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우주의 원리, 인간의 도리

인간의 근원, 학문의 근본

  • 글: 최재목 영남대 교수·철학

    입력2003-01-22 13: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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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한국의 대학입시에서 ‘국·영·수’ 과목이 필수이듯,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고시(과거)에 대비해 사서(四書)에 주석을 단 주희(1130∼1200)의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암기하는 것이 필수였다.

    흔히 사서(四書)라 하면 오경(五經)이 떠오른다. 그 둘을 결합한 사서오경이란 말도 그리 낯설지 않다. 그만큼 우리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귀에 익어 친숙해진 경전이다. 그렇게 동아시아 전통사회를 지탱한 지식체계의 원천인 사서오경은 오늘날에도 대학 강단이나 언론매체, 향교 등을 통해 꾸준히 읽혀지며 음미되고 있다.

    싫든 좋든 유교는 동아시아의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유교 이론의 원천이 바로 사서오경이다. 그 속에는 중국인, 나아가 고전을 통해 생활의 지혜와 인생, 자연과 사물을 음미하고 성찰했던 동아시아인들의 사유양식, 철학·종교에 관한 지식 및 정보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삶을 전통과 관련지어 성찰·반성할 때 유교를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다.

    특히 근현대와 연접한 근세사회 지식인의 교양 필수과목으로 추앙받은 사서는 오경과 달리 한 세트로 구성된 네 권의 책이 하나의 완결된 유교 지식체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합리적인 사색과 논리의 틀은 그만큼 유교를 용이하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전통적 가치’의 재해석과 평가가 계속되는 한, 동아시아 사회의 항상된 길(normal way)을 지탱해온 사서의 생명력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사서의 핵심내용이 무엇인지를 간략히 살펴보겠다. 좀더 빠른 이해를 위해 약간의 서지학적 지식도 곁들였음을 밝힌다.



    사서의 성립과 읽는 순서

    사서는 유학 측에서 확정한 네 권의 주요한 책(경전)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말한다. 그 성립과 관련한 네 선생(四子)을 표면에 내세워서 사자서(四子書)라고도 한다. 혹은 ‘대학’ ‘중용’을 합쳐서 ‘학용(學庸)’으로, ‘논어’ ‘맹자’를 합쳐 ‘논맹(論孟)’으로 부르기도 한다.

    ‘논어’ ‘맹자’는 애당초 단행본으로 전해졌다. 그것은 공자와 맹자가 중국사상사에서 갖는 독자적 위치 때문이기도 하다. ‘논어’는 한당대(漢唐代) 이래 이미 중시되어 왔다. ‘시(詩)’·‘서(書)’·‘예(禮)’·‘역(易)’·‘춘추(春秋)’의 오경에 ‘논어’를 추가한 뒤, 다시 한당대를 거치면서 다른 경전들을 보탬에 따라 칠경, 구경, 십경, 십일경, 십이경 등이 성립됐다. 송대에 이르러 이 십이경에 ‘맹자’를 추가함으로써 비로소 십삼경이 완성됐다.

    참고로 십삼경은 ①역(易)·②서(書)·③시(詩)에다 삼례(三禮)(④예기(禮記)·⑤주례(周禮)·⑥의례(儀禮))와 춘추삼전(春秋三傳)(⑦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⑧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⑨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각각 합한 이른바 구경에, ⑩논어·⑪효경(孝經)·⑫맹자·⑬이아(爾雅)를 추가한 것이다.

    이어 ‘대학’과 ‘중용’을 살펴보자. 애초 ‘대학’은 ‘예기(禮記)’의 제42편에, ‘중용’은 그 제31편에 속해 있었다. 책 속의 한 편명에 불과하던 것이 각각 주요 경서로 독립하게 된 것이다. 가족의 일원이었다가 분가한 것과 같다.

