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가네 호떡’의 황호선 사장. 전국에 400여 개 체인점을 낸 ‘호떡왕’이다.
박씨는 남편을 조르고 졸라 어렵사리 빚을 얻어 양품점을 냈다. 주로 여성복을 떼다 팔았는데, 손님들 중에는 더러 속옷을 구해달라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던 중 고객들의 특이한 행태를 발견했다. 여성복을 구입한 고객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번이고 바꿔달라고 요구했고, 값을 깎아달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속옷을 구입하는 고객들은 한 번도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속옷은 값이 비싸도 깎지 않았고, 몸에 좀 안 맞으면 몸을 옷에 맞춰 입었다. 박씨는 이 점에 착안해 속옷 도매업자로 변신했다.
흰색 속옷이 대부분이던 1980년대에 박씨는 색깔 있는 여성 속옷을 하청 생산해 판매했는데, 소비자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서울 동대문에 4개 점포를 거느린 속옷 전문 판매점 사장이 됐다.
그렇게 해서 지겨운 가난과 결별했지만, 박사장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두 아이를 남편에게 맡긴 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다. 자기 손으로 직접 디자인한 속옷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은 “미쳤냐”며 만류했지만, “허락하지 않으면 이혼하고라도 가겠다”고 버티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에게 부차적인 문제였다. 남편과 아이들을 남겨둔 채 여자 혼자 몸으로 이역만리를 향해 떠난다는 것 자체가 여간한 각오 없이는 결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제가 여유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유학에 실패했을 거예요. 유복하게 자랐다면 이탈리아 말을 전혀 못하면서 덜렁 이탈리아로 날아갈 생각도 못했겠죠. 더구나 전공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어학 공부부터 마쳐야 한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아마 유학을 포기했을 겁니다. 그저 비장한 각오 하나로 일을 저지른 거죠.”
급한 대로 일상적인 언어 문제는 현지 한국 유학생을 옆에 두고 해결했다. 그후 어학 수업을 병행하면서 3년6개월간 속옷 디자이너 전문가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이탈리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그의 못 말리는 도전 정신은 식을 줄 몰랐다. 그 무렵 일본에서 맞춤 속옷이 유행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년 동안 공부했다. 옷은 몸에 맞춰 입으면서 왜 속옷은 몸에 맞춰 입지 않을까 하는 오랜 의문을 풀기 위해 일본행을 결심했는데, 일본 여성들이 맞춤 속옷을 입으며 보정된 몸매로 자신감을 되찾는 것을 목격했다. 무리하게 다이어트하지 않고도 속옷 맞춰 입기로 날씬한 몸매를 만들 수 있다면 여성들에게 그만한 희소식이 없을 터. 예상대로 맞춤 속옷은 국내에서도 빅히트했다.
도전이 생존을 담보한다
박명복 사장은 맞춤 속옷으로 한때 연 120억원대의 매출을 올렸는데, 1997년 말 외환위기 직후 부도 위기에 몰렸다. 110여 명이던 직원들을 10명이 될 때까지 내보내는 고통을 겪었다. 600여 평 사옥은 지하 40평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렇듯 처참한 실패를 맛봤지만, 이번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도 직전 TV 홈쇼핑에 출연해 재기의 기회를 잡은 박사장은 한 세트에 70만원 하는 맞춤 속옷을 12만원대로 낮춰 판매하면서 매출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다시 일어선 박사장은 지난해 50억원대 매출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고, 올해는 150억원의 매출을 예상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충남 천안에 5000평의 부지를 매입, 청주대 의상학과 교수팀 및 경희대에서 의류 소재를 연구하는 교수팀과 함께할 연구소를 짓고 있다. 그는 마치 ‘앞으로’라는 말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일한다.
“큰아이가 딸, 작은아이가 아들인데, 제가 한창 밖으로 나돌며 일에 미쳐 있을 때 작은아이를 울린 적이 있어요.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날, 친구들은 부모가 와서 우산을 받쳐들고 하교했는데, 혼자 그 비를 쫄딱 맞고 집에 오니 그렇게 서러웠나 봐요. 하지만 지금은 엄마를 너무도 잘 이해해주는 둘도 없는 후원자가 됐지요. 딸아이는 저처럼 이탈리아에서 속옷 디자인을 공부해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