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무소유 실천하며 진리 찾는 데니&젬마 부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원하는 대로만 살겠다, 하하!”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4-12-27 18: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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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사람은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 직업도 집도 아이도 없다. 신용카드, 보험, 주식도 없다. 그러나 이들은 다 가졌다. 충만한 사랑과 고요한 평화. 삶을 즐기는 진정한 자유. 북한산 자락 밑 7평짜리 비닐하우스에 둥지를 튼 데니와 젬마 부부. 이들을 만난 후 마음속에 빛을 품은 듯 따스해졌다.
    무소유 실천하며 진리 찾는 데니&젬마 부부
    데니와 젬마를 알게 된 건 단연코 2004년 최고의 수확이다. 말도 안 되는 잡동사니 질문에도 데니는 정확하게 정답을 내놓는다. 문제를 극도로 단순화시켜 핵심을 단숨에 짚어낼 줄 안다. 데니의 비닐하우스 문을 밀고 나오며 나는 다짐한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여기에 오자. 그러면 간단하게 해답이 나와!

    데니는 무욕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직업도 집도 아이도 없고 가구, 텔레비전도 없다. 자본주의의 3대 무기라는 신용카드, 주식, 보험이 다 없다. 신용카드의 편리성, 주식의 수익성, 보험의 보장성은 모두 데니가 지향하는 삶이 아니다. 은행 통장 자체가 없다. “나는 보험 대신 신을 믿고, 카드 대신 현금을 사용합니다”라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히히 웃는 데니. 그에겐 아이 같은 천진이 있다. 아이 같은 천진? 그건 질문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단순성, 선입견에 오염되지 않은 눈, 새로움에 이끌리는 호기심과 온몸 가득 넘치는 활력과 장난기다.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을 때 데니는 맑은 눈으로 나를 봤다.

    “일과요? 우린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요. 시간에 맞춘 일과 같은 건 없어요, 하하. 모든 걸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 합니다. 마음이 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해요. 몸과 마음과 영혼이 원하는 장소에만 가고 원하는 사람만 만나요. 그 반대의 일은 해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요.”

    동시대를 살면서 이런 대자유가 있었다니. ‘어른이 된다는 건 하기 싫은 일도 할 줄 알게 되는 것’이란 슬픈 정의를 가진 나 같은 사람의 머리를 꽝 울리는 말을 데니는 아무렇지 않게 한다.



    “이런 삶을 선택하고도 오랫동안 ‘식사는 시간 맞춰 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불편하게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젠 그것도 벗어났어요. 딱히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어도 우리는 배고프지 않아요. 식사가 꼭 밥이어야 하나요? 고구마로도 차로도 과일로도 얼마든지 식사를 대신할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에게 시간에 맞춰 해야 할 일은 거의 없는 거죠. 몇 해 전부터는 메모장을 버렸어요. 기억나는 건 약속이고 기억나지 않는 건 약속이 아닌 거예요. 그래도 문제 될 게 없던데요. 꼭 필요한 약속이라면 생각이 안 날 리 있나요?”

    하긴 내가 전화 걸어 인터뷰 시간을 잡자고 했을 때도 데니는 “언제든 오세요. 우리 집은 24시간 개방체제예요”라고 했었다. 그래도 굳이 시간을 못박아둬야 안심하는 내가 “그래도 몇 시쯤?” 하며 자꾸 안달을 해도 “아무 때나 편할 때 문 열고 들어오라”고 했었다. 그게 바로 이거였구나.

    기차의 맨 끝자리인 양 콤팩트하고 포근한 방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데니와 젬마 그리고 나는 새벽이 훤하게 밝아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과연 그들의 삶은 충만이었다. 다 버리고 사는 그들 곁에 앉으니 ‘충만을 느끼기가 아주 쉽구나’라고 나는 생각했다.

    7평짜리 ‘마운틴’

    데니와 젬마의 집은 북한산 아래 7평짜리 비닐하우스다. 정확히 말하자면 7평짜리 컨테이너 박스에 양옆으로 2.5평, 1.5평짜리 비닐하우스가 하나씩 덧붙여진 형태다. 집 앞 사각형 나무판 위엔 ‘마운틴’이란 그림 같기도 하고 글씨 같기도 한 간판이 걸려 있고, 비닐창문 앞엔 대나무가 열 그루 자라고 있다. 창 안으로는 겨울인 데도 자스민 줄기가 푸른 잎을 넘치게 피워 올렸다. 마운틴은 생명이 싱그럽게 자라는 집이다. 그들은 이 집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오면가면 들러 차 한 잔 마시고 갈 수 있는 장소로 개방해뒀다. 이곳이 데니와 젬마의 일터이고 집이다.

