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지역 명문으로 떠오른 한국형 보딩스쿨

무공해 교육환경, 과외 흡수한 공교육의 힘

  • 글: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khmzip@donga.com

    입력2004-04-28 1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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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동체 생활을 통해 인성교육과 학력신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기숙학교들이 뜨고 있다. 좋은 자연환경에 최고의 시설, 사교육비 제로, 높은 대학 진학률을 앞세워 우수학생 유치에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기숙학교 캠퍼스는 무엇이 다른가.
    지역 명문으로 떠오른 한국형 보딩스쿨

    학교 마당에서 기타수업 중인공주 한일고 학생들.

    초우트 로즈메리 홀, 필립스 아카데미,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디어필드 아카데미, 세인트 폴즈 스쿨, 호치키스 스쿨, 밀턴 스쿨…. 이들은 미국의 명문 사립 고등학교로 대다수 학생이 학교에서 생활하며 공부하는 보딩스쿨(boarding school), 즉 기숙학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처럼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 사립고 외에도 미국 전역에는 250여개의 보딩스쿨이 있으며 기숙사 운영방식이나 교육철학 및 목표에 따라 다양한 유형이 있다. 예를 들어 재학생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all boarding), 다수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소수가 통학하는 학교(boarding-day school), 반대로 다수가 통학하는 학교(day-boarding), 주중에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학교(5-day boarding school)로 나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보딩스쿨인가. 미국 엘리트 교육의 산실을 직접 방문·취재해 책으로 펴낸 일본인 변호사 이시즈미 칸지는 보딩스쿨의 장점을 7가지로 요약했다(‘보딩스쿨’ 36~37쪽 참조).

    첫째, 부모 곁에서 응석을 부리게 마련인 아이들의 정신교육, 특히 정서적인 성숙을 위해 엄격한 규율을 갖춘 교육적 환경이 필요하다. 둘째, 부모의 부유한 환경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지낼 필요가 있다. 셋째, 가급적 도회의 퇴폐적인 환경과 떨어진 시골 학교가 좋다. 넷째, 학업뿐 아니라 스포츠를 비롯한 문화·예술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루 24시간, 주7일의 밀착교육을 시킨다. 다섯째, 학생들의 독립심과 자립심, 창조성, 리더십 등을 키우기 위해 학생과 침식을 함께하는 상주교사가 있다. 여섯째, 기숙사 생활을 통해 공정함과 양보정신을 기르고 자신과 다른 사고방식 혹은 생활방식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진다. 일곱째, 전국적으로 우수학생을 유치하는 데 기숙사 제도가 필수적이다.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보딩스쿨 제도를 도입해 신흥 명문으로 부상하는 학교들이 늘고 있다. 개교 이래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전국 16개 과학고(특수목적고)와 영재학교로 알려진 민족사관고, 일부러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 대안학교들 외에도 충남 공주의 한일고, 경기도 광명의 진성고, 경기도 의왕의 명지외국어고 등 개교 10년 안팎의 신설학교들이 사교육 없는 전일제 기숙학교를 표방하며 명문고 만들기에 나섰다. 여기에 비교적 원거리 진학생이 많은 비평준화 지역 학교들-경남 거창의 거창고, 충남 논산의 대건고, 전남 담양의 창평고, 전남 장성의 장성고, 전북 익산의 익산고 등-이 기숙사 시설을 확충해 우수학생 유치에 나서면서 전교생의 70~80%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일반 인문계 학교 최초로 전일제 기숙학교로 세워진 공주 한일고(1987년 개교, 2002년 자율학교 지정)와 수도권 최초의 기숙학교인 진성고(1995년 개교), 외국어고로는 최초로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명지외고(2004년 개교), 기숙사생과 통학생이 반반인 전주 상산고(2002년 자립형사립고 전환), 비평준화 지역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인 충남 논산 대건고(1951년 개교)를 직접 방문해 한국형 보딩스쿨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산골짜기 캠퍼스

    서울에서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 있는 한일고등학교까지는 승용차로 쉬엄쉬엄 가도 2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 천안-논산 고속도로 개통 이후 도심과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지만 고속도로만 벗어나면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펼쳐지고 어느새 학교가 위치한 구작골에 이른다.