    ‘중용’은 한대부터 이미 중시되어 왔다. 당나라 중엽의 인물로 송대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 운동의 중요 단서를 마련한 한유(768∼824)는 ‘원도(原道)’를 지어 도통설(道統說)을 주장하면서 ‘맹자’와 ‘대학’을 중시했다. 또 그 제자인 이고(772∼841)는 ‘복성서(復性書)’를 지어 ‘중용’을 중시했다. 한유가 중시한 ‘대학’은 북송시대 사마광(1019∼86)의 ‘중용대학광의(中庸大學廣義)’ 1권 이후 ‘중용’과 함께 별도로 칭해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마침내 ‘예기’에서 분리된 것이다.

    북송시대 하남지방의 이정형제(二程兄弟), 즉 정호(1032∼85)와 정이(1033∼1107)는 ‘대학’과 ‘중용’을 ‘논어’, ‘맹자’와 더불어 오경에 앞서 읽어야 할 유학의 기본 경전으로 인정했는데 이로서 사서가 확립된다.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의 사서가 비로소 이론적으로 연결되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우주의 원리, 인간의 도리

    [표] 13경과 사서



    그런데, 정이는 네 권의 책을 사서로 묶었을 뿐 거기 주석을 달지는 않았다. 하나로 연계된 사서에 처음으로 주석을 단 사람이 주희다. 중국사상사에서뿐 아니라 동아시아 사상사에 빛을 발한 그 유명한 ‘사서집주’는 그렇게 성립하였다. 집주(集註) 혹은 집해(集解)란 선인(先人)의 제주(諸註)를 취사선택하여 또 하나의 주석을 만든 것이다. 그것은 이미 고전 그대로가 아니다. 기존의 주(註), 즉 해석들을 자신의 주관과 이미지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가공의 고전(古典) 세계가 만들어지며, 그를 통해 주석자의 사상과 세계관이 윤곽을 드러낸다.

    주희는 기존에 전해 오던 ‘대학’과 ‘중용’의 체제 및 내용에 대대적인 개편 작업을 벌인다. 자기 생각대로 본문에 해당하는 ‘경(經)’과 그 해설부분에 해당하는 ‘전(傳)’을 판별하고 장(章)과 구절(句節)을 나눈 것이다. 이것이 ‘사서집주’ 중 ‘대학장구(大學章句)’와 ‘중용장구(中庸章句)’다. 두 책은 지금 전해지고 있는 ‘대학’과 ‘중용’의 기본체제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명대의 왕수인(호는 양명(陽明)·1472∼1528)은 이 새롭게 성립한 주희의 ‘대학’(이것을 ‘신본대학(新本大學)’이라 부름)에 대해 ‘예기’ 속의 옛날 ‘대학’(이것을 ‘구본대학(舊本大學)’이라 부름) 그대로가 옳다는 신선한 비판을 제기한 바 있다.

    어쨌든 주희는 오경(五經)이 아닌 사서(四書)를 채택해 체계적으로 주석을 덧붙이는 한편,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매우 중요한 작업을 했다. 그는 이러한 주석작업을 통해 송학의 궁극적 성격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그것은 당시 유행하던 불교와 도교의 사상적 논리에 대항해 새로운 유교 체계(=신유학)로서의 성리학(性理學)을 세우는 역사적 작업이기도 했다. 원(元)대 이래 명(明)·청(淸)대에 걸쳐서 과거시험이 주로 사서에서 출제되면서 그 권위와 학습 열기는 오경을 능가하게 되었다.

    주희는 사서를 ‘대학’→‘논어’→‘맹자’→‘중용’의 순서로 읽을 것을 주장했다. 그러면, 그는 왜 ‘대학’을 처음에 두었을까?