    집을 평수로만 계산하는 짓이 얼마나 졸렬한 수작인지를 마운틴에 가보면 안다. 마운틴은 욕망과 물신과 자본주의의 해방구다. ‘행복과 충만은 손에 쥔 물질의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되풀이된 선언, 그러나 사람들의 욕망과 이기심 앞에 언제나 맥 못 추던 그 선언의 원형이 마운틴엔 생생하게 실재한다.

    쉰넷의 데니와 마흔일곱의 젬마는 관청에 신고한 이름 지동암과 김미순 대신 천주교 세례명으로 서로를 부른다. “어디 있어? 젬마!” 하면 하이 톤의 젬마가 “왜 그래요, 데니?”하고 달려온다. 니키라는 노래 부를 줄 아는 개가 한 마리 있어 식구는 모두 셋. 이 셋은 똘똘 뭉쳐 서로 맹렬하게 사랑한다. 집이 만약 넓었더라면, 30평, 40평, 50평 집에 온갖 가구와 가전제품, 여분의 옷과 장식구를 가득 채웠더라면, 그들은 그토록 밀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마운틴에서 무조건 행진하던 발걸음을 일단 멈췄다. ‘더 많이, 더 크게’를 향한 갈망을 회의했고 ‘바쁘게 일하는 게 선’이라는 일차적 판단을 반성했으며 지금 내가 누리는 터무니없는 풍요에 당황했다.

    마운틴은 ‘사람이 잘 산다는 게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질과다의 시대에 우리가 꼭 한번 마주쳐야 할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삶이란 다툼이 아니라 즐거움임을, 깊은 평화는 물질로 얻을 수 없음을, 빈손일 때 인간은 진정 강해진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것도 아주 가볍게. 젬마가 빈 꿀병에 가득 꽂아놓은 강아지풀처럼 대수롭지 않게. 아주 무심한 터치로!

    출산·양육·재산증식을 거부하고

    전에 데니는 예수회의 수사였다.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까지 9년 동안을 거기서 보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실천가 기질이 강했던 데니에게 당시 수도회 내부를 강타한 해방신학과 보수신학의 갈등은 견디기 어려웠다. 고민하다 결국 사제의 길을 포기하기로 했다. 외롭고 힘겨웠다. 누군가 사람에게 기대고 싶었다. 데니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이야기나 나눠보라고 소개해준 사람이 젬마였다.

    데니를 처음 만났을 때 젬마는 그의 작은 키가 영 마음에 걸렸다. 실망하는 젬마에게 천성적으로 밝고 긍정적인 데니가 말했다.

    “젬마씨,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다시 한번 봐주세요. 내 키가 정말 그렇게 작아요? 다른 사람들은 키가 위로만 자라 뿌리가 얕지만 나는 아래로도 자라 뿌리가 깊어요. 전체 길이를 따져보면 내가 그들보다 훨씬 크다고요” 하며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젬마에겐 그 모습이 그렇게나 순진하고 진지해보였다.

    또 데니는 “사람은 청빈해야 내면의 힘이 생겨 행복해져요. 청빈이란 무욕과 정직입니다”라고 말했고, ‘사랑받는 날에는’이란 시집을 건네주면서 “가짜일지라도 누군가가 오랫동안 진심으로 사랑해주면 그 누군가에게는 진짜가 되죠. 그리고 사람은 한번 진짜가 되면 영원히 진짜가 되는 거예요”라고도 했다.

    마음을 울린 데니의 프로포즈

    데니의 그런 얘기들은 젬마의 마음에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다니엘 수사님을 잊을 수 없게 됐다. 그리하여 서른넷의 데니와 스물일곱 젬마는 결혼을 결심한다.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 일이다.

    결혼하면서 둘은 출산, 양육, 집 마련, 집 늘리기, 재산 불리기라는 삶의 일반과정을 걷지 말자는 데 동의했다. 대신 함께 추구할 게 있다는 데 합의했다. 남들이 다들 정신없이 달려가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려서자 세상은 완연히 달라졌다. 결혼에서 딱 그치고 출산, 양육, 재산증식을 사양하자 출퇴근, 일, 경쟁, 피로가 모조리 생략됐다. 온갖 ‘지지고 볶고’가 다 소용없고 오로지 둘이 마주 누워 새소리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걸로 충분하고 충만했다. 자연히 산에 올랐다. 아니 반대다. 산에 오르면서 충만과 무욕을 배웠다.

    결혼 당시부터 그들의 집은 북한산이었다. 산이 집이고 별장이고 작업실이었다. 나는 데니와 젬마의 집을 알고 나서 마음속에 빛을 품은 사람처럼 따스해졌다.

