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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닥 황제주 ‘웹젠’ 창업자 이수영

“튀는 CEO가 튀는 회사 만든다”

  • 글: 박은경 자유기고가

코스닥 황제주 ‘웹젠’ 창업자 이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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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이사장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에 대해 ‘황당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마치 ‘공짜로 생긴 돈’처럼 취급하는 것에 약간의 반발심도 있다. 웹젠 초기 꽤 큰 엔젤투자자로 나섰다 사정이 급해 주식을 몽땅 팔아치운 어떤 사람은 뒤늦게 나타나 “과실을 나눠 갖자”며 은근한 압력까지 행사하고 있단다.

손수 창업한 회사 주식을 황제주로 만들고도 무덤덤할 뿐인 그에게, 벤처거부가 된 현실을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이 확실(?)하게 확인시켜주고 있는 셈이다.

이수영 사장에게는 세 개의 이름이 있다. “삶을 자각하는 순간마다 이름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 중 호적에 올라 있는 이름은 이은숙이다. 이후 미리내소프트웨어 시절에는 사라 리(SARA LEE)로, 지금은 이수영으로 불린다. 무용가로서 그의 삶은 대부분 ‘이은숙 시절’에 국한되어 있었다.

1966년 경남 마산에서 1남5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생 시절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한국무용학원 수강생이 됐다. 음악만 나오면 주위 시선에 아랑곳 않고 몸을 흔들어대는 딸에게서 예사롭지 않은 끼를 발견한 것이다. 평탄하게 성장하던 그는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서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차라리 입양되어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는 엄청난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돈은 잘 버셨고 그것으로 제 뒷바라지를 엄청나게 해주셨지만 무용하는 환경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마산은 지방이라 문화 불모지였고 그때는 발레를 가르치는 학원조차 없었거든요. 어쩔 수 없이 한국무용만 배워야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제 소질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걸 크게 키워줄 생각은 못 하신 거죠.”



좁은 지방도시가 몹시 답답했던 그에게는 뭔가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때 차례로 빠져든 것이 그림, 사진, 연극이었다.

“뭔가 하나를 시작하면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거든요. 사진에 빠졌을 땐 카메라 장비 일체를 갖추고 촬영지를 물색하러 다닐 정도로 열성이었어요. 그림 그릴 때는 또 그대로 학교도 가지 않을 정도였고요. 연극을 보기 위해 부모님 몰래 서울까지 올라간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유별났죠.”

사춘기 시절 방황을 잠재운 건 발레, 아니 정확히 말해 발레 만화였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30권쯤 되는 일본 만화 ‘백조’를 보면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무용수들의 인생에 빨려들었어요. 현실과 허구를 분간 못할 지경이었으니까요. 내용 중에 차이코프스키나 바하 음악 얘기가 나오면 원판 레코드를 구해 들으면서 만화 분위기와 맞나 안 맞나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곤 했습니다.”

대입 수석 합격의 뒤안길

마침 그때 마산에서 발레 공연이 있었다. 무대 바로 앞에 자리잡은 그는 눈앞에 펼쳐지는 공연을 보며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폈다. ‘발레를 하기 위해 대학에 가야겠다’는 결심도 굳혔다. 이때부터 일년간 그는 오로지 발레리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무섭게 공부했다. 덕분일까, 대학입시 성적은 가족과 학교를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났다.

“점수가 잘 나오자 담임선생님, 부모님, 친척들까지 합세해 서울대나 연세대에 원서를 내라고 종용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세종대 무용과를 목표로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학교에 갈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부모님 성화에 직접 원서를 내러 가지도 못하고, 서울 가는 친구 편에 부탁해 겨우 세종대에 지원했다. 결과는 수석 합격이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학벌과 파벌을 내세우는 현실의 벽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선택한 일은 끝까지 파고들어 성취감을 느껴야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 졸업과 동시에 찾아온 무용계 주류의 벽은 너무도 완강했다. 실력과 상관없이 변방에 남아야 한다는 현실은 뼈아픈 좌절감을 안겨줬다.

“부모님이 명문대에 가라고 하셨을 땐 세상물정을 짐작하신 바가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때 전 그걸 몰랐던 거예요. 아마 저 때문에 부모님 가슴에 비수가 꽂혔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죄송해요.”

좌절로 주저앉는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유학이었다. 1990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세계적 명성의 마사 그레이엄 무용학교에서 2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그 후 뉴욕대에서 예술학 석사(MFA) 과정을 마치고 1995년 귀국했다.

“귀국 전 몇 가지 구상을 했습니다. 한국에서 예술가로만 산다면 경제적인 어려움이 클 것 같았어요. 대학교수가 되자니 학교측에 ‘비벼야’ 하는 사회 분위기도 싫었고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리리라는 걱정도 됐고요. 그렇다고 ‘뒷문’으로 들어갔다가는 내 삶이 평생 일그러질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방송이었어요. 미국은 예술성과 맞물린 방송 관련 프로덕션이 꽤 많습니다. 그런 쪽을 생각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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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은경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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