    ‘대학’에는 학문의 총괄로서의 삼강령(三綱領)과 그 분석인 팔조목(八條目)이 나온다. 그래서 그는 ‘대학’을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교의 이상, 즉 공자의 가르침의 골격(규모)을 깨우치는 ‘초보자가 덕성함양에 들어가는 문(初學入德之門)’으로 간주한 것이다. 주희는 사서 가운데서도 ‘대학’을 가장 중시했고, ‘대학’ 가운데서도 격물(格物) 두 자를 중시했다. 이것은 정이의 사상적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대학’ 다음에 ‘논어’를 둔 것은 공자와 그 제자들이 유교의 이상인 ‘대학’의 도를 어떻게 실천했나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맹자’가 세번째가 된 것은, 맹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이론화·철학화해 심오한 경지로 끌어올렸으며, 또한 송대 신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교의 심성론(心性論)에 대항할만한 인간 마음에 대한 이론적 논거를 제시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맹자’에서는 인간의 본성문제를 다루며 성선론(性善論)을 전개한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불성론(佛性論)에 대응할만한 주요 논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더욱이 ‘맹자’에는 위아주의자(爲我主義者·극단적 이기주의자)인 양주와 겸애주의자(兼愛主義者·박애주의자)인 묵적과 같은 이단의 사설(邪說)을 비판·배척하고, 별애(別愛·차등적/원근법적 사랑)를 주장하는 등 유가적 논조가 담겨 있어 도통(道統) 확립에 지대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중용’을 둔 것은 성(性) 도(道) 교(敎)의 관계를 천명(天命)과 결합시켜 설명하고 있어, 유학의 최종 결론격인 천인합일지도(天人合一之道·우주와 인간 합일의 원리)를 이해하기 쉬우며, 하늘의 운행 원리를 언표한 형이상적 개념인 성(誠) 등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용’은 인간과 사물의 근저에 있는 추상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기에, 다른 경전을 먼저 읽고 이것을 맨 마지막에 읽어야 마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학’이 인간과 사물을 정면에서 바라보도록 한 것이라면, ‘중용’은 그 이면을 성찰토록 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먼저 ‘대학’을 통해 ‘학문의 규모를 정하고 뜻을 정립하며’ 다음으로 ‘논어’를 배워 ‘학문하는 근본을 세우고’ ‘맹자’를 읽어 ‘학문의 발전과 의리를 분별하는 법을 배우며’ ‘중용’을 통해 ‘우주의 원리를 터득한다’는 것이 주희의 ‘사서 읽기 철학’이다. 주희가 확립한 사서 독해의 순서는 이후 일반화되었다. 사서를 읽을 경우, 특별한 생각과 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면 주희의 방법을 따르는 것도 괜찮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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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세계유교 문화축제’에 참가한 유림이 행진을 하고 있다

    ‘대학’은 유학의 학문적 목적과 정치의 근본을 밝힌 책이다. 이미 언급했듯 ‘대학’이 ‘예기’에서 처음으로 분리된 것은 북송의 사마광이 ‘대학광의’를 지은 이후부터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학’의 기본체제는 주희가 ‘대학장구’를 만들고 나서 보편화한 것이다.

    ‘대학’의 명칭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주희의 ‘대학장구’ 서(序)에 근거해, 중국 고대의 교육제도상 ‘소학(小學)’과 ‘대학’이 있었다는 설이다. 둘째, 당나라 초 공영달(574∼648)의 말에 의거해, 소인(小人)에 대립되는 군자 혹은 위정자의 의미인 이른바 대인(大人)의 학문이라는 설이다.