    그들의 살림살이는 지극히 간소하다. 물건이 없으니 마운틴은 좁아도 전혀 옹색하지 않다. 데니의 집에서 손으로 까먹는 귤이 초호화 타워팰리스에서 먹는 맛보다 못할까. 아니, 마운틴의 과일이 더 달다는 데 나는 한 표를 던지겠다. 산에서 주운 말라빠진 밤 한 톨도 귀하게 여겨 입에 녹여 단맛을 우려낼 줄 아는 그들이다. 음식의 근원을 생각하며 입에 넣는 과일이니 원래의 맛과 향이 최대한 풍길 수밖에.

    데니와 젬마의 살림은 ‘각자 큰 배낭 하나에 꾸려 어깨에 메면 족할 만큼’만 있다. 그 이상의 소유는 짐이다. 언제든 앉은 자리에서 털고 일어설 수 있게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당장 필요치 않은데도 쌓아두고 싶은 욕망을 지우고 나니 자유가 찾아왔다. 맑은 밤이면 그들은 산으로 올라간다. 산꼭대기 적당한 곳에 잠자리를 편다. 나란히 누워 너무 찬란해 잠들 수 없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새벽빛, 해돋이. 아침을 맞는 꽃과 새들의 청명과 천진을 함께 보고 바람결, 솔향기, 물소리를 함께 느낀다.

    젬마는 넙적한 바위를 책상삼아 글을 쓰고 데니는 가까운 샘에서 물을 길어온다. 차를 끓이고 과일과 떡으로 아침상을 차려 젬마 앞에 대령하는 건 데니의 몫이다. 이게 그들의 일상이다. 도시적 삶을 버리고 돈과 자식을 포기하고 얻은 자연과의 합일이다.

    “데니, 행복이란 뭐지요?”

    이런 질문에 데니만큼 선명하게 말할 이가 또 있을까.

    “기쁨과 평화죠. 재미와 편안한 마음이죠. 기쁨과 평화는 찰나적인 쾌락과는 달라요. 다들 행복이 쾌락 속에 있는 줄 알지만 쾌락은 지속력이 없어요. 평화를 얻으려면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데 물질에 욕심을 내면 마음은 자꾸 흔들릴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나 집을 사양한 그들에게도 최소한의 벌이는 필요했다. 집은 텐트와 침낭이 대신할 수 있지만 바위 위에 차릴 멋진 식탁의 내용물들은 벌어들여야 했다. 사람은 공중에 나는 새가 아니니 벌레를 먹고 살 수는 없지 않겠나. 하긴 과일과 떡을 산에서 제공받는 일도 자주 있긴 했다. 치성 드리는 사람들이 일쑤 동굴 앞에 두 사람 먹기 넉넉한 음식을 두고 갔다. 데니와 젬마는 그 음식에 담긴 발원을 반드시 이뤄주십사 산신령께 빌곤 감사하게 그걸 나눠 먹는다.

    자연과의 합일

    그들은 북한산 아래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4평짜리 공간을 얻어 마운틴 간판을 걸었다. 찻집이었다. 찻집이래야 고작 테이블 4개를 들여놓았을 뿐이었다. 새벽마다 데니가 북한산에서 맑은 물을 길어오고 손끝 야문 젬마가 정성 들여 커피를 끓였다. 하루 여덟 잔을 팔면 집세 는 낼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다. 불광동 북한산 등산로 입구의 4평짜리 찻집 마운틴은 제법 소문난 명소가 됐다. 7, 8년 터를 잡았던 그 집은 얼마 전 도시개발로 헐리게 됐다. 지난 여름 마운틴은 할 수 없이 이사를 했다. 바로 길 건너로!

    “불광동 1번지에서 녹번동 1번지로 옮긴 거예요, 하하.”

    예전 마운틴은 월세 20만원을 부담해야 했지만 새로 옮긴 집은 월세가 없다. 이젠 하루 다섯 잔만 팔아도 족하다.

    물론 처음부터 찻집을 차리려던 건 아니었다. 결혼 후 맨 처음 선택한 생업은 농사였다. 데니의 고향인 평창에 내려가 농사를 짓기로 했다. 시골로 간 그들은 밤늦도록 관련서적을 읽고 농촌진흥청에 문의해 수박 농사 짓는 법을 익혔다. 데니는 뭐든 철저했다. 다른 사람들은 30㎝ 간격으로 뿌리는 수박씨를 2m 간격으로 뿌렸다. 쓸데없는 곁가지는 쳐내고 큰 가지만 남겼고 수박 하나하나를 수십 번 매만지며 공을 들였다. 몇 달 후 결국 남들보다 두 배나 큰 수박을 수확해냈다.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수박을 따서 트럭에 가득 실어놓은 그날 밤 엄청나게 비가 쏟아졌다. 장마였다. 결국 1년을 피땀 흘려 지은 수박농사는 운송비도 못 건지고 말았다. 농사에는 성공했지만 장사에는 실패한 것이다. 자연의 땅은 정직하게 땀의 대가를 돌려주지만 사람의 땅은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둘은 얼른 항복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친구들의 도움으로 찻집 주인이 된다. 데니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늘 찻집 안에 그득했다. 그들은 신과 인간과 삶과 사랑을 말하느라 일쑤 밤을 새웠다. 데니가 학생들과 이야기한 철학과 신학은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이었다. 데니와 문답을 주고받는 중에 그들은 저절로 한 소식씩을 얻어가곤 했다.