    교문이 따로 없어 불쑥 들어선 학교의 첫인상은 아늑함 그 자체다. 야트막한 봉우리 3개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국수봉을 뒤로하고 학교 전면에 6개의 봉우리가 앉아 있다. 그 사이로 어물천이라는 작은 시내가 흐른다. 500여명의 전교생이 머무르기에 크다 싶은 10만평 규모의 부지에 펼쳐진 이 학교는 1989년 대한민국 건축대전 우수상을 수상했다.

    서울에서 한의사로 부와 명성을 쌓은 고(故) 한조해 선생은 동학에 심취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평소 동학의 교리이자 행동강령인 사인여천(事人如天)과 실천궁행(實踐躬行)을 생활의 지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 학교설립을 결심했다고 한다. 특히 “인성은 습관으로 길러진다”며 기숙학교를 구상했다. 설립자의 호를 따서 ‘현제관’이라 불리는 기숙사는 모두 3개 동으로 학년별로 배치하며 8인 1실 원칙. 한 방에 가급적 서로 다른 시도 출신자로 안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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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학생의 70%가 기숙사 생활을 하는 논산 대건고. 대기자가 30명이 넘을 만큼 기숙사 인기가 좋다.

    “핵가족화되고 입식에만 매달리다 보니 밥상머리 교육으로 대표되는 가정교육이 유명무실해졌습니다. 형제·자매 없는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여러 사람과 부대끼며 사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라기 때문에 남과 더불어 사는 것도 따로 가르쳐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죠. 그 점에서 전인교육의 장으로서 기숙학교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양교석 교장은 역사 전공자답게 “한국의 전통교육기관인 성균관이나 서원들이 모두 기숙학교로 전인교육에 힘썼다”며 기숙학교의 전통을 강조했다. 한일고는 캠퍼스 전체를 산이 휘감고 있는 형국이라 아무리 둘러보아도 유해환경이라곤 찾을 수 없다.

    “학생들에게 이 학교에 오니 뭐가 제일 좋으냐는 질문을 자주 하는데 한 아이의 대답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서울에서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밤 12시에 집에 갔는데 이곳에서는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 좋아요’ 하는 겁니다. 하늘에 별이 총총 박힌 날 잔디밭에 누워 ‘별이 쏟아진다’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도 있어요.”

    캠퍼스가 곧 집인 보딩스쿨은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이 요구된다. 미국 명문 보딩스쿨들도 대도시와 멀리 떨어진 드넓은 자연 속에 캠퍼스가 있는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긴다. 이런 학교일수록 주중에는 빠듯한 수업 때문에 외출할 틈이 없고, 휴일이라도 워낙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어 자동차 없이는 외출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구작골에 위치한 한일고는 이런 요건을 두루 갖춘 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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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건고 학생들이 쓰는 ‘플래너’노트.

    대학 못지않은 캠퍼스로 유명한 전주 상산고를 찾았을 때 제일 먼저 교정 곳곳에서 나무를 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2만여평의 상산 캠퍼스에는 감, 모과, 은행, 매화, 장미, 모란, 철쭉, 연산홍, 백일홍이 빽빽이 심어져 있어 철따라 꽃과 열매를 피워 올린다. 또 비단잉어가 뛰노는 4개의 연못과 500여그루의 소나무가 빚어내는 한국적인 정원의 운치가 그만이다.

    상산고는 재학생 1065명 중 절반 가량인 528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나머지는 통학을 한다. 기숙사는 지난해 준공한 남학생 기숙사(380명 수용)와 기존시설을 리모델링한 여학생 기숙사(150명)로 나뉘어 있으며 4인1실이다. 또 각 방마다 화장실과 세면대, 샤워 부스가 마련돼 있는 것이 특징. 그래서 기숙학교 지망생들 사이에서 상산고 기숙사는 ‘호텔급’으로 통한다.