    ‘대학’의 저자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는데, 전통적으로 ‘대학’은 ‘중용’과 더불어 공자의 손자인 자사(BC 483?∼402?)가 지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공리(공자의 아들)의 아들인 자사의 이름은 급(伋)이며, 자사는 그의 자(字)다. 자사 공급(孔伋)은 생애 동안 주로 고향인 노나라에 살면서 증자(曾子)의 학문을 배워 유학의 전승에 힘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맹자는 자사의 제자의 제자다. 도통(道統)을 중시하는 송학(宋學)에서는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유학의 맥락을 중시해 이 관점을 보편화하기에 이른다. 이후 청대(淸代) 고증학자들의 실증적 연구에 의해 ‘대학’이 자사의 저작이라는 전통적 학설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대학’이 유가 계열 학자의 저작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주희는 ‘대학’의 내용을 본문인 경(經) 1장과 그 해설인 전(傳) 10장으로 구성했다. 경 1장은 ‘대학’의 기본 사상인 삼강령과 팔조목에 대해 서술한 것이고, 전 10장은 그에 대한 세부적인 해석을 덧붙인 것이다. 주희는 그 중 전 5장의 격물(格物)·치지(致知) 부분에 대해 원문이 없어진 것으로 단정하고 그 내용을 스스로 만들어 보충하기까지 했다. 이를 ‘격물보전장(格物補傳章)’ 또는 ‘보망장(補亡章)’이라 한다. 이것은 134자의 짧은 문장이나 주희의 격물치지와 관련한 학문세계가 압축되어 있는 것으로 그의 철학사상을 연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강령’이란 모든 이론의 으뜸이 되는 큰 줄거리(총괄)를 말한다. 즉 ①명명덕(明明德·태어날 때부터 지닌 밝은 덕을 밝힘) ②친민(親民·백성을 친애함) ③지어지선(至於至善·지극한 선의 상태에 머뭄)이 그것이다. 다만 친민의 경우, 주희는 이를 신민(新民·백성을 새롭게 함)으로 해석하였는데, 주자학이 성행했던 한국에서는 주로 이 해석에 따랐다. 주희가 친민의 ‘친’을 ‘신’으로 고쳐 읽는데 대해 왕수인은 옳지 않다고 보고, 원래의 친민 그대로 읽을 것을 주장하였다.

    명명덕에서 알 수 있듯 ‘대학’의 근저에는 인간을 선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긍정하는 이른바 성선설이 깔려 있다. 인간은 본래, 어둡고 타락한 존재가 아니라 무한히 밝고 선량한 자기완성이 가능한 존재라는 시각이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그 내면에 천당 혹은 극락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천당과 극락을 내면적 차원(=명명덕)에서 그치게 하지 말고 외부 사회에서도 실현하자(=친민)는 것이 핵심이다.

    지선의 세계는 이렇게 내외합일(內外合一)에 의해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대학’은 성선론에 입각한 덕치주의의 개론서라 평가해도 하자가 없을 것이다. 중국 근대 정치가인 손문(1866∼1925)이 ‘대학’을 ‘외국의 대정치가들도 꿰뚫어보지 못하고 설명하지 못한 가장 체계적인 정치철학’이 담긴 중국의 명저로 간주한 것도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일리가 있다.

    팔조목은 삼강령의 구체적 분석, 즉 삼강령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①격물(格物·사물의 이치에 다다름) ②치지(致知·앎을 넓힘) ③성의(誠意·뜻을 참되게 함) ④정심(正心·마음을 바로잡음) ⑤수신(修身·몸을 닦음) ⑥제가(齊家·집안을 가지런히 함) ⑦치국(治國·나라를 다스림) ⑧평천하(平天下·천하를 고르게 함)가 그것이다.

    이렇게 팔조목은 개인의 수양론·학문론·윤리론·정치론·철학사상론 등을 포괄하고 있다. 팔조목, 특히 ‘격물치지’에 대해서는 주희 외에도 많은 사상가들이 다양하고 창의적인 해석을 제시해 유교의 개념 해석사에서 이른바 르네상스기를 맞이하게 된다.

    ①격물∼⑤수신은 수기(修己)=성기(成己)=내성(內聖)의 차원으로서 개체·자아의 완성을 의미한다. ⑥제가∼⑧평천하는 치인(治人)=성물(成物)=외왕(外王)의 차원으로서 타자·외물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것을 삼강령과 관련시킨다면 전자는 명명덕에, 후자는 친민에 해당한다. 양측의 온전한 합일을 통해 지선한 상태를 얻는다는 이상을 제시한 것이 바로 ‘대학’의 내용이다.