    기적은 이뤄지고

    찻집은 홍제동에서 홍지동으로, 다시 불광동으로 세월 따라 이사를 했고 데니에게 인생과 진리를 배우던 학생들은 그 사이에 교수도 의사도 건축가도 되었다. 새로 이사한 녹번동 마운틴은 이화여대 건축과의 김광수 교수가 설계했다. 그는 학생 때부터 마운틴을 드나들던 데니의 가까운 친구였다. 김 교수 패들이 완전 빈털터리로 찻집을 떠나게 된 데니와 젬마를 위해 뭔가 궁리를 시작했다.

    “불광동 집을 비워줘야 할 때 주변에서 다들 ‘이제 어떡할래’ 하며 걱정들이 대단했어요. 나는 일단 히말라야로 가겠다고 했어요. ‘보증금 1000만원이 있으니 그걸로 히말라야로 간다. 나중 일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한다’고 선언을 했죠.”

    그렇게 공표하고 나자 일단 안심이 됐다. 걱정은 의미도 소용도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궁리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은 데니의 생활 속에서 늘 거짓말처럼 나타난다. 산꼭대기 바위 뒤에 앉아 ‘라면이 하나만 있었으면’ 하고 뇌까리면 지나가던 등산객이 배낭에서 라면을 하나 꺼내주고, ‘사과가 딱 하나 모자라네’ 싶으면 누군가 턱 나타나 사과 하나를 건네준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법하지 않은 장소에서도 늘 그랬다. 심지어 등산용 내복이 필요하다 싶을 때는 나뭇가지에 한 군데만 찢긴 새 내복이 걸려 펄렁거리기도 했다.

    이번 기적의 내용은 김광수 교수가 베니스 비엔날레 초청작가로 선정된 것이다. 새로운 개념의 주택을 모색하던 그는 가볍고 작고 부드러운 집을 지어보기로 작정한다. 값싸고 부드러운 재료로 빨리 지을 수 있는 집. 비닐만큼 맞춤한 게 없다. 김 교수가 컨테이너와 비닐로 만지면 말랑말랑한 7평짜리 집을 짓자, 또 우연인 듯 평소 가깝게 지내던 수녀님의 여동생이 산 아래 자그만 공터를 쓰라고 내놓았다. 집은 거기에 세워졌다. 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집이 생겼다.

    무소유 실천하며 진리 찾는 데니&젬마 부부

    북한산 자락 밑 작은 공터에 마련된 데니와 젬마의 집, ‘마운틴’. 컨테이너와 비닐로 지어진 7평짜리 소박한 공간이다.

    “나는 집이 크고 딱딱할 게 아니라 작고 부드러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집이 작으면 욕망 조절이 쉬워져요. 욕망이 조절되면 그만큼 평화가 오기 쉽죠.”

    컨테이너 박스 한 쪽엔 나무장식을 덧댄 방을 만들어 침실로 쓰고 그 방의 벽면 한쪽엔 거울을 붙였다. 침실 바닥은 수납공간이다. 손님이 오면 얼른 침구와 옷을 쓸어 담아 딱 닫으면 감쪽같다. 맞은편은 한 사람만 들어설 수 있는 자그만 조리대. 좁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지금까지 화장실을 따로 써본 적이 없어요. 청소는 언제나 내 몫이었는데, 암만 열심히 청소해도 누군가 더럽혀놔요. 그때마다 마음의 평화가 깨져 우리만 쓰는 화장실이 있었으면 싶었는데 그게 또 이뤄졌지요.”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이니 제작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모자라는 돈은 데니의 친구들이 십시일반 보탰다. 되려 돈이 남아 집이 헐리면 떠나려던 히말라야를 집을 새로 짓고도 다녀올 수 있었다. 이사하는 날 마운틴의 집들이에는 둘의 친구가 150명쯤 모였다. 7평에 150명이?

    “충분했습니다. 컨테이너 박스 옥상에서 60명이 함께 미사를 올렸다니깐요. 그래도 무너지지 않던데요. 아주 조용하고 말이죠. 믿어지지 않으세요? 하하.”

    요즘 둘은 지붕 위에 텐트를 치고 잔다. 빨래는 싱크대에서, 밥은 코펠과 버너에 하는 데 익숙하다. 자그만 냉장고는 있지만 텔레비전, 세탁기는 없다.

