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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 경쟁력이다

청중의 힘이 음악사 바꿨다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도

  • 글: 김용환 한세대 교수·음악학 kimyh@hansei.ac.kr

청중의 힘이 음악사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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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세기 초까지 음악가는 궁정과 공공기관에 배속된 기능인이자 고용인에 불과했다. 19세기, 공공연주회가 활성화하면서 비로소 대중과 함께 숨쉬는 진정한 음악의 역사가 시작됐다.
서양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빈)고전주의, 낭만주의, 20세기 음악 등 각 시대를 지칭하는 용어를 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들 용어는 일반 역사(중세·현대), 미술사(르네상스·바로크) 및 문학사(고전주의·낭만주의)에서 차용했으며, 시기적으로는 대략 중세(450~1450), 르네상스(15~16세기), 바로크(17세기 및 18세기 초), 고전주의(1780~1803 또는 1810), 낭만파(19세기)를 포함한다. 20세기 음악을 현대음악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용어와 그 시기는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것일 뿐이다. 현대 음악학은 기존의 시대 구분 및 용어가 각 시기의 음악적 특징 및 시대정신을 적절하게 대변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시기의 설정 역시 학자들마다 이견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자면 “20세기에 매우 다양한 음악적 경향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대표적 시대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면 이것은 19세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또한 18세기 음악이 ‘(빈)고전주의’로 집중되는 것 역시 당시의 실제 음악 상황을 무시한 결과라고 학자들은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미술사에서 차용한 ‘르네상스’와 ‘바로크’라는 용어 역시 음악사의 시대용어로 적합지 않다고 하면서 다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물론 이에 대한 전문적이고 상세한 논의는 이 글의 목적과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서양음악에 보다 진지한 관심을 가진 독자들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기존의 시대구분이 고착된 것으로 단정짓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언급해보았다.

음악가 먹여 살린 궁정·교회·시청

오늘날 우리는 입장권만 구입하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음악회장을 방문할 수 있다. 이러한 공공연주회는 서양음악사의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그 이전에는 어떤 기회에 음악을 들을 수 있었을까?



18세기 중엽 이전의 절대주의 왕정시대에서 음악 행위는 일반적으로 세 기관에 의해 주도되었다. 궁중, 교회 그리고 시립악대가 바로 그것이다. 음악가는 이들 세 기관 중 하나에 소속된 ‘고용인’이었다. 이중에서 교회에 소속된 음악가는 궁중 또는 시립악대에 이중으로 소속되기도 하였다.

궁중에 소속된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가 가장 높았으며, 궁중은 당시 음악생활의 구심점을 형성하며 음악문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궁중에서 개최되는 연주회는 극히 제한적이고 폐쇄적이었다. 이 연주회에 참가할 수 있는 청중은 사회적으로 그 지위를 인정받은 자 중에서 선택된 자들이었다. 일반 시민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연주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궁중에서 개최된 음악회에서 군주나 귀족들은 아마추어 음악가로서 자신의 연주기량을 발휘하였다. 청중은 그 음악회에 참석한 연주자들 자신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궁중의 대외적 행사를 위한 연주회는 궁중에 소속된 음악가들의 작곡과 연주에 의해 수행되었다. 각 궁중의 통치자는 대부분 관현악단과 가극단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것을 자신의 위세에 대한 척도로 과시하곤 했다. 그들은 자신에 소속된 음악가에게 작곡을 지시하고 프로그램을 구성하게 했다. 고용인으로서 작곡가나 연주가는 궁정 통치자의 주문에 따라 작곡하고 연주해야만 했다. 예술인의 창작에 대한 자유의지는 통용되지 않았다.

교회에 소속된 음악가들 역시 통제를 받았다. 교회를 시청에서 주관하였기 때문에 시청의 통제를 받은 것이다. 칸토르(Kantor·교회 부속 합창대의 지휘자)는 시 소속 교회의 모든 예배를 위한 음악을 책임지며 정기적으로 칸타타, 수난곡 등을 작곡해야만 했다. 바하와 텔레만이 그러했다.

사회적 지휘가 가장 낮았던 시청 소속 음악가들은 시의 모든 행사에 동원되었다. 예를 들어 시의회가 폐회될 때나 하루중 일정 시간을 알리기 위해 시청이나 성의 탑에서 나팔을 불었으며, 관례적인 축제나 결혼식 또는 장례식 등을 위해 작곡과 연주를 수행하였다.

이렇듯 모든 작곡 및 연주 행위가 적어도 18세기 중엽까지는 어느 특정 기관에 의해 좌우되었다. 궁정, 교회, 시청은 공공의 음악생활을 담당하는 주체였으며 칸토르, 시의 음악감독 또는 궁중의 악장이 무엇을 작곡하고 무엇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었다. 전문음악인들은 이와 같은 직업 영역을 떠나서는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음악인들과 음악은 이러한 사회구조에서 나름대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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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용환 한세대 교수·음악학 kimyh@ha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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