    우주의 원리, 인간의 도리

    성균관을 찾은 사람들이 공자상 앞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이 담긴 어록이다. 공자의 말, 공자와 제자 사이의 대화, 공자와 당시 사람들과의 대화, 제자들의 말, 제자들간의 대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이 유교의 이상인 ‘대학’의 도를 어떻게 실천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이른바 유교이론의 구체적 실천이 생생하게 담긴 자료집이다. 그 내용은 모두 공자(BC 552∼479)라는 한 위대한 인물의 사상과 행동, 가르침을 조명·부각시켜주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공자의 사상이 중국 고대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 현실에까지 다가와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는 한편, 삶에 필요한 많은 시사와 가르침을 던져주는 매력을 갖는다. ‘논어’의 편찬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공자가 직접 기록·정리한 것이 아닌, 그 제자들이 기록하고 그들의 문인(門人)들이 편찬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논어’의 내용은 논리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다. 공자의 개념 설명은 대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며 그 내용의 깊이 또한 일정치 않다. 따라서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내린 여지가 적지 않다.

    ‘한서’에 따르면 한나라 때에는 세 가지 종류의 ‘논어’가 전해졌다고 한다. ①노나라에서 전해온 ‘노논어(魯論)’ ②제나라에서 전해온 ‘제논어(齊論)’ ③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고문(古文)의 논어(古論)’가 그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논어’는 전한 말의 장우가 노논어를 중심으로 편찬한 교정본이다.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나뉘어 있다. 각 편명은, 예컨대 ‘논어’ 첫 편인 ‘학이(學而)’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첫 구절에서 따온 것처럼, 머리 두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논어’의 첫머리 세 구절에는 그 전편의 사상이 대략 압축되어 있다.

    그 첫 구절은 ‘배워서 때맞춰 이를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로 시작한다. 공자 당시에 배우던 필수 교양과목인 육예(六藝), 즉 예절·음악·활쏘기·말타기·글씨 쓰기·셈하기를 배우는 기쁨을 제일 먼저 내세우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갖출 기본교양을 닦아 사람의 도리를 하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서 향유할 수 있는 기쁨을 제시한 것이다. 배움을 통한 자기완성은 바로 ‘사람이 사람으로서 바로 서는 기쁨’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묻고 배움(學問)과 자기수양(修己)의 과정으로 드러나는 사람임·사람됨의 무늬(人文)는 인륜(人倫)·윤리(倫理)를 성립케 한다.

    이어 둘째 구절에서는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하겠는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라고 말한다. 자기완성을 위해 힘쓰는 자에게는 그 뜻을 알아주고 서로 어울려 사는 모습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이 서로 무리 지어 어울려 사는 즐거움’의 무늬가 바로 친구들의 찾아듦일 것이다. 덕 있는 인간의 윤리와 덕이 있는 정치(德治)도 여기서 성립한다.

    마지막 구절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불만스럽게 여기지 아니하면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다. 사람은 남들의 이목에 이끌려 살기 쉽다. 다시 말하면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하고 불만이 생겨 화가 나게 마련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불만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남의 이목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 ‘가치 있는 일’ 그 자체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해서 함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초연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사람이 사람으로서 해야 할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인간’인 군자(君子)인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원리인 ‘인(仁)’과 생명보다 귀한, 생명을 넘어선 가치인 ‘의(義)’도 여기서 성립한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은,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이 부여한 길(하늘의 뜻)’을 알아야 하며(知命), 사회에 몸을 뚜렷이 세우기 위해서는 ‘예’를 알아야 하며(知禮), 사람이 어떠한가를 잘 알기 위해서는 (그 관계 맺음의 기본인) ‘말’을 알아야 한다(知言)는 구절로 장식된다.