    TV와 전기장판을 버린 이유

    텔레비전 이야기! 한번은 데니가 길에서 텔레비전을 하나 주워왔다. 말짱하게 화면이 잘 나왔다. 너무 재미있었다. 둘 다 멍하니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 보니 며칠이 휙 지나갔다. 산에도 못 갔고 바둑도 못 두었고 그 좋아하던 차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텔레비전은 욕망을 재생산하는 기계였다. 광고는 욕망을 부추겼다. 뭔가 자꾸 허전해지고 모자라는 심정이 생겨났다. 텔레비전 있으니 영화 보게 비디오를 하나 살까 싶고, 이참에 세탁기도 하나 살까 싶은 유혹도 생겼다.

    “바로 이 욕심 때문에 사람들이 불행해지잖아?”

    데니가 벌떡 일어나 텔레비전을 포장했다. 젬마는 말없이 거기 붙일 꼬리표를 만들었다. ‘아직 쓸 만하니 꼭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

    전기장판도 마찬가지였다. 춥게 잔다고 이웃에서 안 쓰는 전기장판을 들고 왔다. 둘은 바닥 난방이 안 되니 늘 꼭 껴안고 잤다. 전기장판을 깔자 체온이 필요없어진 둘은 서로를 자꾸만 밀어내고 있었다. 젬마는 데니와 한 치의 틈 없이 껴안고 자는 것이 전기장판 위에서 자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며칠 후 전기장판 또한 그들에게서 퇴출당했다.

    이런 것보다 탈수기 이야기가 내게는 더 통쾌했다. 빨래는 싱크대에 돌을 놓고 하지만 청바지 따위가 잘 마르지 않는 게 늘 문제였다. 세탁기말고 탈수기 하나쯤은 필요하다 싶었다. 그러나 둘 만한 장소가 없었다. 그러다 휴지통 크기의 자그만 탈수기를 발견했다. 식당에서 쓰는 음식물용 탈수기였다. 양말을 탈수하면 그렇게도 안 마르던 등산용 양말이 금방 마르는 게 신기했다. 청바지를 넣어봤다. 청바지가 너무 커서 뚜껑이 잘 닫히지 않았다. 젬마는 한참을 고심하다 청바지 밑단을 가위로 조금 잘라냈다. 뚜껑이 싹 닫혔다. 젬마는 기뻐서 데니를 불렀고 달려온 데니는 여느 때와 똑같이 “잘했어, 젬마!” 하며 싱글벙글했다.

    나는 의심을 가득 담고 데니에게 물었다.

    “사람이란 원래 한계 안에 갇힌 존재 아닙니까. 이기심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고요. 과연 언제나 행복하다는 게 가능합니까?”

    데니는 내 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고도 4000m에 가보고 알았어요. 히말라야 산간마을엔 음식이 귀하지만 아무도 굶주리지 않아요. 원시상태 그대로죠. 개들조차 먹을 것에 확 달려들지 않아요. 그냥 주면 먹지도 않아요. 두 손으로 건네줘야 받아먹지요.

    그런데 고도가 낮은 곳에 이르면 물산이 풍부한데도 그렇게 거지가 많고 병든 개들이 많아요. 부처님 탄생지에서 인도까지 내려가려다 나는 그곳의 추악함을 보기 싫어 다시 히말라야로 올라와버렸어요. 불행은 탐욕, 무관심과 분배의 불공정 때문에 생기는 거지 가지고 안 가지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이기심은 사회문화적 현상이지 인간 본능은 아닐 거라고 나는 믿어요.”

    처음 히말라야에 갔을 때 데니와 젬마는 안나푸르나의 토롱 패스라는 고개에서 신을 만났다. 신의 실체는 바람이었다. 모든 것을 휘몰아갈 수 있는 장엄하고 강렬한 신의 모습. 그 앞에서 자신은 흙 한 줌도 아닌 먼지 한 톨임을 깨달았다.

    “흙은 그래도 자아가 있잖아요. 꽃을 피우려 하고 무게가 있으니 낮은 데로 내려가려 하고. 먼지는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쓸려갈 뿐이지요. 내가 먼지 한 톨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아무것도 불안할 게 없어졌어요. 그때까지 나의 주어는 나였는데 알고 보니 신이 나를 살게 해준 것이더라고요. 나라는 주어를 빼니 세상이 잘 들여다보였어요.”

    히말라야 체험 이전까지 친구들이 “너희들,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더 늙으면 어쩔래?” 하고 물으면 아닌게 아니라 대답이 궁했었다. 슬금 불안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히말라야 이후로는 그런 불안이 사라졌다.

    데니는 왜 이런 무욕의 삶을 선택하게 됐을까. 대개 유년을 들여다보면 현재를 해명해주는 대답이 들어 있다.

