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내용을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작품들의 다양한 양상 때문만이 아니라, 90년대 문학의 ‘현재성’ 때문이다. 90년대적인 문학 작업은 완료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90년대는 완결된 문학사적 시간대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의미형성의 공간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다만, 그 현재적인 공간에서 움직이는 몇 가지 문학적 맥락을 점검해보는 일만이 가능하다.
90년대 이후의 문학은 80년대 이전의 문학과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에는 80년대와 90년대를 대비시키는 논리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은 90년대 문학을 설명하는 낯익은 방식의 하나다. 이 논리 안에는 80년대와 90년대에 관한, ‘집단·개인, 거대담론·미시담론, 정치적인 삶·문화적인 삶, 역사·일상’ 등의 세부적인 대립 명제들이 포함된다. 이 이분법은 단순성의 문제를 노출하고 있지만, 먼저 사회적 상황과 관련해 설명할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전세계적 지배가 공고화되는 90년대는 한국정치의 민주화 과정과 겹쳐 있고, 이것은 문학을 사회변혁의 중요한 실천방식으로 생각하는 문학이념에 타격을 가했다. 90년대 이후 ‘문민정부’에 이은 ‘국민의 정부’ 출현은 적어도 제도적 층위에서는 정치적 폭압의 시대가 사라졌음을 보여주었고, ‘적’에 대한 폭로와 분노를 쏟아내던 문학은 그 ‘표적’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자본주의가 문화 혹은 정보상품 개발을 통해 시장개념을 확장하면서 노동형태와 생활양식이 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문화산업은 정치권력의 하부구조라는 상태를 벗어나, 자본의 논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스스로 시장을 확대해나가는 자율적인 생산기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문화산업의 성장은 영상, 음반 혹은 디지털 매체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여성 독자를 중심으로 한 문학 소비자군 형성이 90년대 문학시장을 확대했다. 출판시장의 구조는 이른바 ‘본격 문학’ 대신 장편소설과 아마추어리즘을 노출하는 시집 중심으로 변화했다. 이런 과정에서 문학은 피할 수 없이 문화산업의 구조 안에 편입되어 갔다.
문학은 숨 거두지 않았다
문화산업의 팽창과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한 문학의 주변화,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문학의 죽음’이라는 풍문은 90년대 내내 문학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자극했다. 하지만 문학은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았다. 단지 다른 방식으로 숨쉬고 있을 뿐이다. 특히 상업주의 문제를 둘러싼 갖가지 추문들은 90년대 문학공간을 진창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으며, 시장의 논리가 확장되면서 상품경쟁력의 척도로 문학의 크기가 평가되는 상황이 빚어졌다. 여기에서 상품미학의 척도와 대결하는 진지한 문학적 실천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고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시대를 주도했던 정치적 상상력의 문학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한국현대문학의 주류적 특성인 문학에 대한 정치적 소명과 계몽담론의 요구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문학의 추진력이던 정치적 전위와 미학적 전위는 위축되었다. 특히 정치적 전위를 표방한 문학운동은 그 정점에서 불과 몇 년을 견디지 못했다. 더는 폭로할 것도 분노할 것도 없는 세계, 낯선 정보사회적 환경과 자본주의적 일상성의 비속함 가운데서, 문학은 스스로 존재 위치를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서 90년대 문학의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 낯선 문화적 상황에서 문학은 자신의 미학적 자율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집단의 이념에 가려져 있던 개인적 삶의 영역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공적인 명분을 내세우는 대신, 문학은 개인의 실존적·문화적 경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이 다원화한 사회에서 개인의 사적 영역에 관한 관심이 새로운 문학적 탐구의 영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90년대 문학공간에는 사적인 생활세계와 문화적 삶의 문제와 관련된 새로운 주제들이 떠올랐다. 내면성의 재인식, 여성주의와 섹슈얼리티, 도시적 일상성의 탐구, 대중문화와의 접속, 디지털 환경과 사이버 세계, 몸의 시학, 생태학적 상상력 같은 다채로운 테마들은 이전 시대에 볼 수 없었던 세계 인식의 다원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주제와 소재의 다양성이라는 차원을 넘어 문학적 인식 대상과 관계의 다원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내면’과 ‘일상’ ‘영상문화의 매혹’ ‘여성성’ 등이 90년대 문학의 중심부에서 키워드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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