    신설 기숙학교일수록 기숙사 시설에 투자를 많이 한다. 명지외고는 전원 기숙학교를 표방했지만, 아직까지 시설미비로 신입생 328명 가운데 233명만 기숙사에 머물고 통학거리 30분 이내의 학생들은 스쿨버스를 이용한다. 고봉산을 배경 삼아 본관, 체육관과 학생관, 기숙사, 도서관이 ㄱ자로 배치되어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바로 기숙사다. 10층짜리 아파트형 기숙사는 1~4층이 남학생용 명현관, 5~10층이 여학생용 명덕관이다. 이곳에서 취식을 함께하는 남녀 관리교사가 1명씩 근무한다. 바로 옆에는 신축 기숙사 공사가 한창이다.

    4인1실 구조의 명지외고 기숙사는 화장실과 목욕실을 공동 사용하나 각 방마다 전화를 설치한 것이 파격이다. 오혜식 교장은 “휴대전화 반입을 금지했더니 정작 학생들보다 부모들이 더 아쉬워했다”면서 “외로운 기숙사 생활에 전화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모들 요청에 방마다 수신자 부담 전화를 놓았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기숙사 시설이 반드시 ‘교육적’인 것은 아니다. 1995년 개교한 경기도 광명시의 진성고는 현재 재학생 1045명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진성고가 위치한 광명시 하안동 일대는 아파트 단지가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데다 주변에 8개의 학교가 밀집돼 있는 이른바 ‘스쿨 존’. 3400평 규모의 대지 위에 운동장, 교실, 기숙사를 모두 갖춰야 하기 때문에 결코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효율적으로 배치해 ‘내집 같은 학교’를 만들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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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성고의 ‘내 방 같은 교실’. 교실에 오래 머무는 학생들을 위해 서랍과 책꽂이가 있는 책상을 마련했다(위).<br>한 반이 함께 쓰는 남학생 기숙사 내부.

    생활관 5개 층 가운데 1층 식당과 5층 특별강의동을 제외하고 2~4층이 기숙사인데 학년별, 남녀별로 구분돼 있고 한 반 전체가 들어가는 군 내무반식 기숙사가 인상적이다. 다른 건물에 비해 천장이 1m 가량 높아서 20여개의 2층 침대가 줄지어 놓여 있는 데도 답답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방 입구에는 생활지도교사의 침대가 따로 있다. 간혹 기숙사 구조 때문에 진성고를 기피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학부모들은 오히려 이 점을 선호했다. 진성고 교복은 사관학교 제복과 비슷한 데다 일과시간 후에도 일체 사복을 허용하지 않으며 엄격한 두발 규정 때문에 인근에서는 ‘군대 같은 학교’로 통한다.

    4월2일 기숙사 체험행사에 참석한 1학년 김기태군의 아버지 김익래씨는 “공군장교 출신이어서 군 내무반 생활을 잘 아는데 사고는 서너 명이 있는 곳에서 나지 몇십 명이 함께 있으면 오히려 문제가 적다”면서 “여러 기숙학교를 돌아보았는데 기숙사 방마다 생활지도교사가 따로 있고 숙식을 함께하는 점이 마음에 들어 진성고를 택했다”고 말했다.

    진성고는 주·야간 2중 담임제도라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주간에는 교장을 포함해 60명의 교사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저녁식사(오후 6시20분)부터 다음날 아침식사(오전 7시30분)까지는 흔히 사감이라 불리는 35명의 생활지도교사가 전담한다.

    강제보충수업 없는 진짜 자율

    사실 최근 들어 기숙학교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시설이 특별하다거나 주변환경이 좋아서라기보다 ‘사교육 무풍지대’로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2004년 대학입시에서 전라북도 인문계 수석과 예체능계 수석을 나란히 배출해 화제를 모았던 익산고는 영재반의 경우 기숙사 생활을 의무규정으로 두었다. 오전 7시에 일어나 새벽 1시까지 학교생활이 이어지기 때문에 이곳 학생들은 사교육에 한눈 팔 시간이 전혀 없다. 더욱이 면 소재지 학교 주변에는 변변한 학원조차 없어 말 그대로 자율학습을 하면서 교사들이 새벽 1~2시까지 남아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주는 것으로 사교육을 대신해왔다.