    그는 가난한 강원도 산골짜기 마을 6남매의 장남이었다. 박정희의 혁명공약을 외우면서 컸다.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민중을 구제하고’라는 구절이 구구절절 공감되어 박정희를 존경했다. 군인이 되고 싶었다. 열 살 때쯤, 담임선생님과 함께 학교에 안 나오는 친구 집에 찾아갔다. 온 가족이 방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굶어서 탈진해 지금 죽어가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날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처음 서양 신부님을 봤다. 신부님이 아니라 신부님 댁에 있는 수세식 화장실과 자가발전 전기시설을 보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문명세계를 엿본 충격이었다.

    “그때 이미 엠보싱 화장지를 쓰고 있더군요.”

    중학교 졸업 후엔 진학할 형편이 못 돼 2년을 집에 남아 일했다. 그때 데니의 행동을 보면 그의 기질을 읽을 수 있다. 데니는 치밀한 실천가였다. 동네 4H클럽 형들을 설득해 간이 상수도를 만들고 농촌지도소를 쫓아다니며 변소 개량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청소년 모심기단을 만들어 품삯을 받아 비용을 마련했다. 모두 신부님 댁에서 받은 문화충격의 영향이었다. 그 산간마을은 1960년대 초반 열네 살 소년의 각성으로 부엌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쏟아지는 마을이 됐다.

    “일종의 사회운동이랄까. 농촌과 가난과 노동체험을 그때 했었죠.”

    개똥철학자의 수도회 입문

    2년 후 자신의 품삯으로 원주에 있는 고교로 진학하고 거기서 제럴드 엘리스라는 아일랜드 출신 신부님을 만난다. 탐구심 넘치는 지동암 학생은 그 신부님의 사제관 작은 방으로 아예 짐을 싸서 들어가 4년을 함께 산다. 신부님의 영향 아래 독서하고 신부님 심부름으로 강릉, 춘천, 정선 같은 곳의 성당을 찾아다니며 다른 외국인 신부님들을 만난다. 데니의 말 속에 자주 등장하는 서양어휘들은 그때 입에 밴 것들이다.

    “그때 신부님이 주신 래디컬 바이블을 읽었어요. 지학순 주교님이 펴낸 손바닥만한 책으로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들어 있었어요. 엘리스 신부님은 진정 신부님다운 신부님이었지요. 해방신학적 입장을 가지신 분이셨어요. 나는 나중 해방신학과는 다른 제3의 길이 없나 모색하는 쪽이었지만.”

    당시 학교에서 지동암 학생의 별명은 개똥철학자였다. 시몬 베유, 로자 룩셈부르크, 엥겔스, 마오쩌둥, 루이제 린저 같은 혁명가와 사상가들의 책을 주로 읽었고 친구들 앞에서 그런 얘기들을 자주 입에 올렸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신부님과 미국 신부님의 차이도 그때 알았어요. 아일랜드 신부님은 물건이 많지 않아요. 검소하고 조용하고 음악도 별로 듣지 않았죠. 반면 미국 신부님은 대체로 사치스럽고 혼란스럽고 릴테이프로 음악을 크게 틀어요. 집 안에 캔맥주가 가득하고 물건들이 잔뜩 들어차 있죠. 한국 신부님들도 대개 미국 신부님 쪽이에요. 신자들보다 신부님 살림이 더 풍성했으니까요.”

    중학교 때 구경했던 미국 신부님의 풍요의 세계를 오래지 않아 비판하는 눈을 갖게 된 건 엘리스 신부님 덕분이었다. 졸업 후 진로가 ‘성직자 되기’란 건 신부님과 은연중에 이뤄진 교감이었다. 엘리스 신부님은 수도회를 일단 다 둘러보고 결정하라고 했다. 프란체스코와 분도, 예수회, 순교복자수도회란 곳을 차례로 둘러봤다.

    전례가 아름답고 식사가 좋고 삶을 개미들같이 질서정연하게 유지하는 공통점이있었지만 각 수도회마다 이미지가 조금씩 달랐다. 분도는 성가가 아름다웠고 예수회의 매력은 청빈이었다. 당시 청계천에서 빈민운동 하시던 정일우 신부님은 가장 가난한 삶을 실천하고 계셨고, 서강대 이사장인 지구장 신부님은 불도 없는 허름한 창고 안에서 눈빛만 형형하게 번득이고 계셨다. 예수회를 택했다. 정일우 신부님처럼 살고 싶었다. 저 어린 날 굶주림에 죽어가던 친구 가족에 대한 애통함이 있었다.

    무소유 실천하며 진리 찾는 데니&젬마 부부

    이화여대 김광수 교수가 설계한 작은 집에 데니와 젬마, 애완견 니키가 맹렬히 사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데니는 결국 십 년 후 수도회를 떠나고 만다. “당시 내가 하려던 것은 정치였지 종교는 아니었어요. 좋은 세상을 바꾼다는 것 자체가 세상을 자기주장대로 끌고 나가겠다는 일종의 폭력이거든요.”

