문에 느끼는 신비감이 있다면 그 또한 벗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그 날에 대해 묘사한 글 가운데도 현장을 목격한 제가 볼 때는 잘못 알려진 게 많아 답답했어요. 가려지는 것도, 사람들이 곡해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제가 홀가분해 보인다면 그 과정을 거쳤기 때문일 겁니다.”

-역으로 그 사건이 다른 가수에게 찾아볼 수 없는 묘한 힘을 본인에게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바가 저를 더 부담스럽게 했습니다. 가수는 음악으로 평가받아야지, 누구에게 또는 어떤 사건에 기대어 이름을 높이는 것은 부당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런 시각이 존재한다면 저로서는 억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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