    익산고 외에 7년째 졸업생 전원 대학 진학 기록을 세우고 있는 전남 장성고도 전교생 800여명 가운데 600여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4년째 같은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전남 창평고 역시 전교생 900명 중 700명 가량이 머물 수 있는 기숙사를 갖췄다. 이 학교 학생들은 한결같이 “자율학습 외에 과외나 학원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외딴 산골짜기에 자리한 공주 한일고의 하루 일과표를 보자. 오전 6시 기상, 6시15분 아침 점호 및 운동·청소, 7시반까지 아침식사, 7시50분까지 교실동 이동,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아침자율학습 및 오전 정규수업, 2시까지 점심식사, 6시까지 오후 정규수업, 6시 저녁식사, 7시부터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 자정 이후는 교실이나 기숙사 연등실에서 개별 학습.

    이처럼 기숙사와 교실을 오가는 꽉 짜여진 일과 때문에 사교육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굳이 학원에 가려면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 학교 학생들은 집이 멀다는 핑계로 토요일도 기숙사에 남는다. 양 교장은 “학생들이 집에 가질 않아 교직원들이 쉴 틈이 없다. 할 수 없이 한 달에 한 번 ‘권장 귀성일’로 정해 강제 귀가시키고 있다”고 했다.

    학생이 과목과 교사 선택

    기숙학교들의 일과표는 대동소이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 0교시 강제 보충수업이 없고 아예 8시 이후 등교시키거나 특기적성교육을 철저히 자기 선택에 맡긴다는 점이다. 최근 고등학교들이 0교시 부활로도 모자라 새벽 6시30분에 등교해 -1교시 수업까지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상산고는 점심시간 후 효율이 떨어지는 5교시(12시50분~1시35분)를 자율학습 시간으로 배정해 상담과 질의응답을 하거나 과목별로 성적이 부진한 학생들을 위한 보충수업을 하고 있다.

    논산 대건고의 경우 오전 7시50분부터 정규수업이 시작되는 9시까지 요일별로 특별한 ‘자기활동시간’을 갖는다. 먼저 7시50분부터 8시10분까지 전교생이 마당에 나와 줄넘기를 한다. 박용서 교감은 “640여명의 기숙사 학생들을 아침마다 깨우고 운동을 시키는 일이 여의치 않아서 아예 전교생 줄넘기로 바꿨더니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줄넘기로 몸을 풀고 각자 반으로 돌아오면 요일별로 플래너 작성, 독서, 명상의 시간, 자기생활 평가 등의 프로그램이 시작된다. 대건고에 입학하면 누구나 플래너라는 노트를 한 권씩 갖게 되는데, 월요일에는 지난 한 주 자신의 활동을 평가하고 새로운 한 주 계획을 세워 이 노트에 기록한다. 수요일은 명상, 화·목·금요일은 독서, 토요일은 자율학습을 하며 매달 마지막 토요일은 전일제 클럽활동을 한다. 플래너 노트에는 학습·생활·방과후 개인일정, 독후감, 명상결과 등 학생 개인생활에 대한 모든 내용이 망라되어 있으며 이것을 3년간 작성하면 계획하고 실천하는 생활이 몸에 밸 수밖에 없다는 게 박 교감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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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인1실 구조의 명지외고 기숙사. 휴대전화 대신 방마다 전화를 설치했다.

    명지외고는 오전 7시20분~8시10분, 종례 후 오후 4시30분~6시20분, 저녁식사 후 7시20분~9시10분 이렇게 세 차례 특기적성교육이 있다. 흔히 0교시라 불리는 7시20분 수업은 학교가 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운영하고 나머지 시간은 선택이다. 0교시 수업의 경우 월·목요일은 CNN 청취, 화·금요일은 EBS 강의 시청, 수·토요일은 독서(1년치 필독도서가 100권이다)의 날로 정해져 있고, 토요일은 2주에 한번씩 성취도 평가를 한다. 종례 후 수업은 월·수·금 교과 특강, 화·목 비(非)교과 특강이 진행된다.