    왜 수도회를 떠났냐고 누가 물으면 데니는 “성소가 부족해서”라고 답한다. 하느님의 이끄심이 부족한 게 아니라 자기가 하느님께 이끌려가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진리를 찾는 걸 포기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삶은 ‘진리를 디스커버링하는 과정’이라고 여기고 있다.

    ‘무심명철통삼계(無心名徹通三界)’

    “진리가 도대체 뭐냐”고 묻는 내게 데니는 “차라리 지금까지 찾아낸 진리가 뭐냐”고 물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바꿔 물었더니 데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의도 도덕도 사랑도 진리라고 말하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찾은 진리는 생명을 키우고 가꿔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생명은 진리를 되반사하는 존재예요. 생명은 크고 작고도 없어요. 알렉산더 대왕도 바이러스 하나에 무너져 신의 입장에서 보면 약육강식도 없어요. 경중이 없이 똑같이 먼지처럼 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거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인간과 똑같이 소중한 생명이에요.

    서로 바라보며 ‘너 참 좋구나, 너 참 아름답구나’ 해가면서 서로의 생명을 아끼고 지켜 소중하게 다뤄주는 것이 진리예요. 사람만큼 고집불통이고 싹쓸이 해버리는 생명체는 없어요. 다른 생명을 꽃피워줄 줄 알아야 제대로 된 생명이에요. 그게 현재 내가 찾은 진리입니다.”

    어느 날 늘 가던 절에서 데니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북한산 각황사라는 자그만 절 기둥에 오래전부터 쓰여 있던 글귀를 보고서다. 커피를 한 잔 빼서 소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무심명철통삼계(無心名徹通三界)’ 일곱 글자가 빛살처럼 눈을 쏘고 들어왔다. 지금까지 그가 찾아다니던 것의 대답이 거기 있었다. 히말라야의 절대공간 아래서 막연히 느꼈으나 문자화할 수는 없었던 바로 그 깨달음. “무심명철통삼계!” 데니는 키득거리며, 리듬에 맞춰 구호처럼 그 말을 외친다. 어감이 약간 장난스럽기조차 한 그 말 안에 데니가 찾던 평화와 기쁨의 정답이 요약돼 있었다.

    우이동 도선사 입구에서도 같은 발견을 했다. 늘 다녀도 눈에 띄지 않던 구절이 어느 날 천둥 같은 울림으로 둘의 앞을 막았다. 도선사 입구 돌기둥 네 개에 쓰인 글귀였다. ‘자비무적’ ‘천지동근’ ‘만물일체’ ‘방생도량’.

    “방생도량이 뭔지 아세요? 바로 생명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곳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실제 잡은 고기를 다시 물에 풀어주기도 하지 않습니까. 불교도의 방생도량은 절이지만 우리의 방생도량은 산이죠.”

    ‘서양을 돌아 동양으로 왔군요’라거나 ‘가톨릭을 지나 불교에 도달했군요’ 같은 말이 하고 싶어 나는 자꾸 입을 벙싯댔다. 그러나 그게 그런 식의 이분법으로 쪼개질 수 없다는 게 바로 그 말의 뜻 아닌가.

    생명을 정화하는 산

    요즘 데니의 스승은 단연 산이다. 한 때 김수환 추기경이 그의 스승이었다면, 지금은 북한산이고 안나푸르나고 에베레스트다.

    “높이는 모든 생명을 정화해줘요. 한때는 알프스도 가고 요세미티도 가고 싶었는데, 그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히말라야를 만났어요. 나는 산악인이 아니니 오대양 육대주를 섭렵할 필요는 없거든요. 내게 산은 도장(道場)의 의미니까.”

    한때 그에게 누가 등산을 권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내가 강원도 출신이야. 산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해.”

    그러던 중 우연히 서강대 정동수 교수를 따라 북한산에 올랐다. 비 온 다음날이라 풍경이 특별했다. 향로봉에 구름이 세 겹 고리를 이룬 채 걸려 있었다. 천상의 풍경이었다. 자꾸 보고 싶었다. 산이 자기를 부른다고 느꼈다. 매일 아침 일찍 산에 올라 향로봉을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몇 달을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바라본 후 교보문고에서 ‘암벽등반기술’이란 책을 샀다. 동네 석축에서 발 놓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젬마는 ‘데니는 맹렬한 사람이니 마침내 향로봉 구름 사이에 자기 몸을 던져놓고야 말리라’고 짐작했다. 결국 데니는 찻집에 늘 오던 바위꾼들을 따라 향로봉에 올랐다. 같은 날 수리봉에 오르고 마침내 인수봉을 맨몸으로 기어올랐다. 인수봉 가는 길에서 어느 날 ‘자비무적’ ‘천지동근’ ‘만물일체’를 만난 것이다. 데니는 소스라쳐 멈춰 섰다.