    ‘논어’에는 이렇게 인간의 냄새가 풀풀 난다. 모든 시선은 인간의 현실 그 자체로 향해지고, 무엇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를 절실히 캐묻고 반성토록 만든다. 이렇게 ‘논어’에는 ‘사람이 희망’임을 말하는 공자의 사상과 이상이 뜨겁고도 간절히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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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 사후 그 제자들이 대부분 3년상을 모셨는데 자공이 초막을 짓고 계속 더 머문 것을 묘사한 삽회(‘맹자’ 출전)

    ‘맹자’는 공자 다음 가는 성인, 즉 아성(亞聖)으로 숭상되는 맹자(BC 372?∼289)의 사상을 거의 온전히 담고 있는 모두 7편으로 된 책이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맹자’의 성립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①맹자 자신의 저술 ②맹자의 제자가 기록한 것을 맹자 자신이 손대어 간추린 것 ③맹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 ④맹자가 지었으며, 그 제자들에 의해 순서가 정해진 것 ⑤맹자의 제자들이 지었고, 중간중간 그 제자들의 제자들(=再傳弟子)의 기록이 섞여 들어간 것 등이다. 대체로 맹자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및 그 재전 제자)이 편집한 것으로 보면 타당할 것이다.

    ‘맹자’의 일관된 논리전개와 격조 높고 박력 있는 변론조의 명문은 맹자라는 한 인물의 사상과 이상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회 및 정치·경제 등의 양상을 잘 알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후한의 조기는 ‘맹자’에 대해 본격적인 주석 작업을 벌이면서 7편 즉 ①양혜왕(梁惠王) ②공손추(公孫丑) ③등문공(?文公) ④이루(離婁) ⑤만장(萬章) ⑥고자(告子) ⑦진심(盡心)을 각각 상하로 나누어 14편으로 만들었다. 이를 흔히 ‘맹자내편(孟子內篇)’이라고 한다. 이 밖에 ‘맹자외서(孟子外書)’로 ①성선변(性善辨) ②문설(文說) ③효경(孝經) ④위정(爲政)의 사편(四篇)이 있었는데, 조기는 이것이 내용상 내편의 것과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제거해버렸다 한다. 이후 ‘맹자외서’ 네 편의 내용은 알 길이 없어졌지만, 조기가 정한 14편의 체재는 보편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대에 이르러 주희는 조기가 훈고(訓誥)에 치중해 맹자의 깊은 뜻을 놓쳤다고 비판하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맹자집주(孟子集註)’를 지었다. 이 책을 보통 조기의 고주(古註)에 대해 신주(新註)라 부른다.

    ‘맹자’는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 확장하는 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맹자’의 근본 정신은 ‘논어’가 그렇듯 책의 첫 구절(양혜왕·상)에 잘 드러나 있다. “맹자가 양혜왕을 뵈었더니 양혜왕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천리 길을 멀다 아니하고 와주셨으니 장차 우리나라를 어떻게 이롭게 해 주시렵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맹자가 ‘임금님은 왜 하필 이익(利)을 말씀하십니까?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맹자’는 공자가 강조한 인(仁)에다 의(義)를 덧붙여 ‘인의’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을, 이어 이에 입각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을 말한다. 더불어 그는 호연한 기운(浩然之氣) 즉 대자연과 합일하는 인격체를 추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공자의 인(仁)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親愛)의 정을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먼 곳(遠)보다는 가깝고 친근한 곳(近)으로 정이 더 가는 이른바 원근법적인 사랑으로서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라 할 수 있다. 맹자는 이를 계승하여 보편적인 인애(仁愛)의 덕을 주장하는 한편 그 실천면에서는 현실적인 차별 상에 따라 합당한 태도를 결정하는 의(義)의 덕을 내세웠다.