    진성고도 0교시가 없다. 정일웅 교장은 “교사들은 8시10분까지 출근해 8시30분에 학급조회를 하고 8시40분부터 1교시가 시작된다”면서 “하루 일과가 빠듯한 학생들이 아침시간을 활용해 동아리 활동을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언제 공부를 할까. 진성고는 정규 수업시간 외에는 자기주도적 학습을 권한다. 오전 6시40분~7시30분까지, 오후 7시20분 저녁식사 시간 이후에는 자율적으로 공부하거나 필요한 경우 학생이 과목과 교사를 선택해서 수업을 받는 일종의 학원 단과반 형태의 강의가 진행된다. 진성고의 학습은 일반교육과정, 학생이 과목과 교사를 선택해 들을 수 있는 학원 단과반 형식의 특강, 그리고 교사들이 순번을 정해 학생들을 개별지도하는 질의응답 시간이 있어 학원들의 사교육 수요를 학교에서 흡수하고 있다.

    정 교장은 “시간활용을 잘하는 학생들은 정규수업이 끝난 후 자신에게 부족한 과목을 말 그대로 보충하고, 또 하루나 이틀 전 교사에게 질문지를 제출한 뒤 약속한 시간에 개별지도를 받을 수 있어 사실상 학원과 개인과외 두 가지 효과를 모두 얻고 있다”고 했다. 실제 저녁 9시 무렵인데도 진성고 교무실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학생과 상담 중인 교사, 학습지도안을 연구하는 교사들이 여럿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원으로 갈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남아 있기 때문에 교사들이 직접 방과후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야간담임의 지도 아래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하는 동안 학교 곳곳의 특강실에서는 교사들이 개설한 강좌를 학생들이 선택해 듣는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은 정규수업 외에 2~3개의 강좌를 더 듣는다. 학생들이 몰리는 인기 과목, 인기 교사의 강의는 분반을 해서 이른 아침 한 차례 더 강의를 하기도 한다.

    기숙학교는 학생들이 24시간 학교에 머물러 있으므로 자연 교사들의 귀가시간이 늦어져 9시, 10시가 보통이다. 상산고 정희상 교감은 오전 7시30분에 학교에 와서 저녁 10시나 10시반쯤 퇴근하기 때문에 주중에는 집에서 저녁 먹은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교사가 가정교사와 부모 노릇까지 함께해야 하는 까닭에 학교는 실력과 책임감을 겸비한 교사를 뽑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교사들이 학원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개탄하는 세상이지만 이 학교들은 오히려 학원 명강사를 스카우트해온다.

    4월6일자 ‘상산춘추’(전주 상산고 교내신문)에는 새로 부임한 교사들의 프로필이 실려 있어 눈길을 끈다. 지구과학의 양승국 교사는 서울 학원가에서 명성을 날린 베테랑이었고, 수학의 윤선희 선생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이 학교 이현구 교장(전 서울대 수학과 교수)의 권유로 부임했다. 사회과 김지혜 교사는 잡지사에서, 영어과 문미리 교사는 영국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상산고는 강사를 뺀 교사 수만 75명. 비슷한 규모의 일반학교에 영어교사가 10명 정도라면 상산고엔 원어민 강사를 포함해 17명이나 된다. 새로 교사를 채용할 때는 중앙일간지에 공고를 내고 서류심사와 면접을 거쳐 실제 강의를 하도록 한 뒤 이를 과목별 교사들이 직접 평가하는 대학의 채용시스템을 도입했다.

    한일고도 교사 33명 가운데 14명이 석·박사이며 유명학원에서 스카우트해온 교사가 3명이나 있다. 진성고는 교사들의 우수한 경력·학력뿐 아니라 ‘젊다’는 것이 강점이다. 정일웅 교장은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는 본인이 고등학교 때 얼마나 성실하게 공부했느냐가 중요하다”며 고교생활기록부를 요구하는 특별한 채용방식을 소개했다.

    지역 명문으로 떠오른 한국형 보딩스쿨

    꽃과 나무, 연못이 있는 전주 상산고의 아름다운 캠퍼스 전경.