    “인수봉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알게 됐어요. 내가 인수봉에 오른 게 아니었다는 것을. 바람이 불어 모래알 한점이 내 눈에 들어가면 나는 그냥 떨어져 죽는 거예요. 산에 있던 생명들이 나를 친구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바위에 오를 수 없었던 겁니다. 암벽 끝에서 추락한 적이 있어요. 떨어지다 몸이 암벽 중간 소나무 가지에 걸렸는데, 그때 나는 봤습니다. 저 아래 소나무 가지가 날 향해 손을 흔들며 팔을 벌려주는 것을. 나는 놀라는 젬마에게 여유 있게 손을 흔들며 그냥 그 품에 편하게 안겼어요.”

    젬마는 그날 데니를 잃는 줄 알았다. 아슬아슬한 암벽에서 추락하는 남편을 보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데, 데니가 저쯤에서 소나무 가지에 걸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그 장면은 젬마에게도 놀라운 깨달음이었다. 남편을 사랑하므로 그의 지향을 따라 살긴 해도 젬마는 데니가 아니었으니 남모를 어려움이 왜 없으랴. 그러나 차츰 워낙 순정해서 강렬한 남편의 삶에 이끌렸고 데니의 깨달음을 나눠 가졌다.

    “나는 데니보다 딱 일년이 늦어요. 일 년씩 늦게 깨닫는 거지요. 언제나 데니가 앞장서서 나를 이끌어줘요. 만약 데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범한 사람이니 보통의 삶, 돈 모아 집 늘리고 물건 사는 재미나 즐기는 사람이 됐을 거예요. 지금 같은 큰 평화나 거칠 것 없는 기쁨은 맛보지 못했을 거예요.”

    걱정과 불안이 없는 삶

    젬마는 풀꽃 한 송이의 어여쁨을 오래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고 꺼져가는 생명을 살릴 줄 아는 여자다. 마운틴은 겨울에도 작은 풀포기들이 도란도란 자란다. 젬마에겐 버려도 좋은 물건이란 없다. 빈 유리병이 젬마 손을 거치면 세상 하나뿐인 훌륭한 생활소품이 된다. 현금 대신 감각, 애정, 지혜, 긍정을 다 가진 사람이다.

    젬마에게 물었다.

    “행복하세요?”

    대답은 데니와 똑같다.

    “나는 일단 걱정이 없어요. 불안도 두려움도 없어요. 행복이란 잔잔한 기쁨이 길게 모여서 되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나는 늘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워요.”

    삶에 갈등을 느낀 적은 없냐고 다시 데니에게 물었다.

    “잘 몰라서 망설인 적은 있어도 혼란은 없었어요. 갈등도 결국 욕심에서 나오죠. 3년 전 ‘무심명철통삼계’를 깨달은 후 항상 마음이 편합니다. 나는 계몽주의가 싫습니다. 그렇지만 진리라도 좋고 도라도 좋은, 자신의 길을 다들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도가 아니면 철학이라도, 철학이 아니면 가치관이라도, 가치관이 어려우면 원칙이라도 있어야 삶의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그게 없으면 암만 돈이 많아도 행복할 수 없어요.

    사방에 넘쳐나는 모텔들 보이지요? 쾌락 부스러기들을 행복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진리에 다다르자면 우선 진실해야죠. 그게 진리의 현실법칙입니다. 진실이라는 알갱이가 여럿 모여 마침내 진리가 됩니다. 전에는 이놈의 불공평한 세상, 어느 천년에 정의의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나 싶었는데, 요즘 보면 신은 너무나 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열과 성을 다해 진리를 찾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길을 보여줍니다.”

    구기터널 근처의 마운틴은 작은 공간에 만족하는 진보적 삶의 제안이다. 작지만 충일하고, 값싸지만 아름다운 집에 무욕과 청빈을 실천하는 데니와 젬마가 살고 있다. 젬마가 뜨개질한 빨간 옷을 입은 니키는 손님의 발치에서 애교를 떨고, 자전거 클랙슨을 빵빵 울리는 동네 꼬마는 쉰 넘은 데니를 같이 놀자고 불러낸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하며 젬마가 선창하면 데니가 따라하고 니키도 하늘을 향해 가르릉대며 노래에 끼여든다. 마운틴에는 작고 겸허하고 솔직하고 가벼운 세상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가진 게 없어 두렵다고? 미래가 불안하다고? 눈 맑고 몸 빠른 데니는 강냉이 한움큼을 입안에 털어넣고 낄낄낄 웃으며 당신 이마께를 쳐다볼 것이다. 둘은 오늘도 손잡고 산에 간다. 동네 사람들이 다 그들을 내다보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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