    한편, 앞서 말한 맹자의 왕도정치론은 민본주의와 혁명론을 축으로 하고 있다. 물론 맹자의 민본주의는 현대의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이 아니다. 맹자의 민본주의는 선한 본성을 지닌 인간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맹자는 국가가 백성(民)·국토(社稷)·정치(王)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고 보고, 그 가운데서도 백성이 가장 귀하고 임금이 가장 가벼운 것이라고 보았다. 군주로서의 덕성을 상실하고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폭군은 한낱 지아비에 불과하다는 평가와 민의(民意)에 의한 정치적 혁명을 긍정한 혁명론은 애민(愛民)·중민(重民) 사상에 기초한 맹자의 정치적 이상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맹자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먹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생업(恒産)이 있어야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도덕의식(恒心)도 요구할 수 있다고 보아 다양한 경제정책을 제시한다.

    맹자는 인간의 도덕실현의 가능근거로서 사단(四端·네 가지 단서), 즉 인(仁)의 단서인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의 단서인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의 단서인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의 단서인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들고 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추고 있는 이 사단을 확충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성을 이룰 수 있다는 인간의 자기완성의 가능성에 절대적인 신뢰를 둔 이론이다. 맹자의 이 성선설은 순자의 성악설과 대비되며 이후 중국사상사의 정통 학설로 존중받고 동아시아 사회의 긍정적, 낙관적 인간론을 형성하는 주요 이론이 된다.

    이렇듯 ‘맹자’는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의연하게 공자의 사상을 계승·옹호하고 확장하려는 맹자의 사상적 이상을 웅변해주고 있다. 우리가 흔히 공자와 맹자를 붙여서 유교의 정통사상으로 인정하고 ‘공맹지교(孔孟之敎)’로 부르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중용’은 ‘대학’과 마찬가지로 ‘예기’ 속의 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의 중요성 때문에 한대(漢代)부터 주목을 받았다. 한대 이후에는 주해서가 나왔고 33장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북송의 정이에 이르러 37장이 되었다. 남송의 주희는 이것을 다시 33장으로 다듬어 독립된 경전으로 만들었다.

    ‘중용’의 작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흔히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백어(공자의 아들)가 급(伋)을 낳으니 그가 자사였다. 나이 62세에 송나라에서 곤란을 겪으면서 ‘중용’을 지었다’는 대목에 근거하여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저작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왔다. 그러나 청대에 고증학이 발달하면서 이에 대해 이의 제기가 있었다. 어떤 학자는 ‘진(秦)·한(漢) 시대의 누군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저작’이라고 고증하기도 하고, 또는 ‘자사의 초고를 바탕으로 후세의 학자들이 오랜 기간 가필하여 완성한 저작’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자사라는 정설을 부정할 유력한 근거가 없기에 편의상 이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중용’의 자의(字義)에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정이는 ‘기울어지지 않는 것(不便)을 중(中)’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不易)을 용(庸)’이라 하였다. 주희는 중(中)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이고, 용(庸)이란 ‘떳떳함(平常)’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중용’의 첫 장은 ‘대학’ ‘논어’ ‘맹자’가 그랬듯, 전체적 조망과 핵심내용을 압축하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은 흥미롭게도 성선설과 성악설의 두 가지 입장에서 다르게 해석할 수가 있다.

    먼저 성선설적 해석을 살펴보자. ‘하늘이 명(命)한 것을(이성, 측은·수오·사양·시비의 사단지심과 같은) 도덕성(性)이라 하고, 스스로 도덕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스스로 닦아 행하는 것을 교(敎)라 한다.’

    성악설적 해석은 또 다르다. ‘하늘이 명(命)한 것을(식욕·성욕·투쟁심과 같은) 본능성이라 하고, 성인이 백성들의 본능성을 통솔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성인이 도를 백성들에게 넓혀 익히게 함을 교(敎)라 한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해석은 전자인 주희의 것이다. 그러나 후자와 같은 독특한 해석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해석은 늘 열려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중용’의 독해법이 꼭 주희의 방식 그 하나뿐이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중용’의 첫 구절은 유교의 출발점인 동시에 궁극적인 도달점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흔히 ‘중용’을 유교철학의 개론서라고도 한다. 이 개론서를 우리는 주희의 입장에 따라 맹자가 천명한 성선론식으로 읽어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부단히 배워야 하는데, 그 배움에는 길(道)이 있고, 그것은 바로 하늘이 부여한 선한 자신의 본성에 바탕한 것이라는 낙관적·긍정적인 발상법은 송대 및 동아시아 성리학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중용’은 거기서 신유학자들을 매료시켰고, 유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히트작이 된 것이다.