    명지외고는 올해 초 31명의 교사를 모두 공개채용방식으로 선발했다. 직접 면접을 한 오혜식 교장은 “박사과정을 마친 사람이 셋이고 모두 석사 이상이며 유학파도 많다”고 자랑. 특히 명지학원이 기독교 재단인 까닭에 교사들에게 졸업증명서나 자기소개서 외에 세례증명서, 목사 추천서 등을 요구한 것이 특징이다. 목사이기도 한 오 교장은 “지식만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신앙을 기본으로 인성교육을 할 수 있는 교사를 뽑는 게 우리 학교의 원칙”이라고 말한다. 이 학교는 아침 직원조회 때마다 성경읽기, 찬송, 기도를 하고 매주 월요일 1교시는 전교생 예배시간이다. 종교가 맞지 않으면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기숙학교라고 하면 스파르타식 기숙학원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인성교육을 위한 스포츠와 문화예술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고 등하교 시간의 낭비가 없어 오히려 동아리 활동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이 이들 기숙학교다. 영화 상영이나 초청공연 등도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축제도 학교행사치고는 정말 축제답게 치른다.

    인성교육과 학력의 조화

    공주 한일고는 문(文) 외에도 체(體)·예(藝)의 조화를 강조한다. ‘화랑교육’이라 불리는 한일고의 인성교육 프로그램에는, 기숙사 생활 그 자체가 교육이라는 개념 아래 충무공 전첩지 횡단순례, 한·중·일 문화교류, 태권도, 기타, 스키, 수영, 래프팅 등이 추가된다. 태권도의 경우 일주일에 두차례 수업이 있어 졸업 때면 누구나 1단 이상의 유단자가 된다. 기타 역시 필수과목이다.

    한일고에는 교복이 없다. 그래서 ‘3무(無)학교’(교문, 교복, 공해가 없다는 뜻)로 알려져 있는데 양교석 교장은 “기숙사 생활 자체가 통제일 수밖에 없는데 시시콜콜한 것까지 간섭하지 말자는 게 학교방침”이라며 ‘자율과 창조’라는 교훈을 가리킨다.

    이 교훈이 가장 빛을 발했던 것은 지난해 수학여행.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배우는 터라 매년 중국으로 수학여행을 갔지만, 사스(SARS)로 인해 행선지를 일본으로 바꾸게 됐다. 4박5일 일정 중 오사카에서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자유시간을 주어 인솔교사 없이 학생들끼리 4인1조로 자유여행을 하도록 했다는데, 나중에 학생들은 이 날 체험을 수학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다. 교장을 비롯해 인솔교사들은 하루 종일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역 명문으로 떠오른 한국형 보딩스쿨

    방마다 화장실이 있는 상산고 기숙사 내부.

    전주 상산고의 자랑 중 하나가 지난해 준공한 멀티미디어 강의동이다. 15석, 30석, 60석 규모의 소강의실과 180석, 190석 규모의 계단식 강의실(800석 규모의 강당 별도)을 둘러보면 웬만한 대학보다 낫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설을 활용한 수업. 정규교과 외에 매달 명사초청 특강이 열린다. 지난 한해만 서울대 정운찬 총장(경제학), 황우석 교수(수의학), 유시야 외교통상부 본부대사 등 20명이 다녀갔다. 정희상 교감은 “평소 의대·법대만 알던 학생들이 특강을 듣고 나서 진로를 수정하기도 한다”고 했다.

    ‘수학의 정석’의 저자인 홍성대 이사장이 세운 학교답게 ‘수학특강’은 이상할 게 없지만, 성악가가 직접 지도하는 음악수업이 이채롭다. 정 교감은 “국내외 가곡을 배우는 것이 정서에 도움이 된다는 측면도 있고 국제적으로 활동하려면 그 나라 노래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학교 생각”이라고 했다. 여기에 전북대 윤석민 교수팀이 진행하는 17주짜리 ‘글쓰기 특강’과 교기인 태권도 수업이 있다. 상산고 캠퍼스에는 태권도 전문수련장인 상도관이 있다.

    어느 학교나 기숙사의 규율은 엄격하다. 오전 8시를 전후로 등교를 하면 기숙사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해서 아예 문을 잠그는 곳이 많다. 이렇게 해서 등교와 하교, 학습과 생활을 명확히 구분한다. 명지외고의 경우 오후 9~11시까지 이어지는 자기주도학습(자율학습) 시간에 교실이 아닌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도서관에는 전교생 각자의 지정석이 마련돼 있다.

    기숙사의 소등시간은 자정에서 1시 사이로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고 기숙사 안에 별도의 공부방이 있어 1시간 정도 더 연장할 수 있지만 결코 밤새우는 공부를 권장하지 않는다. 전주 상산고 이현구 교장은 평소 학생들에게 “진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눈 뜨고 있는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밤 12시가 넘으면 가수면 상태가 되고 능률도 오르지 않는 데다 다음날 수업시간에 졸게 되므로 12시 반이면 어김 없이 불을 끈다는 것이다. 논산 대건고의 공부방도 새벽 1시면 문을 닫지만 시험 때는 2~3시까지 허용하기도 한다. 복도 비상구 옆에서 책을 펴는 ‘지독한 녀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장 개방한다고.

    기숙사 생활을 처음 하는 학생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부분이 아침기상점호다. 밤늦게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다 아침에는 부모와 싸우다시피 해서 눈을 뜨고 학교에 가는 생활이 몸에 밴 아이들은 아침점호가 힘겹기만 하다. 한일고 기숙사 관리교사인 윤석원씨(한일고 1회 졸업생이기도 하다)는 “점호만 하고 다시 들어와 잠이 드는 아이들이 많아서 깨워 학교 보내는 것이 큰 일”이라고 한다. 기숙사와 교실이 5분 거리도 안 되지만 지각하는 학생도 있다.



    휴대전화나 노트북 소유는 학교에 따라 규칙이 다르다. 상산고처럼 휴대전화를 소유하되 일과시간 중 가지고 다니다 눈에 띄면 그 자리에서 압수당하는 학교도 있고, 진성고의 경우는 아예 반입금지다. 또 기숙사 방에서 노트북 사용을 허용하지만 학교 컴퓨터실이 잘 갖춰져 있어 학생들이 굳이 개인 컴퓨터를 고집하지 않는다.

    각 학교가 휴대전화보다 더 엄격하게 반입금지물품으로 규제하는 것이 음식물이다. 자녀를 기숙학교에 보낸 뒤 노심초사하는 부모들이 간식과 보약을 싸들고 오는 일이 잦아 아예 학부모의 기숙사 출입을 금지시킨 학교들이 많다.

    상산고 정희상 교감은 “빨래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겠다면 뭣 하러 자녀를 기숙학교에 보내느냐”며 부모들의 과잉보호에 혀를 찼다. 명지외고 기숙사 로비에는 면회실이 있어 여기까지만 학부모의 출입이 가능하다. 진성고는 매년 1학년 학부모를 대상으로 1박2일 생활관체험행사를 열어 낯선 기숙사 생활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도록 한다.

    한일고 기숙사 복도에는 업소에서나 쓰는 대형 냉장고 3대에 부모들이 보낸 보약이 꽉 차 있다. 양교석 교장은 “자녀의 기숙사 생활을 안쓰럽게 여기는 부모들도 있으나 아이들은 간식이나 보약이 필요 없을 만큼 충분히 먹고 충분히 건강하다”고 했다.

    번거로울 것만 같은 기숙사생활이지만 그렇게 3년을 동고동락하면 각별한 우정이 쌓인다. 진성고 3학년 양애연 양은 “기숙학교를 창살 없는 감옥쯤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는 많이 놀아요”라고 말한다. 2학년 때 학생회장을 맡아 “동아리 활동 1년을 결산하는 학교 축제인 ‘효천제’를 기획하고 진행한 일이 가장 기획에 남는다”는 양양은 “기숙사 생활이 힘들수록 친구들과 더 친해지기 때문에, 대학 가서 사귄 친구와 기숙사 친구는 차원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했다.

    기숙학교들은 공동체 생활을 통해 인성교육과 학력신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사교육에 매달리지 않고 다양한 전인교육을 받으며 학교수업에만 충실해도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이상(理想)은, 적어도 이 학교들 안에서는 가능해 보였다. 이들이 소위 지역 ‘명문’으로 알려지고 해마다 입학경쟁률이 높아지는 이유도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비평준화 혹은 특수목적고, 자율학교, 자립형사립고라는 이름으로 거르고 걸러진 소수에게만 이런 환경에서 공부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이 때문에 일부 기숙학교는 ‘귀족학교’라는 의혹도 받고 있다. 성적우수자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학생들도 무공해 환경에서 인격을 함양하며 하고 싶은 공부를 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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