    주희가 33장으로 다듬은 ‘중용’은 주로 중용(中庸) 또는 중화사상(中和思想)을 말한 전반부와 성(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후반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전반부의 중화사상은 중용을 철학적으로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중’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드러나기 이전(喜怒哀樂之未發)의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며, ‘화’는 마음이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發而皆中節)이다. 이렇게 ‘중화’를 이루면(致中和)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잡고(天地位焉), 만물이 잘 길러지게 된다(萬物育焉)는 것이다. 따라서 전반부의 ‘중화’는 우주 만물이 제 모습대로 운행되는 형이상적 원리를 언표한 것이다.

    후반부의 ‘성(誠)은 전반부의 내용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 바로 우주만물의 지극히 정성스러우면서 쉼이 없는(至誠無息) 그 성실성을 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성은 하늘의 도이며(誠者天之道也), 성 되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도다(誠之者人之道也)’라고 말하듯, 성은 하늘(天)·땅(地)·사람(人) 즉 삼재(三才)를 관통하는 원리다. 성실한 것은 우주의 원리이고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다.

    인간은 우주의 운행 원리인 성을 배우고 실천하며 체득하는 데서 인격을 완성할 수 있다. 이렇게 우주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이른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나 원리는 ‘중용’의 핵심인 동시에 유교가 지향하는 최종적 목표다. 그래서 ‘중용’은 사서의 마지막을 웅장하게 장식하고 있다.

    ‘온고(溫故)’로서의 사서 읽기

    사서라는 고전은 사실 ‘옛것(古=故)’일 뿐이다. 옛것은 ‘오래되고’ ‘낡아’ ‘구닥다리’가 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온기를 잃고 식어버려, 차갑고 딱딱하게 되어, 지금·여기에 있는 것과 너무나 많이 (시간적으로) 바뀌고 (공간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식은 밥(찬밥)이 따끈따끈할 때의 제 맛을 잃은 것처럼, ‘옛날’이라는 것은 그 당시에 살아 숨쉬며 따뜻한 피가 돌던 상태가 끝난 것이므로 나의 ‘읽기’를 통해서만 살아날 수 있다.

    그래서 사서와 같은 고전을 읽는 작업은 공자가 말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온고(溫故)의 작업이거나 퇴계 이황(1501∼70)이 말한 ‘고인의 예던 길을 예는’ 일일 것이다.

    온고의 ‘온(溫)’은 ‘따사롭다’ ‘따사롭게 하다’ ‘데우다’ ‘뎁히다’의 뜻이다. ‘온고’는 차갑게 식어버린 옛 사람들의 말과 글을 ‘나’의 피가 돌고 따사로운 숨결이 흐르는 실존적인 ‘온몸(心身)’으로 음미하는(읽고, 생각하며, 느끼는) 작업이다. 바로 이때 ‘옛날’이란 것은 나의 실존적 내면적 숨결·입김을 투과하여 따사롭게 생명력을 지녀 소생되어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사서를 읽는 것은 우선 한문이라는 과거 중국의 글 속을 헤매는 이른바 고고학적인 발굴(archaeological digging) 작업과 같은 점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전 ‘읽기’라는 작업 속에는 단순히 그 무언가를 많이 아는 이른바 지식의 축적·집적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을 읽는 ‘지금’의 ‘내’가 나의 앞날(미래)에 대해 어떤 선지자적/예언자적인(prophetic)인 빛과 소리를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찾아 읽어 내려가며 흘리는 땀방울의 크기만큼, 사서는 분명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는 지혜의 길을 터주며 미래를 향한 적지 않은 시사를 가져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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